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드라마는 어떻게 우리 식 정서와 만났을까

법정드라마에는 반드시 피해자와 가해자 그리고 그 피해자를 돕는 법조인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이것은 ‘신의 저울’에서도 다르지 않다. 거기에는 사랑하던 여자친구가 살해당하고 그 살인범으로 누명까지 썼으며, 그를 대신해 범인을 자청해 교도소에 들어간 동생을 둔 피해자 장준하(송창의)가 있고, 과실치사지만 그 사실을 은폐함으로써 장준하의 가족이 불행의 구렁텅이로 빠지게 만든 가해자 김우빈(이상윤)이 있다.

신의 저울은 공평하지 않다는 전제
하지만 ‘신의 저울’이 평범한 법정드라마의 공식을 따르는 건 여기까지다. 이 피해자가 어떻게 법으로써 구원을 받는가의 문제라든가, 가해자가 어떻게 그것을 은폐하려 하는가의 문제는 공식을 벗어나 있다. 피해자인 장준하가 선택하는 것은 법조인, 즉 검사가 되는 것이다. 즉 ‘신의 저울’은 피해자가 법조인의 도움을 받는 드라마가 아니라 피해자 스스로 법조인이 돼서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드라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가해자인 김우빈(이상윤) 역시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 선택하는 것이 법조인으로서의 권력과 지식이라는 사실이다. 법을 통해 한 명은 진실을 밝히려하고 다른 한 명은 진실을 은폐하려 한다. 이것이 말해주는 건 법이 멀쩡한 사람을 살인자로 둔갑시키기도 하고 또 정반대로 만들기도 한다는 것이다. 굳이 장준하의 가족이 겪는 고통을 들지 않더라도 이러한 법을 사이에 두고 벌이는 대결구도 자체는 ‘신의 저울’이 공평하지 않다는 이 드라마의 전제를 말해준다. 이것은 이 드라마가 법을 통해 보는 현실의 문제의식이기도 하다.

신의 저울 위에 얹어지는 관계라는 무게의 추
‘신의 저울’이 독특한 것은 법정 드라마에 우리네 멜로나 가족드라마의 관계 코드를 연결시켰다는 점이다. 장용하의 사건을 두고 벌어진 모의법정에서 유죄냐 무죄냐를 두고 갈라진 김우빈과 장준하 사이에서 판결을 내려야 하는 영주(김유미)는 갈등한다. 김우빈은 간교하게도 영주의 환심을 사기 위해 결혼 이야기를 꺼내고, 그런 사실을 다 알고 있는 김우빈의 어머니인 송여사(김서라) 역시 이를 부추긴다.

눈을 가린 채 ‘신의 저울’을 들고 있는 정의의 여신처럼 공평해야할 영주에게 그 가린 헝겊을 벗겨내고 자신 쪽을 바라보게 만드는 김우빈이라는 캐릭터는 어쩌면 지금 우리의 법 현실을 말해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전형적인 삼각관계의 멜로 드라마와, 어울리지 않는 양가의 결혼을 중심테마로 하는 우리네 가족드라마의 틀은 ‘신의 저울’로 들어와서 이처럼 전혀 다른 수단으로 활용된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사회가 법이라는 잣대보다는 관계와 지위, 권력 등에 의해 움직인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보여준다.

세련되지는 않지만 우리의 법 현실을 고민한 흔적
‘신의 저울’이 할리우드의 법정드라마처럼 쿨하게 보이지 않는 건, 바로 이런 법 집행에 있어서의 관계의 문제를 멜로드라마와 가족드라마의 틀 안에서 풀어내기 때문이다. 자식의 죄를 덮기 위해 힘있는 로펌과 사돈을 맺으려는 빗나간 모정, 사랑하는 연인의 애정공세 앞에 흐려지는 판단력, 무엇보다도 가난을 이겨내기 위해 고시를 준비하는 주인공과 그를 헌신적으로 돌보는 여자라는 설정 같은 것들은 법정드라마처럼 보다 전문적이고 세련될 것 같은 소재와는 사뭇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왕의 아들이 거지를 죽였을 때와 거지가 왕의 아들을 죽였을 때는 절대로 똑같을 수가 없다”는 노세라(전혜빈)의 말처럼 어쩌면 바로 이런 신파적이고 얼기설기 엮어진 관계망 속에서 허우적대는 것이 우리네 진짜 법 현실인지도 모른다. ‘신의 저울’이 의미가 있는 것은 그저 서구의 세련된 법정드라마를 흉내내기보다는 조금은 구닥다리라도 우리 식으로 그것을 풀어내려 했다는 점이다.

