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떴'의 창조적 해체가 바람직한 이유

'패밀리가 떴다(이하 패떴)'가 1기의 마지막 여행을 떠났다. 새로운 '패떴'은 오는 25일 첫 촬영에 나선다고 한다. 지난 2008년 6월17일 첫 방송을 시작으로 한때 30%가 넘는 시청률로 일요 버라이어티의 수위를 지켜왔으나 거듭된 악재와 패턴의 식상한 반복으로 내리막을 걷던 '패떴'은 이제 20개월의 대장정을 마치고 2기로 재정비되는 시점이다. 과연 '패떴1'의 해체와 '패떴2'의 시작은 바람직한 것일까.

먼저 왜 '패떴'이 이런 결과에 봉착했는가를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많은 이들이 '패떴'에 쏟아졌던 많은 논란들과 그 논란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제작진들, 그리고 캐릭터 운용의 실패 등을 그 원인으로 보고 있다. '1박2일'과 비교해 '패떴'은 위기대처능력이 떨어졌다는 지적도 있다. 맞는 얘기다. 하지만 좀 더 근본적인 원인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패떴'은 '1박2일'과 같은 여행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프로그램 형식은 극히 다르다. 먼저 리얼 버라이어티라는 형식이 가진 특징을 이해한다면 이 두 프로그램이 왜 이다지도 다른 길로 갔는가를 알 수 있다. 리얼 버라이어티쇼가 가진 강점에서 빼놓은 수 없는 것이 바로 캐릭터의 성장 스토리다. 여타의 예능과 달리 리얼 버라이어티쇼는 캐릭터가 서고, 그 캐릭터가 매번 미션을 수행하면서 점차 성장해가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이야기의 몰입성을 높인다.

그런데 성장 스토리에는 조건이 있다. 시작하는 캐릭터들이 낮은 위치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낮은 곳에 있어야 성장 가능성이 많아지고 그 가능성에 대한 기대감은 지속적인 시청을 유도해낼 수 있다. '무한도전'의 캐릭터들이 평균이하에서 시작해서 작금의 위치에까지 올라온 것과, 이제 성장해버린 상황에서 더 이상 캐릭터의 성장스토리로 이야기를 이어가지 않는 이유도 그것이다. '무한도전'은 이제 프로그램 형식 실험으로 성장해가고 있다.

'1박2일' 역시 시작 지점에서 그 출연진들은 그다지 최고의 위치에 서 있는 인물들이 아니었다. 강호동은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는 상태였지만, 김C나 은지원, 이수근, MC몽, 그리고 이승기까지 탑의 위치에 서 있는 인물들은 아니었다. 그들이 첫 여행을 떠나기 위해 모인 장소가 '톨케이트'였고 첫 회부터 먹을 것까지 자급자족해야 하는 상황이었던 점을 생각해보면, '패떴'이 시작한 마치 시상식 같은 화려함은 사뭇 비교되는 지점이다.

'패떴'은 이들 리얼 버라이어티와는 방향 자체가 달랐다고 달라야만 했다. 즉 출연진들이 레드카펫 위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할 정도로 모두 탑 연예인들이었다. 유재석, 이효리는 물론이고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던 김수로, 아이돌 대성, 예능감이 살아나고 있던 윤종신이 그들이다. 여기에 초창기 멤버였던 이천희와 박예진은 신선함을 불어넣었다. 즉 '패떴'은 '1박2일'이 낮은 위치에서 조금씩 성장해가는 그 스토리와는 정반대로, 높은 위치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전략을 취했고, 그것은 주효했다.

