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브리그’, 남궁민이 보여준 약자의 위치에서의 당당함

 

“제가 나가고 나서도 또 다른 부당함이 있을 때 여러분이 약자의 위치에서도 당당히 맞서길 바랍니다. 손에 쥔 걸 내려놓고 싸워야 될 수도 있습니다. 우승까지 시키고 나가는 모습이라면 더욱 좋았겠지만 저희 쪽 선수가 돈에 팔려가도 아무렇지도 않은 망가진 팀을 만들지 않은 것에 만족하려고 합니다. 최소한 문제가 있으면 그 문제를 지적할 수 있는 그런 팀 말이죠.”

 

SBS 금토드라마 <스토브리그>에서 백승수(남궁민) 단장은 자신의 임기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밝히며 그렇게 말했다. 이 말은 <스토브리그>가 백승수라는 인물을 통해 무슨 이야기를 하려 했는가가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만년 꼴찌팀이었던 드림즈에 새로이 부임한 백승수가 해온 일들은 늘 우승을 향한 것들이라 이야기됐지만 사실 알고 보면 비정상적으로 운영되던 팀을 정상화시키려는 노력이었다.

 

비정상의 정상화. 여기서 비정상은 팀을 애초부터 키울 의지조차 보이지 않던 재송그룹이 해온 일련의 부당한 조치들이다. 물론 여기에는 드림즈 내부의 잘못된 관행과 부패도 있었다. 스카우트를 둘러싸고 금품이 오가는 문제도 있었고, 코치진들 사이에 갈등과 연봉 협상을 두고 벌어진 선수들과의 문제들도 있었다. 하지만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재송그룹의 갑질에 가까운 부당행위였다. 팀을 해체시키려는 의도로 전지훈련으로 해외는커녕 제주도도 못 가게 만드는 식의 모기업의 갑질이 그것이다.

 

물론 드림즈를 대놓고 해체시키지 못한 건 재송그룹이 지역주민들의 눈치를 보기 때문이었지만, 후반부에 이르러 재송그룹은 이제 그럴 필요조차 없어졌다. 강성그룹과 빅딜을 통해 쇼핑사업을 접게 되면서 더 이상 지역민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진 것. 권경민(오정세) 사장은 어렵게 데려온 강두기(하도권) 선수를 타이탄즈에 이면계약으로 헐값에 트레이드시키고 드림즈 해체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가까스로 이면계약서를 찾아내 언론에 공개하는 내부고발을 함으로써 강두기 선수의 트레이드를 무산시켰지만 이제 백승수는 드림즈를 해체하려는 권경민에 맞서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여기서 그는 꼭 드림즈의 모기업이 재송기업이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한다. 다른 모기업을 찾겠다는 것이다.

 

“권경민 사장은 재송그룹의 의지대로 드림즈를 해체하기로 했습니다. 우리 지역을 기반으로 한 쇼핑사업을 중공업회사로 모두 넘기기로 하면서 더 이상 우리 지역민들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진 거죠. 재송그룹이 우리를 버리기로 한 이상 우리도 결정이 필요합니다. 드림즈 역사에서 투자 의지도 예의도 없던 재송그룹을 이제는 우리도 지워버려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이 제멋대로 농단해버리는 현실 속에서 백승수 단장의 리더십이 빛난 건 그 잘못된 시스템을 정상화하고 저들의 부당한 행위에 묵과하지 않고 목소리를 낸 것이다. 그는 일찍이 권경민에게 “말 잘 듣는다고 달라진 건 하나도 없다”고 말한 바 있다. 결국 부당한 것들을 부당하다 말하며 나설 때만이 그저 당하지 않게 되는 길이고 나아가 그 팀 자체가 망가진 팀이 되지 않는 길이라는 걸 백승수는 보여준 것이다.