‘베바스’와 ‘바람의 화원’의 초현실적인 연출력

“눈 뜨지 마세요. 자 어디선가 새소리가 들립니다. 졸졸졸졸 시냇물 소리도 들립니다. 나뭇가지 사이를 파고드는 따스한 햇살도 느껴집니다. 다람쥐가 지나가는 바스락 소리도 들리고 바람도 살랑살랑 불어옵니다. 그 바람에 섞여서 상쾌한 풀잎 향기도 느껴집니다.” 강마에(김명민)의 말소리에 귀 기울이며 눈을 감은 단원들의 모습이 비춰지고 살짝 살짝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 그리고 거길 지나가는 새 한 마리가 보이더니 단원들은 어느새 평원에 앉아있다. 이어 들리는 강마에의 목소리. “느껴지세요. 여기는 사람의 때가 묻지 않은 새로운 세계입니다. 넬라 판타지아의 세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보이지 않는 소리를 보이게 하는 연출
MBC 수목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에 등장하는 이 초현실적인 장면은 클래식 연주와 연주자의 느낌이라는 영상으로는 표현하기 곤란한 시퀀스를 잘 표현하고 있다. 강마에식으로 표현하면 사실 “박자 맞추고 음 안 놓치고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다. 그건 혼자 죽어라 연습하면 다 되니까. 중요한 건 관객에게 무얼 전달하려 하느냐는 그 마음, 그 느낌이다. 대사로 전달하면 통상적인 말에 끝났을 이 시퀀스는 그러나 이 초현실적인 장면으로 연출되면서 생생함과 함께 깊은 감동을 주게된다.

이제 곧 귀가 먹게될 두루미에게 그 절망적인 상황을 인지하게 하려고 강마에가 물 속으로 들어가 보라고 종용하는 장면에서도 이러한 연출력은 돋보인다. 그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 암흑 속의 절망감을 표현하기 위해 카메라는 물 속에서 연주하는 연주자들을 그려냈다. 연주광경은 있으나 소리가 들리지 않는 그 장면은 고스란히 두루미가 겪게될 상황을 감각적으로 전해준다. ‘베토벤 바이러스’의 이러한 연출은 소리가 주는 절망감과 환희를 영상으로 표현하려는 욕구에서 비롯된다.

이것은 강마에가 어떻게 지휘자의 길로 들어섰는가에 대한 에피소드에서도 등장한다. 가난했던 강마에가 병져 누운 어머니에다 수재까지 겪으며 절망해 자살하려 했던 그 순간, 그의 귀를 괴롭히던 어머니의 가래 끓는 소리 속에서 합창 교향곡으로 연결되는 장면이 그렇다. 여기서 어린 강마에가 현재의 강마에를 조우하는 초현실적인 장면이 연출된다. 여기서 지옥 같던 소리는 아름다운 합창교향곡으로 구원받는다.

그림 속에 박제된 시간을 살리는 연출
한편 SBS 수목드라마 ‘바람의 화원’에서는 오랜 세월이 지나온 그림 한 장 속에 잠들어있는 이야기를 깨어내기 위해 초현실적인 연출을 활용한다. 그림이 꿈틀꿈틀 살아 움직이며 실사로 변하거나, 실사가 화원의 붓끝에 의해 그림으로 변하는 식이다. 신윤복의 ‘기다림’이라는 그림은 정순왕후가 나무 곁에 서서 잠깐 동안의 여유를 즐기는 모습을 크로키처럼 빠르게 신윤복(문근영)이 그리는 장면으로 연출된다. 여기서 실사는 그대로 붓끝의 질감으로 서서히 변하면서 그림으로 나타난다.

