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람보4’, 람보는 여전히 유효한가
 
‘람보’는 겉으로 보기엔 미국이 결국 패퇴할 수밖에 없었던 베트남전의 또 다른 트라우마를 다루는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영화의 재미는 그러한 사회적 이슈보다 근육질의 람보 1인이 수백 명에 달하는 적수들과 싸워 하나씩 물리치는 전형적인 액션 속에 있기 때문이다. 즉 베트남전에서 패배했지만 미국을 상징하는 람보는 여전히 건재하고 오히려 더 강해졌다는 메시지가 그 속에는 들어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여기서 람보가 다수의 적들과 싸우는 전술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지형지물을 이용해 치고 빠지는 저 베트남의 정글에서 그들이 혹독하게 경험한 그 게릴라 전술. 이 영웅이 보여주는 액션의 재미는 바로 이 게릴라 전술에서 나오는데 이것은 그 때까지의 전형적인 미국 액션영웅의 면모와는 다르다. 미국식의 액션영웅이란 저 ‘코만도’의 아놀드처럼 잔뜩 챙겨간 무기를 신나게 쏘아대는 액션을 선보여왔다.

하지만 그것은 베트남이라는 정글 속에서는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베트남의 정글이란 몸집이 작은 베트남인들에게는 요새처럼 굳건한 방패막이 되어주지만 몸집 큰 미국인들에게는 한 걸음 내딛기 어렵게 만드는 족쇄가 된다. 미국의 베트남 전쟁의 패인은 전력과 화기 때문이 아니고 바로 그 베트남의 자연환경 때문이다. 종종 전쟁이 생태주의와 맞서게 되는 것은 베트남전에서 승리하기 위해 미국이 나무를 고사시키기 위해 뿌린 고엽제와, 밀림을 순식간에 불태워버리는 레이팜탄으로 상징화된다. 따라서 베트남전을 소재로 하는 영화 속에서 정글에 대한 미국의 공포는 ‘프레데터’처럼 아무리 화기를 쏟아 부어도 눈에조차 띄지 않는 적으로 그려지곤 한다.

이렇게 보면 람보가 보여주는 게릴라 전술 역시 미국이 가진 베트남에 대한 열등감을 거꾸로 보여주는 것이 아닐 수 없다. 그 덩치가 크면 클수록, 또 힘이 좋으면 좋을수록 그것은 거꾸로 그 열등감의 크기 또한 크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럼에도 ‘람보’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어떻게든 정리되어야할 베트남전에 대한 정신적 트라우마를 ‘람보’가 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베트남의 힘에 대한 인정이고 그를 통해 더 힘을 얻게 되었다는 람보 신화의 창출이다. 이렇게 미국의 한 시골마을에서 힘을 얻은 람보는 ‘람보2’에 와서 직접 베트남으로 날아가고, ‘람보3’에서는 아프카니스탄으로 달려간다. 미국과 분쟁하는 지역의 해결사가 되어 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람보4’는 어떨까. 람보는 왜 노익장을 이끌고 미얀마의 분쟁지역으로 달려갔을까. 미국은 한때 마약소탕 작전의 일환으로 미얀마 정부를 지원한 일을 빼고는 국제적인 비난 이상으로 미얀마와 대립한 적이 없다. 전쟁조차 치르지 않았으니 어떤 트라우마도 없는 그들이 왜 람보를 그 곳으로 보냈을까. 혹 미얀마의 정글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까. 바로 이 부분에서 ‘람보4’가 기존의 람보 시리즈와는 맥을 달리하는 영화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람보4’에는 람보 특유의 정글 게릴라 액션이 등장하지 않는다. 물론 인질 구출작전에서 정글을 달려나가는 람보의 모습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주화력은 과거 미국 액션 히어로들이 들고 있던 기관포다. 따라서 ‘람보4’의 액션 장면에서는 유독 총알과 폭탄에 맞아 파편처럼 날아가는 신체 절단 장면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단순 과격한 액션은 전쟁의 끔찍함을 보여주긴 하지만 아쉽게도 람보 시리즈 본연의 맛을 상당부분 상쇄시켜버린다.

