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친밀한 배신자’, 의심과 불안이 겹치자 생겨난 기막힌 심리 스릴러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

“정말로 엄마가 범인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해? 너 때문이겠지. 엄만 너 볼 때마다 힘들었을 거야. 시신 묻은 게 떠올라서 괴로웠을 거고. 피하지 말고 똑바로 봐. 그거 못견디겠어서 누구라도 죽이고 싶은 거잖아. 너. 장하빈. 엄마 그렇게 만든 건... 사람 때문 아니고... 의심이야.” 

 

궁금해 미칠 지경이다. MBC 금토드라마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를 보는 시청자들이라면 대부분 느낄 수밖에 없는 감정이다. 프로파일러인 아버지 장태수(한석규)는 살인사건을 수사하면서 점점 그 현장에 딸 하빈(채원빈)의 흔적들이 나오자 불안해진다. 혹여나 딸이 범인이 아닐까 의심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건이 진행되면 될수록 사건의 실체가 아주 조금씩 드러난다. 하빈은 범인이 아니라 엄마를 죽게 만든 이들을 찾기 위해 의도적으로 가출팸에 접근했다. 하빈의 친구였던 이수현(송지현)이 그 가출팸에 있었고, 무슨 일인지 엄마가 이수현의 사체를 땅에 묻은 사실을 알게 됐다. 하빈은 누군가의 협박으로 엄마가 죽게 됐다고 믿었고, 그래서 그 누군가를 찾아 자기 손으로 복수하려 했다. 

 

하지만 장태수는 엄마의 죽음이 누군가에게 협박을 받아서가 아니라 자신이 이수현의 시신을 묻은 것 때문에 괴로워하다 결국 자살을 한 거라고 말한다. 그리고 엄마가 그런 짓을 한 이유는 다름 아닌 하빈 때문이었다. 하빈이 혹여나 이수현을 죽였을 지도 모른다는 의심과 불안이 이유였다. 그래서 이를 은폐하기 위해 엄마가 대신 시체를 묻었다며 장태수는 그것이 ‘너 때문’이라고 딸에게 말한다. 

 

그런데 그 말은 너 때문에 엄마가 죽었다며 딸을 질책하는 말이 아니다. 엄마가 딸을 그만큼 사랑했다는 의미다. 너무 사랑해서 조금 다른 아이이긴 하지만 보통 아이처럼 키우고 싶어했던 엄마였고, 그럼에도 이수현의 사체를 보고는 딸이 그랬을 지도 모른다는 의심과 걱정, 불안이 겹쳐지면서 해서는 안될 짓을 한 거였다. 그 결과는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는 파멸이었다. 장태수의 말처럼 하빈의 엄마를 그렇게 만든 건 사람(하빈도 아니고 또 누군가의 협박 때문도 아닌) 때문이 아니고 의심(딸이 그랬을 지도 모른다는) 때문이었다.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가 시청자들을 미치게 만드는 미로 속에 빠뜨리는 이유는, 단순한 사건의 흐름과 범인을 잡는 과정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그 밑에 깔려 있는 인물들의 감정과 심리변화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겉으로 보면 누군가 범인처럼 보이고, 이상행동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그런 행동을 하는 감정과 심리들이 숨겨져 있다. 가족이 범인일 수 있다는 데서 생겨나는 의심과 걱정이 뒤섞인 불안은 하빈의 엄마가 사체를 암매장하는 그런 일까지 벌이게 만든다. 

 

그런데 이건 하빈의 가족에게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이제 점점 수면 위로 올라오는 사건의 진실 속에서 또 한 축을 차지하는 박준태(유의태)와 그의 숨겨져 왔던 아버지 정두철(유오성) 그리고 박준태의 연인 김성희(최유화) 사이에서 벌어진 사건들이 그것이다. 박준태가 술에 취한 채 잠든 후 깨어보니 옆자리에 죽어있던 송민아(한수아)를 보고 자신이 죽였다 착각했지만 그건 아무래도 김성희에 의해 조작된 것 같은 뉘앙스를 풍긴다. 그 순간 등장한 김성희가 “차라리 술 때문”이라고 하라며 그의 아버지가 사람을 때려 죽였다는 사실을 꺼냄으로써 박준태가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처럼 자신도 그런 사람일 수 있다고 믿게 만든 것이다. 