 

사실 우리는 더 이상 대단한 성공이나 꿈을 이루려 하진 않는다. 다만 적어도 약자라는 이유로 부당한 일을 당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며, 부정한 일들이 자행되는 걸 막고 싶은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약자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절대 굽히지 않고 당당하게 제 목소리를 내고, 나아가 이제 그 갑을 을의 위치에서 바꾸겠다 선언하는 백승수의 리더십에 깊은 공감대를 느끼게 된다. 이것이 <스토브리그>가 프로야구를 소재로 가져왔지만 백승수라는 인물을 통해 궁극적으로 하려는 이야기였고 우리가 그 행보에 응원의 마음을 가졌던 이유였다.(사진:SBS)

‘놀면 뭐하니’, 1인 미디어 시대의 또 다른 ‘무한도전’

 

유재석이 말 많다고 방송 중 컷을 당했다? MBC 예능 <놀면 뭐하니?>에서 EBS를 처음 방문했다가 뜬금없이 <최고의 요리비결>에 셰프(?)로 출연하게 된 유재석은 방송 중 요리는 않고 토크를 길게 이어가다 결국 ‘끊으라’는 제작진의 말을 들었다. 그 누구보다 토크에 있어서 자유자재의 능력을 보여주던 유재석이지만 요리방송이라는 새로운 상황은 그를 시종일관 난감하게 만들었다.

 

애초 EBS를 방문한 유재석은 펭수를 다시 만난다는 기대감에 한껏 들떠 있었다. 하지만 대기실에는 펭수가 없었고 난데없이 <최고의 요리비결> PD와 작가가 찾아와 당일 방송에 출연하기로 되어 있다고 통보했다. 김태호 PD와 사전에 약속이 되었다는 것. 얼떨결에 건네받는 대본을 받아들고 본능적으로 읽어가면서 유재석은 갑자기 밀려드는 ‘현타’(현실자각 타임)에 황당해 했다.

 

방송이 익숙한 유재석이라도 <최고의 요리비결> 같은 프로그램은 생소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EBS를 찾은 것조차 처음이었다. 그 날의 요리로 유재석은 유산슬라면과 유산슬덮밥을 선보여야 했는데, 본래 ‘인생라면’ 분식집에서는 미리 준비된 재료들을 갖고 요리만 하면 됐지만 이 방송에서는 재료들까지 손수 잘라 요리를 해야 했다.

 

유재석의 부족한 요리 실력은 재료를 칼질하는 그 모습에서부터 여지없이 드러났다. 인생라면 분식집에서는 라면을 끓여내는 그럴 듯한 모습이 연출되었지만, 죽순을 마치 깍두기 썰 듯 썰어버리고, 팽이버섯을 반을 뚝 잘라내는 바람에 나중에 요리에서는 그 형태를 찾아보기 어려운 지경이 되었다. 또 해삼 역시 잘게 다져야 하는데 두툼하게 썰어 유산슬 고유의 형체가 되지 못했다.

 

방송 내내 유재석은 진땀을 흘렸다. 재료 손질하는 데만 거의 한 시간 가까이 시간을 썼고 부족한 요리 실력을 토크로 메워 넣느라 이런 저런 변명(?)을 해서 시간이 점점 길어지자 결국 제작진은 ‘끊으라’는 사인을 보냈다. 정확히 계량된 레시피를 알려주기 위해 FD가 들고 있는 종이에 적힌 걸 읽으면서도 T(한 큰 술)와 t(한 작은 술)을 읽지 못해 버벅댔고, 식용유와 맛술도 구분하지 못했으며 참기름을 찾기 위해 일일이 냄새를 맡아보기도 했다.

 

늘 방송이 익숙하고 또 능숙했던 유재석이 요리 방송이라는 전혀 다른 성격의 프로그램에 투입되어 당황하고 실수 연발하는 모습은 웃음을 주기에 충분했다. 지금까지의 유재석과는 너무나 다른 면면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인생라면’이란 콘셉트로 ‘라섹(라면 끓이는 섹시한 남자)’이라는 새로운 부캐릭터를 갖게 된 유재석은 그렇게 EBS 요리방송에까지 진출했다.

 

하지만 이런 짠내 나는 방송은 펭수를 만나는 즐거운 시간으로 바뀌었다. 오랜만에 다시 만난 펭수는 유재석은 물론이고 김태호 PD에게 자신이 만든 붕어빵을 선물했고, 유재석은 “대충대충 하라”는 남다른 펭수의 방송 스타일에 만족스러워했다. 지금껏 김태호 PD에게 이리저리 휘둘리던 유재석은 펭수가 필요할 때마다 “매니저!”하고 부르는 그 모습에서 짜릿한 카타르시스를 느꼈고, 방송 앞에서는 뭔가 하는 것처럼 보이다가 스스로 “컷”을 외치며 실제 일은 제작진들을 시키는 모습에 매료됐다.

