한강 작가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기 일주일 전 나는 모스크바에 있었다. 한국국제교류재단 모스크바 사무소의 주최로 열린 ‘전 러시아 대학생 한국어 올림피아드’에 특강을 요청 받아서였다. 알다시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전쟁 중인데, 그 곳을 굳이 가야할까 싶었지만 호기심이 일었다. 하필이면 한국의 대중문화 관련 글을 쓰며 살아가는 나를 불렀다는 건, 그 곳에도 한류 열풍이 있다는 걸 예감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 예감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그 곳에서 환대해준 러시아 한국어 교수들(행사에 심사를 맡은 러시아안들이다)은 유창한 한국어로 톨스토이의 소설 ‘전쟁과 평화’에 빗대 한국과 러시아의 상황을 농담했다. “한국과 러시아는 지금 ‘전쟁과 평화’ 중입니다. 전쟁 중이라 러시아가 한국을 비우호국으로 지정했지만 우리는 이렇게 평화로우니 말입니다.”

 

그들의 한국어 실력은 그저 소통하는 정도가 아니라, 한국 문학과 역사를 이야기할 정도로 깊었다. 특히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 그리고 푸쉬킨 같은 대문호를 가진 자부심이 대단한 그들은 한국문학에 대한 지대한 관심도 드러냈다. 조남주 작가의 ‘82년생 김지영’을 거론하며 한국의 젠더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고, 김호연 작가의 베스트셀러 ‘불편한 편의점’을 통해 한국 소설의 변화를 이야기했다. 또 김훈 작가의 ‘칼의 노래’를 통해 당시 조선의 역사 이야기를 하기도 했고, 학생들 중에는 사도세자 이야기나 정조 이야기를 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이 그렇게 한국문학에 관심을 갖게 된 건, 한국영화와 드라마 같은 콘텐츠들이 최근 전 세계적으로 알려진 것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82년생 김지영’도 영화를 통해 먼저 접하고 소설을 보게 됐다고 했고, 정조 이야기에 대한 관심은 그를 다룬 ‘이산’이나 ‘옷소매 붉은 끝동’ 같은 사극을 통해서 시작됐다고 했다. 문득 부끄러워졌다. 우리는 과연 그만큼 우리 역사와 문학에 관심을 두고 있는가 하는 회의가 들어서였다. 

 

물론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에 대한 이야기도 빠지지 않았다. 실제로 한국 소설을 러시아어로 번역하는 일을 하는 그들은 한국어가 통번역이 특히 어려운 언어라고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영어 같은 경우는 앞부분에 하려는 이야기를 먼저 꺼내놓고 뒤에는 수식어를 붙이는 방식이라 동시통역이 어렵지 않아요. 하지만 한국어는 마지막 한 마디로 앞부분의 이야기를 모두 뒤집을 수 있어서 끝까지 들어야 겨우 통역이 가능하죠. 그런 말도 있잖아요.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안다.”

 

한국의 콘텐츠들이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그래서 이제는 그 관심이 먹거리부터 패션, 여행 등등 한국문화로까지 옮겨가고 있는 추세인데 거기에는 한국어에 대한 관심도 빼놓을 수 없다. 우리에게는 너무 익숙해서 거리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한국어 간판들이 지저분하게만 보이지만, 외국인들에게는 그것이 그토록 멋스럽게 느껴질 수가 없다고 한다. 그래서 최근 한국을 로케이션으로 작품을 찍는 외국감독들은 카메라를 드리우면 골목 하나도 다 그림이 된다는데, 거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한글의 아름다움이다. 한국말도 마찬가지다. 한국말 가사 그대로 BTS의 노래를 따라 부르는 외국인들의 모습은 이제 더 이상 낯선 풍경이 아니다. 

 

