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짜’, 아귀의 손아귀가 말해주는 것

선정적인 장면이라 할 수 있겠지만 ‘타짜’에서 손모가지를 걸고 행해지는 도박은 이 드라마의 백미라 할 수 있다. 보통의 도박이라면 돈만 잃고 나오면 될 일을 어째서 손모가지까지 걸게 되는 것일까. 여기에는 ‘타짜’가 말하는 이른바 ‘구라(도박판에서 상대방을 속이는 것)’의 세계가 끼여든다. 즉 ‘구라를 친 것이 발각이 되면’ 그 자리에서 손모가지를 잘라버린다는 것이다.

손모가지 자른다고 욕망이 끝날까
도박에 판돈 이외에 신체를 건다는 이 설정은 확실히 자극적이다. 이미 상영되어 대성공을 거둔 영화 ‘타짜’에서 아귀라는 캐릭터를 연기한 김윤석이 순식간에 스타덤에 오른 이유에는 그 섬뜩한 캐릭터가 한 몫을 차지했다. 아귀는 상대방의 돈만을 목적으로 도박을 하지는 않는다. 어떨 때는 그가 다른 타짜의 손모가지를 더 원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하는 경우가 있다.

드라마화 된 ‘타짜’에서 아귀(김갑수)는 이 면모를 먼저 드러내 보여주었다. 그는 자신의 경쟁자인 타짜 대호(이기영)를 끌어들여 손모가지를 걸고 순전히 복수를 위한 한 판을 벌인다. 그리고 그 대호의 손모가지를 자르기 위해 준비된 섬뜩한 도박은 부메랑처럼 아귀에게 되돌아와 그의 손모가지를 날려버린다.

그런데 왜 손모가지를 자르는가에 대한 의문을 품어볼 만하다. 그것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도박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만들어버린다는 징벌의 의미가 있다. 하지만 과연 손모가지를 자른다고 도박을 포기하게 될까. 아귀의 경우를 보면 알 수 있지만, 손모가지와 도박의 포기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는 여전히 하우스(도박장)를 들락거리며 호구(돈을 잃어줄 대상)들의 돈을 갈취한다.

보이는 손과 보이지 않는 손
아귀는 직접 패를 들고 싸우는 도박 현장에서 한 걸음 물러나 있지만, 이 하우스 전체는 그의 손아귀에 들어있다. 보이지 않는 그의 손모가지가 하우스 전체를 놓고 도박을 벌이고 있는 셈이다. 그는 보이지 않는 손모가지처럼 보이지 않는 존재로 이 세계를 장악하고 있다. 그의 손모가지(여기서는 얼굴도 포함된다)를 대신하는 손은 다름 아닌 영민(김민준)의 손이다.

따라서 ‘타짜’에는 두 개의 세계가 존재한다. 실제 삼팔광땡과 장땡을 들고 팽팽하게 맞서는 현장 도박의 세계가 있고, 그 도박의 세계 위에서 이뤄지는 작전 도박의 세계가 있다. 현장 도박의 세계가 눈에 보이는 손의 세계라면, 작전 도박의 세계는 보이지 않는 손모가지의 세계다. 즉 손이 없어도 도박이 이뤄지는 세계라는 말이다.

‘타짜’가 이 두 세계를 그리고 있다는 것은 이 드라마가 단순히 도박의 재미만을 추구하는 드라마가 아니라는 걸 말해준다. 순수한 의미(?)의 도박은 손의 경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도박은 상대방의 패를 읽을 수 있는 빠른 두뇌와 휘둘리지 않고 배팅을 걸 수 있는 배짱의 경기다. 그러나 ‘타짜’의 세계에는 두뇌와 배짱과 함께 손 기술이 들어간다. 물론 그 손 기술은 욕망의 상징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아귀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손이 없어도 이뤄지는 이 도박의 세계 속에서는 손 기술로 손모가지가 날아가도 여전히 손 기술은 사용된다.