 

기막힌 건 그의 아버지 정두철이 이 일이 진짜 아들의 짓이라 부정하면서도 의심하며 자신이 송민아의 사체를 토막내 처리했다는 점이다. 저 하빈의 엄마가 이수현의 사체를 처리했던 것과 똑같은 이유다. 즉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가 그리려 하는 건, 가족에 대한 작은 의심, 불신이 얼마나 큰 뼈아픈 사건들로 만들어지는가 하는 것이다. 자식이기 때문에 절대 그런 짓은 하지 않았을 거라 부인하면서도, 혹여나 그것이 사실일 수 있다는 의심이 만들어내는 작은 틈. 그 틈으로 이 부모들은 범죄를 저지른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그저 벌어지는 사건의 끔찍함이나 그 범죄자를 잡아내는 순간의 카타르시스 같은 것들을 담는 범죄스릴러와는 완전히 다른 독특한 전개과정을 보여준다. 그보다는 하나의 사건 위에서 여러 인물들이 이를 통해 갖게 되는 감정과 심리상태를 들여다보고, 그것이 촉발시키는 사건의 파장들을 따라간다. 

 

아마도 범인은 하빈도 박준태도 아닐 것으로 보인다. 그들보다는 김성희가 더욱 의심가는 인물이다. 하지만 범인이 누구든 그보다 이 작품에서 중요하게 보는 건 하빈과 박준태 같은 가족이 의심과 불안 사이의 틈에서 괴로워하며 겪게되는 고통스런 과정들이고, 그럼에도 그걸 회피하지 않고 직시하는 것만이 이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는 걸 장태수 같은 인물을 통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결코 쉽지 않은 인물들의 복잡한 감정들을 표정 하나 말 하나로 표현해내는 한석규와 채원빈을 비롯한 연기자들의 호연과, 같은 대사라도 뉘앙스 차이에 의해 달리 들릴 수 있는 걸 정확히 알고 있는 한아영 작가의 섬세한 대본, 그리고 이 복잡해보이는 미로 같은 사건들을 길을 잃지 않게 연출해내면서 그 위에 인물의 심리까지 영상언어로 담아낸 송연화 감독의 삼박자가 합쳐져 실로 기막힌 심리 스릴러가 탄생했다. (사진:MBC)

콘텐츠와 결합해 시너지를 내는 힙해진 국악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에서도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드라마 ‘정년이’로 인해 여성 국극 나아가 국악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다. 콘텐츠와 결합해 힙해지고 있는 국악의 세계. 그 시너지는 어떻게 생겨나고 있을까. 

정년이

여성 국극 1세대, 조영숙 명인의 한 마디

“죽을 때까지도 못 잊을 거예요. 내 나이가 벌써 90인데, 부모님이 물려주신 목구멍은 성해요. 그래서 말은 잘하고 노래는 잘하는데... 춤도 움직일 수는 있어요, 그러나 앞으로 더 남은 여생이라도 우리 여성 국극을 위해 힘쓰라는 말씀으로 알고 이 영광스러운 상을 받겠습니다.” 지난 10월25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이데일리 문화대상’에서 국악 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한 조영숙 명인은 수상 소감에서 그렇게 감사의 마음을 표했다. 

