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의 무게 담은 ‘자백’, ‘비밀의 숲’과는 또 다른 명작

 

진실이란 도대체 얼마만큼의 무게를 가진 것일까. 신문지상에 그토록 많은 ‘진상규명’이라는 단어에 담겨진 건 어쩌면 우리가 그저 ‘또야’하며 지나칠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닐 지도 모른다. 거기에는 어떤 거대한 권력의 비리가 존재하고, 그 비리를 덮으려는 자들이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 또 다른 피해자들을 양산하는 일들이 벌어진다. 그 피해자들과 가족들은 진실을 밝히기 위해 나서지만 드러난 진실을 마주해야 하는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게다가 그 진실을 이용하려는 이들까지 더해지게 되면 문제는 더욱 복잡해진다.

 

tvN 토일드라마 <자백>은 바로 이 ‘진실의 무게’에 대한 이야기다. 거기에는 최도현(이준호), 기춘호(유재명), 하유리(신현빈), 진여사(남기애) 같은 진실을 밝히려는 자들이 있고, 조기탁(윤경호), 황교식(최대훈), 오택진(송영창), 박시강(김영훈) 그리고 추명근(문성근) 같은 진실을 은폐하려는 자들이 있다. 게다가 제니송(김정화) 같은 진실을 이용해 이익을 얻으려는 자들까지.

 

사건은 복잡하게 얽혀있고, 드라마는 그 사건의 진실을 단번에 보여주지 않는다. 아주 조금씩 드러내주기 때문에 <자백>을 보는 시청자들을 최도현이 느끼는 그 갈증을 고스란히 경험한다. 복잡해보여도 드러난 사건들은 어쩌면 우리가 이미 현실에서 겪었던 것들이라는 기시감을 준다. 무기 도입에 있어서 로비스트가 낀 국방비리가 있었고 그 와중에 진실을 알게 된 이들은 죽거나 협박당해 스스로 살인자라 고백하고 감옥에 갔다. 최도현은 그렇게 감옥에 간 아버지 때문에 ‘진실 추적’을 하기 시작한 인물이다.

 

하지만 <자백>은 최도현이 찾아나가는 진실의 무게를 결코 가볍게 두지 않았다. 사건이 터졌던 그 즈음에 그는 심장이식수술을 했고, 그 심장은 그 사건의 진실을 추적하다 교통사고로 의식불명이 된 검사(진여사의 아들)의 것이었다. 그리고 본래 그 심장을 이식받을 대상자는 역시 당시 사건의 진실을 찾아나가던 기자(하유리의 아버지)였지만 갑작스레 병원에서 사망함으로써 그 대상자는 최도현이 되었다. 결코 우연일 수 없는 이 상황은 결국 조기탁이 누군가의 지시에 의해 만든 것이고 그 지시자 중 하나는 최도현의 아버지도 있었다. 최도현도 하유리도 또 진여사도 이렇게 얽혀진 사건 속에서 진실을 향해 나가는 일이 얼마나 힘든가를 보여준다.

 

진실을 향해 나아갈수록 이를 은폐하려는 자들의 저항도 거세지고, 어쩌면 그 진실 자체가 감당하기 어려운 무게로 다가온다. 여기에 무기거래 로비스트 제니송(김정화)의 등장은 이 양대 대결구도에 변수를 만든다. 과거 사건의 진실을 알고 있는 제니송은 그것을 이용해 유리한 조건으로 거래를 성사시키려 한다. 박시강 의원에게 직접 거래를 제안하며 뒤에 실세로 숨어있는 추명근을 배제시키려 하던 계획이 무산되자, 그는 박시강 주변인물들부터 하나씩 제거해나간다. 황교식을 회유해 오택진 유광기업 회장을 배신하게 만듦으로서 두 사람 모두 무력화시키고 박시강 또한 과거 요정 화예에서 벌어졌던 차승후 중령살인사건의 진실을 빌미로 궁지에 몰아넣는다.

 

그런데 제니송에 의해 어쩌면 과거의 진상이 드러날 수도 있다는 기대는 어느 창고에서 울려퍼진 총성 하나로 깨져버린다. 마치 과거 차승후 중령 살인사건이 재현된 것처럼 최도현의 손에는 총이 들려 있고 제니송은 총에 맞은 채 죽어있는 그 자리를 형사 기춘호가 목격한다. 마치 도돌이표처럼 제 자리로 돌아온 듯한 이 충격적인 엔딩 속에서 또다시 터진 사건은 진실을 미궁에 빠뜨릴까 아니면 진실을 찾게 되는 변수가 될까.

