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가 바꾸는 영화의 풍경들

 

2020년 골든글로브상이 발표한 후보들을 보면 단연 넷플릭스의 선전이 눈에 띈다. 특히 영화는 도드라진다.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아이리시맨’>, 노아 바움백 감독의 <결혼 이야기>,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감독의 <두 교황>이 영화 작품상 드라마 부문 후보에 오른 것. 드라마 부문 작품상 다섯 편 중 세 편이 넷플릭스 영화라는 건 지금 세계 영화판에 넷플릭스가 가진 영향력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중요한 건 이들 작품들이 가진 새로운 특징들이다. 사실 넷플릭스라는 플랫폼의 특징은 극장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멀티플렉스 극장들이 점점 더 효과에 집중하고 실감나는 영상과 음향을 강조하면서 거기 걸리는 영화들도 그 특징에 맞게 변화한 면이 있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이른바 블록버스터 영화들은 그래서 극장을 하나의 놀이공원이자 체험관처럼 만드는 극장용 영화들로 관객들을 끌어 모았다.

 

그러다 보니 영화 고유의 진중한 스토리텔링이나 미장센 같은 것들보다 효과에 집중되는 면들이 강했다. ‘볼거리 영화들’이 많아진 이유다. 하지만 <아이리시맨> 같은 영화를 보면 마치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 로버트 드니로나 알 파치노 그리고 조 페시, 하비 케이틀 같은 어찌 보면 자신의 영화적 아이콘들을 한 자리로 끌어 모아 “본래 영화란 이런 것”이라고 말하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아주 차분하고 담담하게 이야기들이 펼쳐지는 이 영화는 무려 런닝타임이 209분이나 되지만 눈을 뗄 수 없는 몰입감을 선사한다. 저 볼거리가 만드는 극장용 몰입감과는 너무나 다른.

 

<결혼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사랑했지만 작은 균열이 차츰 거대해지면서 파경을 맞게 된 부부가 이혼을 하게 되는 과정을 통해 결혼과 이혼, 사랑, 가족 등에 대한 의미들을 찬찬히 담아낸다. 대단히 극적인 사건들이 담겨지진 않지만 이혼 과정에서 벌어지는 인물들의 섬세한 감정들이 굉장한 폭발력을 만들어낸다.

 

그런데 사실 <아이리시맨>이나 <결혼 이야기>는 극장용 영화로 본다면 사실 기획되기가 쉽지 않고 또 나아가 대중적 성공을 거둘 수 있을지 애매한 작품들이다. 그건 작품이 가진 성취의 문제가 아니라, 극장이라는 공간과 거기서 관객들이 요구하게 된 걸맞는 영화의 틀이 이들 영화와는 조금 다르기 때문이다.

 

극장용 영화와 넷플릭스 같은 OTT에 세워지는 영화의 차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건 런닝타임이다. 사실 <아이리시맨> 같은 3시간이 훌쩍 넘어가는 영화는 아무래도 극장에서는 부담스럽다. 물론 최근 들어 극장에서도 런닝타임이 긴 영화들이 세워지기도 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몇 편의 에피소드로 나눠진 영화들도 상영되었지만 그런 작품들은 대부분 블록버스터였다. 충분한 볼거리가 제공되기 때문에 한 편에 마무리되지 않더라도 그 과정에서의 즐거움만으로 상영이 가능했던 것.

 

하지만 <아이리시맨> 같은 블록버스터라기보다는 긴 이야기에 가까운 영화는 얘기가 다르다. 어찌 보면 <아이리시맨> 같은 영화가 나올 수 있었던 건 넷플릭스처럼 집에서도 영화를 즐길 수 있는 새로운 플랫폼이 있었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극장은 어느 정도 거기에 적합한 러닝타임을 요구한다. 너무 짧아도 애매하지만 너무 길어도 성공이 어렵다. 그래서 한 시간이 살짝 넘는 정도의 중편 영화들은 극장에서 세워지지 않아 잘 만들어지지 않는 경향도 생긴다. 넷플릭스에서 방영되고 있는 프랑스 애니메이션 <내 몸이 사라졌다> 같은 80분짜리 영화는 극장만이 플랫폼이라면 만들어지기 애매한 작품이다.