물론 작품 자체의 뛰어난 성취가 가장 큰 이유이겠지만,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에는 한류로 인한 한국문화에 대한 세계적인 관심도 어느 정도는 일조한 면이 있다. 그리고 그 한류의 흐름에는 한국이라는 나라가 한국전쟁 이후 비교적 짧은 시기에 놀라울 정도로 변화와 성장을 거듭해온 그 과정에 대한 세계적인 관심 또한 들어있다. 최근의 한국 콘텐츠들이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 건, 약 40년 간 한 국가의 탄생과 발전 과정을 압축적으로 겪었기 때문이다. 유시민은 그의 저서 ‘나의 한국현대사’에서 ‘대한민국의 역사는 그 과정(인류 문명사의 과정)을 정확하게 압축 재현했다’며 ‘생리적 욕망의 충족을 도모하는데서 출발해 안전, 자유, 존엄이라는 차원 높은 욕망 충족을 향해’ 나아갔다고 말했다. 이 말은 전쟁 후 반공국가, 경제발전, 민주화, 사회정의와 인권을 차례로 요구해온 대한민국의 변화과정을 말하는 대목이다. 이 각각의 욕망들은 현재에도 여전히 공존하면서 사회의 다양한 문제의식들을 만들어내는데, 콘텐츠들이 이걸 다양하게 담아냄으로써 보다 폭넓은 글로벌 공감대가 가능해졌다. 개발도상국들에게는 여전히 성장서사의 로망을 담은 콘텐츠들이 인기를 끌지만, 동시에 양극화 문제가 고도화된 서구권 국가들은 이 문제들을 담은 사회비판적인 콘텐츠들이 인기를 끈다. 한국은 실로 성장과 분배, 경쟁사회에 대한 애증, 속도와 느림, 디지털과 아날로그 같은 이율배반적인 것들이 뒤섞여 있는 나라다.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받은 건 이러한 한국이 역사적으로 겪어온 아픔과 상처들을 온전히 자신 속으로 끌어안아 문학으로서 품어냈기 때문이다. 그건 그래서 우리의 역사와 현실을 담은 이야기지만, 저마다의 욕망의 단계에 따른 문제에 봉착해 있는 전 세계인들 또한 공감하게 했다. 

 

한강의 노벨문학상으로 한강 작품들은 국내 출판가에 신드롬을 만들고 있다. 수상 이후 닷새간 종이책만 97만2천부가 팔렸고, 베스트셀러 10위권을 모두 한강의 작품이 채웠다. 그리고 이런 변화는 국내 출판가에도 기대감을 만드는 모양새다. 최근 ‘텍스트 힙’이니 ‘독파민’이니 하는 새로운 독서 트렌드에 대한 관심 또한 커졌다. 지금이 다시금 인문학에 대한 관심을 제고시킬 절호의 기회라고 말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물론 이러한 쏠림현상이 인문학에 대한 근본적인 저변을 넓힐 것이라 생각하진 않지만, 그래도 책과 독서에 대한 관심이 생겨나는 건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개발시대의 압축성장을 ‘한강의 기적’이라고 했다면, 최근 한국 콘텐츠에 대한 전 세계적인 관심을 제2의 ‘한강의 기적’이라고 한다. 중의적인 표현이지만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통한 또 한 번의 ‘한강의 기적’을 기대한다. 인문학을 바탕으로 하는 한국 문화의 깊이가 피어나는 기적 같은 일들이 생겨나기를. (글:이데일리, 사진:Nobel Prize)

K콘텐츠 파워, 실감케 한 러시아 한류 그 현장에 가다

문화는 막힌 길도 에둘러 뚫고 나간다고 하던가.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필자가 느낀 건 전쟁으로 인해 막힌 한국과 러시아의 외교적 국면들 속에서도 한류는 오히려 더 뜨거워졌다는 것이다. 현재의 러시아 청년들이 보여주는 한류 열풍 그 현장을 다녀왔다. 