타짜의 세계, 현실의 축소판
‘타짜’가 채용하고 있는 것은 도박이라는 소재, 즉 손의 세계지만, 그것이 말하려는 것은 도박 그 위에 존재하는 손이 없어도 여전히 존재하는 욕망이라는 괴물이다. 조금 비약해서 말한다면 이들이 드나드는 이 하우스는 지금 우리들이 살아가는 세계의 축소판이다. 돈 한 푼 없어도 일단 사고 싶은 욕망은 늘 존재하며, 사회는 그 욕망을 가능한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즉 눈에 보이는 돈(현금)이 없어도 눈에 보이지 않는 돈(신용)이 움직이는 욕망의 수레바퀴는 멈추지 않는다.

이 세계 속에는 늘 아귀 같은 존재가 판의 시스템을 장악하고 당신의 주머니를 노리고 있다. 당신이 이 시스템을 전혀 모르는 호구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쪽쪽 빨려 빈털터리가 될 때에서야 비로소 후회하게 될 지도 모른다. 또 정반대로 당신은 이 시스템 속에 들어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타짜가 되는 교육을 받고는 타인의 주머니를 노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타짜’에서의 하우스는 그 안으로 들어가느냐 마느냐의 선택의 기회라도 있지만, 현실이라는 하우스에서 선택의 기회 따위는 없다. 누구나 다 이 욕망의 수레바퀴 속에 던져지게 된다는 말이다.

하지만 여기서 인정해야할 것이 있다. 안타깝게도 이 욕망의 하우스는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힘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타짜’가 도박을 통해 보여주려는 세계는 바로 여기까지다. 그것은 도박이 옳으냐 옳지 않으냐 하는 윤리적인 문제가 아니다. 대신 바로 그 도박의 세계, 그 세계를 움직이는 보이는 손과 보이지 않는 손, 욕망이 바로 당신이 지금 살아가는 세계의 축소판이라는 것. 그것을 관조하게 하는 드라마가 바로 ‘타짜’다.

드라마, 아버지 부재의 시대를 말하다

아버지는 죽었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말한 것처럼.

‘엄마가 뿔났다’에서 엄마가 뿔을 내는 동안, 아버지 나일석(백일섭)은 늘 그 엄마 주변을 빙빙 돌며 눈치를 보거나 혼자 씩 웃고 있거나 가족 대소사에서 한 걸음 뒤편에 서 있었다. 그러면서 엄마가 내는 뿔을 거의 다 받아주었다. 심지어 ‘1년 간의 휴가’를 달라고 했을 때, 아버지는 자신이 나서서 엄마가 살 전셋집을 구하러 다닐 정도였다.

‘엄뿔’이 보여준 아버지의 존재감
이 가족드라마에서, 그것도 가족의 변화형태를 가장 잘 포착한다는 주말 저녁 드라마가 보여주는 아버지의 모습은 과거의 권위를 잃어버린 지 오래다. 주말 드라마의 주 시청층이 중장년 여성이란 점이 영향을 끼친 결과이겠지만, ‘엄마가 뿔났다’에서 남성들은 거의 대부분이 여성의 시점으로 타자화되어 그려진다.

엄마, 김한자(김혜자)의 독백으로 설명되는 가족의 이야기는 그 자체가 엄마의 시선으로만 채워진다. 장남은 어딘지 부족한 인물이며, 맏사위는 이혼남이고, 둘째 사위는 어딘지 부모의 치맛폭에 사는 듯한 엄친아다. 반면 맏며느리는 생활력 강한 여성이고, 장녀는 능력 있는 커리어 우먼이며, 차녀는 성격 좋고 늘 밝고 솔직한 여성이다.

이것이 엄마의 시선이기 때문에 여성을 좀더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시선 속에서 제외되어 있는 인물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아버지 나일석이다. 한없이 열려진 마음을 가진 시아버지 나충복(이순재)은 아직까지 집안의 어르신으로 서 있는 반면, 나일석은 늘 그 바깥에 존재한다. 김한자가 집을 나가겠다고 선언할 때, 그 허락을 구하는 당사자는 나일석이 아니고 나충복이다.

