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 함무라비’, 법정물에 담아낸 우리 사회의 부조리한 민낯

가해자의 고통과 피해자의 고통이 과연 등가의 저울에 올려질 수 있을까. JTBC 월화드라마 <미스 함무라비>는 사내 성희롱 사건의 판결이 벌어지는 법정을 통해 이런 질문을 던진다. 박차오름(고아라)은 가해자가 해고당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주장했지만, 한세상 부장판사(성동일)는 “한 가장의 밥줄을 끊는 일”은 신중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가장의 밥줄’이라는 말이 꽤 그럴 듯하게 들리는 대목이었지만, 사실 그 가장의 다른 이름은 상습적인 성희롱 가해자였다. 법정에 나와 자신의 성희롱 사실이 가족에게까지 다 드러나는 그 일이 자신에게는 큰 고통이라고 강변하고 있었지만, 그건 어차피 가해자가 스스로 저지른 일에 대해 책임지고 감수해야할 고통일 뿐이었다. 

희한한 건 법정에서 이상하게도 피해자가 더 피해를 보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마치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피해자의 변호사는 아예 변론을 하지 않고 있었고, 가해자 측의 변호사는 피해자를 과잉 반응을 보이는 이상한 직원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심지어 증인으로 나온 다른 직원들조차 가해자의 성희롱적인 발언을 그저 농담으로 받아들였다고 말할 정도였다. 

결국 피해자는 그들의 말에 더 심각한 2차 피해를 겪게 됐다. 그 누구도 자신의 입장을 대변해주지 않고 사측의 사주를 받은 가해자의 입장만을 두둔하는 상황. 심지어 그와 가장 가까웠던 선배 사원조차 등을 돌리는 모습에 눈물만 쏟아낼 수밖에 없었다. <미스 함무라비>의 이 법정 풍경은 하나의 판결 사례처럼 그려진 것이지만, 사실은 우리 사회가 가진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뀌는 부끄러운 민낯을 드러낸 면이 있다. 가해자는 억울하다 주장하고 오히려 피해자가 또 다른 피해를 입는 상황을 우리는 현실에서 자주 목도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미투 운동을 통해 드러난 것처럼 성폭력 같은 사안에서 이런 문제가 도드라져 보이지만 사실 그 근원을 찾아 들어가면 비뚤어진 권력 구조가 거기 자리하고 있다는 걸 발견할 수 있다. 결국 이 법정에서 피해자가 일방적인 피해를 계속 당하게 된 건, 가해자가 가진 권력이 여전히 회사와 결탁되어 발휘되고 있어서다. 증인으로 나온 직원들은 거짓 증언을 하고 심지어 피해자를 정신병자로 몰아가야 자신들이 생존할 수 있을 거라는 사측의 반 협박을 받고 있었다.

결국 법정의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한 판사들은 섣불리 판결을 내리지 않고 다시 기일을 잡아 사측의 술수를 파헤쳤다. 다시 법정에 나온 여직원의 마음이 흔들리고 결국 자신 또한 인턴 시절 가해자에게 당했던 성희롱의 증거를 문자메시지를 통해 보여준 것. 흥미로운 건 이 과정에서 가해자의 아내 역시 변호사에게 성희롱과 성추행을 당했다는 사실을 밝혔다는 점이다. 권력에 의한 성폭력이 만연한 사회 속에서 그런 일들은 부메랑처럼 가해자에게도 똑같이 벌어질 수 있다는 걸 이 사례는 보여준다. 

사실 장르물들이 드라마의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하면서 법정물은 눈에 띄게 늘어났다. 하지만 <미스 함무라비>는 법정을 소재로 하고 판사가 주인공인 드라마지만, 우리가 흔히 말하는 ‘법정물’이라는 장르적 재미를 추구하기보다는 ‘현실 공감’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 현재 미투 운동을 포함해 권력을 이용한 갑질 사례들이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고 있는 건 가해자와 피해자가 역전되는 상황이 아닐 수 없다. 가해자들은 여전히 그 권력의 언저리에서 살아가지만, 피해자들은 오히려 2차 피해를 입는 상황들. 여기서 전가의 보도처럼 나오는 것이 가해자들 역시 고통 받고 있다는 뉘앙스다. 하지만 어찌 가해자와 피해자의 고통을 같은 저울에 올릴 수 있을까. “가해자의 고통과 피해자의 고통은 같은 저울로 잴 수 없다”는 이 드라마의 주장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이유다.(사진:JTBC)

‘스케치’ 이동건과 정지훈, 흥미진진한 대결 뒤 남는 의구심

인과론.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고, 그 결과는 또 다른 결과의 원인이 된다는 이론. 그렇다면 결과를 바꾸기 위해서 원인을 제거하는 건 정당한 일일까. JTBC 금토드라마 <스케치>는 스케치로 예고된 살인을 막으려는 이들이 등장한다. 미래를 그리는 유시현(이선빈)과 그와 사건에 함께 뛰어들게 된 강동수(정지훈)가 그들이다. 그 스케치를 통해 강동수의 약혼녀 지수(유다인)가 살해당할 수도 있다는 걸 확인하게 된 유시현은 그래서 강동수가 하려는 행동을 바꾸려고 한다. 그렇게 하려는 행동을 바꾸면 원인이 달라지게 되고 그것이 결과도 바꿀 수 있으리라 여기는 것이다. 