 

<자백>은 처음 <비밀의 숲>과 비견되는 작품으로 소개되었지만, 갈수록 <비밀의 숲>과는 또 다른 놀라운 작품이라는 걸 스스로 증명해내고 있다. 놀라울 정도로 촘촘한 이야기 구성과 전개가 깊은 몰입감을 주면서도, 일관되게 추구하는 메시지, 즉 ‘진실에 대한 갈증’과 ‘그걸 위해 감당해야하는 무게’라는 그 주제의식을 놓치지 않고 있어서다. 진실을 밝히려는 자와 숨기려는 자 그리고 그걸 이용하려는 자의 구도를 통해 우리가 신문지상에서 스쳐 지나쳤던 ‘진상규명’이라는 단어가 가진 거대한 무게를 흥미진진하게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라니. <비밀의 숲>이 그 촘촘한 이야기로 검찰 내부의 정의라는 메시지를 담았다면, <자백>은 결코 쉽지 않은 진실 규명이 우리 사회에 얼마나 중대한 사안인가를 담아내고 있다.(사진:tvN)

‘아름다운 세상’, 어른들은 어떻게 아이들을 망치고 있나

 

JTBC 금토드라마 <아름다운 세상>의 제목은 역설적이다. 그 어디에서도 아름다운 세상의 모습을 찾기가 어려워서다. 학교 옥상에서 추락해 의식불명이 된 선호(남다름). 학교는 서둘러 자살시도라 단정 짓고 사안을 덮으려 한다. 심지어 선호가 친구들에게 이른바 ‘어벤져스 게임’이라며 집단 구타를 당하는 영상이 발견되지만 가해학생들은 ‘장난’이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건 결코 장난 수준이 아니다. 거기에는 항상 교실에서는 착한 우등생의 얼굴을 하고 있는 학교 재단 이사장 아들 오준석(서동현)의 보이지 않는 ‘조종’이 존재한다.

 

준석은 이 드라마에서 천사와 악마의 얼굴을 오가는 형상으로 묘사된다. 공부도 잘하고 집도 부자인데다 권력까지 갖고 있는 이사장 아들이라는 사실은 그가 아이들을 지능적으로 조종하고 괴롭히며 군림하는 힘으로 작용한다. 그는 겉으론 친절한 척, 착한 척 하지만 한동희(이재인)처럼 이미 왕따 경험을 하고 전학 온 약한 아이를 또 다시 왕따시키고, 친한 친구로 지냈던 선호가 그것이 옳지 않은 일이라며 그에게 반기를 들자 그조차 집단 괴롭힘을 조장한다.

 

심지어 자신이 뒤에서 어벤져스 게임의 배역을 정해주고 지시를 내렸다는 사실이 학폭위에 의해 드러날 위기에 처하자 그 장소에 함께 있었던 조영철(금준현)에게 선물을 주며 자기 편으로 만들고 진실을 말한 이기찬(양한열)을 거짓말쟁이로 몰아세운다. 아이라고는 하지만 그의 무표정한 얼굴과 가장된 눈물 그리고 뒤돌아서 보이는 미소는 시청자들을 끔찍하게 만든다.

 

그런데 <아름다운 세상>이 하려는 이야기는 학교 폭력을 저지른 아이의 잘못을 드러내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보다는 이 아이가 어떻게 해서 이런 괴물이 되어가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준석은 어쩌다 친구까지도 왕따시키고 집단 폭력을 당하게 만드는 그런 인물이 되었을까. 그것은 그의 아버지인 세아교육재단 이사장 오진표(오만석)의 엇나간 자식 교육에서부터 비롯된다.

 

오진표는 세상을 움직이는 건 단 몇 프로의 상위그룹이라고 생각한다. 준석이 100년이 넘은 세아교육재단을 이어받을 후계자로서 다른 아이들과는 다르다고 그는 말한다. 준석은 이러한 ‘위계’가 심지어 친구 사이에도 당연히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에게 반기를 든 선호를 집단 린치하게 만들고는 친구 사이에도 서열이 있다는 자신의 속내를 드러낸다.

 

결국 그래서 사건이 벌어진다. 학교 옥상에서 준석은 선호와 다퉜고, 그 와중에 선호는 추락했다. 그건 사고일 수도 있었지만 문제는 그 사고가 ‘사건’이 되게 만든 준석의 엄마 서은주(조여정)다. 그 날 옥상에서 준석을 발견한 서은주는 선호의 추락을 자살기도로 위장하기 위해 현장을 조작한다. 훗날 준석은 엄마에게 말한다. 그 날 자신이 모든 걸 다 봤다고. 일을 이렇게 만든 건 그래서 엄마 때문이라고.

