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시트’, 한국형 블록버스터는 눈물과 웃음의 롤러코스터가 있다

 

이 영화 심상찮다. 재난과 코미디는 어딘지 어울리지 않을 듯싶지만, 의외로 웃음과 눈물의 공존이 가능하다는 걸 보여주는 영화가 바로 <엑시트>다. 그 중심에는 역시 울면서 웃기는데 이보다 잘 할 수 없는 조정석이라는 배우가 있다. 그는 영화 내내 뛰어다니고 억울해하고 두려워 떨고 심지어 울지만, 그걸 보는 관객들에게는 시종일관 웃음을 안긴다. 바로 이 눈물과 웃음이 자연스럽게 교차되는 지점이 바로 <엑시트>가 가진 가장 큰 묘미라는 걸 생각해보면 이 영화에서 조정석이 얼마나 큰 위치를 차지하는가를 실감할 수 있다.

 

유독가스로 뒤덮인 도시를 탈출한다는 그 상황은 전형적인 재난영화의 틀을 갖고 오지만, 그 속의 인물들과 그들이 만들어가는 이야기가 지극히 우리식의 공감대를 한껏 머금고 있다는 건 한편의 가족드라마 혹은 멜로드라마 같은 느낌을 준다. 게다가 영화는 재난영화가 갖고 있는 그 무거움만큼 이 상황을 살짝 비틀어 만들어내는 웃음의 지점들을 정확히 알고 있다. 그래서 관객들은 너무나 공감 가는 용남(조정석)네 가족 구성원이 쏟아내는 대사 하나에도, 이들이 칠순잔치를 하며 보이는 풍경 하나에도 웃음이 터진다.

 

하지만 그 웃음은 청년 백수로 구박받으며 살아온 용남이 재난 상황 속에서 보여주는 용기와 인간애 앞에 뭉클한 감동으로 바뀐다. 게다가 그와 함께 하는 대학동아리 후배 의주(임윤아)는 용남이 짝사랑했던 여인으로 그가 두려워 눈물까지 흘리면서도 바른 선택을 하게 만든다. 산악동아리를 하며 몸에 익은 클라이밍 기술은 유독가스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위로 오르고 또 올라야 하는 용남과 의주의 유일한 생존방법이 된다. 건물과 건물 사이를 아슬아슬한 밧줄 하나로 넘어가고, 마치 절벽을 오르듯 건물을 맨 손으로 오르는 과정은 관객들의 손에 땀을 쥐게 만든다.

 

또한 용남이라는 청춘이 보여주는 짠내와 웃음은 그가 보여주는 용기 있는 행동들로 반전을 보이며 아무 것도 하지 않아 잉여로 취급받는 이 청춘이 사실은 얼마나 많은 가능성의 존재인가를 드러내준다. 도시를 가득 채운 유독가스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위로 오르고 또 오르기 위해 상처투성이가 되는 그의 손은 그래서 마치 지금의 청춘들의 단상을 담아내는 듯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물론 <엑시트>는 저 드웨인 존슨이 출연했던 <스카이스크래퍼>식의 스펙터클과 폼나는 액션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친숙한 공간과 인물들과 상황들이 너무나 우리 식으로 맞춰져 있어서인지 <스카이스크래퍼>보다 더 실감나게 다가온다. <스카이스크래퍼>가 가짜 이야기 같다면 <엑시트>는 바로 우리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듯한 현실감을 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건물 하나 넘어가는 일이나, 한 층 위로 올라가는 일 하나만으로도 <엑시트>는 <스카이스크래퍼>가 주지 못하는 흥미진진함을 만들어낸다.

 

게다가 이 긴박하고 아슬아슬한 순간들은 마치 남사당패 줄타기가 그러하듯이 그 긴박한 상황을 슬쩍슬쩍 무너뜨림으로써 웃음을 터트리게 만든다. 물론 조정석과 임윤아는 내내 이 긴박한 상황 속에서의 진지한 연기를 선보이지만, 그것이 웃음으로 전화된다는 점에서 기막힌 희비극의 묘미를 선사한다.

