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탐구생활', 공감 버라이어티 시대 여나

내 속에 들어갔다 나왔나. 어쩜 저렇게 내 속 같은 얘기만 할까. 케이블채널 tvN의 '재밌는 TV 롤러코스터-남녀탐구생활'의 마음에 짝짝 달라붙는 맛깔스런 내레이션을 듣다 보면 드는 생각이다. 같은 상황에 대한 남녀의 서로 다른 내밀한 심리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이 예능 프로그램이 말 그대로 빵 터진 건 바로 이 공감에 있다.

'남녀탐구생활'이 이 공감을 가져오기 위해 취하고 있는 방식을 들여다보면 실로 흥미로운 점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이른바 대세가 되어버린 리얼 버라이어티 형식의 정반대 지점에 이 코너가 서 있다는 점이다. 리얼 버라이어티는 리얼에 포인트를 맞춰 대본을 최소화하고 현장에서 포착한 장면과 대사들을 가져와 그것을 편집과 자막을 통해 웃음과 스토리를 강화한다. 하지만 '남녀탐구생활'은 먼저 내레이션을 만들고 거기에 맞춰 영상을 연출하는 철저히 사전 기획된 내용을 담는다. 그래서 결과는? 공감 백배의 영상이다.

이것은 기획되지 않은 날 것의 영상들만이 진정성을 담아내고, 그것이 결국 공감까지 가져올 수 있을 거라고 믿게 만드는 리얼 버라이어티가 대세가 된 세상에 대한 역발상이다. 리얼 버라이어티가 의도되지 않은 장면을 통해 리얼한 공감을 주고 자막 등 후반작업을 통해 그 공감이 증폭된다면, '남녀탐구생활'은 먼저 딱 맞는 내레이션이 철저히 기획되어 만들어지는 지점에서 먼저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거기에 맞춘 영상은 그 공감을 증폭시킨다. 방향은 반대지만 목적은 같다. 공감이다.

리얼 버라이어티가 대세가 된 것은 그것이 리얼해서 재미있기 때문이 아니라 리얼해서 공감이 가기 때문이다. 그 웃음이 거짓이 아니고 진정성이 있기 때문이다. 똑같은 먹을 것을 놓고 복불복을 해도 그것이 진짜 배고플 때 하는 것과 그렇지 않을 때 하는 것에는 공감의 차이가 생긴다. 리얼 버라이어티는 바로 이러한 리얼한 상황들을 엮어서 어떤 이야기를 만들고 그 이야기는 바로 그 리얼함 때문에 공감을 얻는다. 그러니 리얼 버라이어티에서 리얼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다. 목적은 공감이 된다.

예능 프로그램이 이처럼 공감을 목적으로 하게 된 것은 리얼 버라이어티가 가진 스토리텔링의 특징이기도 하다. 리얼 버라이어티는 일정한 캐릭터를 구성하고, 상황 속에서 리얼한 반응들을 엮어서 하나의 스토리를 구성한다. 이것은 매 회 다른 이야기를 가지면서 또 전체를 관통하는 성장 스토리를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드라마적인 스토리와 거의 같다고 할 수 있다. 다른 점은 그것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 정도일 것이다. 그러니 이러한 스토리를 가진 예능들이 드라마가 추구하는 것처럼 공감을 추구하게 된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남녀탐구생활'이 이 굳이 리얼을 내세우지 않고도 공감을 가져왔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지점이다. 이것은 리얼 버라이어티 시대에 이 코너의 선택이 리얼을 주장하지 않아도 충분히 살아남을 수 있는 가능성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남녀탐구생활'은 남녀의 숨겨진 내밀한 심리라는 누구나 보편타당하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소재를 가져와 대중들과 공감했다는 점이 성공의 핵심 포인트다. 사실 이제는 '리얼 버라이어티'의 리얼이라는 말조차 식상해진 시점이다. 리얼에 대한 강박은 이제 그것이 진짜냐 가짜냐 하는 식으로 오히려 사회적 논란만 야기시키는 아킬레스건으로 전락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는 새로운 대안은 공감이다. '남녀탐구생활'은 그 가능성을 실제로 보여주고 있다. "예능 프로그램? 웃기기만 하면 된다고 치부되던 시대는 이제 갔어요. 예능도 이제는 공감이 필요해요." 이제 공감 버라이어티의 시대다.