 

<놀면 뭐하니>는 지난주 <맛있는 녀석들>과의 콜라보로 두 개의 방송이 겹쳐지는 독특한 풍경을 만들어낸 바 있다. 그리고 이번에는 EBS를 방문해 유재석이 지금껏 해보지 않았던 요리방송 <최고의 요리비결>을 통해 지금껏 보지 못했던 유재석의 새로운 면모를 보게 해주었다. 여기에 유재석의 상황과는 전혀 다른 펭수와의 만남 또한 그 비교점으로 웃음을 주었다.

 

흥미로운 일이지만 이제 <놀면 뭐하니>를 보면 슬쩍 지나치는 어떤 이야기조차 주목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유재석이 가끔씩 나중에 은퇴하면 카페 하나 열고 싶다는 이야기를 할 때 어쩌면 그가 바리스타에 도전하고 카페를 여는 새로운 부캐릭터를 또 하나 가질 수도 있겠다고 상상하게 된다. 또 펭수가 유튜브 100만 구독자를 돌파해 받은 골드버튼을 부러워하는 걸 보며 김태호 PD가 “부러우세요?”라고 묻는 대목에서도 혹시 저걸 또 도전하는 것일까 예감하게 된다.

 

<무한도전>에서는 여러 캐릭터들이 서로 협업하고 관계를 이어가면서 만들어가는 성장스토리가 그려졌다면, <놀면 뭐하니>는 유재석이라는 한 인물이 얼마나 다양한 것들을 시도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존재인가를 그려내고 있는 느낌이다. 유재석이고 김태호 PD가 기획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들이지만, 다른 한편에서 보면 1인 미디어의 시대에 사실 이런 길은 누구에게나 열려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게다. 그런 점에서 보면 <놀면 뭐하니>는 1인 미디어 시대에 새롭게 그려내는 또 다른 <무한도전>이라고 읽혀진다.(사진:MBC)

‘이태원클라쓰’, 박서준의 소신과 패기에 점점 빠져든다는 건

 

“소신, 패기. 없는 것들이 자존심 지키자고 쓰는 단어. 이득이 없다면 고집이고 객기일 뿐이야.” 장가의 회장 장대희(유재명)는 자신의 아들 장근원(안보현)을 폭행한 죄로 감옥에 들어간 박새로이(박서준)를 면회와 그렇게 말한다. 그리고 이 말은 JTBC 금토드라마 <이태원 클라쓰>의 화두나 다름없다. 과연 소신과 패기로 이 부당한 세상에 맞설 수 있을까.

 

박새로이가 바로 그 소신과 패기를 화두로 던지는 캐릭터다. 부당한 일에 소신과 패기로 나서서 굽히지 않은 이유로 퇴학당하고 아버지마저 장근원의 뺑소니로 사망한다. 격분해 장근원을 죽이려 하지만 그 일로 전과자가 되었다. 아무런 희망도 없던 박새로이에게 어떤 길이 되어준 건 면회온 오수아(권나라)가 말한 ‘복수’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그는 어떻게 장대희외 장근원에게 복수할 것인가.

 

소신과 패기로 살아가야할 청춘들이 돈과 힘 앞에 고개 숙여야 버텨낼 수 있는 현실 속에서 박새로이 같은 인물에 대한 몰입감은 더더욱 커진다. 대단한 성공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엄청난 돈을 벌겠다는 것도 아니며 그저 평범하고 소소해도 소박한 행복을 누리고 싶다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게 우리네 현실이다. 집 밖을 나서면 세상은 돈과 권력으로 서열을 나누고 고개 숙이라 한다. 무릎 꿇으라 한다. 심지어 범법 행위를 해도 피해자가 무릎 꿇어야 하는 그런 참담한 현실.

 

그런데 박새로이의 복수 방법이라는 것이 그의 이름처럼 새롭다. 그는 그 흔한 복수극에 등장하는 인물들처럼 가까운 주먹을 쓰지 않는다. 대신 감방에서부터 장대희의 자서전을 외우다시피 읽어가며 자신도 성공하겠다 마음먹는다. 부정한 방법이 아니라 소신과 패기를 지켜가며 성공하는 일. 그래서 힘을 갖고 잘못된 일들을 바로잡는 것. 결국 소신과 패기를 지키는 것이 옳다는 자신의 신념을 확인하는 것이 그의 복수방법이다.