요정 같던 이효리가 몸빼를 입고, 아이돌 대성이 유재석과 함께 덤 앤 더머가 되며, 김수로는 이천희와 짝을 맞춰 김계모와 천데렐라가 되고, 박예진은 수수해보이는 이미지에 살벌함을 더했다. '패떴'은 탑의 위치에 서 있는 이들을 차츰 바닥으로 떨어뜨리는 전략으로 큰 웃음을 주었다. 이것은 '1박2일'의 후발주자로서 차별화를 위해서도 당연한 것이었다. 우리는 흔히 '1박2일'과 비교하면서 '패떴'은 왜 그렇게 못하냐고 비판하지만, 사실 그게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모든 프로그램이 '1박2일' 같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초창기 이천희와 박예진에 이목이 집중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이들은 타 멤버들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덜 기대하게 하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차별화에 성공한 형식은 또한 내적인 문제도 갖고 있었다. 그것은 탑 연예인이라는 지점에서 생겨날 수밖에 없는 형식의 폐쇄성에서 비롯된다. '패떴'은 '1박2일'과 달리 외부인과의 접촉이 거의 없이 패밀리들간의 이야기로 구성되는데 그 이유에는 현실적인 문제가 자리한다. 즉 대외적인 인물들과 공공연히 접촉하는 것이 탑 연예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더욱 어렵다는 것이다. '패떴'의 관계자의 말을 인용하면, "아예 프로그램을 찍을 수 없을 정도"가 되는 경우가 다반사라는 것이다.

이 폐쇄성은 고정 멤버들의 이미지 소비를 빨리 가져오게 만든다. 저들끼리 밥 해먹고 게임하는 형식의 반복은 그것이 늘 같은 멤버들이 하는 것이기 때문에 쉬 식상해진다. 만일 현지인들이나 제작진과의 대결구도 같은 것을 끌어들여 변수를 만들어낸다면 이야기는 달라졌을 것이지만 '패떴'은 그것이 여의치 않았다. 따라서 '패떴'이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게스트의 활용이다. 게스트를 변수로 끼워 넣어 상수의 식상함을 넘어서려 했던 것.

이렇게 보면 지금껏 '패떴'이 걸어온 길이 애초 형식 속에서 어느 정도는 결정되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1박2일'이나 '무한도전' 같은 성장 스토리형 리얼 버라이어티쇼의 위기가 그 성장의 정점에 설 때 오는 것처럼, '패떴' 같은 정점에서 추락하는 스토리를 가진 쇼의 위기는 한 치의 신비감 없이 보여줄 것을 다 보여준 지점에서 오게 된다. 즉 어떤 프로그램이나 이야기 구조를 갖는 한, 언젠가는 위기가 오고 결국은 사라져가는 운명을 갖게 된다. 다만 '패떴'은 그 형식의 폐쇄성 때문에 캐릭터 소비가 그만큼 빨라 그 사라지는 운명도 빨리 오게 되었던 것뿐이다.

그러니 '패떴'이 가진 이런 형식적인 특징을 감안했을 때, '패떴1'의 해체와 '패떴2'의 시작은 당연하고도 바람직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패떴'은 그 형식적 특성상 새로운 신비감을 가진 캐릭터들이 계속 투여되어야 지속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다. 따라서 새로운 멤버로 교체하는 것만으로도 '패떴2'는 새로운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 '패떴'이라는 형식 자체가 힘이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힘을 극대화해낼 수 있는 새로운 인물들의 투입은 그만큼 가능성을 높이게 된다. 이제 남은 것은 이 새로운 인물들이 어떻게 새로운 이야기를 엮어나가는가 하는 점이다. 물론 프로그램의 폐쇄성을 탈피할 수 있는 방법이나 리얼 버라이어티로서의 진정성을 확보하는 방법은 숙제로 남아있다. 그럼에도 새로운 인물로 시작하는 '패떴2'가 주는 기대감이 결코 작지 않은 것 역시 사실이다.

버라이어티가 꾼 꿈, 어떻게 현실이 됐나

그 누가 쇼는 그저 쇼일 뿐이라고 했던가. ‘무한도전’이 말도 안 되는 포크레인과 삽질의 대결을 벌이던 시절에, 쇼는 그저 쇼일 뿐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것은 아무런 맥락도 의미도 없이 그저 쇼가 보여주는 흥미로운 볼거리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몇 해가 지나면서 우리는 ‘무한도전’이라는 쇼 프로그램이 실제로 현실을 바꿔나가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들은 봅슬레이를 빌려서 경기에 출전하던 국내 봅슬레이의 열악한 상황을 감동적인 도전을 통해 순식간에 바꿔버렸다. 현재 올해 벤쿠버에서 열리는 동계올림픽 출전권까지 따놓은 한국 봅슬레이팀은 그 누구보다 관심을 받는 존재가 되었다. 그들은 한식의 세계화를 위해 뉴욕으로 날아가 한 레스토랑에서 메뉴 런칭을 선보이기도 하고, 불황에 힘겨워하는 음식점들을 기습공격(?)해 무한 매출을 올려주기도 한다. 그들에게 도전은 이제 쇼이면서 동시에 현실이 되기도 한다.