전 러시아 대학생 한국어 올림피아드에 참여한 대학생들

러시아인이 사도세자 뒤주 이야기를 하는 진풍경

“여기서 뒤주는 사도사제가 가둬져 죽은 뒤주를 떠올리게 합니다.” 방탄소년단의 멤버 슈가(Agust D)가 낸 ‘대취타’ 중 ‘과건 뒤주에 가두고’라는 가사를 설명하는 한 러시아 대학생이 그렇게 말한다. 한국어를 한국인처럼 말하는 러시아인들도 놀랍지만, 그들이 단지 언어만이 아니라 ‘사도세자’ 같은 한국역사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는 건 더더욱 놀랍다. 지난 4-5일 양일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한국국제교류재단 모스크바 사무소의 주최로 열린 ‘전 러시아 대학생 한국어 올림피아드’의 풍경이다. 이 행사의 백미는 둘쨋날 마지막 테스트로 치러진 ‘주제발표를 통한 말하기 시험’. 다뤄지는 주제들을 보면 한국의 명절 같은 전통문화는 물론이고, 현재 가부장제를 벗어나 변화하는 한국의 젠더의식, 퓨전화되고 있는 국악, 한복 등등 다양했다. 그런데 이러한 한국의 문화를 소재로 주제를 발표하는 대목에 빠지지 않는 건 한류 콘텐츠들이다. 사도세자 이야기가 나온 건 ‘대취타’의 가사를 설명하면서고, 한국의 젠더의식 변화를 이야기하며 조남주 작가의 소설로 영화화되기도 했던 ‘82년생 김지영’이 등장한다. 퓨전 국악으로서 이날치가 소개되고 한복을 이야기하며 아이브의 ‘해야’ 뮤직비디오가 소재가 된다. 이런 방식은 현재 러시아의 한류가 K콘텐츠의 차원을 넘어 K컬처로 넘어가고 있다는 걸 말해준다. 이 행사에 초청받아 모스크바를 방문한 필자에게는 놀라운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현재 한러 관계는 그리 좋지 못하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한국은 러시아에서는 비우호국이 됐다. 하지만 이 행사가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러시아 청년들의 한국문화에 대한 애정은 그 어느 때보다 뜨겁다. 실제로 콘텐츠진흥원이 2023년 12월에 내놓은 ‘러시아 특화보고서-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한류 영향’을 보면 2022년 말까지 러시아는 전년 대비 39% 증가한 790만 명의 한류 팬을 보유해 한류 팬 증가율 세계 1위를 기록했다고 한다. 또 한국어는 2023년 가장 인기 있는 언어 중 하나로 한국어 교재 및 자습서 판매량은 전년 대비 32%가 증가했다고 한다. 

 

행사가 끝나고 한 식당에서 참가한 대학생들과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러시아의 한국어 교수님들(러시아인들)과 함께 이어진 뒷풀이 자리 역시 이런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한식을 연구한 러시아인 셰프가 직접 음식을 만들고 운영하는 그 식당에서는 김치전에 잡채 그리고 막걸리가 나왔고, 학생들과 교수들은 익숙하게 한국어로 환담을 나누며 한식을 즐겼다. 그 풍경은 모스크바가 아닌 종로 어디라고 해도 될법한 한국적인 분위기 그대로였다. 

 

막혀 있어 더 뜨거워진 러시아 한류

러시아의 K팝에 대한 인기는 전쟁 이후 유럽 투어에 러시아가 포함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도 여전했다. 러시아 팬들이 한국을 방문하거나(K팝 투어가 등장했다) 혹은 인접국에서 열리는 콘서트를 찾아가는 일도 생겼다. K팝 커버댄스 콘테스트가 올해만 해도 3월, 6월, 7월에 열렸고, 지난 7월에는 한국콘텐츠진흥원과 러시아의 스트리밍 플랫폼인 MTS가 주최하고 러시아 한국문화원이 후원한 K팝 콘서트에 걸그룹 라잇썸과 송원섭이 무대에 올라 성황리에 공연을 마쳤다. 송원섭은 빅토르 최 노래를 커버하며 러시아어권 국가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싱어송라이터다. 

 

K팝은 물론이고 드라마, 영화 같은 K콘텐츠의 인기를 견인하는 건 역시 스트리밍 서비스를 통해서다. 우크라이나 사태로 인해 러시아 내 스트리밍 서비스는 대부분 제한되고 있다. 넷플릭스도 유튜브도 보기가 어렵지만 러시아의 스트리밍업체들이 등장해 이를 대체하고 있다. 다른 루트가 막혀 있기 때문에 이들 스트리밍업체들을 통한 K콘텐츠 소비는 오히려 늘고 있는 추세다. MTS 같은 현지 스트리밍 플랫폼의 K팝 관련 조회수는 20% 가량 늘었다고 한다. 또한 드라마나 영화의 경우는 전쟁 이후 제한된 유럽과 미국 콘텐츠의 자리를 한국 콘텐츠가 채워나가는 형국이다. 공식적인 러시아의 OTT들을 통한 정식 수입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지만, SNS를 통한 비공식적인 K콘텐츠의 확산도 적지 않다. 마치 과거 한국에서 있었던 미드 열풍 때 팬들이 자막을 붙여 올렸던 것처럼 지금 현재 러시아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공식채널을 통해 ‘기황후’, ‘구미호뎐’, ‘마우스’, ‘도깨비’ 같은 예전 작품들이 소개되고 있다면 비공식채널을 통해서는 한국에서 현재 방영되고 있는 최근작들(이를 테면 ‘백설공주에게 죽음을’ 같은)도 거의 실시간으로 소개되고 있다. 