‘람보4’는 여전히 미국이 어떤 액션 히어로를 희구한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더 이상 람보는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 즉 저 수많은 이라크전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들을 통해 드러나듯이 전쟁은 더 이상 영웅을 탄생시키는 낭만적인 공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첫 번째 피(First blood)로 시작했던 ‘람보’가 이제 마지막 피(Last blood)로 람보를 고향으로 귀환시키는 길, 한때 영웅이었지만 이제는 나이든 람보의 발길이 무겁고 쓸쓸한 것은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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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근이로 보는 연출의 힘

캐릭터 전성시대, 이제는 견공 상근이 마저 떴다. ‘상근이의 일기’, ‘상근이 미니홈피’는 ‘1박2일’ 제 7의 멤버로 활약하고 있는 상근이의 인기를 말해주는 대목. 회당 40만 원의 고액(?) 출연료를 받는 상근이는 ‘아현동 마님’에 겹치기 출연을 하는 등 연예인 못지 않은 대우를 받고 있다고 한다. 게다가 안티마저 없으니 캐릭터 전성시대에 이만한 캐릭터가 있을까.

흔히들 리얼 버라이어티쇼의 관건은 캐릭터에 있다고 한다. ‘무한도전’이 그랬던 것처럼 ‘1박2일’이 이처럼 주목받는 이유 중 가장 큰 것은 은초딩, 허당 같은 캐릭터가 시청자들에게 어필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구축된 캐릭터는 마치 드라마가 그러한 것처럼 리얼 버라이어티쇼의 상황과 사건들을 용이하게 만들어내는 장점이 있다. 웃기지 않은 행동도 과거 그 캐릭터가 구축되게 만든 어떤 사건과 연관되면 웃음을 주고 그것은 또한 캐릭터를 더욱 강화시킨다. 이것이 리얼 버라이어티쇼가 캐릭터에 집중하게 되는 이유다.

그런데 사람이 아닌 견공인 상근이의 캐릭터는 어떻게 구축된 것일까. 물론 견공에게도 어떤 성격 같은 것이 있겠지만 그것을 쇼를 통해 캐릭터로까지 발전시킨 것이 오로지 상근이 혼자만의 몫일까. 그렇지 않다. 그것은 사실 연출력의 힘이다. 갑자기 출연진들을 향해 달려드는 상근이의 영상 위에 강렬한 록기타 반주를 띄우자, 순간 상근이는 락커가 됐고, 은지원의 발부리에 오줌을 누고, 슬레이트를 겁내는 상근이와 은지원에게 달려드는 상근이의 영상을 절묘하게 편집하자 상근이는 은초딩과 앙숙이 되었다. 상근이의 캐릭터 이미지는 이처럼 연출의 힘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것은 다른 출연진에게도 어느 정도는 해당되는 것이다. 이승기에게 ‘허당’이라는 캐릭터 닉네임이 붙은 것은 네티즌들에 의해 자생적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다. 김C가 어느 날 내가 너에게 호를 주겠다며 ‘허당’이라 한 것이 그 시작이다. 이것은 다른 출연자들도 마찬가지. 은초딩은 ‘울릉도 독도를 가다 편’에서 은지원이 유치한 말을 한 것에 대해 노홍철이 ‘초딩, 초딩’이라 한 것에서 비롯됐다. 그리고 이후 이승기와 은지원이 등장할 때, 자막은 그들을 허당과 은초딩으로 설명하면서 캐릭터는 구축되었다.

캐릭터 구축의 한 방법으로 제시되는 것은 경쟁구도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라면에 우유를 넣어먹는 에피소드’이다. “라면에 우유를 타 먹으면 다음날 붓지 않는다”는 그 이야기를 꺼낸 것은 역시 캐릭터에 걸맞는 강호동이었고, 그러자 그의 완력에도 아랑곳없는 은초딩이 “그럴 거면 안 먹고 말지”하고 되받는다. 그런데 여기에 허당 선생이 “라면 다 먹고 우유 먹으면 되잖아요”하고 쐐기를 박는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대화가 오고갈 때 함께 제시되는 자막이다. 거기에는 ‘막상막하 허당 승기와 은초딩’이라 적히면서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상황을 캐릭터들간의 각축장으로 바꿔 놓는다.

상근이와 은초딩의 대결구도는 저 허당과 은초딩의 대결구도와 유사한 양상을 띄면서 상근이 캐릭터를 구축해나가고 있다. 그러니 캐릭터 전성시대가 도래한 이유에는 출연자들의 노력 이면에 연출자들의 탁월한 연출력이 전제되어 있다고 봐야 한다. 따라서 ‘무한도전’과 ‘1박2일’같은 ‘캐릭터라이즈드 쇼(Characterized Show)’의 성공한 캐릭터들 뒤에는 김태호 PD나 이명한 PD 같은 제 7, 제 8의 캐릭터가 존재하고 있는 셈이다. 박명수보다 더 악마 같은 김태호 PD라는 말이나, 역시 쫀쫀하게 출연진들을 괴롭히는 것으로 악명 높은 이명한 PD라는 캐릭터는 그렇게 부각되어온 것이다. 캐릭터를 세우는 리얼 버라이어티쇼에서 스타PD가 탄생하는 것 또한 그 때문이 아닐까. 리얼 버라이어티쇼의 진짜 힘은 바로 그 연출력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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퓨전사극시대, 작가로 즐기는 사극

