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가 너인게 왜 약점이야?” - 이언희 ‘대도시의 사랑법’

대도시의 사랑법

세상이 뭐라 하든 생각대로 밀고 나가고 행동하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 재희(김고은)와 성소수자라는 비밀을 숨긴 채 세상과 거리를 두고 살아가는 흥수(노상현). 이언희 감독의 ‘대도시의 사랑법’은 등장하는 남녀의 캐릭터만으로도 이들의 관계가 어떻게 엮어져갈 것인가에 대한 궁금증을 만든다. 어느 날 우연히 흥수의 비밀을 재희가 알게 되면서 두 사람의 관계가 시작된다. 흥수가 “약점이라도 잡은 것 같냐?”고 자기보호 본능에 가까운 화를 내자, 재희는 흥수에게 말한다. “너가 너인게 왜 약점이야?”

 

결코 평범하지 않은 이 청춘들은 세상의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방법을 찾아낸다. 그건 두 사람이 사귀는 사이인 척 하는 것. 이로써 흥수는 성소수자가 아니냐는 주변의 시선으로부터 벗어나고, 재희 역시 이 남자 저 남자 밝히고 다닌다는 소문으로부터 벗어난다. 그들은 동거하지만, 각자의 취향대로 누군가를 만나 사랑하고 아파한다. 남녀 간의 사랑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일종의 동지애 같은 게 적어도 두 사람 사이에서는 피어난다. 세상의 편견을 벗어난 두 사람만의 자유지대랄까. 물론 그들 역시 사회 초년생이 되면서 취업과 결혼 같은 세상이 요구하는 틀 속으로 들어가며 평범해지지만 그 때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말한다. 진짜 네가 되어 살라고.

 

부커상과 국제 더블린 문학상 후보에 오른 박상영 작가의 동명 소설집에 실린 ‘재희’를 원작으로 하는 이 작품은 보다시피 퀴어 영화다. 하지만 그럼에도 누구나 공감할 수 있게 된 건, 세상이 요구하는 무수한 ‘다움’이 주는 상처가 성소수자들만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실에 치여 나다움을 잊고 살게 된 이들에게 잠시나마 나답던 청춘의 한 때를 떠올리게 하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되는 작품이다.(글:동아일보, 사진: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

'옛글들 > 이주의 영화 대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정상적인 보통  (0) 2024.11.03
따뜻한 국밥 한 그릇  (0) 2024.10.27
극한창업  (0) 2024.10.13
사적 제재와 진짜 정의  (0) 2024.10.08
가을의 문턱  (0) 2024.09.30

“지금까지 이런 맛은 없었다.” - 이병헌 ‘극한직업’

극한직업

실적이 바닥이라 해체 위기에 처한 마약반이 국제 마약범죄조직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잠복수사에 들어간다. 이 상황만 보면 한 편의 형사물이 떠오르지만 이병헌 감독의 ‘극한직업’은 여기서 갑자기 코미디로 방향을 튼다. 24시간 감시를 위해 범죄조직 아지트 앞에 있는 치킨집을 위장창업했는데, 이 치킨집이 대박이 나면서다. “지금까지 이런 맛은 없었다. 이것은 갈비인가. 통닭인가? 네. 수원 왕갈비 통닭입니다.” 전화로 손님응대하는 고반장의 목소리는 점점 치킨집 사장처럼 변해가고, 갈비와 통닭의 중간쯤 되는 왕갈비 통닭에 대한 입소문이 퍼지면서 치킨집은 순식간에 대박 맛집이 된다. 

 

이 영화의 엉뚱하고도 기막힌 반전의 이야기는 고스란히 현실이 된다. 뻔한 범죄스릴러나 형사물이라 생각했던 관객들이 빵빵 터지는 코미디에 호응하면서 입소문이 터지고 무려 1600만 관객을 돌파하는 역대급 대박 흥행을 터트린 것. 그런데 이 흥행에는 잘 짜여진 코미디 액션이 만들어낸 유쾌 통쾌한 재미뿐만 아니라, 갈수록 힘들어지는 창업 현실에 대한 갈증이 작용한 면도 있다. 조기퇴직에 너도 나도 쉽게 할 수 있을 거라 여겨지는 창업에 뛰어들었지만 폐업하는 자영업자들도 급증했다. 그러니 잠시라도 현실을 잊고 마음껏 웃고 싶은 마음이 왜 없을까. 게다가 가장 많이 창업한다는 치킨집 이야기를 비틀어낸 코미디이니 풍자와 판타지가 더해지지 않았을까.

