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작가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기 일주일 전 나는 모스크바에 있었다. 한국국제교류재단 모스크바 사무소의 주최로 열린 ‘전 러시아 대학생 한국어 올림피아드’에 특강을 요청 받아서였다. 알다시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전쟁 중인데, 그 곳을 굳이 가야할까 싶었지만 호기심이 일었다. 하필이면 한국의 대중문화 관련 글을 쓰며 살아가는 나를 불렀다는 건, 그 곳에도 한류 열풍이 있다는 걸 예감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 예감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그 곳에서 환대해준 러시아 한국어 교수들(행사에 심사를 맡은 러시아안들이다)은 유창한 한국어로 톨스토이의 소설 ‘전쟁과 평화’에 빗대 한국과 러시아의 상황을 농담했다. “한국과 러시아는 지금 ‘전쟁과 평화’ 중입니다. 전쟁 중이라 러시아가 한국을 비우호국으로 지정했지만 우리는 이렇게 평화로우니 말입니다.”

 

그들의 한국어 실력은 그저 소통하는 정도가 아니라, 한국 문학과 역사를 이야기할 정도로 깊었다. 특히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 그리고 푸쉬킨 같은 대문호를 가진 자부심이 대단한 그들은 한국문학에 대한 지대한 관심도 드러냈다. 조남주 작가의 ‘82년생 김지영’을 거론하며 한국의 젠더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고, 김호연 작가의 베스트셀러 ‘불편한 편의점’을 통해 한국 소설의 변화를 이야기했다. 또 김훈 작가의 ‘칼의 노래’를 통해 당시 조선의 역사 이야기를 하기도 했고, 학생들 중에는 사도세자 이야기나 정조 이야기를 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이 그렇게 한국문학에 관심을 갖게 된 건, 한국영화와 드라마 같은 콘텐츠들이 최근 전 세계적으로 알려진 것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82년생 김지영’도 영화를 통해 먼저 접하고 소설을 보게 됐다고 했고, 정조 이야기에 대한 관심은 그를 다룬 ‘이산’이나 ‘옷소매 붉은 끝동’ 같은 사극을 통해서 시작됐다고 했다. 문득 부끄러워졌다. 우리는 과연 그만큼 우리 역사와 문학에 관심을 두고 있는가 하는 회의가 들어서였다. 

 

물론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에 대한 이야기도 빠지지 않았다. 실제로 한국 소설을 러시아어로 번역하는 일을 하는 그들은 한국어가 통번역이 특히 어려운 언어라고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영어 같은 경우는 앞부분에 하려는 이야기를 먼저 꺼내놓고 뒤에는 수식어를 붙이는 방식이라 동시통역이 어렵지 않아요. 하지만 한국어는 마지막 한 마디로 앞부분의 이야기를 모두 뒤집을 수 있어서 끝까지 들어야 겨우 통역이 가능하죠. 그런 말도 있잖아요.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안다.”

 

한국의 콘텐츠들이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그래서 이제는 그 관심이 먹거리부터 패션, 여행 등등 한국문화로까지 옮겨가고 있는 추세인데 거기에는 한국어에 대한 관심도 빼놓을 수 없다. 우리에게는 너무 익숙해서 거리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한국어 간판들이 지저분하게만 보이지만, 외국인들에게는 그것이 그토록 멋스럽게 느껴질 수가 없다고 한다. 그래서 최근 한국을 로케이션으로 작품을 찍는 외국감독들은 카메라를 드리우면 골목 하나도 다 그림이 된다는데, 거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한글의 아름다움이다. 한국말도 마찬가지다. 한국말 가사 그대로 BTS의 노래를 따라 부르는 외국인들의 모습은 이제 더 이상 낯선 풍경이 아니다. 

 