 

무려 7년 동안 배를 탄 돈으로 이태원에 낸 단밤 포차는 그러나 얼마 되지도 않아 영업정지를 먹는다. 고등학생인 조이서(김다미)가 장근수(김동희)와 함께 그 가게를 찾았고 직원인 최승권(류경수)은 주민증 검사를 하면서 미심쩍어 했지만 워낙 장사가 안 되는지라 그냥 받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걸 신고한 이는 박새로이에게 마음을 두고 있던 오수아(권나라)였다. 오수아는 박새로이를 좋아하고 있지만 그보다 성공에 대한 야망이 더 크다.

 

장근수의 형으로 나타난 장근원은 경찰서에서도 고개를 숙이는 인물. 놀리듯 봐줄 수도 있지 않냐는 장근원의 말에 경찰도 그럴 수 있다 말하자, 박새로이의 자신의 소신과 패기를 다시금 드러낸다. 경찰이 본래 자신의 꿈이었지만 전과자는 경찰이 될 수 없다며 범법 행위를 하려는 경찰을 오히려 훈계한 것. 그건 자신에게 벌을 주라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여기서 조이서라는 소시오패스 성향을 가진 다재다능한 천재 캐릭터는 박새로이를 새롭게 보게 된다. 조이서가 본 세상은 소신과 패기와는 거리가 먼 비굴하고 부당한 일들이 벌어지는 곳이고, 그는 영악하게도 그런 세상을 제대로 이용하며 살아가는 인물이다. 그래서 세상은 피곤하고 의미 없다 여기는 그에게 박새로이는 완전히 새로운 인물로 다가온다.

 

“나 때문에 감방가고 나 때문에 퇴학당하고 나 때문에 너희 아빠가 죽었다고 생각하는 거지? 어? 아 근데 말야.. 네 생각이 맞아. 중졸에 전과자에 고아 나 때문에 인생 엿된 불쌍한 박새로이.” 하지만 이렇게 도발하며 쥐똥만한 가게로 먹고 살려면 더러워도 참아야 한다는 장근원에게 박새로이는 주먹이 아닌 선전포고를 한다. “9년. 지금껏 잘 참았어. 앞으로 6년은 더 참을 거야. 네 놈 공소시효. 내 계획은 15년짜리니까.”

 

박새로이의 선전포고는 옆에서 그 상황을 바라보는 조이서는 물론이고 이를 보는 시청자들의 마음을 설레게 만든다. 소신과 패기만으로는 도저히 버텨내기 힘든 현실이지만 적어도 이 드라마 속에서나마 박새로이라는 인물이 그걸 통쾌하게 해내는 모습이 못내 보고 싶기 때문이다. 지금껏 세상은 원래 그렇다며 포기하듯 이용하며 살아왔던 조이서 같은 청춘 또한 박새로이의 그런 도전을 든든히 지원해줄 인물이 될 테니.

 

<이태원 클라쓰>는 웹툰 원작이지만 그 자체가 드라마틱한 극적 구조를 압축적으로 잘 갖고 있는 작품이다. 서서히 쌓아올렸다 폭발시키는 극적 구성이 굉장한 에너지를 가진 이 작품은 청춘들의 현실을 투영시킴으로써 몰입감을 더더욱 높이고 있다. 3회 만에 8.0%(닐슨 코리아)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 작품에서 같은 방송사의 빅히트작 <스카이 캐슬>과 같은 고공행진을 기대하게 만든다. 과연 <이태원 클라쓰>는 클래스가 다른 몰입감을 통해 그 아성을 넘어설 수 있을까.(사진:JTBC)

'머니게임', 신념 위해 희생은 필요하다?

 

“나는 흔히 말하는 베이비부머 세대야. 성장에 너무도 익숙했던 세대. 매해 8에서 10퍼센트씩 성장했고 일자리는 널렸었고. 채과장은 엑스세댄가? 20대 때 IMF를 겪었을 것이고 30대 때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었겠네. 어려서는 풍요로웠지만 이후 경제는 곤두박질치고 취업마저 힘들었을 첫 세대. 외환위기 때 마이너스 6% 이후로도 잘해봐야 성장률이 2내지 3%였던 세대. 이게 대한민국 경제가 오늘날 받아 든 성적이야. 누구 잘못일까?”

