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상’, 현빈이 만들어낸 독특한 긴장감과 통쾌함

제목이 <협상>이라 영화 <네고시에이터>나 일본 만화 <용오>를 떠올린 관객 분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테러리즘의 한 가운데 들어가 세치 혀로 놀라운 협상력을 보여주는 인물들의 이야기. 인질극을 해결하기 위해 제 몸 하나를 던지는 이들이 만들어가는 긴장감 넘치는 상황들...

하지만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협상>은 시작은 그런 ‘협상가’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그 끝은 의외의 이야기를 이끌어낸다. 영화의 핵심적인 재미의 부분이라 스포일러를 되도록 피하고 싶은 그 후반부는 이 영화가 우리 식의 해석을 얼마나 하려 노력했는가를 잘 드러내준다. 

영화 <협상>은 이미 예고를 통해 모두가 주지하고 있듯이 인질극을 벌이는 민태구(현빈)와 어떤 상황 속에서도 냉정함을 유지하며 협상을 이끌어내는 협상가 하채윤(손예진)의 팽팽한 대결구도로 긴장감을 이어간다. 화상통화로 서로의 얼굴을 보며 상대방의 카드를 읽어내려는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자칫 인질을 잃을 수도 있다는 사실 때문에 손에 땀을 쥐게 만든다. 

영화적 관습이지만 도입부분에 협상을 하는 도중 죽음을 맞이한 무고한 피해자 때문에 자책감 같은 걸 갖고 있는 하채윤은 또 다시 그런 일을 겪는 것을 피하기 위해 노력하는데, 그와 함께 하는 경찰청장이나 국정원 측은 그에게 도움을 주기 보다는 오히려 어려움을 만들어낸다. 정보 공유를 하지 않아 생겨난 협상의 난항 때문에 하채윤은 먼저 그들부터 협상해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태국에 있는 테러범과 한국에 있는 협상가가 스크린 하나로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며 협상을 해나가곤 있지만, 도대체 이 테러범이 무슨 이유로 이런 일을 벌이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협상가는 그 이유를 찾아내려 애쓴다. 그것이 협상의 전제조건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이유를 찾는 과정에서 하채윤은 의외의 진실들을 마주하게 된다.

사실 테러범과 협상가의 이야기가 추석이라는 명절 시즌에 어울릴까 싶은 의구심이 있지만, 괜찮은 액션 영화를 원하는 관객이라면 충분히 만족할만한 내용이다. 물론 허점도 적지 않다. 하지만 협상이라는 소재를 가져와 의외로 우리 식의 문제의식을 드러내는 대목은 작은 허점들을 덮어주기에 충분하다. 

이 영화는 손예진과 현빈의 연기 변신도 볼만한 대목이다.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로 우리에게 사랑스러운 모습을 선보였던 손예진이 이 작품에서는 말 한 마디로 상대방의 마음을 쥐락펴락하는 협상가로의 변신을 선보이고, 여성들을 설레게 했던 그 웃음이 테러범으로서 이제는 오싹한 긴장감을 갖게 만든 현빈의 변신도 주목할 만하다. 

특히 현빈의 연기는 그가 왜 그동안 해왔던 멋진 주인공의 모습에서 악역으로 변신을 도모하려 했는가를 잘 보여준다. 악역이지만 미워할 수 없는 강렬함을 담아내고, 영화 전체를 긴장하게 만들어주며, 심지어 통쾌함까지 주는 그런 인물의 역할을 현빈은 멋지게 소화해냈다. 영화가 가진 부족한 부분들이 적지 않지만, 손예진과 특히 현빈의 연기는 이를 채워주기에 충분하다.(사진:영화'협상')

'안시성', 호불호 갈리는 압도적 볼거리와 약한 스토리 사이

영화 <안시성>은 지축을 뒤흔드는 말발굽 소리로부터 시작한다. 달리는 말과 창과 칼을 들고 맞붙는 당 태종의 군대와 고구려군의 치열한 전장. 살점이 잘려져 나가고 피가 튀는 그 현장이 마치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 상황을 고스란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재연된다. 

그 영화의 도입 부분을 채운 전투 장면은 앞으로 이 영화가 어떤 걸 보여줄 건가를 말해준다. 제목만 들어도 그 내용을 모를 우리네 관객은 없을 소재. 20만 당나라 최강의 대군을 맞아 고작 5천의 병사들로 이를 물리친 양만춘 성주가 이끈 안시성 전투가 그것이다. 

KBS 대하사극 <대조영>에서도 다뤄졌고, SBS 드라마 <연개소문>에서는 제작비 400억 중 상당한 액수를 소진시켜 결국 전체 드라마를 휘청하게 만들었던 게 바로 초반 안시성 전투 스펙터클이었다. 그 정도로 안시성 전투라는 소재를 재연해내려는 역사 콘텐츠들의 야심은 계속 있어왔다. 그러니 영화 <안시성>이 다루는 이야기는 이미 우리네 관객들이 대부분 아는 것이다. 다만 그것을 어떻게 재연해낼 것인가가 이 영화가 가진 관건이었다.