이런 장면이 가장 뛰어나게 연출된 것은 김홍도의 ‘군선도’에 있어서다. 먼저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는 신윤복과 김홍도(박신양)의 눈에 다양한 인물군들이 포착되는 장면들이 연출되고, 이어서 김홍도가 그림을 그리는 장면에서 그림 속의 인물이 그 저잣거리의 인물들과 오버랩된다. 이러한 연출은 지금 현재 박제로 남아있는 그림을 살아있게 만드는 동시에 김홍도가 가지고 있는 그림의 철학을 엿보게도 해준다. ‘군선도’를 그리며 “보이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그리는 것”이라는 말은 저잣거리의 인물들을 통해서도 신선을 볼 수 있다는 말과 다름 아니다.

또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신윤복의 그림, ‘단오풍정’은 단오에 계곡에 모여 머리를 감고 그네를 타는 여인네들을 드라마 속 에피소드로 풀어냄으로서 정지된 그림 속의 이야기를 눈앞에 생생히 보여준다. 기생 정향(문채원)과 신윤복이 함께 그네를 뛰면서 그 부서지는 풍광들 속에 계곡의 여인네들이 하나하나 그림의 부분으로 바뀌는 장면은 이 드라마가 가진 연출미학의 백미라 할 수 있다.

두 드라마가 예술을 다루고 있기 때문일까. ‘베토벤 바이러스’와 ‘바람의 화원’은 영상미학에 있어서도 뛰어난 면모를 보이고 있다. 보이지 않는 소리를 보이게 하고, 오랜 시간 동안 화폭 속에 박제된 시간을 열어 그림을 꿈틀대게 만드는 초현실적인 연출의 힘은, 그저 보여지는 영상 그 이상의 것을 전달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드라마인지 꿈인지 착각될 정도의 영상 연출은 우리로 하여금 시각에만 매몰되어 있던 영상을 상상력의 세계로 넓혀나가게 해준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바로 음악과 미술 같은 예술 자체가 지향하는 것이기도 하다.

여성을 버리자 여성이 된 문근영, 그리고 신윤복

문근영은 국민여동생이라는 이미지를 얻는 순간 딜레마에 빠졌다. 귀엽고 순수함이 묻어나는 미소, 특유의 선해 보이는 커다란 눈망울은 그녀를 순식간에 스타덤에 올려놓았지만, 그것은 또한 족쇄이기도 했다. ‘어린 신부(2004)’, ‘댄서의 순정(2005)’으로 구축된 여동생 이미지를 벗어나기 위해 그녀는 ‘사랑따윈 필요없어(2006)’의 비련의 여주인공을 맡는 한편, 모 이동통신사의 CF를 통해 섹시한 이미지로의 변신을 시도했다. 하지만 대중들은 여전히 그녀를 여동생 이미지로 두고 싶어했다.

2년여의 공백기를 거쳐 문근영에게 다가온 ‘바람의 화원’의 신윤복이라는 캐릭터는 그녀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했다. 남장여자란 그녀가 강요받아온 국민여동생이라는 이미지와, 또 변신해야할 성인연기자라는 이미지를 벗어난 제3의 선택이 될 수 있었다. 우리네 연예계에서 여성연기자들에게 강요되는 두 이미지, 즉 귀엽거나 섹시한 그 이미지의 짐을 벗어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기묘한 것은 그녀가 여성의 이미지를 버리자 오히려 여성으로 성큼 다가왔다는 점이다.

‘바람의 화원’의 신윤복이라는 캐릭터는 화동(畵童)같은 이미지를 갖고 있다. 이것은 문근영이라는 국민여동생이라 불리던 연기자에게 가장 편안한 옷이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가 연기하는 신윤복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남성으로 살아가지만 그녀의 마음 속에서 꿈틀대는 여성성은 신윤복의 겉모습인 화동의 이미지를 깨고 바깥으로 슬쩍슬쩍 빠져나온다. 스승인 김홍도(박신양)의 등에 업혀 가슴이 설레기도 하고, 그림을 가르쳐주기 위해 잡은 김홍도의 손길에 마음이 떨리기도 한다.