 

<아름다운 세상>이 날카롭게 들이대고 있는 시선은 바로 이 지점이다.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고, 아이들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어른들은 서둘러 진실을 덮으려 하거나 조작하려 하고 심지어 피해자를 주변 사람들까지 피해를 주는 인물로 몰아세운다. 인간이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짓이지만 아이들의 미래를 위한다는 그 명목은 모든 걸 정당화하고 스스로를 합리화시킨다.

 

그런데 결과는 어떨까. 그 아이들의 미래를 위한다는 그 일련의 행동들은 오히려 아이들을 망가뜨린다. 아이들은 부모들이 하는 일련의 행동들을 보며 그것이 세상이라고 배운다. 그래서 잘못을 저질러도 힘이 있으면 벌을 받지 않을 수 있고, 죄에 가담했어도 무조건 우기면 죄가 아닌 것이 될 수도 있으며, 심지어 힘 있는 사람에게 붙어야 살 수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거짓도 불사하며 친구도 버려야 한다는 걸 배운다.

 

반면 아이가 옥상에서 추락하는 그 사건을 통해 그 부모는 자신들이 얼마나 어른으로서 잘못해왔는가를 뼈저리게 깨닫는다. 선호의 아버지 박무진(박희순)은 학교선생님으로서 입바른 소리를 해왔지만 실제로 한 발 더 나아가 아이들의 사정을 들여다보고 그들의 아픈 이야기를 들어주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자신을 ‘후진 어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런 깨달음이나 후회, 자책감을 보이는 인물조차 없는 이 비정한 세상에서 그는 결코 ‘후진 어른’이 아니다. 그야말로 이제 제대로 된 세상을 만들어가기 위해서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하는가를 알게 된 진정한 어른이다.

 

동생 동희가 왕따를 당해왔고 심지어 너무 괴로워 죽을 생각까지 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동수는 동생을 괴롭힌 아이들을 죽도록 때려주겠다며 분노를 드러낸다. 하지만 박무진은 그것이 아무 것도 해결해줄 수 없다고 말한다. 동수가 그러면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뭐냐고 외치자 박무진이 말한다. “들어줄 수 있잖아. 동희 이야기 들어줄 수 있잖아. 난 우리 아들 이야기 듣고 싶은데 들어줄 수가 없어. 들어줄 수 있었는데 기회를 놓쳤어. 그게 얼마나 후회되고 괴로운 줄 알아?”

 

우리는 과연 제대로 살아가고 있을까. 우리가 매일 같이 치열하게 뛰어다니고 누군가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그 삶은 과연 우리에게 ‘아름다운 세상’을 가져다 줄 수 있을까. 박찬홍 감독과 김지우 작가는 전작이었던 <기억>에서부터 우리 사회가 가진 문제들의 근원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것은 아마도 세월호 참사가 가져온 충격이 분명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기억>이 기억을 지워내려는 시스템 속에서 결코 지워내선 안 되는 기억의 문제가 있다는 걸 드러냈던 것처럼, <아름다운 세상>은 어떤 사건의 진상을 제대로 파악해내는 일과, 그런 정의가 존재한다는 걸 아이들에게 보여주는 일이 진정 아름다운 미래를 만들 수 있다는 걸 말하고 있다.(사진:JTBC)

'녹두꽃' 윤시윤이 든 성냥, 그리고 조정석이 들 횃불

 

시작부터 뜨겁다. SBS 금토드라마 <녹두꽃>이 첫 회부터 활활 타올랐다. 탐관오리들에 의해 착취당하고 굶주리며 길바닥에 나뒹굴던 민초들은 그 손에 농기구 대신 횃불과 죽창을 들었다. 녹두장군 전봉준(최무성)이 이끄는 민초들은 조선의 봉건적 틀을 벗어나 ‘사람이 곧 하늘(인내천)’인 후천개벽의 세상의 기치 아래 모여들었다. <녹두꽃>에는 근대가 열리는 그 시점의 뜨거움이 시작부터 전개되었다.