<안시성>이 그려내는 인물들은 다소 전형적이고 도식적이다. 백성들에게 자애로운 성주 양만춘(조인성), 그와 정치적으로 부딪치는 연개소문(유오성), 양만춘을 따르는 무사들로 부관인 추수지(배성우), 도끼를 쓰는 부월수장인 활보(오대환), 그와 티격태격하면서도 서로를 챙기는 환도수장 풍(박병은)이 있고, 양만춘의 여동생인 백하부대장 백하(설현)와 그의 연인인 기마부대장 파소(엄태구)가 등장한다. 캐릭터 설명만으로도 그들이 앞으로 어떤 일들을 해나갈 것인가가 어느 정도는 예측 가능한 그런 인물들을 <안시성>은 배치해놓는다. 

이렇게 쉽게 전형적인 인물을 사용하고, 안시성 전투라는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 소재를 가져왔다는 건, 이 영화가 주력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전투 장면의 스펙터클이라는 걸 명백히 해준다. 그래서 영화는 이야기의 재미보다는 볼거리의 재미가 훨씬 더 관객을 몰입시킨다. 특히 우리네 사극에서 이렇게 다양한 방법으로 ‘공성전’을 다룬 적이 있나 싶을 정도로 밀고 당기는 전투의 스펙터클은 관객의 시선을 압도하기에 충분하다. 

성을 부수고 들어오려는 당 태종과 이를 막아내면서 반격을 가하는 양만춘의 치열한 두뇌싸움은 흥미롭고, 도저히 이겨낼 수 없을 것 같은 공격 속에서 이를 뒤집는 전략들은 ‘전쟁 스펙터클’이 보여줄 수 있는 극점들을 보여준다. 특히 공간감을 잘 인지하게 만든 연출은 관객이 안시성에서 벌어지는 전투의 여러 국면들에 함께 하고 있다는 느낌을 전해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다만 이렇게 스펙터클이 강렬하게 전편에 채워지다 보니 가끔씩 전투의 소강상태에서 이어지는 드라마들이 너무 소소하게 느껴진다는 점이다. 이것은 인물을 다소 전형적으로 그려 놓은데서 빚어진 결과이기도 하고, 애초부터 인물을 파기보다는 전쟁의 양상에 더 집중하겠다는 영화의 전략에 따른 결과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안시성>은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영화다. 볼거리를 찾는 관객이라면 <안시성>의 시종일관 이어지는 전쟁 스펙터클이 압도적인 재미로 다가올 수 있다. 하지만 보다 섬세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원하는 관객이라면 인물에 대한 평이한 이야기에 아쉬움을 느낄 수 있다. 다만 분명한 건 <안시성>은 극장에서 봐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영화라는 점이다. 시각과 청각이 아우러진 그 시스템 속에서 더더욱 생생하게 느껴질 수 있는.(사진:영화'안시성')

'서치'와 '상류사회' 희비쌍곡선, 좋은 영화는 관객이 먼저 알아본다

변혁 감독의 영화 <상류사회>는 시작 전부터 시끌시끌했다. 19금이니, 일본 AV배우까지 등장한 역대급 노출이니 하는 자극적인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여기에 변혁 감독 스스로 영화가 가진 의미를 이야기하는 인터뷰까지 더해졌다. 논란에 대한 해명의 뉘앙스를 가진 인터뷰였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그것 역시 관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일종의 홍보 마케팅처럼 여겨졌다. 논란과 19금이 버무려진 형태의 홍보 마케팅.

물론 홍보 마케팅이 잘못된 건 아니다. 영화가 그만한 완성도를 갖고 있다면 말이다. 하지만 <상류사회>는 감독까지 나서서 그 작품이 가진 의미들을 세세히 설명했어도 관객들의 마음을 잡지 못했다. 완성도도 떨어졌고, 새로움은 찾기 어려웠다. 결국 남은 건 노출뿐이었다. 관객들은 외면했고 주말 이틀 간 20만 관객을 동원해 누적 50만 관객을 기록했지만 주말 박스오피스 3위로 밀려났다.

<서치>가 미국 선댄스영화제 관객상을 수상했던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우리가 하루 종일 들여다보며 살아가는 SNS 세계만으로 구성된 영화라는 게 일단 관객에게 참신하게 다가온다. 그게 한 편의 영화가 될까 싶지만, 충분히 가능하고도 남는다는 걸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네 삶이 얼마나 이 새로운 세계에 포획되어 있는가를 깨닫게 만든다.