‘미녀들의 수다’가 건드린 ‘루저’라는 뇌관

‘미녀들의 수다’가 또 사고를 쳤다. 모 대학 여대생이 “키가 작은 남자는 루저”라는 발언을 한 것이다. 별거 아니라고 생각될 지도 모르는 이 발언은 그러나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비난의 목소리가 일파만파 커졌고, 결국에는 제작진까지 교체했지만 그 여진은 끝날 줄을 모른다. 인터넷은 온통 루저 패러디로 가득하고, 그 발언을 한 여대생은 사회생활을 하기 어려울 정도로 궁지에 몰렸다.

항간에는 터질 것이 터졌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그것은 ‘미녀들의 수다’가 교양과 천박 사이에서 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왔기 때문이다. 그 뉘앙스는 제목에서부터 풍긴다. ‘수다’라 함은 이 프로그램이 토크쇼를 지향한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애초에 기획된 대로 외국의 여성들을 토크 대상으로 세웠다는 점은 참신하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그네들의 눈을 통해 본다는 점이 이 프로그램을 ‘교양 있는’ 어떤 것으로 생각하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취지와 기획의도가 무색하게 왜 하필 ‘미녀’를 거기 세워두었냐는 점은 논쟁거리다. 이 프로그램을 보다보면 마치 여성을 상품처럼 전시해놓은 듯한 뉘앙스를 읽게 된다. 기획의도에 맞게 진지한 토크를 했다면 그런 뉘앙스는 읽혀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토크쇼는 때론 천박하기 이를 데 없는 질문을 던진다. 이번 사건에서도 그 본질은 여기서 생긴 것이라 볼 수 있다. “키가 작은 남자는 루저”라는 답변이 나오게 된 것은 “키가 작은 남자와 사귈 수 있냐?”는 천박한 질문에서 비롯된 것이다.

‘미녀들의 수다’가 토크쇼를 표방하면서 결국 껍질을 한 꺼풀 벗겨내면 노골적인 성 상품화가 그 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이들은 이 프로그램이 가진 위장술이 오히려 반감의 요인이 된다. 바로 이런 반감 위에 하필 ‘루저’라는 이 시대의 뇌관을 건드리는 단어를 쓴 것이 문제를 더욱 크게 만들었다. ‘청백전(청년 백수 전성시대)’이나 ‘이태백(이십대 태반이 백수)’, ‘삼일절(31세면 취업길이 막혀 절망하는 시대)’ 같은 신조어들이 청년 실업의 절망을 표현하고 있는 요즘, 백수니 루저니 하는 단어는 그 어느 때보다도 민감해졌다.

그 ‘루저’라는 단어를 그것도 대학생이라는 사람이 개념 없이 사용했다는 점은 공분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식자라는 사람이 거기에 걸맞지 않은 발언을 한 것이 더 큰 파장을 몰고 온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보면 ‘미녀들의 수다’에서 한 여대생이 ‘루저’라고 한 마디 한 것이 결코 작은 사건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첫 번째는 이 프로그램이 갖게 된 도덕적 불감증이 원인이고, 두 번째는 그러한 불감증에서 비롯된 생각 없는 발언과 생각 없는 편집으로 방영된 프로그램에 그토록 취약함을 보인 이 사회가 원인이다.

게다가 이 ‘루저’라는 단어 속에는 사회적 문제에 대한 무책임한 뉘앙스가 들어가 있다. 즉 사회가 구조적으로 어떤 문제를 양산하고 있을 때, 그 문제를 지적하고 나서는 것이 정당함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위너들(혹은 그런 구조적 문제로 이득을 보는 이들)은 그것이 그저 ‘루저’의 논리라고 일축한다는 점이다. 구조적 문제를 개인적인 차원으로 치부하고, 오히려 비하하고 비난한다는 점에서 ‘루저’라는 단어의 뉘앙스는 지독하다. 그리고 이런 단어가 버젓이 공중파에서 농담처럼 흘러나오는 이 사회는 또 얼마나 지독한가.

김C와 김성민, 예능에 리얼을 입히는 그들

확실히 예능은 새로운 시대에 접어들었다. 남들은 웃기려고 안달복달 예능을 하려 할 때, 오히려 진지한 얼굴로 다큐해서 호평을 받는 시대니 말이다. 그 새로운 시대의 징후처럼 서 있는 인물이 바로 김C다.