 

그가 수상자가 된 건 ‘조 도깨비 영숙’이라는 작품에 서게 되면서다. 이 작품은 이날치 밴드의 베이시스트이자 각종 영화, 드라마의 음악감독이기도 한 장영규와, 가장 현대적인 방법으로 전통가곡을 노래하는 박민희가 여성 국극 1세대인 조영숙 명인의 삶과 예술을 조망한 하이브리드 무대다. ‘선화공주’의 전막을 올린 이 작품에서 조영숙 명인은 90세의 나이가 무색하게 선화공주부터 철쇠까지 1인5역을 소화해 기립박수를 받았다. 잔뜩 굽은 등으로 운신도 쉽지 않지만 여전히 쩌렁쩌렁한 목소리에서 젊은 시절의 여성 국극 배우가 떠오른다. 그건 다름 아닌 최근 tvN에서 방영되고 있는 ‘정년이’에서 우리가 푹 빠져 있는 매란국극단 배우들의 모습이다.

 

조영숙 명인이 수상 소감에서 밝힌 것처럼 여성 국극은 사실 이대로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러던 것이 세종문화회관에 조영숙 명인에 대한 헌정을 담은 무대가 올라 새롭게 조명받을 수 있었던 데는 드라마화된 ‘정년이’의 역할이 적지 않았다. 이미 웹툰으로도 레전드가 된 작품이지만, 드라마화되면서 당대의 여성국극이 얼마나 힙하고 멋진 것이었던가를 대중들에게 실제 무대를 통해 설득시켰기 때문이다. 

 

‘정년이’가 선보인 여성 국극은 1950년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창극의 한 갈래로 소리만이 아니라 춤, 연기까지 모두 소화하는 종합공연예술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고전 ‘춘향전’이나 호동과 낙랑공주 같은 역사를 소재로 한 ‘자명고’ 같은 작품들이 무대에 올려졌다. 드라마 ‘정년이’는 이를 재연해내기 위해 1년 이상의 공을 들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드라마를 통해 재연되어 공개된 ‘춘향전’, ‘자명고’는 극 중 극으로 호평받으며 화제가 됐다. 그리고 ‘정년이’가 촉발시킨 여성국극에 대한 관심은 이제 그 창극 속에 담겨진 춤과 소리에 대한 관심으로도 이어지고 있다. 

 

장영규 음악감독의 진심이 느껴지는 음악

사실 드라마 ‘정년이’의 음악 감독은 저 조영숙 명인의 삶과 예술을 담은 ‘조 도깨비 영숙’에 참여한 장영규다. 그가 얼마나 이 일에 진심인가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장영규는 과거 어어부밴드 시절부터 국악 퓨전에 대한 열정을 드러냈고, 미국의 공영방송 라디오 NPR에 가발 쓰고 하이힐 신고 등장한 영상이 전 세계를 발칵 뒤집어 놓고 이희문이라는 걸출한 신예 국악인을 스타덤으로 올려 놓았던 민요 록밴드 씽씽밴드(SsingSsing)에도 베이시스트로 참여했다. 또 판소리 수궁가를 재해석한 ‘범내려온다’의 이날치 밴드로도 활약하고 있다. 국악의 현재화에 앞장서고 있는 대표적인 인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인지 그가 음악감독을 맡은 ‘정년이’는 우리의 소리가 얼마나 멋진가를 음악적으로도 드라마틱하게 보여준다. 첫 회에 천재 소리꾼인 정년이의 엄마 채공선이 부르는 ‘심청가’의 한 대목인 ‘추월만정’은 물론이고 ‘춘향가’의 ‘광한루 추천가’, ‘사랑가’, 또 ‘자명고’에서 구슬아기 역할의 주란(우다비)이 부르는 ‘왕자마마’ 같은 곡들이 너무나 멋스럽게 들린다. 물론 그건 드라마가 스토리와 캐릭터를 더해 들려주는 것이라 생겨나는 효과이기도 하지만, 음악적으로도 완성도 높게 구현된 결과여서 가능해진 일이 아닐 수 없다. 