물론 작품 자체의 뛰어난 성취가 가장 큰 이유이겠지만,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에는 한류로 인한 한국문화에 대한 세계적인 관심도 어느 정도는 일조한 면이 있다. 그리고 그 한류의 흐름에는 한국이라는 나라가 한국전쟁 이후 비교적 짧은 시기에 놀라울 정도로 변화와 성장을 거듭해온 그 과정에 대한 세계적인 관심 또한 들어있다. 최근의 한국 콘텐츠들이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 건, 약 40년 간 한 국가의 탄생과 발전 과정을 압축적으로 겪었기 때문이다. 유시민은 그의 저서 ‘나의 한국현대사’에서 ‘대한민국의 역사는 그 과정(인류 문명사의 과정)을 정확하게 압축 재현했다’며 ‘생리적 욕망의 충족을 도모하는데서 출발해 안전, 자유, 존엄이라는 차원 높은 욕망 충족을 향해’ 나아갔다고 말했다. 이 말은 전쟁 후 반공국가, 경제발전, 민주화, 사회정의와 인권을 차례로 요구해온 대한민국의 변화과정을 말하는 대목이다. 이 각각의 욕망들은 현재에도 여전히 공존하면서 사회의 다양한 문제의식들을 만들어내는데, 콘텐츠들이 이걸 다양하게 담아냄으로써 보다 폭넓은 글로벌 공감대가 가능해졌다. 개발도상국들에게는 여전히 성장서사의 로망을 담은 콘텐츠들이 인기를 끌지만, 동시에 양극화 문제가 고도화된 서구권 국가들은 이 문제들을 담은 사회비판적인 콘텐츠들이 인기를 끈다. 한국은 실로 성장과 분배, 경쟁사회에 대한 애증, 속도와 느림, 디지털과 아날로그 같은 이율배반적인 것들이 뒤섞여 있는 나라다.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받은 건 이러한 한국이 역사적으로 겪어온 아픔과 상처들을 온전히 자신 속으로 끌어안아 문학으로서 품어냈기 때문이다. 그건 그래서 우리의 역사와 현실을 담은 이야기지만, 저마다의 욕망의 단계에 따른 문제에 봉착해 있는 전 세계인들 또한 공감하게 했다. 

 

한강의 노벨문학상으로 한강 작품들은 국내 출판가에 신드롬을 만들고 있다. 수상 이후 닷새간 종이책만 97만2천부가 팔렸고, 베스트셀러 10위권을 모두 한강의 작품이 채웠다. 그리고 이런 변화는 국내 출판가에도 기대감을 만드는 모양새다. 최근 ‘텍스트 힙’이니 ‘독파민’이니 하는 새로운 독서 트렌드에 대한 관심 또한 커졌다. 지금이 다시금 인문학에 대한 관심을 제고시킬 절호의 기회라고 말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물론 이러한 쏠림현상이 인문학에 대한 근본적인 저변을 넓힐 것이라 생각하진 않지만, 그래도 책과 독서에 대한 관심이 생겨나는 건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개발시대의 압축성장을 ‘한강의 기적’이라고 했다면, 최근 한국 콘텐츠에 대한 전 세계적인 관심을 제2의 ‘한강의 기적’이라고 한다. 중의적인 표현이지만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통한 또 한 번의 ‘한강의 기적’을 기대한다. 인문학을 바탕으로 하는 한국 문화의 깊이가 피어나는 기적 같은 일들이 생겨나기를. (글:이데일리, 사진:Nobel Prize)

‘정년이’로 또다시 청춘의 아이콘으로 돌아온 김태리

정년이

“참말로 고맙구만이어라. 하지만 받지 않겄습니다. 그 길은 제 길이 아니어라.” tvN 드라마 ‘정년이’에서 윤정년(김태리)은 자명고 대본을 내주며 오디션을 볼 수 있게 해주려는 매란국극단 스타 문옥경(정은채)의 호의를 거절하며 그렇게 말한다. 문옥경은 장터에서 윤정년이 소리를 하는 걸 듣고는 단박에 천부적인 재질이 있다는 걸 알았고, 그래서 그를 매란국극단에 들어올 수 있게 도운 인물이다. 그런 문옥경의 호의가 고맙지만 이를 거절하는 정년에게서는 보다 당당하게 제 힘으로 서고 싶은 청춘의 기세가 엿보인다. “안 그래도 다들 지가 지 실력으로 이 국극단 들어온 거 아니라고 떠들어 싼디, 여기서 또 쉬운 길을 선택해 불믄, 그 사람들 말이 맞다고 인정하는 꼴밖에 안 된께요.”

 

첫 회 4.8%(닐슨 코리아) 시청률로 시작해 단 4회만에 12.7%까지 급상승한 ‘정년이’의 저력은 바로 이 윤정년이라는 캐릭터의 매력에서 나온다. 목포 시장 바닥에서 아무런 미래에 대한 꿈도 없이 살아가던 이 청춘은 어느 날 별천지에서 온 대스타 문옥경을 만나고 국극의 꿈을 꾸게 된다. 엄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끝내 집을 떠나 매란국극에 들어온 윤정년은 거기서도 그를 시기하는 이들과 치열한 경쟁 속에서 갖은 역경을 마주하게 된다. 하지만 이 청춘은 물러서거나 좌절하는 법이 없다. 돌덩이 같은 단단한 역경을 피하지 않고 뚫고 나가는 기세. 이 청춘의 기세에 시청자들은 빠져든다. ‘정년이’가 파죽지세의 시청률을 기록하는 이유다. 