‘1박2일’은 몇 년 간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여행 버라이어티를 통해서 국내에 숨겨진 여행지들을 발굴해내고 있다. 이를 통해 국내여행에 대한 인식도 바뀌고 있으며, 캠핑 열풍 같은 여행 문화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실제로 해외 관광객들 중에는 ‘1박2일’을 보고 국내를 찾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무엇보다 ‘1박2일’이 거둔 가장 큰 수확은 도시에 상대적으로 소외된 시골에 대한 따뜻한 향수와 정의 이미지를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이 연장선 상에 있는 ‘청춘불패’ 역시 마찬가지. 강원도 홍천의 유치리라는 동네에 정착해가는 걸 그룹 아이돌들의 모습을 통해 도-농 간의 소통의 과정이 훈훈한 감동까지 전해주는 이 버라이어티는, 실제로 이 자그마한 동네에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제 시청자들은 유치리라는 동네에 사는 이장님이나 로드리(동네 이장님 친구 분의 애칭)를 마치 우리 동네 어르신처럼 가깝게 느끼게 됐다. 걸 그룹 아이돌들이 찾아간 상점에는 일부러 찾는 관광객들이 생길 정도. 한쪽 벽에 붙여진 그들과 함께 찍은 사진들은 쇼와 현실의 공존을 잘 보여준다.

‘천하무적 야구단’은 보다 실제적인 꿈을 꾸며 그 꿈을 현실로 만들어가고 있다. 아마추어 야구인들을 위한 ‘꿈의 구장’을 건립하는 것이 그것. 이들은 이 꿈을 실현하기 위해 먼저 5개 지역을 찾아가 야구장 부지를 타진했다. 야구장 건립은 100억 대에 이르는 대규모 공사지만 그것이 불가능한 꿈은 아니다. ‘천하무적 야구단’이 꾸고 있는 그 꿈에 대해 많은 이들이 지지하고 동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엔터테이너들이 광대로 딴따라로 폄하되던 시대, 쇼는 여흥의 하나일 뿐이었다. 하지만 펀(fun)이 사회를 움직이는 하나의 추동력이 되어가는 이 시대에 쇼는 여흥을 넘어서 현실을 바꾸는 힘이 되고 있다.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은 이제 국회나 상아탑에서의 심각한 고민과 진지한 토론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 꿈을 꾸고 그 꿈이 많은 이들의 지지를 얻을 때, 사회는 어떤 변화를 허락한다. 스튜디오의 폐쇄된 공간 속에서 여흥거리만을 고민하던 버라이어티쇼들. 이제 스튜디오를 벗어나면서 이들은 현실 속에서 꿈을 꾸기 시작했고 그 꿈은 조금씩 현실을 바꿔가고 있다. 올해는 더 많은 꿈들을 버라이어티 속에서도 볼 수 있기를 희망한다.

제2의 유재석, 강호동은 언제 나올까

연예대상에 올해도 역시 변화는 없었다. 강호동과 유재석의 아성은 굳건했다. 2005년 유재석이 KBS와 MBC의 연예대상을 거머쥐면서 유재석의 시대가 열렸고, 2007년 MBC 연예대상을 '무한도전' 팀원으로 유재석이, 그리고 SBS 연예대상을 강호동이 양분하면서 유재석-강호동의 시대가 열렸다. 그리고 2008년과 2009년은 아예 연예대상이 누가 되느냐가 아니라 강호동, 유재석 둘 중 누가 더 많이 가져가느냐에 관심이 쏠릴 정도가 되었다.