이 시대 드라마가 향수하는 아버지
최근 이 같은 아버지 부재의 신호들은 ‘엄마가 뿔났다’에서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드라마에서 드러난다. ‘에덴의 동쪽’은 아버지 부재의 시대에, 그 빈자리에 대한 향수를 그 바탕에 깔고 있다. 이 비극적인 가족의 탄생은 시대가 살해한 아버지 이기철(이종원)에서부터 비롯된다. 여기서부터 강한 엄마, 양춘희(이미숙)가 탄생하고, 그 빈자리를 채우고 해체된 가족을 묶어두려 안간힘을 쓰는 이동철(송승헌)이 자리한다. 이 드라마의 힘은 시대를 과거로 돌려 현재에는 시대착오가 되어버린 강력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끌어내는 데 있다.

이렇게 강력한 아버지를 찾는 드라마들이 거의 시간대를 과거로 되돌리고 있는 점은 주목할만한 사실이다. 주말 저녁을 오랜 시간 점유하던 KBS 사극은 바로 이 아버지의 시간대였던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지금 이 시간대 역시 흔들리고 있다. 주말 밤에 대거 포진되어 점차 사세를 넓히고 있는 엄마들의 드라마(이것은 엄마들이 주인공인 드라마를 말할 뿐이다. 사실 이 드라마는 이제 아버지들도 즐기는 드라마가 되었다)가 그걸 말해준다.

사극이 그리는 왕은 이제 아버지로서의 역할과 왕으로서의 역할을 나누게 되었다. ‘대왕 세종’은 물론 신하들과의 우여곡절이 많지만 왕으로서 자신의 뜻을 강력하게 펼쳐나가는 카리스마를 보여주는 반면, 아버지로서는 한없이 약한 존재로 자리한다. 주중 드라마 ‘바람의 나라’에서 유리왕(정진영)은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왕이지만, 국가의 존폐를 위해 자식을 버려야 하는 비운의 아버지다. 즉 사극 속에서 아버지라는 위치는 왕이라는 직능과 늘 부딪치는 거추장스런 옷이 되고 있다.

나일석의 어깨가 쓸쓸해보이는 이유
이것은 가족드라마가 아닌 현대물에서도 마찬가지다. ‘베토벤 바이러스’에서 주인공들에게는 가족이라는 짐이 부여되지 않는다. 강마에(김명민), 두루미(이지아), 강건우(장근석)의 가족들은 드라마를 위해서 거세되었다. 반면 아버지의 모습은 ‘똥 덩어리’라 모욕을 당한 정희연(송옥숙)의 남편 박진만(이봉규)이나, 가족을 위해 오케스트라의 꿈을 접고 후배에게까지 고개를 숙이며 사회생활을 해온 박혁권(정석용)을 통해 드러난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아버지를 찾기 위해 뒤돌아보지는 않는다. 그저 지금 현실이 그렇다는 걸 말해주고는 꿈을 향해 달려간다.

‘타짜’에서 아버지는 도박 때문에 돈도 다 날리고 결국엔 죽음을 당하는 존재다. 고니(장혁)가 잡으려고 하는 욕망은 어쩌면 아버지를 죽음으로 내몬 그 돈을 가지려는 것이며, 따라서 도박판은 이 시대 아버지들의 생사를 건 생존경쟁의 축소판이 된다. 속고 속이는 현실 속에서 늘 손모가지든 목이든 걸어야 하는 힘겨운 아버지들의 상황, 그것이 바로 ‘타짜’의 세계다.