 

한국영화의 경우도 최근작들까지 극장에서 방영되고 있는데, 지금까지 최고 수익을 낸 작품은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으로 약 40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러시아에서는 ‘영화제 영화’로 한국영화가 많이 알려져 왔지만 지난 2022년과 2023년 사이에는 러시아 영화관들이 한국영화를 많이 소개해 보다 대중들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이 시기 ‘부산행’이나 ‘비상선언’, ‘범죄도시3’ 같은 작품들이 특히 큰 인기를 끌었다. 

 

어려울수록 문화 교류는 지속되어야

이러한 K콘텐츠의 인기가 한국어나 한식, 패션 등의 K컬처로 확산되고 있는 상황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는 2020년 모스크바에 문을 연 한국 길거리 음식 체인점 치코(CHICKO)다. 떡볶이, 라면, 김밥, 핫도그 같은 한국 분식을 제공하는 이 음식점은 세르게이 레베데프가 한국의 양념치킨 맛에 반해 창업을 한 곳으로 현재 모스크바 안에만 9개점, 러시아 전역에 40여개의 매장을 가진 대박 프랜차이즈다. 한식을 팔지만 그보다는 한국문화를 판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연일 줄이 이어진 매장에는 한국드라마와 K팝 관련 사진들과 벽면 가득 한국어들로 채워져있다. 그만큼 러시아 안에서 한국을 경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이 체인점은 한국 인플루언서들과 협업해 한국에서 유행하는 메뉴를 도입하기도 하고, 직원들의 한국방문을 통해 한국문화를 경험하게 한 후 메뉴에 스토리텔링을 더하는 식의 홍보 마케팅도 한다고 한다. 러시아 내에서의 한식에 대한 수요는 갈수록 높아지고 있는데, 실제로 김이나 커피, 음료, 라면, 소스 등 한국 농식품의 러시아 수출액은 매년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전 러시아 대학생 한국어 올림피아드 행사를 축하하기 위해 참석한 이도훈 주 러시아연방 대사는 “어려운 시국일수록 특히 학술, 문화 교류가 지속되어야 한다”고 강변했다. 또 필자에게 그 행사에 참여한 대학생들의 한국문화에 대한 열의가 결국은 “한러 관계의 상호 발전적인 미래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다. 전쟁으로 인해 한국과 러시아의 관계는 사뭇 소원해졌지만, 이 현재의 상황이 바뀔 거라 낙관하는 건 바로 미래를 이끌 러시아 청년들의 모습을 통해서라는 이야기다. 

 

현재 러시아 관련 우리네 뉴스들은 대부분 전쟁의 양상에만 집중되어 있는 게 사실이다. 그래서 어딘가 전운이 감도는 모스크바를 상상하지만 현장에서 경험한 건 완전히 다르다. 특히 한러 관계가 경색되어 있는 현 상황에서도 더더욱 열기를 띠고 있는 한류는 문화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오히려 실감케 한다. 한러 교류의 민간외교로서 한류가 그 밑거름을 마련하고 있는 한, 향후 상황이 바뀌었을 때 한러 관계의 변화는 한류를 타고 봇물처럼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글:시사저널, 사진:한국국제교류재단)

K-드라마 팬덤의 드라마틱한 변화

이른바 K-드라마를 만든 일등공신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그건 당연히 열성적인 한국의 시청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게다. K-드라마라는 위상은 비판적이며 까다롭기 유명한 한국의 시청자들의 요구가 반영된 결과이기 때문이다. 

선재 업고 튀어

까다롭기 이를 데 없는 한국의 시청자들

1980년부터 2002년까지 무려 23년간 방영됐던 MBC ‘전원일기’가 종영하게 된 건 더 이상 이 드라마가 보여주는 농촌의 풍경이 현실이 아니게 됐기 때문이다. 도시화로 인해 농촌을 떠나 도시로 가는 이들이 급증했고, 이미 농촌조차 90년대부터 서서히 전원도시로 변모했다. 당연히 라이프스타일도 바뀌었다. 시청자들은 어딘가 구닥다리 같은 시골의 삶보다는 도시의 세련된 삶을 보고 싶어했다. 이러한 요구는 이미 90년대 초반부터 등장했는데 이른바 ‘트렌디 드라마’ 붐이 생겨났다. 도시 남녀의 트렌디한 삶과 사랑이야기가 쏟아져 나왔다. ‘질투’부터 ‘사랑을 그대 품안에’, ‘별은 내 가슴에’ 같은 드라마들이 그 사례다. 이들 드라마들은 과거 신파적 스토리를 가진 멜로드라마와는 달리, 소비적인 도시의 삶에서의 가벼운 사랑 이야기로 채워졌다. 시골의 삶에서 도시의 삶으로 옮겨가고, 신파적 눈물의 서사에서 가벼운 웃음의 서사로 바뀌게 된 건 당대의 한국 시청자들의 달라진 욕망이 투영된 결과였다. 이들 드라마들은 중화권을 중심으로 한류드라마가 태동하게 되는 중요한 변곡점을 만들었다.