 

넷플릭스는 한 때 봉준호 감독의 <옥자>를 방영하며 멀티플렉스와 한 판 갈등을 일으킨 적이 있다. 멀티플렉스가 영화를 걸어주지 않은 것. 하지만 최근 들어 멀티플렉스들은 넷플릭스 영화들을 하나 둘 걸기 시작했다. 물론 오래 걸어놓거나, 상영관을 많이 잡지는 않지만 그래도 외면할 수 없는 좋은 작품들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 흐름은 마치 멀티플렉스가 그 특성상 만들어온 볼거리 경향을 이제는 넷플릭스 같은 새로운 플랫폼에 맞춰진 영화들이 조금씩 보완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그 화려한 효과들을 보여주는 영화에 도취되어 잠시 잊고 있던 영화 본래의 맛을 넷플릭스 같은 새로운 플랫폼이 오히려 복원해내고 있다는 건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사진:넷플릭스)

천만 예약 ‘겨울왕국2’, 진취적 스토리와 퇴행적 독과점의 양면

 

영화 <겨울왕국2>는 개봉과 함께 어쩌면 일찌감치 1,000만 관객 돌파를 예약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개봉한 지 10일도 안돼서 무려 760만 관객(11월30일 기준)을 돌파했다. 2013년 개봉했던 <겨울왕국>이 애니매이션 최초로 1,000만 관객을 넘겼던 걸 떠올려보면 시즌2에 대한 기대감이 클 수밖에 없다는 건 당연한 일일게다. 따라서 <겨울왕국2>가 1,000만을 돌파한 건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이렇게 된 건 <겨울왕국2>가 이미 전편에서 드러냈던 것처럼 디즈니 애니메이션에 불어넣은 색다른 공주이야기에 대한 해석이 폭넓은 공감대를 불러 일으켰고, 거기에 디즈니 특유의 뮤지컬 무비가 갖는 감흥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음악적으로 보면 물론 전편의 ‘Let it go’를 뛰어넘는 노래를 찾기는 어렵지만 ‘into the unknown’이나 ‘Show yourself’ 같은 꽤 괜찮은 음악들이 포진해 있다. 음악적 감흥도 감흥이지만, 스토리와 엮어져 그 노래가 전하는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여성 캐릭터 엘사와 안나의 메시지가 더 큰 공감대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스토리도 <겨울왕국2>는 진일보했다고 보인다. 젠더적 관점의 변화는 더 명확해졌고, 거기에 소수민족 이야기와 환경 문제까지 더해져 다양한 페미니즘의 논제들이 영화 구석구석에 포진됐다. 무엇보다 엘사가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을 찾아가는 그 과정은 이야기로도 또 화려하고 역동적인 애니메이션의 표현으로도 충분히 감동을 줄만하다. 또한 엘사와 안나, 그리고 그 부모와 그 조부모의 세대를 하나의 역사적으로 엮어 그 잘못된 역사를 현재 바로잡는 이야기 구성도 흥미롭다.

 