드라마 속 이 시대의 아버지는 죽었다. 삶은 아버지에게 그만큼 팍팍해졌고, 그 속에서 여성들은 아버지가 짊어졌던 현실의 짐을 나누기 시작했다. 하지만 권위의 시대가 가버린 그 자리에 남겨져 아내에게 구박을 들어도 뭐가 그리 좋은 지 킥킥 혼자 웃는 나일석의 어깨가 가끔씩 쓸쓸해 보이는 건 왜일까. 이것은 아마도 “신은 죽었다”라고 말했을 때, 우리가 갖게되는 상반된 두 감정, 즉 해방감과 함께 솟아나는 어떤 안타까움 때문이 아닐까.

독특한 소재 클래식, 우리 식으로 풀어내

현대극이 사극을 넘었다. ‘주몽’이후, 현대극과의 경쟁에서 연전연승하던 사극불패 신화가 깨졌다. 그것도 고구려 사극의 연장선상에 있는 대작 ‘바람의 나라’와 퓨전사극의 새로운 역사를 열 ‘바람의 화원’과 동시에 맞붙은 결과이다.

물론 ‘바람의 화원’은 이제 막 시작했기 때문에 아직 ‘베토벤 바이러스’의 완승을 말할 단계는 아니다. 하지만 본래 초반부터 강세를 보이기 마련인 사극의 시청률 경향을 봤을 때, 이제 11%대를 넘기고 있는 ‘바람의 화원’이 17%대를 향해 가는 ‘베토벤 바이러스’의 상승곡선을 꺾기는 만만찮을 것으로 보인다.

사실 시청률이 그다지 중요한 것은 아니다. 단지 현대극의 부활을 알리는 하나의 지표로서 ‘베토벤 바이러스’의 가치를 논하기 위해 시청률을 거론했을 뿐이다. 작품의 완성도만을 두고봐도 ‘베토벤 바이러스’라는 드라마는 그동안 침체를 겪었던 현대극의 부활을 예고하기에 부족함이 없기 때문이다.

틀에 박힌 삼각관계나 신데렐라 이야기, 늘 있던 재벌가 스토리 같은 옛 드라마의 흔적을 ‘베토벤 바이러스’에서는 거의 발견하기가 힘들다. 소재 자체가 드라마로서는 국내에서 처음 시도되는 클래식을 다루고 있고, 스토리 또한 지금껏 봐왔던 여느 드라마들과는 궤를 달리한다.

사실 이 작품은 ‘노다메 칸타빌레’라는 일본 드라마를 연상시키는 부분이 많다. 하지만 만일 그 정도에 머물렀다면 이처럼 폭발적인 반응을 얻지는 못했을 것이다. 거기에는 독특한 ‘베토벤 바이러스’만의 클래식에 대한 재해석이 들어가 있다. 클래식이라 하면 떠오르는 어딘지 상류층의 문화 같은 이미지의 편견을 이 드라마는 보기 좋게 깨고 있다.

그것은 이 ‘베토벤 바이러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면면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음대를 졸업했지만 남편과 자식 뒷바라지로 “다음에, 다음에”하다가 어느덧 아줌마가 되어버린 정희연(송옥숙). 누군가 “아줌마!”하고 부를 때 그녀는 “제 이름은 정희연이에요.”하고 말한다. 익명의 아줌마보다는 정희연이라는 첼리스트로서의 이름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20년 간의 공백을 안고 나간 자리에서 악명 높은 지휘자 강마에(김명민)는 그녀를 “똥 덩어리”라 부르며 인간적인 모멸감을 안겨준다. 그리고 그 똥 덩어리는 자신의 한계를 넘고 정희연이라는 자기 이름에 책임을 지는 연주를 해낸다. 똥 덩어리로 살아왔던 그녀가 사실은 자신이 금 덩어리였다는 것을 알게되는 순간이다.

오케스트라가 하고 싶어 모인 인물들은 대개가 정희연 같은 보통 사람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공무원으로 살아가며 귀가 먹기 전에 오케스트라를 한 번 더 하고 싶은 두루미(이지아), 서울시향을 정년퇴직했지만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연주 기회를 얻지 못하는 김갑용(이순재), 밤무대 연주자 배용기(박철민), 재능은 있어도 돈이 없어 음악공부를 못하는 하이든(쥬니) 등등. 강마에 식으로 표현한다면 클래식이라는 고급스런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인물들이다.