최근 드라마 중 사극만큼 다양성을 확보하고 있는 건 없을 것이다. 이것은 과거 정사 위주의 정통사극의 틀에서 벗어나면서 가능해진 일. 이른바 퓨전사극은 역사적 사실, 혹은 역사적 텍스트에 상상력을 덧대, 사극의 외연을 넓히는 역할을 했다. 이제 사극은 어떤 역사적 시점을 다룰 것인가 보다 어떻게 다룰 것인가가 더 중요해졌다. 사극의 작가주의가 거론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제 사극은 작가들의 상상력과 감독의 연출력에 의해 그 색채를 달리하게 되었다.

이병훈표 성장 사극, ‘이산’
월화의 밤을 평정한 MBC 사극 ‘이산’은 이병훈표 사극의 정석을 보여주고 있다. 매 2회 정도 분량으로 주어지는 미션과 해결을 통한 캐릭터의 성장을 그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전형적인 선악구도가 극명한 대결구도를 이루고 있다는 점도 이병훈 PD의 색채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정조라는 왕을 주인공으로 세운 점이 과거 주로 평민이었던 주인공과 다른 점이지만, 차라리 평민으로 살아가는 게 나을 법 싶은 정조의 상황을 보면 그다지 달라진 것도 아니다. 절대적인 지지자가 되는 영조 캐릭터 또한 ‘대장금’의 왕과 오버랩되며, 묵묵히 뒤에서 주인공을 돕는 성송연(한지민) 역시, ‘대장금’의 민정호(지진희)를 빼닮았다.

이렇게 비슷한 구조에 비슷한 캐릭터들이 등장하지만 여전히 힘을 발하는 것은 이병훈표 성장 사극의 틀이 내포하고 있는 저력을 말해주는 것이다. 과거의 역사적 시점을 다루지만 거기에는 여전히 현대인들의 욕망들이 다양하게 투영되어 있다. 성군을 바라는 백성들의 마음이나, 신분과 남녀 차별을 뛰어넘는 성공담은 지금 시대의 환타지와 맥을 같이 하기 때문이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제 왕으로 서게 될 정조 이산(이서진)이 나갈 방향성이다. 지금까지 이병훈표 성장 사극 속의 주인공들은 그 꼭대기에 서는 순간 미션 완료하며 끝났지만 ‘이산’은 앞으로도 한참 더 길을 가야하기 때문이다.

홍자매표 패러디 사극, ‘쾌도 홍길동’
수목의 밤을 웃게 만드는 홍미란, 홍정은 작가의 ‘쾌도 홍길동’은 패러디 사극이다. 그간 여러 작품들을 통해 다양한 패러디를 통한 웃음을 선사했던 홍자매는 ‘쾌도 홍길동’에 와서는 고전인 ‘홍길동’ 자체를 패러디 한다. 사극이라 하기엔 역사적 시공간이 부재한 이 드라마는 따라서 ‘홍길동’이란 고전의 현대적 해석으로 볼 수 있다. 사극 속에서 웨이브춤과 골프 장면은 물론이고 주인공들의 펑키한 패션 스타일을 볼 수 있는 것은 이 드라마가 사극 자체를 패러디해 현재를 풍자하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는 무협지의 틀과 만화적 상상력이 홍길동이란 텍스트 위에서 작가들의 상상력과 만난다. 작가에 의해 새롭게 재해석된 등장인물들은 저 마다 현대인들의 그것을 표상하는 기성세대의 가치관(운명론이나 태생적 결정론 같은)과 부딪치면서 그 전복을 꿈꾼다. 나라를 훔친 도적과 맞서 그들의 재물을 훔치는 도적, 홍길동은 이 시대의 가치관들과 조우하면서 새로운 수퍼히어로로 부각된다. 홍자매의 발칙한 상상력이 사극에서도 고스란히 발현되는 순간이다.