이러한 ‘강요된 남성성, 드러내고 싶은 여성성’은 문근영이라는 연기자가 꿈꾸던 것이 아닐 수 없다. 여성의 이미지보다는 아이의 이미지로서 보여지길 원하는 대중들의 욕망과 그 속에서 본인 스스로 보여주고픈 여성의 이미지는 정확하게 문근영이라는 배우의 상황과 연결된다. 따라서 그녀가 연기하는 신윤복이 그림 속에서 여성성에 끌리는 것(여성을 주로 그리고 화풍 또한 여성성을 따른다)은 그대로 그녀의 마음의 표현이기도 하다. 이것은 또한 신윤복의 그림을 통해 보여지는 ‘정해진 틀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과도 연결된다. 신윤복은 그려서는 안 되는 것들에 대한 당대의 틀을 깼던 화원이다.

극중 신윤복이 정향(문채원)을 대하는 태도 역시 남성성을 드러내기보다는 여성성을 더 강조한다. 신윤복은 금기된 것, 즉 여성성에 대한 희구를 여성의 아름다움에서 찾으려 한다. 신윤복이 그녀를 그리워하고 그림에 담으려 하는 것은 단순한 남녀 간의 애정이 아니다. 그녀는 정향을 자신의 그림 속에 담음으로써 자신의 여성성을 채워 넣으려 하는 것이다. 그녀가 ‘단오풍정’의 그림을 펼쳐놓고 정향에게 “이 그림 속에 들어와 주시요”하고 말하는 장면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이렇게 보면 문근영이란 연기자와 신윤복이라는 캐릭터의 만남은 운명적이라 할 수 있다. 문근영은 연기자로서 강요된 이미지와 드러내고픈 이미지를 신윤복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드러내고 있고, 신윤복이라는 캐릭터는 문근영이라는 연기자의 훌륭한 옷이 되어주고 있다. 신윤복을 통해 보여준 문근영의 이미지 변신은 또한 우리네 여성 연기자들이 가진 딜레마를 넘어서는 것이기도 하다. 여성 연기자로서 강요되는 이미지를 넘고 나서야 비로소 ‘여성’이라는 꼬리표를 떼고 ‘연기자’로서 살아갈 수 있다는 것, 문근영은 신윤복을 통해 그걸 보여주었다.

리더십 부재의 시대, 강마에 신드롬이 말해주는 것

‘베토벤 바이러스’가 심상치 않다. 클래식이라는 마니아적 소재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시청률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는 이 드라마는 어쩌면 ‘시청률을 잡은 유일한 마니아 드라마’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무엇이 이 바이러스를 우리 사회 깊숙이 퍼뜨리고 있는 걸까. 그 중심에는 절대 카리스마, 신드롬 조짐까지 보이고 있는 강마에(김명민)가 있다. 그 캐릭터가 시청자들의 열광을 얻어내는 바로 그 지점을 보다보면 우리 사회의 부끄러운 속살이 살짝 드러나는 걸 목도할 수 있다.

현실성 있는 강력한 리더십의 부재
강마에가 오케스트라를 하기 위해 모여든 단원들에게 제일 먼저 하는 작업은 그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게 하는 것이다. “실력도 없는데 노력도 안 하면서 대접을 받으려” 하는 그들에게 그는 거침없이 “똥 덩어리”라는 카운터 펀치를 날렸다. 그 충격은 단원들뿐만 아니라 드라마를 보던 이 땅의 잠재적 똥 덩어리들(?)에게도 고스란히 미쳤다. TV를 켜면 어디서나 흘러나오는 이 “생각대로 하면 되는” 긍정의 사회에 그는 강한 부정을 했다. TV가 전파하던 거짓의 희망은 그의 말 한 마디로 깨지고 우리는 거기서 진짜 냉정한 현실을 보게 되었다.