 

현재화 하려는 국악, 한국무용

‘정년이’의 인기에는 그간 끊임없이 시도되어 왔던 젊은 국악인들의 도전이 밑거름이 되어 왔다는 걸 부인할 수 없다. 국악은 최근 10여 년 동안 현재와 호흡하기 위한 노력을 부단히 해왔다. ‘팬텀싱어’ 같은 프로그램에 참여해 국악이 세계음악과 기막히게 어우러지는 놀라운 무대들을 보여줬던 고영열이나, 홍대 클럽에서 시작해 전 세계를 ‘얼쑤’ 하는 추임새로 채워버린 이날치 밴드, 국악 오디션 프로그램 ‘풍류대장’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힙한 국악 밴드의 가능성을 보여준 서도밴드나 뮤지컬부터 창극까지 섭렵하며 방송에도 출연하는 젊은 소리꾼 김준수 같은 국악인들의 대표적이다. 특히 김준수와 고영열이 클래식을 베이스로 하는 퓨전밴드 두 번째달과 함께 2016년에 내놓은 ‘판소리 춘향가’는 국악의 현재적 재해석이라는 점에서 주목받은 명반이다. 여기서 고영열이 부른 ‘쑥대머리’는 한국적 정서가 물씬 배어난 발라드처럼 들리고, 김준수가 부른 ‘어사출두’는 엄청난 속도로 쏟아내는 가사들로 마치 한 편의 힙합을 듣는 듯한 느낌을 줬다. 또 ‘풍류대장’을 통해 새삼 정가의 매력을 전해주었던 해음도 빼놓을 수 없다. 해음은 정가를 하는 구민지, 가야금 하수연 그리고 거문고 황혜영으로 구성된 국악 그룹이다. 

 

‘정년이’로 인해 커진 한국무용에 대한 관심도 예사롭지 않다. 그런데 여기에도 한국무용을 현재화하려는 힙한 춤꾼들의 노력이 엿보인다. 최근 방영되고 있는 ‘스테이지 파이터’는 발레, 현대무용, 한국무용을 전공한 무용수들이 한 자리에 모여 치열한 계급전쟁을 벌이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인데, 여기서 유독 눈에 띠는 이들이 한국무용을 한 춤꾼들이다. 넘사벽의 테크닉과 표현력을 보여주는 최호종이나 그의 제자인 김규년, 치렁치렁한 머리로 야수 같은 춤사위로 시선을 잡아끄는 김시원, 절제와 균형미로 어떤 장르에도 자기 춤을 소화해내는 김효준 같은 춤꾼들이 그들이다. 한국무용이 가진 부드러운 춤선이 기반이 되어 있지만, 이들의 춤은 너무나 파격적이어서 발레나 현대무용 무용수들조차 놀라게 만든다. 

 

서브컬처화된 국악의 반격

사실 국악은 우리 고유의 문화지만, 현재에 이르러 그 대중적 저변이 사라진 게 사실이다. 8,90년대까지만 해도 국악은 방송 프로그램에서도 정규로 자리하고 있었고, 조상현 같은 스타 국악인이 존재했다. 또 가요라고 해도 국악을 기반으로 하는 음악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팝 음악이 대중음악의 주류로 자리하면서 전통을 고집하던 국악은 갈수록 설 자리가 사라져갔다. 그래서 이런 표현이 아이러니하기는 해도 ‘서브컬처화’된 면이 있다. 메인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주변화되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최근 주류와 비주류를 나누어 메인과 서브컬처가 분리하는 그런 경계들이 무너지고 있다. 저마다의 취향으로 소비되는 문화의 시대로 넘어오면서 서브컬처를 좋아하며 마니아처럼 취급받던 이들이 주류로 떠오르는 흐름도 생겨나고 있다. 국악도 이 흐름을 타고 있다. 너무나 좋은 것이지만 많은 이들이 향유하지 않아 오히려 더더욱 응원하고픈 어떤 것으로서 국악이 주목되고 있고, ‘정년이’는 그걸 촉발시키고 있다. (글:시사저널, 사진:tvN)