 

사실 사극에서 혁명 같은 엄청난 사건이 벌어지기까지는 꽤 많은 전조를 깔기 마련이다. 굶주리고 피폐한 민초들의 삶이 조명되고 그와 반대로 호의호식에 주연을 일삼는 탐관오리 조병갑(장광) 같은 인물과, 그 권력에 덧대 백성을 수탈하는데 앞장서며 자신의 치부만을 위해 살아가는 백가(박혁권) 같은 아전의 이야기들이 그것이다.

 

하지만 <녹두꽃>은 이런 이야기의 서두를 길게 잡지 않았다. 첫 등장에 말을 타고 유학에서 돌아오는 백이현(윤시윤)이 길바닥에 주저앉아 굶어 죽어가는 민초에게 밥 한 덩이를 던져주는 장면만으로 그 많은 이야기들은 충분히 설명되고도 남았다.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지옥이 누군가에게는 극락”이라는 전봉준의 말 한 마디와 더불어, 저잣거리의 피폐된 민초들의 모습과 관아에서 주연에 빠져있는 조병갑과 호의호식하는 백가의 모습을 대비해 보여줬다.

 

이 양극단의 풍경은 탐관오리의 수탈이 민초들의 피폐한 삶의 원인이라는 걸 말해주는 것이고, 전봉준이 횃불을 들고 봉기하게 되는 이유를 그대로 설명해준다. 물 흐르듯 빠른 전개로 이어진 드라마는 그 안에 백이강(조정석)과 백이현이라는 배다른 형제의 상반된 캐릭터를 부각시켰다. 한 아버지인 백가로부터 나온 두 인물이지만 백이강은 노비의 소생으로서 백가를 대신해 갖은 악행을 저질러온 인물이다. 반면 백이현은 정실의 아들로 일본에 건너가 신문물을 배우고 돌아온 인물로 자신의 형인 백이강이 그런 삶을 살아온 것에 대해 미안함을 느끼는 인물.

 

백가라는 도저히 상종하기 어려운 아버지를 두고 있는 형제로서 둘 다 그 삶에 분노하고 있지만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그 상황을 받아들인다. 백이강이 어머니를 위해 그저 자신을 학대하듯 민초들을 괴롭히며 백가의 앞잡이로 살아가는 반면, 백이현은 백가 앞에서는 웃지만 사실은 어떻게든 그로부터 벗어나 조선을 ‘개화된 세상’으로 바꾸고 싶어 한다. 결국 백이강 역시 그런 삶에서 벗어나 동학군의 별동대장이 될 거라는 점은 이 형제가 모두 저마다의 방식으로 아버지에 항거하는 삶을 선택한다는 걸 말해준다.

 

<녹두꽃>은 이처럼 백가라는 아버지 밑에서 이를 깨치고 나오려는 백이강과 백이현의 이야기로 당대 조선의 상황을 그대로 담아낸다. 왕을 어버이라 여기던 봉건사회. 그래서 그 어버이가 잘못된 길을 가도 받아들여야만 했던 그 사회로부터 벗어나, 잘못된 걸 바꾸고 평등한 세상을 꿈꾸며 근대를 열어가려던 동학혁명의 그 과정이 이 집안의 이야기로 그려져 있다.

 

흥미로운 건 백이현이 유학에서 가져온 성냥과 백이강이 눈앞에서 목도했고 앞으로 자신도 들게 될 그 횃불이 가진 상징성이다. 백이현은 불씨 하나를 꺼뜨려도 소박을 맞는 조선의 상황을 이야기하며 성냥 하나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개화’를 꿈꾼다. 반면 백이강과 동학농민들은 수탈에 당하고만 살아왔던 민초들이 이제 그 잘못된 세상을 뒤집고 새로운 세상을 열겠다는 ‘혁명’을 꿈꾼다.

 

지금껏 사극들이 무수히 많은 조선시대의 역사들을 가져왔지만 동학농민혁명을 소재로 가져오지 못했던 건 왜였을까. 그것은 사극이 과거의 역사를 그저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요구에 의해 재현되는 장르라는 걸 말해준다. 무수한 촛불을 경험하고, 그 힘들이 모여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는 현재가 동학농민혁명을 다시금 소환해 그 의미를 되묻고 있다는 것. 촛불 이전에 횃불이 있었다는 걸 <녹두꽃>은 성냥을 가져온 백이현과 횃불을 들게 되는 백이강을 통해 그려내려 하고 있다. 그 면면만으로도 가슴이 뜨거워지는 이유다.(사진:SBS)

‘해치’가 다루는 환란·변란, 어째 옛 이야기 같지 않은 이유

 