 

tvN 수목드라마 <머니게임>에서 허재 금융위원장(이성민)은 채이헌 과장(고수)에게 그렇게 화두를 던진다. 채이헌은 경제부총리 김호중(박지일)으로부터 허재를 끌어내리라는 지시를 받았고 그래서 그 일에 공공연하게 나서던 차였다. 허재는 대놓고 채이헌에게 자신이 가진 생각을 신념인 양 드러낸다.

 

“한강의 기적? 기적 따위는 없었어. 국민들의 피가 있었을 뿐이지. 그 피의 대가로 쌓아올린 경제야. 그 경제가 IMF 때 와르르 무너졌다고. 그런데도 정신을 못 차렸어. 왜? 빌어먹을 경제학자들이 권력자들의 밑을 닦기에 바빴으니까. 원하는 대로 이론 만들어주고 그 이론으로 국민들의 눈을 가리고 속였으니까. 진작 뜯어내고 망치질 했어야했는데 그걸 못했으니까.”

 

허재는 채이헌의 아버지인 채병학(정동환) 교수와 경제 정책을 두고 치열한 대립을 했고, 결국 벼랑 끝에서 우발적으로 채교수를 밀어 사망케 했던 인물이다. 채병학이 주장하던 정부의 개입보다는 시장에 맡기라는 시장주의에 반발했던 것. 하지만 그 과정에서 채병학을 사망케 한 사실은 허재가 가진 생각과 신념이 옳다고 해도 그가 이를 실행해나가는 과정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잘 보여준다. 그는 기적 따위는 없었다며 누군가의 피와 희생이 있어야 경제를 되살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머니게임>에서 금융위원장이 된 허재가 가장 먼저 한 것은 정인은행의 BIS 비율을 조작해 악명 높은 해외 펀드인 바하마에 매각시킨 일이다.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정인은행과 거래하는 부실기업들을 파산 매각 하는 등의 정리에 들어간 것. 그 과정에 개입한 바하마의 코리아 지사장 유진한(유태오)은 정인은행장을 허수아비로 내세워 우진조선해양을 파산시키고 이를 중국 측에 팔아 막대한 이득을 얻으려 한다. 만일 이렇게 되면 우진조선해양이 국내에서 개발한 레이더 기술 또한 유출될 위기에 놓이게 되는 것.

 

허재 금융위원장은 진작에 도려냈어야 할 썪은 살로 우진조선해양 같은 그룹을 지목하고 파산으로 인한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 과정이 치러야 하는 희생이 너무나 크다. 이혜준(심은경) 사무관이 어린 시절 겪었던 것처럼 바하마가 개입해 파산한 은행 때문에 연쇄 도산하는 기업들도 생겨나고 견디다 못한 서민들 중에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했다. 제 아무리 소신이 분명하다 하더라도 이런 희생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

 

허재 같은 관료가 더더욱 위험한 건 부패한 관료라기보다는 자기 확신에 가득 차 있다는 점 때문이다. 그는 누군가를 죽이거나 죽음으로 몰아넣으면서도 자신이 하는 일이 정당하다는 확신에 차 있다. 만일 이런 인물이 정부의 고위 관료로 앉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머니게임>은 제목에 담긴 것처럼 ‘게임’ 같은 수준의 문제를 다루는 게 아니다. 누군가의 삶 전체가 송두리째 뽑힐 수 있는 그런 결정들이 오가는 세계의 심대한 문제들이다.

 

허재가 자신의 소신을 밀어붙이기 위해 나준표(최병모) 같은 라인을 만들고 바하마를 끌어들이며, 위기에 몰리면 상대의 약점을 찾아내 끌어내리는 그런 일련의 방식을 쓰고 있고 그것이 심지어 먹힌다는 건 이 드라마가 그리는 정부의 시스템이 얼마나 취약한가를 잘 보여준다. 누군가의 소신은 저마다 존중받아 마땅하지만 그것들이 어떤 제동장치나 안전장치 없이 마구 농단될 수 있는 시스템이 가진 위험성. 허재 같은 시한폭탄을 앞에서 막아내려는 이혜준(심은경) 사무관 같은 인물이 너무나 연약하게만 느껴진다.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인물, 기관, 사건은 실제와 관련이 없습니다.’ 드라마 시작에 자막으로 등장하는 이 문구가 사실이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허재 같은 위험천만한 관료나, 그의 농단이 마음대로 먹히는 시스템이 현실이라면 서민들의 각자도생은 얼마나 허탈한 일이겠나.(사진: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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