무엇보다 <겨울왕국2>가 거둔 성취가 돋보이는 대목은 지금까지 무수히 많이 디즈니가 그려냈던 공주와 왕자 이야기를 별 거부감 없이 너무나 유연하게 뒤집어 놨다는 점이다. 젠더니 페미니즘이니 하는 단어만 들어도 어딘지 어떤 선입견을 갖게 되는 경향이 있는데, <겨울왕국2>는 그 얘기들을 다 꺼내면서도 별다른 선입견 없이 이야기에 몰입하게 한다. 그건 젠더 이야기를 환경문제나 소수민족 문제까지 확장해서 끌어안았기 때문에 생겨난 자연스러움이다. 사람들은 젠더 문제에는 민감하지만, 그 확장일 수 있는 환경문제나 소수민족 문제에는 훨씬 포용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작품의 완성도로 충분히 평가받고 또 대중적 성공도 가져갈 수 있었던 <겨울왕국2>에 시작부터 불거진 스크린 독과점 논란은 오점이 될 수밖에 없다. <겨울왕국2>는 상영점유율(63%)과 좌석점유율(70%)를 기록함으로써 <어벤져스:엔드게임>이 기록했던 상영점유율(80.9%)와 좌석점유율(85%)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독과점 비율을 기록했다. 결국 영화 다양성 확보와 독과점해소를 위한 영화인 대책위가 다양성 침해라며 비판하게 된 이유가 되었다.

 

젠더와 환경, 소수민족 문제 같은 다소 소외된 것들의 가치를 재조명하고 그것들을 복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영화가 독과점 논란을 일으킨다는 건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이건 극장 체인이 이미 지난 <겨울왕국> 1편의 성공을 통해 이번 2편의 성공도 일찌감치 예상했기 때문에 생겨난 일일 수 있다. 하지만 이 바람직한 메시지를 전하는 영화가 흥행에는 성공했지만 그로 인해 영화의 메시지와는 정반대의 또 다른 피해를 만들고 있다는 비판을 피하긴 어렵다.

 

<겨울왕국2>의 진취적인 메시지와 그와는 정반대 흐름을 갖는 독과점 문제의 공존을 들여다보면, 이제 기존 잘못된 질서와 자본을 비판하는 콘텐츠도 결국은 자본의 질서 안에 편입되고 있는 현실을 실감하게 된다. <겨울왕국2>의 메시지와 완성도에 박수를 치면서도 남는 씁쓸함이다.(사진:영화'겨울왕국2')

‘날씨의 아이’의 흥행실패, 과연 시국 때문 만일까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전작이었던 <너의 이름은.>으로 일본 애니메이션으로서는 이례적으로 370만 관객이라는 흥행을 거둔 감독이다. 국내에는 이미 그 작품 때문에 그의 전작들이었던 <언어의 정원>이나 <초속5센티미터> 등 또한 화제가 된 바 있다. 그래서일까. 이 영화에 투자한 영화사측은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신작 <날씨의 아이>가 첫 주말에 약 33만 관객을 동원한 것에 적이 실망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 관계자는 공식 입장문까지 내놨다.

 

공식 입장문의 주요 내용을 보면 <너의 이름은>에 비해 <날씨의 아이>의 성적이 저조한 이유가 지금의 냉각된 한일관계 때문이라는 것이고, 이에 대해 안타까운 심경이 토로되어 있다. 물론 지금의 이런 시국이 이 작품의 성패에 영향을 준 건 사실일 게다. 아무래도 일본 영화라는 사실이 주는 막연한 부담감(?) 같은 것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첫 주말에 33만 관객을 동원한 것이 과연 실패라고 볼 수 있는지, 또 그 실패의 기준으로 <너의 이름은>의 흥행 성공을 내세우는 것이 온당한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작품으로만 보면 <날씨의 아이>는 전형적인 신카이 마코토 감독 스타일의 연출과 이야기 기법을 가져온 작품이다. ‘빛의 마술사’라는 지칭대로 빗방울 하나하나, 폭죽이 터지는 색감, 하늘의 풍경 등등이 만들어내는 감성들을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색채로서 화려하게 표현해낸다. 그래서 그 색깔에 빠져들면 단지 눈만 건드리는 게 아니라 보는 이들의 감성까지 건드리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이것은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 <날씨의 아이>라는 날씨를 소재로 한 작품을 만든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이 작품은 세계적인 기상이변 같은 지구적 위기의 문제를 특유의 판타지적 기법으로 들여다보고 머리만이 아닌 감성으로까지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야망이 담겨져 있다. 하지만 그 기조에서 가장 중요해 보이는 건 날씨가 사람들의 감정을 좌지우지한다는 그 사실이고, 그것을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 아니면 색채로 표현해내기 어렵다는 점이다.