그는 강호동이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가며 "시베리아 야생 수컷 호랑이~"를 연발할 때도, MC몽이 발군의 예능감을 살려 몸 개그를 날릴 때도, 은초딩이 눈을 깜박깜박하며 또 무슨 장난을 쳐서 웃음을 줄까 고민할 때도, 이승기가 안되는 요리 실력으로 요리를 하겠다며 난리 블루스를 출 때도, 이수근이 예능의 빈 공간에 불쑥불쑥 초절정의 개그를 선보일 때도 그저 묵묵히 무표정한 얼굴로 그 자리에 서 있다.

아니 무표정이 아니라 오히려 인상을 쓰고 있다. 그래서인지 그는 '1박2일'이라는 야생의 예능 프로그램 속에서 지나치게 진지하게 "사는 건 고행"이라고 온몸으로 말하는 것만 같다. 그런데 그 진지함이 예능 속으로 들어오자 놀라운 마력을 발휘한다. 그것은 이 새로운 조류로 만들어진 리얼 예능에 진짜 리얼을 입히는 존재로서 김C가 부각되는 것이다. 그는 지지리도 운 없는 사나이로 한 겨울에는 속옷 차림으로, 한 여름에는 털 잠바로 그 생생한 계절감을 전한다.

재수 없게도 복불복에 져서 홀로 도보로 베이스캠프까지 가는 여정에서도 그는 진지함의 극을 보여주었다. 방송분량은 아예 포기했고, 어두컴컴한 밤길을 묵언수행하듯 걷는 김C는 말 그대로 이 예능 프로그램을 다큐로 만들었다. 그런데 이것이 진짜 다큐일까. 그렇지 않다. 이 예능 속의 다큐는 오히려 웃음을 만들어내는 포인트가 된다. 모두가 웃기려 노력하고 웃음을 터뜨릴 때, 혼자 그 옆에 서 있는 진지한 인물은 그 대비효과를 통해 웃음이 만들어진다. 이 '1박2일'의 이 '예능 속의 다큐'가 준 웃음은 사실상 김C라는 캐릭터가 '1박2일'이라는 예능 프로그램 속에서 주는 웃음과 일맥상통한다.

'1박2일'에 김C가 있다면 '남자의 자격'에는 김성민이 있다. 김C가 주어진 야생의 상황을 버티는 것으로 그 예능에 리얼과 웃음을 선사한다면, 김성민은 여기서 한 발작 더 나가 적극적으로 힘겨운 상황을 받아들이고 오히려 그 속에서 즐거움을 얻는 모습을 통해 리얼과 웃음을 선사한다. 그의 입에 붙은 말, "나 그거 꼭 해보고 싶었는데"는 다른 멤버들의 한숨과 묘한 대조를 이루며 양측의 웃음을 강화한다.

일일 직장 체험에서도 그는 주어진 여행사 직원의 일에서 한 걸음 나아가 하고 싶은 것을 더 하려는 자세를 보였고, 모두가 두려워하는 전투기 조종에서도 그는 즐기는 자세로 하늘을 날았으며, 모두 힘겨워 하는 2PM의 UCC 만들기에서도 "한번 더"를 외쳐 주변사람들을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게 만들었고, 모두 귀찮아하는 가사일에서 조차 마치 주부가 된 것처럼 열심히 임하는 자세를 보였다.

김성민의 이런 예능에 대한 '열혈'의 자세는 리얼과 웃음을 넘어서 어떤 감동마저 주는 이유가 된다. 나이 든 아저씨들의 도전기로 이루어진 '남자의 자격'에서 고개 숙인 아저씨들과는 상반되게 긍정적이고 밝은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이 땅의 아저씨들에게 어떤 힘을 부여해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예능에 리얼을 입히는 그들. 예능이 아니라 다큐를 하는 그들. 김C와 김성민이라는 존재는 이제 우리네 예능 프로그램이 서 있는 위치를 잘 말해준다. 설정이 아닌 리얼한 웃음은 어떤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제 예능 프로그램의 베이스가 되고 있고, 김C와 김성민은 바로 그 베이스로서의 상징적인 존재가 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리얼 버라이어티 시대의 전면에 부각되어 있는 유재석, 강호동의 존재만큼, 이 시대의 예능을 잘 알려주는 인물로서 이들 만한 존재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예능에서 웃음만큼 중요해진 것이 진정성이 된 시대다.