우리에게 재난은 이제 무수한 콘텐츠들의 단골소재가 됐다. 이를테면 봉준호 감독의 <괴물>은 한강에 출몰한 괴생명체의 습격을 다루는 것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재난에 대처하는 국가 시스템’에 대한 이야기이고, 이런 기조는 <감기>나 <연가시> 같은 작품에서도 계속 이어졌다. 심지어 <부산행>이나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 같은 좀비 장르에서조차 우리는 ‘재난’의 그림자를 읽어낸다. 전국적인 재난이 벌어지고, 국민 혹은 백성들은 죽어나가는 상황에서 이를 대처하는 국가의 무능력은 보는 이들을 뒷목 잡게 만들곤 한다. 그리고 그 재난에 실제로 대처하는 이들은 무고한 국민 혹은 백성들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SBS 월화드라마 <해치>는 조선시대 영조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사극이지만, 역시 우리네 콘텐츠의 단골소재가 된 재난의 코드를 그대로 가져온다. 역사 속 실존인물인 이인좌의 난을 다루면서 그것을 ‘환란’과 ‘변란’으로 담아낸 부분이 그렇다. ‘환란’은 이인좌가 지방과 도성 곳곳의 우물에 독을 타 마치 역병이 번지고 있는 듯한 상황을 만들어내고, 도처에 이 모든 책임이 ‘자격 없는 왕’ 때문이라는 괘서를 뿌려 민심을 흔드는 이야기로 다뤄지고, 변란은 이인좌가 결국 청주성을 함락시키고 도성을 향해 진격하는 그 과정을 통해 다뤄진다.

 

여기서 중요한 관전 포인트는 이 환란과 변란에 대처하는 왕과 신하의 자세다. 영조(정일우)는 역병이 번지는 듯 보여 흔들리는 민심을 잡기 위해 스스로 도성 밖으로 나가 민심을 다독인다. 신하들조차 다가가길 꺼려하는 괴질 환자들을 직접 찾아와 위로하면서 반드시 이 역병을 다스릴 거라는 믿음을 갖게 만든다. 그리고 그것이 역병이 아니라 누군가 탄 독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우물을 폐쇄하고 처방을 내려 결국 환란을 잡는다.

 

이인좌가 결국 밀풍군(정문성)을 앞세워 군사를 일으키는 변란에 대해서 영조는 노론의 수장인 민진헌(이경영)과 소론의 수장인 조태구(손병호)와 함께 당략을 뛰어넘는 대처를 시도한다. 전장에 나가는 백성들 앞에 민진헌 또한 참담함을 느끼는 상황, 영조는 이런 지속된 피의 정치와 변란의 근본적인 문제가 당파에 있다는 걸 절감한다. 그리고 변란의 중요한 원인이 된 소외된 남인들을 되돌리기 위해 ‘탕평책’을 제안한다. 물론 민진헌은 권력은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며 이에 극렬히 반대하지만 그 역시 희망조차 없는 민초의 모습을 보며 마음이 흔들린다. 결국 탕평책은 이인좌의 근거가 되는 남인들을 붕괴시킬 수 있는 묘안이면서 동시에 오랜 파당정치에 종지부를 찍을 기회이기도 했던 것.

 

<해치>는 어째서 이인좌의 난이라는 역사적 소재를 가져와 환란과 변란에 대처하는 왕과 신하의 모습으로 그려내려 했을까. 그것은 여러모로 최근 우리네 국정과 정치의 현실을 그 사극의 틀로서 담아내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세월호 참사가 벌어졌을 때 대통령은 과연 무엇을 했던가. 그 참사가 벌어진 후 진상규명조차 제대로 되지 않고 심지어 지금까지도 입에 담기조차 힘든 발언을 하며 이를 정치적으로만 활용하려는 정치인들조차 있지 않았던가. <해치>가 영조와 신하들을 통해 다루는 환란과 변란에 대처하는 모습들은 그래서 지금의 우리네 정치 현실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결국 이들 왕이나 신하들은 막상 변란이 터져도 전쟁에 나가지는 않는다. 그 전쟁에 나가 무고한 죽음을 맞는 이들은 결국 백성이다. 국정과 정치가 권력을 두고 싸우고 있을 때, 심지어 그 싸움이 변란으로까지 번져갈 때, 그로 인해 죽어나가는 건 민초들이다. 과연 <해치>의 이 이야기가 그저 옛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을까. 최근 들어 그토록 많은 재난 콘텐츠가 비슷한 코드들로 등장하고 있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다.(사진: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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