이는 피해자의 관점에서 바라본 인과론을 뒤집으려는 행동이다. 일어날 사건에 피해자가 연루되지 않기 위해 하려던 행동을 바꾸는 것. 하지만 이런 대응으로 미래를 바꾼다는 건 소극적인 행동일 수 있다. 당장 피해자는 사건을 피할 수 있을지 몰라도, 여전히 남아있는 가해자는 또 다른 피해자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적극적으로 인과론을 뒤집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여기서 등장하는 인물이 역시 미래를 예지하는 능력을 가진 장태준(정진영)이다. 장태준은 무고한 희생자들이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 벌어지지는 않았지만 앞으로 벌어질 사건의 ‘잠재적 범죄자’를 미리 처단하는 방식을 제안한다. 그가 김도진(이동건)에게 술을 마시는 한 사내를 죽이라고 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그 사내는 음주운전으로 결국 무고한 모녀를 죽게 만든다. 그런데 과연 이건 윤리적으로 정당한 일일까. 

‘잠재적 범죄자’는 아직 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사람일 뿐이다. 하지만 그가 앞으로 그런 일을 벌일 거라는 걸 알고 있다는 이유로 그를 살해하는 건, 그 자체가 범죄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스케치>가 그리는 유시현과 장태준, 그리고 강동수와 김도진의 대결은 이 미래를 볼 수 있다는 능력 앞에 놓여진 딜레마의 대결이 된다. 

성범죄자 서보현(김승훈)이 지수를 물에 빠뜨리고 도주했을 때, 강동수는 그를 추격하라는 유시현의 말을 따르지 않고 지수를 구하려 물속으로 뛰어든다. 그래서 강동수는 간신히 지수를 구조해내지만, 서보현을 쫓아간 유시현은 그에게 맞아 쓰러지고 결국 그를 놓쳐버린다. 하지만 강동수가 지수를 구하기 위해 유시현과 함께 서보현과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그의 공범자는 홀로 김도진의 집에 침입해 그의 아내를 살해하게 된다. 강동수의 개입으로 결과가 바뀐 것이지만, 이 바뀐 결과는 원인이 되어 다시 지수가 살해되는 결과로 돌아온다. 지수를 해하려는 서보현을 사전에 알게 된 김도진이 살해했고, 뒤늦게 현장에 도착한 강동수는 차가운 시신으로 돌아온 지수를 안고 오열하게 되는 것.

이처럼 원인이 바뀌고 그래서 결과도 바뀌지만, 그 결과가 다시 부메랑처럼 돌고 돌아 또 다른 비극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흥미롭다. <스케치>가 그저 예지능력을 소재로 가져와 벌어질 사건을 막기 위한 형사들의 이야기에 머물지 않고, 그렇게 미래를 바꾸는 일이 과연 타당한 일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건 이 드라마를 더 깊이 있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2회 마지막 장면에 김도진이 서보현을 죽이고, 지수에게 “어려운 선택을 해야 할 것”이라고 한 말에 담긴 뉘앙스는 어떤 의구심을 남긴다. 그는 진정 지수마저 살해한 것일까. 그건 어쩐지 김도진이라는 캐릭터의 과잉된 행동이라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아내의 복수를 한 것까지는 이해가 되지만, “할 일이 남았다”며 무고한 지수를 살해한다는 게 납득될 수 있는 일일까.