 

영화는 충분히 재미있게 볼 수 있지만, 보는 이에 따라서는 신카이 마코토 감독 특유의 감정 과잉 부분이 몰입을 오히려 방해한다고 느낄 수도 있다. 잔잔하게 흐르던 감정을 어느 순간 폭발시키고 그 상황에서 주인공들이 마치 구호를 외치듯 대사를 던지며 부감으로 거대한 도시나 자연으로 확장되는 그런 영상 연출과 음악이 이어지는 그 연출방식은 이미 <너의 이름은>에서도 충분히 반복되었던 것들이다. 그리고 그건 <너의 이름은>에서 큰 힘을 발휘한 연출이었지만, 이미 그것이 익숙한 관객들에게 비슷한 연출방식을 보이는 <날씨의 아이>가 그만한 효과를 발휘했을 지는 의문이다.

 

영화는 주관적 체험이고 그래서 그 반응은 상대적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영화의 흥행이란 객관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대중들의 주관적 판단에 의해 결정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날씨의 아이> 영화사측이 첫 주의 결과를 보고 내놓은 공식 입장문이 과연 공감할만한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된다. 공식 입장문에 담겨진 것처럼 영화사측은 ‘2019년 전 세계에서 가장 창의적인 감독 중 한 명의 작품’으로 <날씨의 아이>를 꼽고 있고 그래서 이 정도 성적은 일찌감치 실패이며 그 이유는 한일관계 때문이라 내놓고 있다.

 

물론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 대단한 감독인 건 사실이지만, 모든 대중들이 영화사측처럼 생각하는 건 아닐 게다. 또 첫 주말에 33만 관객 수를 실패로만 보지 않는 관객도 있을 수 있다. 안타까운 건 알겠지만 자신들의 생각을 객관적 사실처럼 얘기하며 생각한 만큼 관객이 들지 않았다고 시국을 가져오는 건 너무 성급한 판단과 행동이 아닐까. 반드시 관객 수가 그 작품 완성도의 바로미터가 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사진:영화'날씨의 아이')

아놀드 슈와제네거, 제임스 카메룬 그리고 린다 해밀턴

 

1984년 처음 등장했던 제임스 카메룬 감독의 <터미네이터>는 이 레전드가 될 영화의 신호탄이었다. 미래를 바꾸기 위해 미래에서 온 인간과 터미네이터의 대결이라는 이 흥미진진한 설정에 확실한 아우라를 부여한 건 터미네이터로 등장했던 아놀드 슈와제네거였다. 그 정도로 부서지고 깨지면 끝날 법한 상황에서도 죽지 않고 계속 해서 공격하는 터미네이터라는 캐릭터는 당대의 전 세계 관객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하지만 <터미네이터> 시리즈가 제대로 본 궤도에 오르게 된 건 1991년 제작된 <터미네이터2>였다. 레전드라고 불릴 수밖에 없는 놀라운 스케일의 액션이 CG와 더해져 풍부해졌고, 스토리도 탄탄해졌다. 무엇보다 1탄에서 압도적 존재감을 드러냈던 터미네이터가 이제는 유일한 미래의 희망으로 남은 존 코너를 지키는 수호천사로 미래로부터 날아온다. 더 강력한 액체 금속형 로봇 T-1000(로버트 패트릭)이 쉽게 파괴되지 않는 적으로 등장하고, 그와 무심한 듯 온몸을 던져 대적하는 T-101(아놀드 슈와제네거)의 압도적인 대결이 그려진다.

 

여기에 빼놓을 수 없는 또 한 명의 히어로가 합류하는데 그가 바로 사라 코너(린다 해밀턴)다. 훗날 인류 저항군의 사령관이 될 존 코너를 지키기 위해 사라 코너와 T-101의 T-1000을 물리치려는 사투가 벌어진다. 사라 코너는 이 미래를 두고 벌이는 사투 속에서 또 한 명의 여전사로서 강력한 존재감을 만들어낸다.