사실이 그렇다. 현 예능 프로그램에 있어서 강호동과 유재석만큼의 맨파워를 갖고 있는 인물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지상파 방송3사의 대표 예능 프로그램은 모두 이들의 마력적인 손아귀 안에 들어가 있다. MBC의 대표 버라이어티인 '무한도전'과 대표 토크쇼인 '황금어장'에 각각 유재석과 강호동이 포진해 있고, KBS의 대표 버라이어티인 '1박2일'과 대표 토크쇼인 '해피투게더'에 각각 강호동과 유재석이, 또 SBS의 대표 버라이어티인 '패밀리가 떴다'와 '스타킹'에 유재석과 강호동이 자리하고 있다.

사실 이건 뒤집어서 생각해보면 이들이 대표 예능 프로그램에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이들 예능 프로그램들을 대표로 만들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예능 PD들이 밝히듯 유재석과 강호동은 예능 프로그램의 '희망이자 절망'이다. 그들이 있어야 예능이 빛을 발한다는 현실은 PD 입장에서는 희망이면서 절망인 셈이다. 이들의 맨파워는 방송3사의 주말 버라이어티 대전에서 연전연패하고 있는 '일밤'을 보면 단박에 알 수 있다. 물론 프로그램의 성패가 모두 MC에만 의존하는 것은 아니지만 주말 버라이어티에서 이 양대산맥이 경쟁자로 있다는 것은 분명 넘기 어려운 산을 만들어내는 것이 사실이다.

유재석과 강호동은 스타일은 다르지만 모두 상대방의 끼와 재능을 끄집어내는 재주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현재 리얼화되어가는 예능에 가장 필요한 존재들이다. 이들의 연예대상 독식이 시작된 시점이 리얼 예능이 막 태동하던 시점과 맞닿는다는 점은, 이들이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얼마나 부응했는가를 잘 말해주는 대목이다. 게다가 이들은 때로는 경쟁구도로 때로는 친형제처럼 서로를 지지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철옹성 같은 굳건한 아성을 구축했다.

"재석아. 이 상 내가 받아도 되나?" 이런 강호동의 멘트에 "상은 방송국에서 주는데 왜 유재석씨에게 그걸 묻느냐"는 한 개그맨의 질문에는 묘한 뉘앙스가 깔려있다. 강호동과 유재석은 이미 서로가 가장 높은 위치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이야기이며, 자신 아니면 상대방이 연예대상을 받을 것이라는 것을 이미 전제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연말이 되기 시작하면 우리는 응당 그런 것인 양, 강호동과 유재석 둘 중 한 명이 선택되는 것을 보아야 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것은 예능의 체질에 그다지 좋은 현상은 아니다. 한두 명에게만 집중되는 구조는 그만큼 약해질 수밖에 없다. 또한 과도한 노동의 집중은 당사자들에게도 육체적, 정신적 소비를 빠르게 가져와 결국 예능인으로서의 수명 또한 단축시킬 수 있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이렇게 몇 년이 지속되다보면 새로운 예능인들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해 적체되는 현상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방송사의 입장에서도 몇몇 예능인에 집중되는 구조는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고, 이것은 또한 시청자들의 입장에서도 다양성을 제한한다는 부작용을 가져올 수도 있다.

분명 유재석과 강호동은 비교대상이 없을 정도로 발군의 능력을 갖추고 있다. 그러니 이들이 상을 모두 가져간다는 것에 이견이 있을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연말 방송3사 연예대상 시상식을 통해서 우리네 방송 환경이 지나치게 한쪽으로 쏠려 있다는 것을 확인한다는 것은 못내 아쉬운 일이다. 제2의 유재석, 제2의 강호동은 언제 나타날까. 2010년에는 좀 더 다양한 예능인들이 다양한 캐릭터로 군웅할거하는 시대가 되길...

'빵꾸똥꾸'에 깃든 사회, 그 의미

난데없는 '빵꾸똥꾸(?)'로 사회가 시끌시끌하다. MBC 시트콤 '지붕 뚫고 하이킥'에서 악동인 해리(진지희)가 입에 달고 다니는 이 '빵꾸똥꾸'는 올해의 유행어가 될 만큼 장안에 화제가 됐다. 그런데 지난 22일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이러한 용어가 폭력적이고, 필요이상 반복적으로 사용됐다며 해당 프로그램에 권고 조치를 했다. 도대체 왜 이 같은 용어에 대해 이처럼 상반된 반응이 나온 걸까.