물론 그 장면이 삭제되어 있는 점으로 보면, 지수의 죽음이 김도진에 의한 살인이 아닐 수 있다는 일말의 예감을 갖게 만든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지수의 죽음이 너무 의도적인 강동수와 김도진의 대결구도를 위한 설정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설정이 중요한 건, 이 드라마가 인물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에 대한 작가의 태도를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대결구도나 갈등을 위해 인물을 소모적으로 다루는 것이라면 시청자들의 공감을 얻기가 어렵게 될 수 있다. 만일 결국 김도진이 지수를 살해한 것이라면, 그만한 납득할 이유가 제시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사진:JTBC)

‘무법변호사’, 기성이라는 가상도시에 담은 현실 코드들

“아이고 할매요. 맨날 이렇게 퍼줘가 할매는 뭐 먹고 사노?” “고마 떠들고 처먹기나 해라. 마 나가서 얼른 경제를 살려야 될 거 아이가.” 국밥집에서 국밥을 먹는 안오주(최민수)와 국밥집 욕쟁이 할매가 나누는 대화. “기성의 아들 안오주 자나깨나 기성만 생각하겠습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 가장 정의로운 도시 여러분의 시장 안오주가 만들어가겠습니다.”라는 내레이션으로 마무리되는 기성시장 선거홍보영상이다.

tvN 토일드라마 <무법변호사>에 등장하는 한 장면이지만, 누구나 이 선거홍보영상을 보며 떠오르는 인물이 있을 게다. “경제만 살리면 된다”고 외치던 그 유명했던 전직 대통령의 선거홍보영상. 물론 시장통 국밥이야 정치인들에게 선거철이면 늘 카메라에 잡히는 단골메뉴지만, 이 드라마가 그려낸 선거홍보영상은 누가 봐도 지금은 뇌물과 횡령 등의 혐의로 구치소에 수감 중인 당시의 전직 대통령의 그것을 패러디했다는 게 느껴진다. 국밥집 욕쟁이 할머니도 사실은 다 연기자였던 것이 뒤늦게 밝혀진 그 홍보영상.

시장선거가 벌어지는 <무법변호사>의 기성은 이 드라마가 만들어낸 가상도시다. 왜 하필 기성이라는 이름을 붙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 도시명은 혹 ‘기성세대’라고 부를 때의 그 ‘기성(旣成)’은 아니었을까. 물론 ‘기성세대’라고 부를 때 그 의미가 모두 부정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우리네 현실에서 정치와 정의의 문제 등에 있어서 ‘기성’의 의미는 긍정적이지 않다. 적어도 이 드라마가 그려내는 현실 속에서는 더더욱. 

<무법변호사>의 기성을 좌지우지하는 인물은 차문숙(이혜영) 판사다. 그는 이미 오래 전부터 기성을 법으로 쥐고 흔들어왔던 차병호 판사의 딸. 그 권력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그는 겉으로는 ‘기성의 마더 테레사’라고 불리며 보육원 봉사를 다니며 아이들을 챙기는 모습을 언론에 흘리지만, 행사가 끝나고 나면 청결제로 손부터 씻는 인물이다. 공명정대한 판사로 알려져 있지만 그건 연출된 거짓들이다. 그는 안오주 같은 깡패를 시장으로 세워 앞으로도 기성을 자신의 발밑에 두려고 한다. 

깡패 안오주는 대놓고 자신이 시장이 되려는 이유가 “정치”가 아닌 “돈을 벌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것이 그가 선거홍보영상으로 국밥 코스프레를 하는 이유다. 그 영상에 들어가 있는 “경제를 살린다”는 말이나, “가장 살기 좋은 도시, 가장 정의로운 도시”는 안타깝게도 서민들을 속이기 위한 연기일 뿐이다. 차문숙과 안오주는 그렇게 기성의 적폐 세력으로 그려진다. 

그런데 이 두 인물의 면면과 그들을 바라보는 기성 시민들의 모습이 예사롭지가 않다. 차문숙은 아버지대로부터 이어받은 권력을 앞으로도 계속 유지하려 하고, 안오주는 정치의 힘을 빌려 경제를 살리기는커녕 자신의 주머니만을 채우려 한다. 그런데 하재이(서예지)의 아버지인 하기호(이한위)를 통해 드러나듯 시민들은 이들의 거짓 놀음에 눈이 멀어 있다. 자신이 큰 은혜를 입었다 생각하며, 기성에 나타나 그 진실을 끄집어내려는 봉상필(이준기)에게 적대감을 갖는 모습은 우리가 이전 선거철마다 겪었던 일들을 떠올리게 한다. 

물론 모든 기성세대가 그랬던 건 아니지만, 오로지 먹고 사는 문제인 경제가 최우선이 되었던 시대를 살아오며 덮어지고 미화되고 했던 일들을, 이제 봉상필이나 하재이 같은 새로운 시대를 여는 인물들이 바로 잡으려 한다. 이런 이야기가 어찌 우리에게 남다른 의미로 다가오지 않을까. <무법변호사>의 기성이라는 도시가 그저 가상에 머물지 않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적폐청산의 이야기가 현실 코드를 담아낸 패러디처럼 다가오는 건 그래서일 것이다.(사진:tvN)

‘이리와 안아줘’가 담은 2차 피해 문제, 현실도 마찬가지

그들의 진짜 이름은 나무와 낙원이었다. 나무는 진짜 그 이름처럼 낙원을 위해 늘 묵묵히 그 자리에서 버티고 있었고, 윤희재(허준호)라는 희대의 살인마인 아버지 때문에 늘 지옥에서 살아가던 나무에게 낙원은 역시 그 이름처럼 유일한 낙원이었다. 하지만 그 나무가 꺾어지고 낙원이 지옥이 되는 일은 결국 벌어지고 말았다. 