 

그런데 트렌디 드라마는 그 후로도 승승장구 했을까. 아니다. 한동안 트렌디 드라마들이 쏟아져 나오긴 했지만 생각만큼 한국 시청자들의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 한국 시청자들은 이제 현실성이 결여된 적당한 배경을 채워놓고 그려나가는 가벼운 멜로가 식상해졌다. 그래서 병원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연애만 하는 드라마들을 ‘무늬만 의학드라마’라고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즈음 안판석 감독이 일본 원작을 리메이크한 ‘하얀거탑’이 방영되면서 보다 전문적인 디테일에 대한 시청자들의 욕구를 채워주었다. 이후 이른바 전문직 드라마 시대가 열렸다. 의사와 변호사 같은 직업군은 물론이고 요리사, 호텔리어 등등 다양한 전문직업을 가진 인물들이 등장하는 드라마들이 쏟아졌다. 물론 여전히 신데렐라 스토리를 담은 멜로드라마들이 강력한 힘을 발휘했지만 이에 대한 비판도 적지 않았다. 당시 멜로의 대가인 김은숙 작가도 변화를 시도했다. ‘온에어’와 ‘시티홀’ 같은 작품은 전문직의 세계가 더해진 멜로드라마였다. 그 후 ‘태양의 후예’, ‘쓸쓸하고 찬란하신 도깨비’, ‘미스터 션샤인’을 통해 김은숙 작가는 멜로와 다양한 장르들을 엮어냈는데 이것 역시 이제 OTT 등의 글로벌 시대가 열리면서 보다 장르물에 익숙해진 시청자들의 요구와 무관하지 않았다.

 

이처럼 한국의 시청자들은 까다로운데다가 쉽게 질리고 그래서 새로운 걸 계속 요구한다. 이미 성공한 드라마의 방정식은 그래서 그 공식이 나온 이후에 따라하게 되면 이미 지나간 트렌드가 되기 일쑤였다. ‘전원일기’가 종영하고 20년이 넘게 지난 지금은 ‘갯마을 차차차’, ‘동백꽃 필 무렵’, ‘나쁜 엄마’, ‘웰컴투 삼달리’ 같은 다시 시골의 삶으로 돌아가는 일련의 드라마들이 등장하고 있다. 도시의 삶에 지친 한국 시청자들이 이제는 편안하게 쉴 수 있는 드라마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K-드라마가 나오기까지 그 상당 지분은 한국의 까다로운 시청자들이 갖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K-드라마 만든 K-팬덤, 그 탄생과 변화

한국 시청자들에게 드라마는 일상에 맞닿아 있는 장르다. 과거에는 집에서 다른 일을 하면서 틀어 놓고 있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그래서 누구나 한 마디씩 얹기 좋은 장르고, 또 누군가를 만나 이야기의 물꼬를 트는데도 이만한 게 없다. 드라마 이야기로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는 경우도 적지 않은데, 이 만만함은 시청자들이 개입할 수 있는 좋은 틈입을 만들어줬다. 

 