먼저 사전에도 없는 '빵꾸똥꾸'가 무얼 의미하는 지부터 정확히 알아야 할 것 같다. 시트콤의 내용에 따르면 그 유래는 해리가 어렸을 때 말을 좀 늦게 하게 됐는데, 할아버지인 이순재가 방귀를 뀌는 소리를 듣고는 첫 마디를 '빵꾸똥꾸'라고 말했다는 데서 비롯된 것. 그 후로 뭔가 심사가 뒤틀리는 것(행위나 사람 모두 통틀어)을 대하면 해리는 이 말이 습관적으로 터져 나온다. '빵꾸똥꾸'는 적어도 해리에게는 자신만이 가진 욕이라고 할 수 있다.

처음 '빵꾸똥꾸'를 외치는 해리의 모습은 그래서 거북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어쨌든 욕의 의미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욕은 그 집에 새로 들어와 식모 생활을 어렵게 하며 살아가는 세경과 신애 자매에게 집중적으로 쏟아진다. '빵꾸똥꾸'는 해리가 처음 신애의 뺨을 올려 부쳤을 때 느껴지던 그 충격처럼 다가왔던 게 사실이다. 어린 아이가 어쩌면 저렇게 독할 수가 있을까.

하지만 그런 충격은 조만간 사라져갔다. 그리고 차츰 독하기만 한 아이라고 여겨졌던 해리는 역시 아이다운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빵꾸똥꾸'를 외치면서도 하루만 신애가 보이지 않으면 견딜 수 없어하고, 신애가 쓰는 동화를 읽기 위해 신애가 하는 일을 도와주며 빨리 쓰라고 욕을 해대는 해리는 영락없는 아이의 모습이다. 그러니 이 아이가 이렇게 욕을 입에 달고 사는 모습에서 이제는 불쌍한 마음이 들기 시작한다.

바로 이 지점부터 해리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비호감에서 호감으로 바뀌었다. 해리를 이해하게 되는 지점에서 해리의 '빵꾸똥꾸'가 의미하는 것이 진짜 무엇인지도 드러났기 때문이다. 물론 어린 아이가 입에 담는 욕이 보기 좋을 수는 없다. 그런데 이 보기 좋지 않은 것, 그것은 사실 우리가 인정하기 싫은 우리의 현실이기도 하다. 아이가 무슨 죄가 있을까. 아이마저 욕을 하게 만드는 환경이 문제가 아닐까.

아이의 입을 통해 듣게 되는 '빵꾸똥꾸'는 어쩌면 우리가 만들어놓은 사회의 비뚤어진 부분을 거울처럼 비춰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해리가 '빵꾸똥꾸'를 외칠 때마다 이제는 심지어 묘한 카타르시스까지 느끼게 되는 것은 욕이 가진 언어적인 기능과 거의 궤를 같이 한다. 욕과 배설의 즐거움이 같다는 것은 어떤 억압을 대리해 풀어주는 그 기능적 유사함 때문이다.

세상이 잘못 돌아가고 있을 때, 그것을 지적하는 촌철살인의 욕은 심지어 문학적으로까지 느껴지기도 한다. 물론 '빵꾸똥꾸'가 문학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용어는 풍자를 웃음의 재료로 삼는 시트콤으로서는 꽤 우회적인 괜찮은 표현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아마도 '빵꾸똥꾸'를 듣고 빵 터졌던 분들은 그 이유가 이 말이 가진 표피적인 의미 이상의 뉘앙스를 순간 느꼈고 또 공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아이들이 무비판적으로 해리의 행동을 따라할 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 사회가 만들어낸 아이들의 리얼한 모습이라는 것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적어도 '지붕 뚫고 하이킥'은 정직하게 그런 변화해가는 아이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변화 혹은 아이들의 성장을 희망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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