이렇게 보통 사람의 눈높이로 인물들을 배치하고, 그들 앞에 우리가 흔히 클래식이라면 느끼는 위압적인 선입견으로서의 강마에를 세워놓은 이 드라마는 결국 이들이 함께 음악을 연주하는 그 길을 향해 달려간다. 바로 이 부분에서 시청자들은 자신의 잊고 있던 꿈을 이들 보통 사람들의 노력을 통해 다시 발견하는 공감의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클래식이라는 음악 자체가 갖는 새로운 감동의 오브제가 그 경험을 증폭시키고, 기성배우보다는 신인들(혹은 드라마에 한동안 보지 못했던)이 대거 포진된 신선한 연기자들의 연기가 드라마라는 악기를 신명나게 연주해준다. 무엇보다 김명민이라는 연기자의 힘은 다른 연기자들의 연기를 빨아들일 만큼 강력한 블랙홀로서 드라마 전체를 이끌어간다.

사실상 사극의 성장은 퓨전사극이라는 새로운 틀의 등장과 함께 이루어진 것이지만, 동시에 현대극, 그 중에서도 트렌디 드라마의 몰락과도 연관이 있다. 하지만 ‘베토벤 바이러스’는 현대극이 늘 받아왔던 이 선입견, 즉 트렌디의 그림자를 거의 벗겨내고 있다. 작년 현대극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던 ‘커피 프린스 1호점’에 이어 ‘베토벤 바이러스’가 어디까지 현대극의 지평을 넓혀놓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베토벤 바이러스’ vs ‘바람의 화원’ vs ‘바람의 나라’

수목드라마 대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클래식이라는 새로운 소재를 다루는 MBC의 ‘베토벤 바이러스’, 신윤복과 김홍도의 삶과 사랑을 다루는 SBS의 퓨전사극 ‘바람의 화원’, 대무신왕 무휼의 일대기를 그린 KBS의 ‘바람의 나라’가 그것. 모두가 야심찬 기획이 돋보이는 대작드라마로 드라마를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어느 것 하나 놓치고 싶지 않을 만한 작품들이다. 눈에 띄는 것은 이 드라마들이 각각 음악, 미술, 역사를 다루고 있다는 점. 그만큼 최근 우리네 드라마들이 소재의 다양화와 함께 전문화가 이뤄지고 있다는 반증이다. 음악과 미술 그리고 역사, 이 팽팽한 수목드라마 학기에 당신이 먼저 보고픈 1교시는 어떤 것인가.

음악시간 - 오케스트라로 표현되는 꿈의 앙상블
음악시간을 맡고 있는 ‘베토벤 바이러스’가 그리고 있는 것은 음악을 매개로 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음대를 졸업했지만 남편과 자식 뒷바라지로 살아온 아줌마 첼리스트 정희연(송옥숙). 술좌석에서나 여흥을 돋우는 연주를 하는 공무원 바이올리니스트 두루미(이지아). 천재지만 그 사실을 모르고 경찰생활을 해온 강건우(장근석).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연주기회를 갖지 못하는 오보에 주자 김갑용(이순재). 밤무대 연주자 배용기(박철민). 재능은 있지만 돈이 없어 음악공부를 하지 못하는 하이든(쥬니). 모두가 어딘지 하나씩 부족한 인물들이 오케스트라 연주를 위해 모이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을 조련할 지휘자는 완벽주의자 강마에(김명민)다.