이 작품에서 아빠 역할을 연기한 존 조는 시종일관 얼굴 표정을 통해 그 깊은 감정과 아픔들을 연기해냄으로써 한국 관객들에게도 인상적인 모습을 남겼다. 우리에게는 <아메리칸 파이2>와 <스타트랙>의 술루 역할로 기억에 남겨진 배우다. 한국에서 태어나 6살 미국으로 이민해 성장한 한국계 배우다.


‘공작’, 이런 영화가 극장에 걸린다는 것만으로도 뭉클하다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선거철만 다가오면 빠지지 않고 나오는 이른바 ‘북풍’의 실체는 무엇일까. 어째서 선거 임박해 ‘북한의 도발’이 벌어지고 어김없이 일간지에 마치 당장이라도 전쟁이 벌어질 것처럼 대서특필되었나. 영화 <공작>은 아마도 1990년대 말 대선 과정에서 벌어졌던 이른바 ‘총풍사건’을 기억하는 분들에게는 그리 생소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당시 ‘흑금성 사건’으로 ‘북풍’의 실체가 드러났던 그 사건을.

<공작>은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하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해석과 연출은 들어있지만 ‘흑금성 사건’의 현실적 자료들의 대부분이 그대로 담겨 있다. 워낙 흑금성이 실제로 해온 대북 공작 이야기 자체가 드라마틱해 특별한 이야기를 첨가하지 않아도 충분히 관객들을 몰입시킬만한 힘이 있기 때문이다. 눈에 띄는 액션이 있는 영화도 아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을 늦출 수 없게 보게 만드는 힘은 그 실제 이야기에서부터 나온다.

북핵 위기가 점점 커지고 있는 시점에 대북 공작을 위해 목숨을 걸고 뛰어든 박석영(황정민)은 사업가로 위장해 북한의 외화조달을 책임지고 있는 간부 리명운(이성민)을 만난다. 그리고 실제로 대북사업으로 진행되었던 남북 합작 광고 사업을 두 사람은 공조해 진행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박석영은 본래의 목적이었던 영변의 핵시설을 들여다보려 노력하고, 북한의 정보들을 안기부에 넘기는 일을 동시에 수행한다. 

<공작>의 팽팽한 긴장감은 사업가로 위장해 북한까지 들어가 김정일 당시 위원장까지 만나게 되는 박석영의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일 분 일 초들이 만들어낸다. 그와 함께 김정일의 허락을 받아내 사업을 진행하게 되면서 공동의 운명에 처하게 되는 리명운은 박석영과 기묘한 동지적 관계를 맺게 된다. 남과 북으로 서로 다른 위치에 서게 되지만 ‘새로운 남북관계의 시대’를 희망하는 두 사람의 의지는 그들을 위협하는 양국의 세력들(?)과 대결하게 만든다. 

이 영화가 흥미로운 건 처음에는 박석영와 리명운이라는 인물을 통해 남북이 대결구도로 등장하지만, 차츰 두 사람은 공동운명체가 되어가고 대신 남북 각국의 또 다른 세력들이 그들을 위협하는 존재로 바뀌어간다는 점이다. 북한의 리명운을 위협하는 건 정무택(주지훈)으로 대변되는 군부세력이고, 남한의 박석영을 위협하는 건 엉뚱하게도 대선이 불리해지자 북풍을 조작하려는 정치인들과 안기부의 공조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당선은 그래서 이 영화의 중대한 변곡점을 만들어낸다. 북풍을 조작하면서까지 대선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밀어내려 했던 정치세력과 안기부는 그가 당선됨으로써 오히려 위기를 맞게 된다. 이른바 ‘총풍사건’이 드러나고 당시 북풍 공작을 했던 안기부 요원은 검거되며, 안기부는 국정원으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다 알고 있듯이 김대중 전 대통령은 남북 정상 회담을 제안한다. 그렇게 남북관계의 새로운 시대가 열리게 됐던 것.

<공작>의 신랄함은 나라를 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사실은 특정 정치세력을 위해 북풍 공작까지 감행했던 시대의 어둠을 정조준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것은 최근 문재인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을 만나기 전까지 또 다시 재연되고 있던 상황들이다. 김대중 정권에서부터 노무현 정권까지 이어지던 대북정책은 이명박 정권에서 박근혜 정권으로 이어지며 과거의 모습으로 퇴행해버렸던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작>이 남북 광고 합작을 계기로 남측의 이효리와 북측의 조명애가 만나는 장면과, 그 장소에서 다시 만나게 되는 박석영과 리명운의 모습이,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정일 전 위원장이 만나던 장면과 최근 문재인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을 만나는 장면으로 오버랩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공작>은 시대의 씁쓸함을 정조준하는 그 신랄함과 동시에 남북이 마주잡은 그 손의 훈훈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보기 드문 수작이다. 무엇보다 이런 영화가 극장에 걸릴 수 있는 시대를 만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뭉클해지는.(사진:영화'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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