 

임윤아는 이 작품을 통해 확실한 연기 변신을 선보인다. 지금껏 가녀린 선을 통한 멜로 연기 등을 주로 보여 왔던 임윤아는 <엑시트>를 통해 액션 또한 가능하고 나아가 코미디 연기도 조정석 못지않게 해낼 수 있다는 걸 확인시켜준다. 조정석이야 이미 <질투의 화신> 같은 작품을 통해서 울면서 웃기는 연기의 정점을 보여준 바 있다. 하지만 임윤아에게는 <엑시트>가 자신의 연기 스펙트럼을 비약적으로 넓혀준 작품으로 기억될 듯하다.

 

이번 여름 블록버스터 시장에서 <엑시트>는 분명 일을 낼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웃을 일 없는 지금의 현실에 잠시 시원하게 웃을 수 있고, 그러면서도 어딘가 따뜻하고 훈훈한 기분을 가질 수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해외의 그 어떤 화려한 블록버스터보다 확실히 <엑시트>는 우리의 마음을 요동치게 한다. 거기에는 눈물과 웃음의 롤러코스터가 있으니.(사진:영화'엑시트')

‘나랏말싸미’, 세종대왕 폄훼 아니라고 하지만

 

영화적으로만 보면 <나랏말싸미>는 꽤 잘 만든 영화다. 그것은 이 영화가 지금까지 세종대왕을 다루는 많은 콘텐츠들이 깊게 들어가 보지 않았던 한글의 창제 과정을 흥미진진하게 다루고 있어서다. 무에서 유를 창출해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제목에 담긴 것처럼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로 시작하는 ‘훈민정음’의 서문처럼, 우리는 우리말을 하고 있는데 글자는 한자를 쓰는 당대 언어생활의 어려움은 세종대왕이 그 말을 소리 나는 대로 글자로 만들려한 중요한 이유다.

 

소리글자를 만들기 위해 하나하나 발성을 해가며 그 소리가 입안 어디서 나오는지 알아내기 위해 손가락을 집어넣고 소리를 내는 과정들을 반복하고, 그 일관된 규칙을 찾아내며 나아가 점과 선만으로 다양한 글자의 조합을 만들어내는 그 한글의 창제 과정 속에는 그래서 자연스레 세종대왕의 뜻과 마음이 얹어진다. 그 뜻은 모든 정보들을 민초들도 공유하게 하여 특정권력자들이 정보를 독점해 나라가 망하는 걸 막겠다는 것이고, 그 마음은 좀 더 민초들이 편리하게 살 수 있게 해주겠다는 ‘애민정신’이다.

 

그러니 세종대왕이 주도적으로 이 한글 창제를 하는 과정을 온전히 담았다면 박수 받아 마땅한 영화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나랏말싸미>는 박수는커녕 역사왜곡 논란이라는 비판에 직면했다. 그것은 출처도 불분명한 신미 스님의 한글창제설을 덜컥 영화의 중심으로 가져왔기 때문이다. 신미는 세종대왕이 홀로 고민해온 연구들을 보고는 한 마디로 ‘헛짓’을 했다고 일갈하고, 소리문자를 만들기 위해 본인이 능숙한 산스크리트어를 참조하며 한글을 만들어나간다.

 

신미가 한글 창제의 중심부에 서게 되자 자연스럽게 세종대왕은 뒤편으로 물러난다. 물론 이를 지시하고 그 과정들을 검수하는 건 세종대왕의 역할이 되지만, 실제로 우리의 소리를 정리하고 점과 선으로 이어 만든 글자를 만들며, 심지어 그 한글을 쓰는 법을 정리한 것도 모두 신미의 몫이 된다.