이들은 모두 악기를 들고 있지만 그 뒤에 각자의 이야기들을 갖고 있다. 이것은 부족한 단원들뿐만 아니라 완벽주의자 강마에도 마찬가지다. 그는 천재인 정명환(김영민)과의 오랜 경쟁관계를 가져왔다. 단원들이 각자 자신의 사연 속에서 음악을 통해 얻어가야 할 그 무엇이 있는 것처럼 강마에도 천재적인 재능보다 열정과 노력으로 이루어내는 성과가 가치가 있다는 것을 정명환에게 증명하고 싶은 것이다. 따라서 오케스트라 연주는 이 이야기들의 앙상블이 그 짧은 시간 속에 하나로 엮이는 과정이다. 이 음악시간이 베토벤과 모차르트, 브람스 같은 클래식 감상 그 이상의 재미를 주는 것은 그 때문이다.

역사시간 - 새로운 고구려 사극, ‘바람의 나라’
역사시간은 그간 꾸준히 관심을 받았던 고구려사의 원조격이라 할 수 있는 김 진 원작의 ‘바람의 나라’다. 92년도 연재되기 시작하면서 고구려 열풍의 진원지로 자리한 ‘바람의 나라’는 사실상 ‘주몽’으로 시작된 고구려 사극의 발원지라 할 수 있다. 작년 드라마화된 ‘태왕사신기’는 ‘바람의 나라’ 원작을 표절했다는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만큼 이 작품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높다는 반증이다. 이것은 또한 그만큼 부담도 크다는 말이다. 드라마화 하는 과정에서 당연히 발생하는 재해석을 두고 원작과 자꾸 비교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하지만 사극으로서의 ‘바람의 나라’는 분명 과거 여타의 고구려 사극과는 달라진 면모를 보이고 있는 게 사실이다. 역사에서 그다지 조명되지 않았던 대무신왕 무휼을 다루고 있으며, 왕의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과 함께 한 인간으로서의 고민 같은 것을 사극의 틀 안에 녹여 넣고 있다. ‘연개소문’처럼 고구려가 주는 뉘앙스에 짓눌려 무리한 스펙터클을 보여주려 하지도 않고, ‘주몽’처럼 전쟁에서조차 전투전 규모의 액션을 보여주는 식의 시행착오를 보여주지도 않는다. 어느 정도 안정된 느낌을 주는 이 역사시간을 통해 고구려의 또 다른 면모를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역사 자체만으로도 흥미를 끄는 ‘바람의 나라’다.

미술시간 - 그림으로 표현되는 섬세한 감정들
미술시간에는 김홍도, 신윤복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관심을 끌만한 두 천재화가의 그림이 있다. 동시대에 같은 도화서에서 활동했던 그들에 대해 이 사극은 도발적인 해석을 하고 있다. 신윤복이 여성이었으며, 그들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는 것. 실제로 많은 그림들이 그 미묘한 감정들을 증명하고 있는데, 이 사극이 주목하는 것은 바로 그 그림이다. 말로 표현하는 것보다 더 강렬한 마음의 표현, 그것은 어쩌면 한 폭의 그림이 전하는 수만 가지의 감정들이 아닐까.

‘바람의 화원’은 사극이지만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새로운 사극이 될 것으로 보인다. 영화 ‘취화선’같은 작품을 통해 우리네 그림이 갖는 영상미와 그네들의 드라마틱한 삶이 영상물의 훌륭한 소재가 된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바이다. ‘이산’에서 일부 도화서의 이야기가 다루어지기도 했지만, 그것은 일부분이었다. ‘바람의 화원’은 바로 그 우리네 그림의 이야기를 김홍도, 신윤복이라는 두 거장의 삶을 통해 들여다보는 사극이다. 대부분 전쟁이나 전투가 벌어지는 남성 중심적인 사극들 사이에서 이 사극은 아마도 가장 여성적인 사극이 되지 않을까. 미술시간이 유독 기대되는 대목이다.

음악과 미술 그리고 역사를 다루고 있는 이 세 편의 드라마들은 각각의 개성들이 넘치는 작품으로 시청자들에게 수목의 밤을 고민하게 만든다. 어느 것 하나 버리기 아까운 작품들. 하지만 IPTV 같은 디지털 방송시대에 걱정할 필요가 있을까. 1교시 끝나고 2교시, 3교시를 즐기면 그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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