대선 때면 반짝 나타나는 리더십들은 대부분 허황된 수치를 내세우면서 장밋빛 사회를 얘기하지만 사실상 사회는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그들은 현실을 얘기하기보다는 먼 미래의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혹은 일어나기 어려운) 꿈만을 이야기했다. 까칠하고 째째한 모습을 가감 없이 드러내며 현실을 솔직히 말하는 그는 이 사회의 ‘부드럽고 한없이 너그러운 얼굴’로 거짓된 ‘핑크빛 미래’를 말하는 자들과 대비를 이루며, 이 사회에 부재한 현실성 있는 강력한 리더십을 대리충족 시키게 만들었다.

소수집단이 지배한 꿈이 없는 사회
이 드라마가 강마에식으로 표현하면 ‘귀족을 위한 것으로 천민들은 꿈에도 꿀 수 없는’ 클래식이라는 소재를 사용하면서 사회에서 누락된 서민들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이 드라마만의 강력한 반어법이다. 주부로서 꿈을 접고 살아온 정희연(송옥숙)은 가정이라는 집단에 발목이 잡혀 있고, 앞서나간 후배에게 굴욕을 당하면서도 회사에서 꿈을 갉아먹고 사는 박혁권(정석용) 역시 회사와 가정에 발목이 묶여 있다. 가난한 형편 때문에 클래식을 하려면 으레 해야만 할 것으로 생각되는 개인레슨 같은 투자(?)를 받지 못해 거리를 전전하는 하이든(쥬니)은 이 사회라는 집단에 발목이 잡혀 있다.

이들의 상황은 현실 그대로이다. 이 사회에서는 누구든 현실이라는 걸림돌에서 생존하기 위해 꿈을 버린다. 아니 어쩌면 도전조차 하지 못하게 사회는 일찌감치 그들에게 꿈을 버리는 연습을 시켜온 지도 모른다. 강마에가 말한 귀족과 천민을 나누는 클래식은 이 사회의 상류층이 가진 특권의식과 서민들이 가지도록 강요받는 천민의식을 단번에 드러내준다. 몇 프로 되지 않는 소수 집단이 사회 전체 집단을 굴러가게 하는 구조 속에서 저네들은 클래식 같은 문화를 누릴 때, 다수의 서민들은 꿈을 버리도록 강요받는 사회. 강마에의 까칠한 말 한 마디 속에는 그것이 숨겨져 있다.

환타지가 환타지에서 끝나지 않도록
하지만 이 드라마는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시작한다. “꿈을 이루라는 게 아니라 한번 꿔보기나 하라는 것이다. 꿔보지도 않으면서 꿈이라고 하면 그건 꿈이 아니라 그냥 별이다.” 강마에의 이 말처럼 현실을 보지 못했던 서민들에게 잔인한 현실을 보여준 후, 꿈꾸지 못하는 소외된 이들을 꿈꾸게 만든다. 이 드라마가 강력한 환타지를 갖추는 지점은 바로 이 곳이다. 드라마 속 단원들이 강마에라는 지휘자를 통해 오케스트라를 하는 그 꿈을 향해 매진할 때, 그걸 바라는 시청자들은 자신 속에 오래도록 묻어두었던 꿈 한 자락을 꺼낼 수도 있을 것이다.

각자 사회의 구성원들이 꿈을 다시 꾸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그 꿈을 꾸게 만드는 리더십이다. 강마에 같은 리더십은 드라마에서나 존재하는 것일까.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것일까. 우리 사회가 지금 필요로 하는 리더십은 대중들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하는 리더십이 아니라, 대중들에게 혹독할지라도 현실을 보게 만들고 또 그것을 꿈으로 연결시키는 리더십이다.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지만, ‘베토벤 바이러스’를 보며 환타지가 환타지에서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기는 건, 그것이 이 사회가 가면 뒤에 숨겨왔던 현실의 정곡을 찌르고 있기 때문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