'강심장'은 그 프로그램명이 의미심장하다. 먼저 '강심장'의 '강'에서 우리는 두 가지 뉘앙스를 발견한다. 그 첫 번째는 강호동이다. '야심만만2'가 우여곡절 끝에 폐지되고 신설된 이 프로그램은 시작 전부터 '강호동쇼'라는 이야기가 흘러나와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박중훈쇼'가 시청률에서도 또 평가에서도 참패를 면치 못하고 물러날 때, 그 반대급부로서 떠오른 것이 강호동이 진행하는 '무릎팍 도사'였다. 박중훈이 주창했던 '예의바른 토크'는 게스트에게만 예의바른 토크로 끝났고, 반대로 '무릎팍 도사'의 '불친절함'은 게스트를 불편하게 하지만 시청자들의 궁금증을 해소시켜주었다는 점에서 단지 불친절한 토크로 끝나지 않았다. 그러니 이 시점에 '강호동쇼'라는 제목이 주는 무게감은 실로 클 수밖에 없다. 첫 회에 이례적으로 17%에 달하는 시청률을 거두게 된 것은 바로 이 '강심장'의 '강'이 가진 '강호동쇼'의 뉘앙스가 일정 부분 역할을 했던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강심장'은 '강호동쇼'가 아니었다. 강호동이 MC인 토크쇼였을 뿐이다. 그것도 이승기와 함께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게다가 '강심장'은 게스트들을 잔뜩 초대해 벌이는 집단 대결토크쇼의 형식을 지니고 있어 게스트에 집중도가 더 높았다. 상대적으로 MC들은 진행자의 위치에 머물 뿐이었다. 실제로도 강호동의 역할은 눈에 띄지 않았다. '무릎팍 도사'처럼 프로그램 전체를 이끌고 가는 강호동에 익숙한 시청자라면 '강심장'에서 존재감이 살지 않는 강호동이 낯설게 느껴질 판이었다. 그러니 '강호동쇼'라는 기대감이 컸던 만큼 실망감도 클 밖에. 기대감을 갖게 한 '강호동쇼'의 뉘앙스가 시청률을 높여놓는 역할을 해냈지만 그만큼 강호동이 져야할 부담감도 클 수밖에 없게 되었다.

프로그램이 시작되고 '강심장'의 '강'은 '강호동쇼'가 아니라 '강하다'는 의미로 변환되었다. 강한 토크를 한다는 이야기다. 지금껏 토크쇼에서는 좀체 얼굴을 내밀지 않았던 빅뱅의 G드래곤은 "멤버들과 잠적 계획을 세웠고 그 계획을 승리가 사장에게 폭로"했다는 이야기를 털어놨고, 2NE1의 씨엘은 "5년간 남자친구 금지"를 선언한 사장님이 밉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런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방식은 이른바 그 주의 '강심장'이 되기 위한 대결형식이다. 그 날의 주제에 대해서 각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어떤 것이 더 "강한가"를 즉석에서 방청객이 투표로 결정하는 식이다. 마지막에 남은 1인이 그 주의 '강심장'이 되는 것. 물론 여기서 '강한 것'이 토크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춤이나 끼를 보여주는 것도 한 방식이다. 따라서 어찌 보면 '강심장'은 파일럿 프로그램으로 이경규가 진행한 '토끼열전'의 화려한 버전 정도로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강한 토크쇼를 지향하는 '강심장'의 형식은 어디서 파생되어 진화된 결과일까. 먼저 밝혀 두자면 프로그램의 형식이 어떤 기존에 있는 형식을 변용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그 변용된 형식이 갖는 새로움이 진화의 성격을 갖는가, 아니면 퇴행의 성격을 갖는가이다. '강심장'에서 떠오르는 프로그램은 '세바퀴'와 '스타킹'이다. 집단 게스트 체제를 갖고 토크와 끼를 선보인다는 점이 '세바퀴'를 닮았고, 거기에 스튜디오 경연대회 형식의 대결구도가 '스타킹'을 닮았다. 하지만 두 프로그램과 '강심장'은 근본적인 차이점들이 더 극명하다. '세바퀴'가 설문을 통한 퀴즈 형식으로 다양한 세대의 공감대를 끌어내려 했다면, '강심장'에는 그러한 퀴즈 형식 같은 공감의 장치가 따로 없다. 좀 더 강한 토크를 위한 대결구도가 더 부각되고, 공감 포인트는 외적인 장치가 아니라 다양한 이야기 속에서 찾아지는 형식이다. 그 주의 '강심장'이 되기 위해서 게스트들이 쏟아내는 이야기에는 자극적인 폭로의 이야기도 있지만, 때론 감동적인 사연도 들어가 있다. 아직까지는 자기 존재를 알리기 위한 강한 이야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만, 그것만이 다는 아닐 것이다. 실로 강심장이어야 할 만한 자극적인 폭로성의 이야기와, 심장을 울리는 공감의 이야기를 섞어내야 비로소 토크쇼로서의 기능을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스타킹'은 경연 형식의 대결이 들어가지만 그 대결은 일반인들에 초점이 맞춰짐으로써 공감대가 형성된다. 반면 '강심장'은 연예인 자신들의 이야기나 끼를 뽐내는 것이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자기 홍보의 함정에 빠질 위험성이 있다. 중요한 것은 이 형식 속에 어떤 내용이 담기느냐는 것이다. 그 강한 이야기가 어떤 종류의 것인가가 관건이 된다. 안타깝게도 아직까지 '강심장'은 우리가 흔히 토크쇼에서 봐왔던 자극적인 폭로성의 이야기들이 난무하는 실정이다. 물론 간간히 가슴 찡한 이야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1회와 2회에 '강심장'에 등극한 이야기는 이러한 폭로성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방송한 지 3년 만에 결혼해 임신까지 하게 되자 천덕꾸러기가 되어버린 아나운서 오영실이 겪었던 그 시절의 눈물겨운 사연이 1회의 강심장이 되었고,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의정의 뇌종양 투병기가 2회의 강심장이 되었다. 이처럼 토크가 가지는 폭로성과 진정성 사이에서 '강심장'은 어느 정도 균형을 맞추려 노력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배분을 보면 거의 대부분이 연예인 사생활에 관련된 자극적인 이야기가 주류를 이루고, 거의 끝부분에 진정성 있는 이야기 한두 개로 마무리를 하는 느낌이다.