조립식 가족

“자식 가진 사람이 왜 몰라줘?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그거 다 내 행복이지 얘네 행복이야? 나 좋자고 하는 일에 왜 해준이가 눈치를 봐야 돼?” JTBC 수요드라마 ‘조립식 가족’에서 윤정재(최원영)은 자꾸만 강해준(배현성)에게 잘하라고 하는 그의 이모 강이현(민지아)의 말이 거슬려 술기운을 빌어 그렇게 말한다. 어려서 해준이 엄마는 서울에 돈 벌러 간다며 이모에게 아이를 맡겼고, 윤정재는 바쁜 이모 때문에 혼자 집을 지키는 해준이 눈에 밟혀 잠깐 봐주겠다며 데려와 키운 것이 한 세월이 됐다. 이제 해준은 정재를 아빠라고 부르고 정재 역시 해준을 자식이라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다. 해준에게 “잘해라”, “은혜를 꼭 갚아라”라고 하는 이모의 말들이 정재에게 탐탁찮은 이유다.   

 

이 장면은 이 제목부터 심상찮은 ‘조립식 가족’이 담고 있는 가족의 특별함을 잘 드러낸다. 윤정재와 강해준은 성도 다르지만 함께 살면서 부자 관계가 된다. 그렇게 살면서 가족이 된 건 강해준만이 아니다. 윗층 사는 김산하(황인엽) 역시 윤정재를 가족으로 생각한다. 그 역시 엄마에게 버림받았다. 아런 나이에 동생이 사고로 죽었고 그 비극으로 그의 엄마는 심지어 어린 산하를 원망할 정도로 피폐해지다가 이혼했다. 아빠 김대욱(최무성)과 함께 살지만 아래층 윤정재 역시 엄마 없는 산하를 아들처럼 대했다. 그리고 윤정재의 친딸인 윤주원(정채연) 역시 이들을 한 가족으로 받아들이면서 독특한 가족관계가 형성됐다. 윤정재와 김대욱이 티격태격하며 한 식탁에서 밥을 먹는 부부 같은 관계가 되고, 김산하와 윤주원 그리고 강해준이 남매 같은 관계가 된다. 엄마도 없고 성도 다르지만 가족이 된 그들. 그래서 ‘조립식 가족’이다. 

 

‘조립식 가족’은 그래서 가족이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담아내는 가족드라마지만, 그 갈등양상은 과거의 가족드라마와는 사뭇 다르다. 과거의 가족드라마들이 내세우는 가치는 ‘가족이 최고’라는 거였다. 그래서 바깥에서는 남들이 힘겹게 해도 귀가해 함께 저녁을 먹는 그 정경으로 모든 것들이 풀리는 모습을 보여주곤 했다. 물론 가족 내에도 갈등과 분란을 일으키는 이들이 등장하기도 했지만 그것 역시 다시 넉넉한 가족의 품에 안기는 결말로 끝나기 마련이었다. 이런 최후의 보루로서의 가족의 가치는 지금도 여전히 좋은 것이지만, ‘가족만이 최고’로 나가는 혈육에 대한 집착이 당연한 것처럼 오해되기도 했다. 그 많은 ‘출생의 비밀’ 코드들이 등장해 “너는 내 핏줄”이라며 함께 살아보지도 않았던 부모가 부자가 되어 나타나 자식의 팔자를 한 순간에 고쳐버리는 판타지가 그려지곤 했다. 과거 가족주의 시대의 엇나간 풍경이다. 

 

‘조립식 가족’은 정반대 구도로 과거식의 가족주의에 선을 긋는다. 엄마도 없고 성도 다르지만 가족이라 말하는 이들 앞에 유전적인 친부모들이 등장한다. 강해준에게 나타난 부자 친아버지는 당연한 듯 그를 아들이라 부르며 미국 유학을 시켜주겠다고 하지만, 그는 그럴 마음이 전혀 없다. 또 김산하에게도 어린 시절 떠났던 엄마 권정희(김혜은)가 나타나 함께 서울로 가자고 하지만 그 역시 그럴 마음이 전혀 없다. 두 사람 모두 진짜 가족은 단지 핏줄이어서가 아니라 어려서부터 함께 시간을 보냈던 그들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비록 ‘조립식 가족’처럼 보일지라도.