 

서이레 작가의 웹툰을 원작으로 하는 ‘정년이’는 드라마 리메이크 이야기가 나왔을 때부터 우려의 목소리들이 적지 않았다. 워낙 유명한 작품이라 원작 캐릭터의 싱크로율을 감당할 배우가 과연 있을까 싶어서였다. 그 활달한 성격에 소리까지 연기해야 하니 만만찮은 역할이다. 하지만 김태리가 정년이 역할로 분한 첫 회가 등장하면서 이런 우려들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원작 웹툰에서 막 튀어나온 듯 싶을 정도로 발랄한 청춘의 캐릭터를 제 옷 입은 듯 소화해냈고, 소리를 하거나 국극의 무대에 설 때는 너무나 진지한 모습 또한 보여줌으로써 시청자들을 납득시켰기 때문이다. 

 

사실 김태리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유독 ‘청춘의 초상’으로서의 역할들을 주로 해왔다는 걸 발견할 수 있다. 2016년 영화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는 김태리라는 배우가 가진 밝고 쾌활한 면모를 대중들에게 각인시킨 작품이다. 블랙코미디적인 요소가 담긴 이 작품에서 김태리는 막대한 재산을 가로채려는 사기꾼 백작(하정우)의 제안으로 귀족 아가씨(김민희)의 집에 하녀로 들어가게 되는 인물이다. 하녀라고는 하지만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이 인물이 백작이 아닌 아가씨와 마음을 나누는 과정을 김태리는 특유의 밝은 에너지로 소화해낸 바 있다. 그 후 2017년 ‘1987’에서는 1987년 독재정권과 맞서는 대학생들의 민주화 운동에 회의적이었지만 차츰 그 대열에 참여하게 되는 이연희라는 청춘의 고뇌와 성장을 연기했다. ‘1987’에서 그랬던 것처럼 김태리는 하는 작품마다 당대의 청춘들이 겪는 아픔들을 공유하면서도 거기에 좌절하지 않고 뚫고 나가는 모습으로 대중들에게 각인됐다. 고향을 떠나 도시에서 저마다 성공하고픈 꿈을 꾸지만 그것이 청춘을 마모시키고 좌절하게 만드는 현실을 담은 ‘리틀 포레스트’에서도 그랬다. 김태리는 도시의 삶에 지쳐 고향으로 돌아와 거기 나는 식재료들로 음식을 챙겨먹으며 자신을 회복해가는 청춘 송혜원을 통해 당대의 청춘들을 위로했다. 

 

“나도 꽃이요. 다만 나는 불꽃이요.”라는 명대사를 남긴 ‘미스터 션샤인’은 또 어떤가. 구한말 사대부가의 영애로서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었지만 이를 거부하고 힘겨운 의병활동의 길을 선택한 고애신 역할을 김태리는 특유의 발랄한 에너지로 소화해냈다. 일제강점기의 암울한 분위기를 뚫고 나오는 드라마의 발랄함은 김태리라는 배우와 만나 기분좋은 시너지를 만들었다. IMF를 배경으로 그 힘겨운 시절 어른들로 인해 청춘들이 겪게 된 아픔과 성장을 담은 ‘스물다섯 스물하나’에서도 김태리는 나희도라는 인물을 통해 큰 위로를 줬다. 이러한 김태리가 써온 청춘의 초상을 담은 필모그래피는 심지어 오컬트 장르인 ‘악귀’에서도 이어졌다. 각박한 현실 앞에 좌절한 청춘들이 그 엇나간 욕망이 탄생시키는 악귀를 그린 이 작품에서, 김태리는 구산영이라는 공시생 역할로 악귀가 자신을 잠식하려는 위기와 맞서는 청춘을 연기했다. 

 

그래서 김태리가 나왔던 작품들을 들여다 보면 지금의 청춘들이 마주한 현실이 엿보인다. 수저 색깔로 미래가 결정되는 불공정한 사회 속에서도, 어떻게든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애쓰지만 번번히 좌절되는 현실 앞에 갑갑해 하는 청춘들의 초상이다. 그래서 연애도 결혼도 출산도 포기하는 이른바 N포세대라는 말까지 나오는 현실이 아닌가. 하지만 이러한 ‘포기’라는 단어가 익숙해진 건 청춘들이 원해서가 아닐 게다. 그들이 진짜 바라는 건 그래서 김태리가 해온 작품들 속 인물들이 보여주듯이 그 현실을 뚫고 나가는 그런 모습이 아닐까. 