'강호동쇼'가 아닌 강한 이야기를 선택한 '강심장'이 이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심장을 뛰게 만드는 진정성이 담긴 이야기다. 토크쇼가 가져야 하는 제 1의 덕목은 소통이기 때문이다. 토크쇼는 그 기본이 커뮤니케이션에 있다. 그러므로 누군가 이야기를 하고 그 이야기가 상대방에게 전달되어 공감을 일으켜야 비로소 토크쇼로서의 어떤 기본이 마련될 수 있다. 이것은 아무리 예능화되어버린 토크쇼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이를 위해 '강심장'이 이제부터 다시 들춰봐야 할 것은 '세바퀴'가 갖고 있고 '야심만만'이 갖고 있던 공감의 장치들이다. '세바퀴'와 '야심만만'이 갖고 있던 설문 퀴즈 같은, 그 자리에 앉아있는 수많은 게스트들을 하나로 묶어낼 수 있는 공감의 장치가 있어야, 각각 쏟아내는 이야기들은 지리멸렬해지지 않는다. 집단 게스트는 경쟁이라는 장점을 가지지만, 반면 소외라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 여러 명이 이야기를 하다보면 꿰다 논 보릿자루가 늘 생기기 마련이다. 그런데 게스트란 사실 시청자들이 공감하면서 동시에 감정이입을 통한 대리만족을 주는 존재이기도 하다. '세바퀴'의 아줌마들이 보여주는 솔직 과감한 수다는 현실에서 쉬 내뱉지 못하지만 늘 속내로 갖고 있던 그 부분을 긁어줌으로써 보는 이들에게 통쾌함을 안겨준다. 그러니 그 게스트가 소외된다는 것은 그대로 시청자의 소외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야심만만'은 토크쇼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평가되는 프로그램이다. 설문을 통해 공적인 이야기를 가져와 그것을 연예인들의 사적인 이야기를 통해 풀어냄으로써 자극과 공감을 동시에 가져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 장치를 버리고 나서 '야심만만'이 겪은 지리멸렬의 길을 떠올려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어떻게 하면 강한 토크를 할 것인가만을 고민한 결과였다. '강심장'이 진정한 토크쇼의 강자로 서려면 강한 이야기와 함께 심장이 뛰게 하는 이야기가 잘 어우러져야 한다.
(이 칼럼은 시사저널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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