 

그 후 <터미네이터>는 몇 편의 후속작을 내놨지만 이렇다 할 성적도 내지 못했고 작품으로서의 호평도 받지 못했다. <터미네이터3>, <터미네이터: 미래 전쟁의 시작>, <터미네이터 제니시스>가 그 불운의 작품들이다. 거기에는 아놀드 슈와제네거가 출연했다는 걸 빼놓고 <터미네이터> 1,2편이 보여줬던 그 독특한 세계의 압도적 긴장감과 페이소스 같은 걸 느끼기가 어려웠다. 제임스 카메룬과 린다 해밀턴의 부재가 너무나 크게 느껴진 작품들이다.

 

이 일련의 흐름을 봐왔던 <터미네이터>의 원조 팬이라면 이번에 개봉한 <터미네이터: 다크페이트>에 이 세 사람이 뭉쳤다는 사실만으로도 설렐 수밖에 없을 게다. 물론 감독은 팀 밀러가 맡았지만 제임스 카메룬이 제작했고 스스로 “2편에서 이어지는 속편”이라며 원조의 계보라는 걸 명확히 했기 때문이다.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 사라 코너로 린다 해밀턴이 합류함으로써 이 영화는 <터미네이터> 골수팬들을 흥분시켰다.

 

이제 나이가 지긋하고 희끗희끗한 머리에 주름살이 가득한 아놀드 슈와제네거와 린다 해밀턴이지만 <터미네이터 다크페이트>는 놀랍게도 이들의 액션이 여전히 살아있다는 걸 보여준다. 물론 젊은 피로 미래에서 온 슈퍼솔져 그레이스(맥켄지 데이비스)가 합류하고 그가 지키려는 대니(나탈리아 레이즈)가 더해졌지만 영화의 아우라를 장악하고 있는 건 역시 아놀드 슈와제네거와 린다 해밀턴이다.

 

미래에서 온 새로운 터미네이터 ReV-9(가브리엘 루나)은 터미네이터 1탄과 2탄의 로봇이 결합한 듯한 형태다. 금속으로 이뤄진 터미네이터의 골격에 액체 형태로 형상이 마음대로 변환하는 T-1000이 분리됐다 결합했다 하며 대니를 제거하겠다는 목표하나로 앞뒤 재지 않고 공격하는 모습이 압도적인 액션으로 그려진다. 강력해진 적만큼 그와 대결하는 사라 코너와 T-800(아놀드 슈와제네거) 그리고 그레이스, 대니의 공조가 더 흥미진진해진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번 <터미네이터 다크페이트>를 흥미롭게 만드는 건 지금 시대에 걸맞는 젠더적 관점을 투영시켰다는 점이다. 린다 해밀턴은 노익장을 과시하는 걸 크러시를 여지없이 멋지게 보여주고, 미래에서 온 그레이스의 놀라운 액션과 대니와의 워맨스가 보는 내내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미래의 희망이 되는 자를 죽이려는 터미네이터와 그를 지키기 위한 여성들의 연대 그리고 이를 돕는 로봇 T-800의 구도는 그 자체로 이 영화의 액션에 더 큰 몰입감을 주는 요소다.

 

거의 30년에 가까운 시간을 거쳐 <터미네이터: 다크페이트>는 원조의 맥을 잇는 모습으로 돌아왔다. 나이 들었지만 여전히 멋진 아놀드 슈와제네거와 린다 해밀턴의 액션을 보는 것만으로도 원조 팬들은 반색할 수밖에 없다. 그 액션을 통해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고, 그 모습들이 중첩되어 불러일으키는 추억 게다가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보이는 이들의 멋진 모습이 주는 기분 좋은 몰입감까지 느낄 수 있으니.(사진:영화'터미네이터 다크페이트')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