‘조립식 가족’은 중국 후난TV에서 방영됐던 중국드라마 ‘이가인지명’의 리메이크 작품이다. 그래서인지 중국 특유의 신파적 감성과 반복적인 갈등 상황이 전개되는 면이 있다. 이들 ‘조립식 가족’을 위협하는 친부모들의 모습이 다소 작위적으로 위악을 부리는 장면들과 그럼에도 끈끈한 가족애를 보이는 장면들이 자주 등장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립식 가족’이 공감을 주는 건, 이 작품이 제시하고 있는 새로운 가족상이 우리에게도 의미있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이제 과거 같은 혈연 중심의 ‘가족이 최고’를 그리는 가족드라마는 거의 사라졌다. 삶이 바뀌었고 가족관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가족이 사라진 건 아니다. 그러니 우리 시대에 맞는 새로운 가족드라마들이 최근 들어 등장하고 있는 중이다. 리메이크작이지만 ‘조립식 가족’이 묻고 있는 ‘진짜 가족’의 의미가 특별하게 다가오는 이유다.  (글:일간스포츠, 사진:JTBC)

“비밀의 햇볕. 허허 좋네예.” - 이창동 ‘밀양’

밀양

“아저씨, 밀양이란 이름의 뜻이 뭔지 알아요?” 남편을 잃고 밀양에 정착하려 아들과 함께 내려온 신애(전도연)는 고장난 차를 고쳐준 종찬(송강호)에게 밀양의 뜻을 묻는다. 하지만 종찬에게 밀양은 ‘경기가 엉망이고, 한나라당 도시고, 부산이 가깝고, 인구는 많이 준’ 그런 동네다. 그에게 이름의 뜻 같은 건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냥 사는 동네일 뿐. 신애가 그 뜻을 종찬에게 알려준다. “한자로 비밀 밀, 볕 양. 비밀의 햇볕. 좋죠?” 그러자 종찬은 그제야 자신이 살던 동네의 이름이 그런 뜻이였다는 걸 알았다는 듯 허허 웃으며 말한다. “비밀의 햇볕. 좋네예.”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에 앞부분에 등장하는 이 장면은 앞으로 벌어질 신애의 비극과 그 속에서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그녀의 곁에 끝까지 남아있는 종찬의 존재를 에둘러 설명한다. 아들이 유괴되어 시신으로 돌아오고 그걸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던 신애는 종교에 귀의해 평화를 얻었다 생각하지만, 막상 유괴범을 면회하고 나서는 절망에 빠진다. 유괴범 역시 종교에 귀의해 용서받았고 평화를 얻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용서하지 않았는데 그 누가 먼저 그 인간을 용서할 수 있냐며 신애는 아파한다. 종교를 저주하고 피폐해져가는 신애를 구원해주는 건 과연 뭘까. ‘밀양’은 그것이 종찬 같은 존재라고 말한다. 늘 옆에 있어 우리를 살아가게 만들지만 그렇기 때문에 마치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존재들.

 

혼자 머리를 자르려는 신애에게 종찬이 거울을 들어줄 때, 카메라가 틸다운되며 바람에 날려 바닥을 뒹구는 머리카락과 음지에 버려진 것들을 비추는 햇살을 담은 엔딩이 긴 여운으로 남는 이 작품은 묻는다. 당신의 밀양 같은 존재는 누구인가. 또 당신은 누군가의 그런 존재가 되고 있는가.(글:동아일보, 사진:영화'밀양')

'옛글들 > 이주의 영화 대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 꿈, 내 인생  (0) 2024.11.25
새로운 돌파구  (0) 2024.11.18
비정상적인 보통  (0) 2024.11.03
따뜻한 국밥 한 그릇  (0) 2024.10.27
편견과 나다움  (0) 2024.10.21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