윤희재는 낙원의 부모를 살해했고 낙원까지 죽이려 했지만 나무가 막아섬으로써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렇게 윤희재는 체포되었지만 과연 그걸로 끝이었을까. 가해자가 잡혔지만 피해자들은 결코 그 지옥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삶을 살게 되었다. 나무와 낙원은 그래서 그 이름으로 살아갈 수 없게 되었다. 나무는 채도진(장기용)으로 낙원은 한재이(진기주)로 살아가려 하지만 비정한 세상은 그들을 가만 내버려두지 않았다.

MBC 수목드라마 <이리와 안아줘>가 심상찮다. 제목만 보면 그저 그런 청춘 멜로처럼 보이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눈물과 분노 없이는 바라볼 수 없는 가슴 먹먹하면서도 동시에 지금의 우리네 현실을 생각하게 만드는 장면 장면들이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든다. 물론 이 드라마는 살인자의 아들인 채도진과 그 살인자에 의해 살해당한 피해자의 딸인 한재이의 절절한 사랑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그것은 또한 가해자가 감옥에 들어가서도 참회록이랍시며 자서전을 써서 장사를 하며 버젓이 살아가는 반면, 피해자는 언론의 2차 피해를 겪으며 살아가는 사회적 문제들을 담았다. 

최근 미투 운동과 더불어 더 자주 등장한 것이지만 ‘2차 피해’는 이미 우리 사회에서 벌어졌던 갖가지 사건 사고들 속에서 적지 않게 등장했던 일들이었다. <이리와 안아줘>가 지목하고 있는 것처럼 그 2차 피해를 촉발하는 건 당장 이슈에만 눈이 먼 언론들이다. 윤희재의 자서전을 출간한 인물이 한 시사잡지 기자이고, 어떻게든 과거를 파내 이름까지 바꿔가며 살아가는 채도진과 한재이를 끝내 대중들 앞에 발가벗기고 다시 그 지우고 싶은 과거를 끄집어낸 이들이 바로 기자들이다. 

그 2차 피해는 윤희재가 살인마인 줄 모르고 결혼하며 살다 결국 사실을 알고는 딸과 도망친 채옥희(서정연)와 채소진(최리)에게도 벌어진다. 섬에 들어가 조용히 식당을 하며 살아가던 그들에게 윤희재 자서전의 수입이 가족들에게 갈 것이라는 허위보도가 나오면서 이들은 다시 과거 윤희재의 지옥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가해자는 웃으며 추억처럼 과거의 살인을 회고하고 있지만, 피해자들은 끝없는 2차 피해를 입고 있는 상황. 이건 지금 현재도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아닌가.

<이리와 안아줘>라는 이 드라마의 제목은 그래서 다시 읽힌다. 그저 청춘 남녀의 사랑을 뜻하는 것인 줄 알았던 제목이 피해자들에게 진심으로 다가와 따뜻한 포옹을 해줄 수는 없냐는 질문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채도진과 한재이는 그 어린 시절 끔찍한 일들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안아준 적이 있다. 사건현장에서 망연자실하게 앉아 있던 나무에게 낙원은 다가가 원망을 하기보다는 끌어안아주었다. 너의 잘못이 아니라며 “살아남으라”고 말해주었다. 

나무는 그 어린 나이에도 도망치는 채옥희와 채소진에게 “잘 가라”고 “멀리 도망치라”고 말해주었다. 채옥희는 두려움 때문에 딸을 데리고 도망칠 수밖에 없었지만 그 어린 아이가 지옥 속에 서 있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모두를 도망치게 했지만 정작 아이는 도망치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마치 버텨내는 일에 익숙해져 버린 나무처럼.

어째서 한재이 같은 피해자들에게 다가가 안아주지 못할까. 다만 그가 살해당한 유명배우의 딸이라는 사실을 유포해 연기자로서 새 삶을 살아가려는 그 안간힘을 밟아버릴까. <이리와 안아줘>는 채도진과 한재이가 겪는 2차 피해의 굴레 속에서 그 누구도 안아주지 않는 살벌한 현실을 보여준다. 그 두 사람이 서로를 안아주는 장면이 그토록 절절하고 아프게 다가오는 건 이런 비정한 현실을 그들의 사랑에서 더더욱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사진: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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