윤선주표 본격 정치사극, ‘대왕 세종’
주말 밤을 장악한 ‘대왕 세종’은 본격 정치사극의 가능성을 엿보게 만든다. 그 원동력은 다름 아닌 윤선주라는 작가에서 나온다. ‘불멸의 이순신’으로 주목을 받고 ‘황진이’로 자기 색깔을 굳혀온 윤선주는 ‘대왕 세종’에서 본격적인 정치의 세계로 뛰어든다. 윤선주 작가가 써온 작품의 특징은 그 주인공의 행보에서 일관되게 발견할 수 있다. 작가는 신분이나 서열로 인해 내적인 한계 상황을 가진 주인공이 그 열등감과 차별을 이기고 가장 높은 자리에 서는 과정을 그린다.

이순신은 우리가 위인전에서 보아왔던 완벽한 인물로 등장하지 않는다. 그는 깊은 열등감을 갖고 있는 인물이며 그럼에도 그것을 뛰어넘어 불멸로 달려가는 실전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국어 교과서에 등장하는 시조 몇 편으로 기억되는 황진이 역시 드라마 속으로 들어와서는 끝없는 자기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여성으로 그려진다. 이것은 ‘대왕 세종’에서도 마찬가지다. 그저 한글 창제로서 각인된 세종대왕은 이 작품을 통해 치열한 정치세계 속에서 생존해나가는 현실 정치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작가의 이러한 주인공의 내적 갈등에 대한 탐구는 역사적 사실에만 박제되어 있던 위인을 생생하게 살아있는 인물로 재탄생시킨다. 윤선주 작가의 이 같은 인물 탐구를 통한 치밀한 심리묘사는 ‘대왕 세종’이 그리고 있는 다양한 인물들의 정치적 입장을 다각적으로 표현하면서 거기서 발생하는 화학반응의 재미를 만들어낸다. 때로는 그 정치적 입장이 너무나 다양하고 대사의 중의적인 의미들이 너무 깊어 이해가 쉽지 않은 단점이 있지만, 그래도 그 어려움이 진짜 복잡한 정치의 세계라는 점은 누구나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 혹은 연출자들의 역량이 더 중요해진 퓨전사극 시대에, 물론 역사왜곡의 문제는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하지만 사극은 기본적으로 역사 자체가 아니라 창작의 산물인 드라마라는 점에서 이러한 작가의 탄생은 환영받을 만한 일이다. 오히려 ‘사극은 역사 자체’라는 사고방식을 뒤집어 ‘사극은 드라마’일 뿐이라는 점을 명백히 한 후, 사극의 좀더 자유로운 실험이 이루어지고, 한 편으로는 그로 인해 환기된 진짜 역사에 대한 논의들이 병렬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작가가 사극을 말해주는 사극의 작가주의 시대는 이미 도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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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뿔났다’, 그녀들을 뿔나게 한 것

‘엄마가 뿔났다’의 엄마 김한자(김혜자)는 자식들 때문에 마음이 좋지 않다. 세탁소 일을 하고 있는 아들 영일(김정현)의 아이를 가졌다며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친 미연(김나운)만으로도 골치가 아픈데, 막내 영미(이유리)는 밥벌이도 못하는 남자(실제론 재벌2세이지만)와 결혼을 하겠단다. “내 인생이 정말 마음에 안 들어요”라고 말하는 그녀는 사실상 대부분의 자식 가진 엄마의 마음을 제대로 잡아낸다. 세상에 제 맘대로 되는 자식 가진 부모가 몇이나 있을까.

그래서 그녀는 늘 ‘안해요! 못해요!’하고 말하면서 화를 내거나 때론 눈물을 보인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걱정되어 찾아온 자식들 앞에서 그녀는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며 언제 그랬냐싶게 금세 웃어 보인다. 이 조울증에 가까운 태도변화는 갑작스럽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우리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것은 그녀의 웃는 얼굴 뒤에 숨겨져 있는 세상 엄마들 모두가 가지고 있을 아픔 같은 것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편 나일석(백일섭)은 늘 이렇게 말한다. “결국엔 할 거면서 당신은 꼭 그러더라.” 속으로 뿔나면서 겉으로는 웃는 그 엄마의 마음은 내레이션 속에서나 흘러나올 뿐이다. 남자들이건, 자식들이건 일단 저질러놓고는 “사랑해서 미안혀”라고 말하면 그뿐인 존재들 아닌가. 그래서 뿔난 엄마가 어느새 웃는 낯으로 대할 때 그들은 “엄마 벌써 풀렸구나”하며 으레 그래왔고 그래야 할 것처럼 말하곤 한다.