 

김태리가 가진 청춘의 에너지가 빛나는 ‘정년이’는 한국전쟁이 막 끝난 1956년을 시간적 배경으로 삼은 작품이다. 한국전쟁으로 피폐해진 삶 속에서 하루 벌어 하루 살기도 고단한 삶을 살았던 시절이다. 그런데 ‘정년이’가 그리고 있는 건 그런 좌절과 포기의 이야기가 아니다. 여성국극의 꿈을 향해 달려가는 청춘 정년이의 성장드라마다. 그 고단했던 시절에도 그 힘겨움을 위로해줬던 건 다름 아닌 국극 같은 당대의 문화들이었다. 그 문화의 현장 속에서 민초들도 잠시 현실을 잊고 웃고 울며 다시 살아갈 힘을 얻었으니 말이다. 그 예인의 길을 그려낸 ‘정년이’가 주는 위로가 남다른 건 그래서다. 꿈을 꾸는 것조차 사치처럼 여겨지던 시절, 역경을 뚫고 꿈을 향해 나아가는 정년이의 모습은 큰 위로와 더불어 용기를 준다. 제 아무리 힘겨운 현실 속에서도 꿈꿀 수 있는 용기는 누구에게나 필요하다고, 남다른 청춘의 기세를 보여주는 정년이와 그 역할을 맡은 김태리는 말해주고 있다.(글:국방일보, 사진:tvN)

“밥 잘 묵으쓰면 됐지. 그게 뭐라꼬 여태 얹힜노?” 양우석 ‘변호인’

변호인

“대한민국 주권은 국민에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국가란 국민입니다!” 양우석 감독의 영화 ‘변호인’은 이 명대사로 잘 알려져 있다. 국가의 폭력에 의해 희생당할 위기에 처한 청년을 구하기 위해 법정에서 그를 변호하는 송우석(송강호) 변호사의 일갈이다. 영화사에 남을 명장면이지만 그럼에도 내게 남은 이 영화의 명장면은 따로 있다. 그건 송우석 변호사가 고시 준비할 때 자주 갔던 국밥집 아지매 최순애(김영애)와의 일화다. 너무 힘들어 포기하려고 책까지 다 팔아넘기고 그 집을 찾은 송우석은, 밀린 외상값을 내려고 주머니 속 지폐를 만지작거리다 그만 도망치고 만다. 그 길로 다시 중고서점을 찾아 팔았던 책들을 되찾고 그렇게 시험에 합격해 변호사가 되어 돌아온다. 

 

그 빚을 갚기 위해 다시 찾은 국밥집. 송우석이 자신이 그 때 밥 먹고 도망친 놈이라며 외상값이 든 두툼한 봉투를 건네려 하자, 최순애는 만류하며 말한다. “자고로 묵은 빚은 돈 말고 얼굴하고 발로 갚는 기라. 자주 오라꼬. 알긋나? 아이고 마 기분 째진다. 오늘도 공짜다.” 그 말에는 진심이 묻어난다. 빚지고 도망친 이를 나무라기보다는 자신이 차려준 밥 먹고 성공한 이를 기뻐한다. 감복한 송우석이 한번 안아봐도 되냐며 꼭 껴안자, 최순애는 마치 엄마처럼 등을 두드리며 말한다. “밥 잘 묵으쓰면 됐지. 그게 뭐라꼬 여태 얹힜노?” 

 

이 국밥 한 그릇의 가치는 얼마나 될까. 그건 값이 아니라, 거기 담긴 마음의 가치다. 호사스런 대접을 받고도 얹히는 마음 없이 사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 작은 국밥 하나의 신세도 잊지 않는 마음과, 그걸 그저 돈이 아닌 마음으로 환산하는 마음. 요즘 같은 시대에 더더욱 그리워지는 마음들이다. (글:동아일보, 사진:영화'변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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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콘텐츠 파워, 실감케 한 러시아 한류 그 현장에 가다

문화는 막힌 길도 에둘러 뚫고 나간다고 하던가.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필자가 느낀 건 전쟁으로 인해 막힌 한국과 러시아의 외교적 국면들 속에서도 한류는 오히려 더 뜨거워졌다는 것이다. 현재의 러시아 청년들이 보여주는 한류 열풍 그 현장을 다녀왔다. 