 

물론 <나랏말싸미>가 이처럼 다소 도발적인 시도, 즉 신미가 한글 창제의 중심에 있었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게 된 건 왕과 대등한 스님이라는 그 구도가 지금의 대중들에게 어떤 카타르시스를 줄 것이라 여겼기 때문일 게다. 과거 <광해> 같은 영화가 광해라는 왕과 광대를 병치시키면서 만들어냈던 카타르시스와 유사한 어떤 것.

 

하지만 신미가 세종대왕을 ‘주상’이라 부르고, “왕 노릇 똑바로 하란 말입니다!”라고 일갈하는 장면에서 지금의 대중들은 카타르시스를 느끼기 보다는 어떤 불쾌함을 느끼는 면이 더 컸다. 역사는 세종대왕이 주도적으로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우리의 문화유산인 한글을 창제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어디서 갑자기 스님 한 명이 나타나 그걸 자신이 했다고 주장하고 심지어 세종대왕에게 면박을 주는 대목이 어딘가 잘못됐다 여겨졌기 때문이다.

 

역사왜곡 논란이 점점 커지자 <나랏말싸미> 조철현 감독은 신미를 세운 일이 역사를 왜곡하려는 의도가 아니라고 밝혔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 때 가졌을 내면의 갈등과 고민을 ‘외면화’하기 위해 영화적 인물을 만들어냈을 뿐이라는 것. 그리고 신미가 실존인물이며 여러 문헌에 기록이 나와 있어 충분히 ‘역사 공백을 개연성 있는 영화적 서사’로 만들만한 근거가 있는 인물이라고도 했다. 세종대왕을 폄훼하려는 의도는 없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영화 <나랏말싸미>는 시작부분에 ‘다양한 훈민정음 창제설 중 하나일 뿐이며 영화적으로 재구성했다’고 자막으로 밝히고 있다. 하지만 한 인터뷰에서 “나로서는 넣고 싶지 않은 자막일 수 있다”며 “어째 됐든 그 누구든 역사적인 평가 앞에서 겸허해야 된다는 판단에서 넣게 됐다”고 한 말이 그 진정성에 대한 의구심을 갖게 만들었다.

 

세종대왕이 주도적으로 만든 한글을 신미가 주도해서 했다고 하는 영화의 이야기는, 창작물로서의 상상력의 허용을 어느 정도 감안한다 하더라도 대중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다. 외국에서 이 영화를 본다면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특히 일본 같은 나라에서 이 영화의 신미 한글창제설을 보게 된다면 또 엉뚱한 말들을 늘어놓지 않을까 우려된다. 역사왜곡을 의도하려 한 건 아닐 수 있어도 <나랏말싸미>는 지금의 대중들의 정서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이것이 이 영화가 끝내 무너지게 된 진짜 이유다.(사진:영화'나랏말싸미')

디즈니 월드, 그 움직임이 심상찮다

 

지금 극장가는 디즈니 월드다. 지난 5월 개봉한 <알라딘>이 1천만 관객을 돌파했고, 지난 6월 20일 개봉한 <토이스토리4>도 320만 관객을 돌파했다. 7월2일 개봉한 <스파이더맨:파 프롬 홈>은 700만 관객 돌파를 앞두고 있고, 새로이 개봉한 <라이온킹>도 단 하루만에 30만 관객을 돌파하며 디즈니 열풍을 이어가고 있다. 이 정도면 디즈니 영화 보러 극장에 간다는 말이 과언이 아닐 정도.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된 걸까.

 

그간 디즈니가 그간 끊임없는 인수합병을 통해 그 캐릭터 왕국의 영토를 무한 확장해왔기 때문이다. 디즈니는 방송사 ABC, 스포츠채널 ESPN은 물론이고, 2006년에 픽사, 2009년에는 마블코믹스, 2012년 루카스 필름, 2017년 20세기폭스, 2018년 21세기폭스까지 인수했다. 이로써 우리가 알고 있는 무수한 캐릭터들, 예를 들면 픽사 애니메이션 캐릭터들과 마블 캐릭터, 스타워즈, 엑스맨까지 모두 디즈니 소속으로 편입됐다.