90년대 이후부터 서서히 진행된 디지털 혁명은 이렇게 저마다 수다로 휘발되던 드라마에 대한 이야기들을 인터넷으로 결집시키는 힘을 발휘했다. 그 목소리들은 이제 하나의 여론이 되어 제작자들에게 압력을 미쳤다. 심지어는 방영도중 주인공이 바뀌거나 스토리 전개가 달라지게 될 정도였다. 특히 80년대부터 90년대까지 민주화 과정을 겪은 대중들은 자신들의 목소리가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경험을 하게 했고, 인터넷은 그 목소리를 더욱 결집시키는 장이 되어주었다. 그러면서 디지털 공간은 저 너머의 미국드라마, 일본드라마 같은 당시 우리보다 앞서 있던 해외의 드라마들을 섭렵하게 했다. ‘프리즌 브레이크’ 같은 미드가 국내의 방송사에서 소개되기도 전에 인터넷을 통해 화제가 됐고, 심지어 미국드라마는 ‘미드’로 또 이 드라마의 주인공인 마이클 스코필드는 한국식 이름 ‘석호필’을 갖게 됐다. ‘일드’도 마찬가지였다. ‘노다메 칸타빌레’나 기무라 타쿠야 주연의 ‘롱 베케이션’ 같은 일드가 한국의 시청자들의 눈을 높였다. 당연히 한국드라마들과 비교하게 되고, 좀더 세련된 드라마에 대한 요구도 거세졌다. 이 일련의 과정을 거쳐 단단해진 K-드라마는 충분한 자본력과 글로벌 네트워크를 제공하는 OTT와 만나면서 드디어 저력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오징어게임’이 글로벌 성공을 거뒀고, ‘킹덤’ 같은 독특한 좀비물이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OTT를 만난 K-드라마의 팬덤은 이제 국내만이 아닌 전 세계로 넓혀졌다. 그래서 OTT에 세워지는 작품들에 대한 국내 팬덤과 해외 팬덤 사이의 갭도 생겨났다. 넷플릭스에서 대자본으로 만들어진 다소 자극적인 판타지 장르물의 경우 그 호불호가 특히 갈리는 경향이 생겼다. 국내 드라마 팬들은 ‘스위트홈’ 같은 판타지 장르가 처음에는 워낙 새로워 열광했지만 시즌을 거듭할수록 자극적인 흐름에 지쳐갔다. 제작진들도 국내 팬덤만이 아닌 글로벌을 겨냥하는 경향도 생겼다. 최근 넷플릭스에서 내놓은 모완일 감독의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같은 작품은 세련된 스릴러로 해외에서는 좋은 반응들이 나왔지만 국내 팬덤에서는 괜찮은 성과를 얻지 못했다. 국내 드라마 팬들은 그간 OTT의 등장으로 지나치게 판타지화하고 자극적으로 변한 K-드라마에 식상함을 느끼고 오히려 ‘순한 맛’ 드라마를 찾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최근 앞서 언급한 시골향 드라마들이 다시 등장하고 로맨틱 코미디류의 가볍게 볼 수 있는 드라마들이 새삼 주목되고 있는 건 그래서다. 

 

이처럼 국내 팬덤과 해외 팬덤 사이에 정서적 차이가 생겨나기도 하지만, OTT가 가진 글로벌 가능성을 밑바탕으로 시너지를 낼 수 있는 사례도 나오고 있다. ‘선재 업고 튀어’가 바로 그것이다. 국내에서는 최고시청률이 겨우 5%에 머물렀지만, 이 작품은 OTT를 통해 전 세계에 동시 방영됨으로써 강력한 코어 팬덤이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에서도 형성됐다. 특히 흥미로운 대목은 K팝 아이돌인 선재(변우석)와 그의 열성팬인 임솔(김혜윤)이 만들어가는 판타지 로맨스를 통해 마치 K팝 팬덤이 만들어지는 흐름이 생겨났다는 점이다. 코어 팬덤을 중심으로 입소문이 퍼져나가고 이것이 라이트 팬덤으로 이어지면서 ‘선재 업고 튀어’는 방영 후에도 변우석이 아시아 투어를 할 정도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처럼 이제 글로벌 시장으로 나가게 된 K-드라마는 국내 팬덤과의 관계만이 아닌 해외 팬덤까지 포괄하는 새로운 관계 속에서 진화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정서적 차이로 인한 호불호를 만들기도 하지만, 그 과정을 통해 로컬 사회의 정서적 틀에 묶여 있던 국내 팬덤들도 글로벌 감수성을 갖게 만드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또한 국내 팬덤이 가진 로컬의 정서 또한 글로벌 팬덤에 전파될 것으로 보인다. 지금 K-팬덤은 로컬과 글로벌 정서가 부딪치고 화학작용을 내는 새로운 장이 되고 있다.  (글:N콘텐츠 매거진, 사진:tvN)

버추얼 아티스트가 열고 있는 새로운 세계

최근 SM엔터테인먼트의 첫 버추얼 아티스트 나이비스가 싱글 ‘Done’을 발표하며 본격행보에 나섰다. 버추얼 휴먼이 붐처럼 등장하고 있는 시대, 버추얼 아티스트의 심상찮은 행보는 음악산업에 어떤 변화를 예고하는 걸까. 