전 러시아 대학생 한국어 올림피아드에 참여한 대학생들

러시아인이 사도세자 뒤주 이야기를 하는 진풍경

“여기서 뒤주는 사도사제가 가둬져 죽은 뒤주를 떠올리게 합니다.” 방탄소년단의 멤버 슈가(Agust D)가 낸 ‘대취타’ 중 ‘과건 뒤주에 가두고’라는 가사를 설명하는 한 러시아 대학생이 그렇게 말한다. 한국어를 한국인처럼 말하는 러시아인들도 놀랍지만, 그들이 단지 언어만이 아니라 ‘사도세자’ 같은 한국역사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는 건 더더욱 놀랍다. 지난 4-5일 양일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한국국제교류재단 모스크바 사무소의 주최로 열린 ‘전 러시아 대학생 한국어 올림피아드’의 풍경이다. 이 행사의 백미는 둘쨋날 마지막 테스트로 치러진 ‘주제발표를 통한 말하기 시험’. 다뤄지는 주제들을 보면 한국의 명절 같은 전통문화는 물론이고, 현재 가부장제를 벗어나 변화하는 한국의 젠더의식, 퓨전화되고 있는 국악, 한복 등등 다양했다. 그런데 이러한 한국의 문화를 소재로 주제를 발표하는 대목에 빠지지 않는 건 한류 콘텐츠들이다. 사도세자 이야기가 나온 건 ‘대취타’의 가사를 설명하면서고, 한국의 젠더의식 변화를 이야기하며 조남주 작가의 소설로 영화화되기도 했던 ‘82년생 김지영’이 등장한다. 퓨전 국악으로서 이날치가 소개되고 한복을 이야기하며 아이브의 ‘해야’ 뮤직비디오가 소재가 된다. 이런 방식은 현재 러시아의 한류가 K콘텐츠의 차원을 넘어 K컬처로 넘어가고 있다는 걸 말해준다. 이 행사에 초청받아 모스크바를 방문한 필자에게는 놀라운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현재 한러 관계는 그리 좋지 못하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한국은 러시아에서는 비우호국이 됐다. 하지만 이 행사가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러시아 청년들의 한국문화에 대한 애정은 그 어느 때보다 뜨겁다. 실제로 콘텐츠진흥원이 2023년 12월에 내놓은 ‘러시아 특화보고서-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한류 영향’을 보면 2022년 말까지 러시아는 전년 대비 39% 증가한 790만 명의 한류 팬을 보유해 한류 팬 증가율 세계 1위를 기록했다고 한다. 또 한국어는 2023년 가장 인기 있는 언어 중 하나로 한국어 교재 및 자습서 판매량은 전년 대비 32%가 증가했다고 한다. 

 

행사가 끝나고 한 식당에서 참가한 대학생들과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러시아의 한국어 교수님들(러시아인들)과 함께 이어진 뒷풀이 자리 역시 이런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한식을 연구한 러시아인 셰프가 직접 음식을 만들고 운영하는 그 식당에서는 김치전에 잡채 그리고 막걸리가 나왔고, 학생들과 교수들은 익숙하게 한국어로 환담을 나누며 한식을 즐겼다. 그 풍경은 모스크바가 아닌 종로 어디라고 해도 될법한 한국적인 분위기 그대로였다. 

 

막혀 있어 더 뜨거워진 러시아 한류

러시아의 K팝에 대한 인기는 전쟁 이후 유럽 투어에 러시아가 포함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도 여전했다. 러시아 팬들이 한국을 방문하거나(K팝 투어가 등장했다) 혹은 인접국에서 열리는 콘서트를 찾아가는 일도 생겼다. K팝 커버댄스 콘테스트가 올해만 해도 3월, 6월, 7월에 열렸고, 지난 7월에는 한국콘텐츠진흥원과 러시아의 스트리밍 플랫폼인 MTS가 주최하고 러시아 한국문화원이 후원한 K팝 콘서트에 걸그룹 라잇썸과 송원섭이 무대에 올라 성황리에 공연을 마쳤다. 송원섭은 빅토르 최 노래를 커버하며 러시아어권 국가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싱어송라이터다. 