 

국세청에 따르면 지난해 폐업 신고를 한 사업자 수가 100만명에 육박했다고 한다. 팬데믹을 빚으로 버텨냈지만 고금리, 고물가, 고임금에 쓰러져간 것. 현재의 자영업자들이 겪는 고충은 ‘극한창업’에 가까울 듯 싶다. 언제쯤 나아질까. ‘극한직업’ 속 이야기가 현실이 되진 못해도 희망이라도 될 수 있는 그런 날은 요원한걸까.(글:동아일보, 사진:영화'극한직업')

'옛글들 > 이주의 영화 대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따뜻한 국밥 한 그릇  (0) 2024.10.27
편견과 나다움  (0) 2024.10.21
사적 제재와 진짜 정의  (0) 2024.10.08
가을의 문턱  (0) 2024.09.30
든든한 내 편  (0) 2024.09.16

“아이고 힘들어.” 류승완 ‘베테랑2’

베테랑2

“내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이 명대사로 기억되는 ‘베테랑’이 시즌2로 돌아왔다. 그 대사에 담긴 뉘앙스처럼 서도철(황정민) 형사는 서민들을 대변한다. 가난해도 지킬 건 지키며 살려는 서민들의 마음이 그것이다. 그래서 천인공노할 죄를 짓고도 솜방망이 처벌을 받고 풀려나는 자들 앞에서 서도철은 분노한다. ‘베테랑’ 시즌1은 막강한 돈과 권력으로 법망을 빠져나가는 재벌3세 조태오(유아인)를 끈질기게 추적해 법의 심판을 받게 하는 이야기로 서민들의 답답한 속을 풀어줬다. 그런데 시즌2는 이야기의 결이 조금 다르다. 사회적 공분을 불러 일으키고도 법망을 빠져나가며 제대로된 처벌을 받지 않은 범죄자들에게 사적 제재를 가하는 해치(정해인)라는 연쇄살인범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형사가 아닌 보통 서민들의 입장에서 서도철의 마음은 그 해치와 그리 달라보이지 않는다. 특히 말보다 주먹이 앞서는 형사가 아닌가. 

 

‘사적 제재’는 어쩌다 보니 우리 사회의 새로운 정서로 떠올랐다. 법 정의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고 있다는 민심이 불러일으킨 공분은 ‘모범택시’부터 ‘비질란테’, ‘국민사형투표’, ‘노웨이 아웃’ 등등 다양한 사적 제재를 소재로하는 콘텐츠들을 양산했다. 그리고 이 사적 제재는 실제로 범죄자의 사적 정보를 마음대로 공개하는 방식으로 현실에서도 벌어지는 일이 됐다. 하지만 정의가 어찌 간단할까. “살인은 살인이야”라며 “사람 죽이는데 좋은 살인 있고 나쁜 살인 있냐”고 묻는 서도철은 해치의 엇나간 정의를 바로잡는다. 만신창이가 되어 사건을 마무리한 후 서도철이 넋두리처럼 하는 “아이고 힘들어”라는 대사는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분노와 처단 같은 단순한 선택만으로 얘기될 수 없어 그 과정이 결코 쉽지만은 않은 것. 그것이 진짜 정의가 아닐까.(글:동아일보, 사진:영화 '베테랑2')

'옛글들 > 이주의 영화 대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편견과 나다움  (0) 2024.10.21
극한창업  (0) 2024.10.13
가을의 문턱  (0) 2024.09.30
든든한 내 편  (0) 2024.09.16
장애와 사회의 책임  (0) 2024.09.10

“아저씨는 왜 나만 보면 웃어요?” 허진호 ‘8월의 크리스마스’

8월의 크리스마스

“아저씨. 아저씨는 왜 나만 보면 웃어요?” 허진호 감독의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다림(심은하)은 정원(한석규)에게 묻는다. 주차단속요원으로 단속차량 사진을 현상하러 자주 초원사진관을 찾아오면서 다림은 그 곳을 운영하는 정원에게 각별한 감정을 갖게 된다. 정원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자꾸만 웃음이 난다. 무표정했던 삶에 피어난 웃음. 하지만 그는 그럴수록 괴로워진다. 시한부 판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다림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정원은 그 시한부의 삶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건 마치 어려서 모두가 가버린 텅 빈 운동장에 혼자 남아있을 때 느꼈던 감정 같은 거라고. 어머니도 아버지도 그리고 자신도 언젠가는 그렇게 사라져 버리는 거라고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의 삶 속으로 불쑥 들어온 다림에 대한 감정이 생겨나면서 정원은 흔들린다. 술에 취해 친구에게 농담처럼 자신이 곧 죽는다고 말하기도 하고, 경찰서에서 조용히 있으라는 말에 왜 자신이 조용히 있어야 하냐고 절규한다. 삶에 대한 기대감은 희망고문처럼 그를 짓누른다. 

 

죽음 앞의 삶. 우리는 모두 시한부다. 그러니 사라져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 자연스러운 일이 힘겨워지는 건 사랑하게 된 존재들과의 이별 때문이 아닐까. 정원은 끝내 그 이별을 받아들인다.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날 수 있게 해준 다림에게 고마움을 갖고 조용히 혼자 떠난다. 삶이 아름다운 건 언젠가 사라져가기 때문일 게다. 웃을 일 없던 정원이 다림을 보며 자꾸만 웃었던 것도. 또 하나 둘 떨어져 수북히 쌓여갈 낙엽들이 벌써부터 우리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도. 아름답도록 슬픈 멜로 영화 한편이 그리워지는 가을의 문턱이다. 9월의 끝자락에서도 푹푹 찌던 여름이 어느새 지나고 있다.(글:동아일보, 사진: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옛글들 > 이주의 영화 대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극한창업  (0) 2024.10.13
사적 제재와 진짜 정의  (0) 2024.10.08
든든한 내 편  (0) 2024.09.16
장애와 사회의 책임  (0) 2024.09.10
사람의 가치  (0) 2024.09.02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