나이비스

에스파의 세계관에서 빠져나온 나이비스

에스파는 그 세계관 자체가 버추얼 세계와 맞닿아 있는 걸그룹이다. SM엔테터인먼트는 에스파에 일종의 아바타 개념인 ‘아이(ae)’ 캐릭터를 덧붙였다. 그래서 에스파의 멤버는 카리나, 윈터, 지젤, 닝닝과 더불어 이들과 연결되어 버추얼 월드에 존재하는 ae들을 합쳐 총 8명이다. 리얼 월드와 버추얼 월드. 에스파가 가져온 이 세계관은 이제 이들의 활동 역시 두 세계를 넘나드는 것이라는 걸 예고했다. 이건 에스파(aespa)라는 그룹명에도 담겨있다. ‘아바타 X 익스피리언스(Avatar X Experience)’의 첫글자를 딴 ‘ae’에 영단어 aspect(양면)가 합쳐진 이 이름은, 아바타를 통한 두 세계(리얼 월드와 버추얼 월드)를 경험하라는 의미가 들어있다. 

 

에스파의 등장과 함께 SM엔터테인먼트는 이례적으로 이러한 세계관을 담은 세 편의 에피소드를 내놨는데, 그건 실사와 버추얼 이미지, 툰 스타일 이미지들이 결합된 것이었다. 버추얼 월드에 존재하는 각각의 ae들과 소통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에스파는 블랙맘바의 등장과 함께 그 연결이 끊겨버리자 버추얼 세계로의 모험을 떠나 블랙맘바와 대결한다. 여기서 리얼 월드로부터 버추얼 월드로 인도하는 존재가 등장하는데, 그가 바로 나이비스다. 

 

에스파가 리얼 월드에서 버추얼 월드로 들어가 그 세계를 경험하게 해주는 서사를 보여준다면, 나이비스는 이제 정반대로 버추얼 월드에서 리얼 월드로 빠져나오는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본래 그 곳을 벗어나면 안되는 존재지만, 에스파를 돕기 위해 그 곳을 벗어나게 된 나이비스는 이제 가상과 현실을 넘나드는 활동을 시작한다. 나이비스라는 이름은 ‘사이버 항해사(cyber+Navigator)’라는 뜻이다. 최근 발표한 싱글 앨범 ‘Done’은 그래서 나이비스의 본격 독자 활동의 출사표다. 

 

나이비스가 이렇게 리얼 월드로 나오는 과정을 보면 그간 SM엔터테인먼트가 이 버추얼 아티스트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가가 느껴진다. 에스파의 세계관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과정은 사실상 앞으로 인공지능 기술에 의해 버추얼 휴먼이 어떻게 탄생할 것인가를 예고하는 대목 그대로다. 리얼 월드에 사는 이들이 각각 버추얼 월드에 연결되어 갖게 될 ae란 사실상 개인 데이터에 기반해 만들어질 아바타 개념이고, 데이터들이 점점 축적되고 스스로 학습을 하기 시작하면 어느 특이점에서 독자적으로 대화하고 움직이는 버추얼 휴먼이 가능할 거라는 상상이다. 그 세계를 빠져나오면 안되는 룰을 어기고 리얼 월드로 나오는 나이비스는 그래서 일종의 ‘자유의지’를 획득한 버추얼 휴먼의 스토리를 담고 있다. 하나의 세계관이지만, 버추얼 세계에 대한 비전과 철학이 들어 있는 것이다. 

 

나이비스라는 존재가 뛰어넘는 본질

“존재는 본질에 앞선다.” 에스파의 세계관에서 반복되어 등장하는 장 폴 사르트르의 이 문구는 나이비스가 앞으로 해나갈 행보와 이로 인해 변화할 음악산업(나아가 엔터 산업)을 예감하게 만든다. 가상이지만 그 존재가 실제 세상을 움직인다면 그것은 실존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걸 말해주는 이 문구는, 이미 우리네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최근 봇물 터지듯 등장한 무수한 버추얼 휴먼들을 생각해보라. 이들은 갖가지 산업에 들어와 모델, 가수, 아나운서, 인플루언서 등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이들을 대하는 팬들의 자세다. 플레이브 같은 버추얼 아이돌을 떠올려보라. 물론 2D 캐릭터의 이면에 실제 아티스트들이 존재하는 그룹이지만 버추얼 캐릭터로만 하는 활동에도 팬들은 진짜 ‘존재’로서 이들을 받아들이고 열광한다. 라이브 방송을 통해 실시간으로 소통하기도 하고, 심지어 콘서트도 일반 아티스트들과 똑같이 한다. 물론 스크린을 통해 이뤄지는 것이지만, 관객들과 호흡을 맞춰가며 보여주는 무대는 여느 콘서트의 풍경과 다르지 않다. 그러니 가상이라는 본질은 적어도 팬과 호흡하는 이 과정에서는 무화된다. 실제 존재하는 아이돌 그룹으로서 세상을 움직이고 있으니 말이다. 