 

이러니 웬만한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시리즈물들은 대부분 디즈니 영화가 되었다. 중요한 건 이 시리즈물들이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또 스핀오프 되거나 ‘어벤져스화’되면서 무수한 콘텐츠들을 쏟아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 극장가를 장악한 디즈니 영화들을 보면 그 디즈니 월드의 확장이 어떻게 이뤄지고 있는가를 실감할 수 있다.

 

<토이스토리4>의 경우, 기존 <토이스토리> 시리즈의 연작이지만 그 세계관을 바꾸면서 확장성을 갖게 됐다. 장난감의 세계에 머물던 이야기가 새로운 세계로의 여행으로 넓혀지게 나가게 된 것. 이것은 디즈니의 시리즈들이 기존 공고한 캐릭터를 활용하면서도 새로운 이야기로 변주해내는 방식이기도 하다.

 

<알라딘>과 <라이온킹>은 디즈니가 그간 애니메이션으로 해왔던 세계를 실사화하려는 그 야심이 드러나는 작품들이다. 워낙 애니메이션으로 잘 알려져 있는 작품인데다, 디즈니 특유의 뮤지컬 형식의 음악들이 가미한 방식은 뛰어난 CG 기술이 더해진 실사판을 더 실감나는 재미로 만들어주는 이유들이다. 익숙하지만 여전히 매력적인 스토리를 음악과 더불어 실사로 본다는 사실만으로도 관객들을 잡아끄는 요인이 되고 있다.

 

<스파이더맨>은 마블과 루카스 필름 그리고 20세기 폭스까지 인수함으로써 하나의 캐릭터 군단을 만들어낸 디즈니가 그려나갈 캐릭터를 기반한 콘텐츠 사업의 면면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어벤져스> 그 이후의 세계를 다시금 그려가며 스파이더맨을 세워 놓은 이 작품은, 마치 과거 아이언맨에서부터 비롯되어 거대한 <어벤져스>의 세계가 그려졌던 그 과정의 기시감을 느끼게 한다.

 

1927년 탄생한 미키 마우스의 성공으로 세워진 디즈니는 애니메이션으로 시작했지만, 캐릭터 비즈니스, 테마파크 비즈니스에 이어 실사 영화 제작에도 뛰어들었다. 게다가 끊임없는 인수합병을 통해 그 캐릭터 왕국은 점점 더 확장되었다. 또한 디즈니는 동영상 스트리밍 업체 훌루의 경영권을 확보함으로써 넷플릭스에 이어 애플, 아마존 등 글로벌 기업들이 뛰어들고 있는 OTT 시장에도 뛰어들었다. 오는 11월 출시를 앞두고 있는 ‘디즈니+’에 OTT 시장이 긴장하고 있는 이유다.

 

과연 디즈니는 영화관에서부터 OTT까지 장악하는 콘텐츠 공룡이 될 것인가. 지금 현재 극장가를 가득 채우고 있는 디즈니 영화들의 움직임은 그래서 영화의 다양성 측면이나 우리네 작은 영화들을 떠올려 보면 무감하게 바라보기가 어렵다. 디즈니 콘텐츠들로 가득 채워진 극장가의 풍경은 그만큼 어두운 그림자 속에 가려지는 무수한 콘텐츠들을 만들어낼 테니 말이다.(사진:영화'라이온킹')

‘기생충’, 공간 대비만으로도 빵빵 터지는 봉준호 감독의 디테일

 

정말 오랜만에 깔깔 웃었다. 첫 장면으로 등장하는 반지하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만으로도 웃음이 터졌다. 그것이 봉준호 감독의 칸느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이라는 어마어마한 성취를 한 작품이라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시작부터 이 영화가 너무 정곡을 콕 찔러서였다. 그 반지하에서 간만에 가족이 모여 맥주 한 잔을 하려 할 때 마침 취객이 나타나 토악질을 해대고 노상방뇨를 하려는 모습을 보며 기택(송강호)이 짜증을 확 내는 장면에서 터지는 웃음. <기생충>은 그런 영화였다. 무언가 비극적 상황의 꼬질꼬질함이 오히려 웃음으로 터져 나오는 블랙코미디.