그렇게 뿔난 그녀를 살 수 있게 해주는 것은 관성적인 살림의 손길 때문이다. 그녀는 늘 손이 바쁘다. 흔히 엄마들이 그러하듯이 입으로는 연실 자식 걱정과 뿔난 심사를 수다로 뽑아내면서도 손은 쉴 틈이 없다. 같은 날 태어난 남편과 시누이의 생일 상을 차리면서, 아이까지 데리고 들어온 며느리를 위해 미역국을 끓이면서, 맏딸 영수(신은경)의 오피스텔에 반찬거리를 가져가면서, 갑자기 찾아온 막내 영미의 남자친구 정현(기태영)을 위해 저녁거리로 뭘 준비할까 고민하면서, 아기 목욕을 시키고 콩나물을 다듬고, 빨래를 끓이면서 나오는 그녀의 수다를 듣다보면 말과 행동이 서로 상반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안한다. 못한다 하면서도 몸은 늘 그녀를 뿔나게 하는 가족들을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 그것이 가족을 위해 살림하는 엄마들의 마음이다.

그런데 이 드라마 속에서 뿔난 엄마는 김한자뿐만이 아니다. 이제 앞으로 결혼문제로 그녀와 부딪치게될 정현의 엄마, 고은아(장미희)도 제 맘대로 되지 않는 아들 때문에 잔뜩 뿔이 나 있다. 격에 맞지 않는 아들의 여자친구도 여자친구지만, 한 번도 그녀의 말을 어기지 않던 아들이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는다는 배신감이 더 클 터이다. 그녀는 “드라마에 나오는 편견에 가득 찬 교양 없는 시어머니 역할”은 하기 싫다 말하면서도 결국은 자식 욕심 앞에 그 역할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자식 앞의 부모마음이야 김한자나 고은아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문제는 그 뿔난 심사를 어떻게 극복하느냐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드라마는 두 뿔난 엄마의 서로 다른 문제 해결 방식을 드러낸다. 그것은 그녀들의 상반된 일상과 관련이 있다. 드라마에서 그려지는 고은아는 살림과는 거리가 먼 여자다. 그 집안의 살림은 ‘미세스 문’이 해주고 있는 상황에 그녀는 교양 있는 포즈로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거나 대화를 나누는 것이 일상의 전부다.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해왔던 그녀는 ‘희생’이라는 단어가 늘 떠오르는 엄마라는 존재보다는 군림하고 시키는 사모님이라는 존재로 그려진다. 누구에게 양보할 수 없는 그녀가 하는 문제 해결 방식이란 마음에 들지 않는 아들의 여자를 불러, 남편 말대로, ‘웃는 얼굴로 포를 뜨는’ 일이다.

반면 김한자는 그 뿔난 심사의 위안을 살림 그 속에서 찾는다. “속상해서 잠이 오지 않는다”며 잠자리에서 이불을 들고 나와 펴는 부엌은 그녀에게 삶의 힘을 다시 되찾게 해주는 공간이다. 부족하고 마음에 안 들지만 ‘거둬 먹이는’ 엄마의 마음 그 속에 자신을 살 수 있게 하는 힘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긋지긋한 노동이 분명하지만 관성이 되어버린 살림의 손길은 때론 자신을 살 수 있게 해주는 힘이 되어주기도 한다.

‘엄마가 뿔났다’가 그려내는 두 명의 뿔난 엄마. 그 엄마들의 뿔은 모두 제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자식들로 인해 비롯된 것이지만 서로 다르다. 김한자의 뿔은 안으로 자라나 자신을 찌르는 반면, 고은아의 뿔은 밖으로 자라나 그 누군가를 찌른다. 고은아가 뿔난 심사를 토로할 때 옆에서 그걸 받아주는 것이 구관조 하나인 반면, 김한자의 옆에는 늘 가족들이 있는 건 그 때문이다.

“니가 최고여!”라고 말하면서 울면 한 그릇이라도 따뜻하게 사주는 시아버지 나충복(이순재), 혹여나 상처가 깊을까봐 붕어빵이라도 사서 아내를 찾는 남편, 든든한 말벗이 되어주는 시누이 나이석(강부자), 엄마의 가시 돋친 말에도 그저 뽀로통한 얼굴만 하고 넘기는 맏딸 영수, 그리고 엄마의 마음을 풀어줄려고 분위기를 맞추는 예쁜 딸, 영미가 있는 것은 바로 그런 엄마의 뿔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마음은 이 드라마를 보는 엄마란 존재를 가진 모든 이들의 마음이기도 하다.

주부들의 살림, 태안을 살림
말실수 가족
지수가 화영을 이해하는 까닭
‘내 남자의 여자’, 그녀들의 부엌
이 시대 주부, 지수의 사랑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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