 

K팝은 물론이고 드라마, 영화 같은 K콘텐츠의 인기를 견인하는 건 역시 스트리밍 서비스를 통해서다. 우크라이나 사태로 인해 러시아 내 스트리밍 서비스는 대부분 제한되고 있다. 넷플릭스도 유튜브도 보기가 어렵지만 러시아의 스트리밍업체들이 등장해 이를 대체하고 있다. 다른 루트가 막혀 있기 때문에 이들 스트리밍업체들을 통한 K콘텐츠 소비는 오히려 늘고 있는 추세다. MTS 같은 현지 스트리밍 플랫폼의 K팝 관련 조회수는 20% 가량 늘었다고 한다. 또한 드라마나 영화의 경우는 전쟁 이후 제한된 유럽과 미국 콘텐츠의 자리를 한국 콘텐츠가 채워나가는 형국이다. 공식적인 러시아의 OTT들을 통한 정식 수입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지만, SNS를 통한 비공식적인 K콘텐츠의 확산도 적지 않다. 마치 과거 한국에서 있었던 미드 열풍 때 팬들이 자막을 붙여 올렸던 것처럼 지금 현재 러시아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공식채널을 통해 ‘기황후’, ‘구미호뎐’, ‘마우스’, ‘도깨비’ 같은 예전 작품들이 소개되고 있다면 비공식채널을 통해서는 한국에서 현재 방영되고 있는 최근작들(이를 테면 ‘백설공주에게 죽음을’ 같은)도 거의 실시간으로 소개되고 있다. 

 

한국영화의 경우도 최근작들까지 극장에서 방영되고 있는데, 지금까지 최고 수익을 낸 작품은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으로 약 40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러시아에서는 ‘영화제 영화’로 한국영화가 많이 알려져 왔지만 지난 2022년과 2023년 사이에는 러시아 영화관들이 한국영화를 많이 소개해 보다 대중들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이 시기 ‘부산행’이나 ‘비상선언’, ‘범죄도시3’ 같은 작품들이 특히 큰 인기를 끌었다. 

 

어려울수록 문화 교류는 지속되어야

이러한 K콘텐츠의 인기가 한국어나 한식, 패션 등의 K컬처로 확산되고 있는 상황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는 2020년 모스크바에 문을 연 한국 길거리 음식 체인점 치코(CHICKO)다. 떡볶이, 라면, 김밥, 핫도그 같은 한국 분식을 제공하는 이 음식점은 세르게이 레베데프가 한국의 양념치킨 맛에 반해 창업을 한 곳으로 현재 모스크바 안에만 9개점, 러시아 전역에 40여개의 매장을 가진 대박 프랜차이즈다. 한식을 팔지만 그보다는 한국문화를 판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연일 줄이 이어진 매장에는 한국드라마와 K팝 관련 사진들과 벽면 가득 한국어들로 채워져있다. 그만큼 러시아 안에서 한국을 경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이 체인점은 한국 인플루언서들과 협업해 한국에서 유행하는 메뉴를 도입하기도 하고, 직원들의 한국방문을 통해 한국문화를 경험하게 한 후 메뉴에 스토리텔링을 더하는 식의 홍보 마케팅도 한다고 한다. 러시아 내에서의 한식에 대한 수요는 갈수록 높아지고 있는데, 실제로 김이나 커피, 음료, 라면, 소스 등 한국 농식품의 러시아 수출액은 매년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전 러시아 대학생 한국어 올림피아드 행사를 축하하기 위해 참석한 이도훈 주 러시아연방 대사는 “어려운 시국일수록 특히 학술, 문화 교류가 지속되어야 한다”고 강변했다. 또 필자에게 그 행사에 참여한 대학생들의 한국문화에 대한 열의가 결국은 “한러 관계의 상호 발전적인 미래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다. 전쟁으로 인해 한국과 러시아의 관계는 사뭇 소원해졌지만, 이 현재의 상황이 바뀔 거라 낙관하는 건 바로 미래를 이끌 러시아 청년들의 모습을 통해서라는 이야기다. 

 

현재 러시아 관련 우리네 뉴스들은 대부분 전쟁의 양상에만 집중되어 있는 게 사실이다. 그래서 어딘가 전운이 감도는 모스크바를 상상하지만 현장에서 경험한 건 완전히 다르다. 특히 한러 관계가 경색되어 있는 현 상황에서도 더더욱 열기를 띠고 있는 한류는 문화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오히려 실감케 한다. 한러 교류의 민간외교로서 한류가 그 밑거름을 마련하고 있는 한, 향후 상황이 바뀌었을 때 한러 관계의 변화는 한류를 타고 봇물처럼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글:시사저널, 사진:한국국제교류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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