 

봉준호 감독이 ‘봉테일’이라 불리는 게 허명이 아니라는 걸 느끼게 되는 대목은 이 영화가 담고 있는 공간, 경계, 침범, 파국 같은 것들이 공간과 빛 같은 시각적, 미술적 장치들만으로도 고개가 끄덕여지기 때문이다. 기택의 가족이 사는 반지하라는 공간은 그래서 자본의 양극화가 만들어낸 계급사회의 한 계급을 상징한다. 영화가 그 반지하 공간에서 바깥세상을 바라보는 장면에서 시작한다는 건 그 시점을 따라 우리 사회의 비극적이지만 우습게도 보이는 계급적 특성을 해부해 보이겠다는 의지처럼 읽힌다.

 

햇볕이 하나도 들어오지 않는 지하도 아니고 그렇다고 지상이라고 할 수도 없는 반지하라는 공간은 그 경계가 애매하다. 그래서 이 지점이 어떤 다른 계층으로 침범해 들어올 때 그건 ‘계급의 충돌’을 만들어낸다. 이것을 봉준호 감독은 바퀴벌레에 비유한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아 없는 것처럼 치부하며 살아가지만, 분명 저 지하에 존재하는 바퀴벌레가 문제를 만들어내는 건 그 경계를 넘어 지상으로 튀어나왔을 때다.

 

<기생충>은 이러한 평시에는 잘 보이지 않는 자본의 양극화가 어떤 선을 넘어갈 때 만들어내는 마찰음을 특유의 블랙코미디식 유머로 담아낸다. 기택이 사는 반지하에 마치 왕좌처럼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화장실 변기마저 웃음이 터지는 상징처럼 다가오고, 그 집과 비교되는 글로벌 IT기업 박사장의 대저택은 그 비교점만으로도 우리가 사는 세상을 표징하는 지적 웃음을 준다.

 

그 공간들을 우 몰려 올라갔다가 우 몰려 내려오는 인물들의 모습은, 마치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위 아래로 넘나드는 사회구조 속으로의 모험담처럼 보이게도 만든다. 냄새처럼 분명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경계를 침범해 들어온 흔적이 주는 긴장감이나, 물을 뿌리면 숨어있던 바퀴벌레들이 튀어나오듯, 폭우 속에서 인물들이 도망치는 장면은 절박하고 비극적이지만 이상하게도 웃음이 터진다. 높은 지대에 있는 대저택에 사는 사람들에게 내리는 비는 아이가 텐트를 치고 놀 정도로 낭만이 되기도 하지만, 그 시간에 낮은 지대에 사는 이들은 물난리를 겪는 곳. 그곳이 우리가 사는 사회라는 게 하나의 살아있는 블랙코미디처럼 떠오르기 때문이다.

 

<기생충>은 ‘계획’이란 걸 세워봐야 그 구조 때문에(누구는 높은 곳에 살고 누구는 낮은 곳에 사는) 폭우 하나에도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는 그 양극화된 세상에서 ‘무계획’이 최선의 계획이 된 가족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기생’을 선택한다. 저들 옆에 달라붙어 그들이 던져주는 무언가를 받아먹거나, 혹은 몰래 훔쳐 먹는 삶. 이토록 비극적인 현실을 이토록 웃음 터지게 만들 수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역시 봉테일이라는 별명에 걸맞는 거장의 여유로운 손길이 느껴지는 작품이다.(사진:영화'기생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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