 

나이비스가 싱글로 내놓은 ‘Done’의 뮤직비디오를 보면 가상과 현실을 과감하게 넘나드는 이 존재의 야심이 엿보인다. 3D 실사 캐릭터와 더불어 애니메이션 주인공 같은 2D 캐릭터 등 다양한 형태로 변신하는 이른바 ‘플랙서블 캐릭터’를 선보인 것이다. 이러한 다양한 캐릭터들은 앞으로 나이비스의 활동이 다양한 매체에 맞게 가상과 현실을 자유자재로 오갈 것이라는 걸 예고한다. 예를 들어 가수로서 음악프로그램에 등장할 것이지만 향후 게임 속 캐릭터가 될 수도 있고, 웹툰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다. 실제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활동들(이를테면 가상 캐릭터로서의 활동 같은)을 나이비스는 할 수 있게 되리라는 것이다. 

 

버추얼 아티스트가 넘어가는 불편한 골짜기

과거 사이버 가수 아담이 처음 버추얼 아티스트의 탄생을 예고하며 등장했을 때 신기해하면서도 넘지 못한 벽은 이른바 ‘불편한 골짜기(uncanny valley)’였다. 실제와 너무 멀면 조악해서 또 너무 가까우면 마치 완벽한 마네킹이 사람 흉내내는 것 같아서 느껴지는 불편함이 그것이다. 이것은 결국 이러한 버추얼 이미지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과 감각의 문제인데, 최근 들어 가파르게 빠져들던 이 골짜기는 점점 완만해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가상에 대한 낯설음이 과거에 비해 점점 흐려지고 있어서다. 

 

플레이브나 이세계아이돌 같은 2D 기반의 버추얼 아이돌에 열광하는 팬덤이 형성되고 있는 건, 이제 만화나 애니메이션 같은 캐릭터 산업을 통해 대중들이 이를 마치 실제처럼 과몰입하는 일이 그만큼 익숙해졌다는 걸 의미한다. 이들 툰스타일의 캐릭터들이 오히려 실사 3D 캐릭터보다 더 친숙하게 느껴지는 건 이들 캐릭터들이 실제 인간과 비교되기보다는 캐릭터로서 다가오기 때문이다. 

 

반면 최근 실사 캐릭터로 등장해 모델에서 가수까지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는 버추얼 휴먼들이 불편한 골짜기를 넘는 방법은 이미지 재현 기술을 통해서다. 말그대로 진짜 사람처럼 구현해내는 것. 그런데 여기서 ‘진짜 사람처럼’이라는 표현에는 인간다운 면 또한 포함하는 걸 말한다. 그래서 일부러 완벽한 피부보다는 주근깨가 있는 피부를 구현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버추얼 휴먼에 대한 거리감을 줄이려는 노력이다. 

나이비스가 툰스타일 2D와 캐주얼 3D, 실사 3D를 오가는 플랙서블 캐릭터를 내세운 것 역시 다양한 활동을 전제한 것이면서 동시에 그 캐릭터성을 전면에 끄집어냄으로써 불편한 골짜기를 넘으려는 전략 또한 담겨져 있는 선택으로 보인다. 이렇게 하면 실제 인간과의 비교를 슬쩍 벗어나 캐릭터로서 받아들여질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지금은 물론 버추얼 아티스트는 이를 디자인하고 애니메이션 작업을 통해 탄생하고 대중들과의 소통에 있어서도 아직 자율적으로 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지는 못했다. 하지만 데이터가 점점 축적되고 이를 바탕으로 하는 인공지능 기술이 진화하게 되면 자율성을 어느 정도 갖게 된 존재로 진화할 가능성이 높다. 에스파의 세계관을 빠져나온 나이비스가 이 새로운 특이점을 향해 가는 버추얼 아티스트의 세계로 우리를 어떻게 인도할지 기대되는 대목이다. (글:시사저널, 사진:SM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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