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에 불을 붙이는 밑그림 전문 허준호의 존재감

이 정도면 허준호는 작품의 ‘밑그림 전문’이라고 불러도 될 듯싶다. 허준호는 드라마든 영화든 주인공 역할로 등장한 적은 별로 없다. 대부분 악역이나 중요한 조연이 그가 연기해온 전문분야다. 하지만 그의 악역과 조연 역할은 그저 보조적인 것에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그 작품의 전체적인 정서나 분위기 혹은 팽팽한 긴장감 같은 것이 그의 연기로부터 부여된다는 점에서 그는 작품의 밑그림을 그려내는 숨은 주인공이 아닐까. 

'군주(사진출처:MBC)'

MBC 수목드라마 <군주>에서의 허준호가 그렇다. 사실 이 사극에서 편수회라는 조직이 갖는 존재감은 전체 이야기의 모티브라는 점에서 가장 중요하다. 왕의 뒤편에 서서 사실상 비선실세 역할을 하는 편수회의 국정농단으로 인해 파탄 나는 국가와 핍박받는 백성들이라는 이야기의 동기가 없다면, 이에 맞서 싸우며 스스로를 성장시켜 진정한 왕으로 돌아오는 세자 이선(유승호)의 모험담이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편수회의 수장으로서 대목을 연기하는 허준호는 그런 점에서 보면 이 편수회라는 조직의 비정함을 거의 혼자서 만들어내는 역할을 부여받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왕(김명수) 앞에서 예의를 갖추는 듯싶지만 실상은 왕을 허수아비처럼 여기는 인물. 그래서 결국 자신의 말을 듣지 않게 된 왕을 잔인하게 죽여 버리는 인물이 바로 대목이다. 

하지만 <군주>에서 대목이 더 살벌한 존재로 여겨지는 건 그가 돈과 권력이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꿰뚫고 있는 인물이라는 점이다. 가짜 세자를 허수아비 왕으로 세우려던 걸 군권을 쥐고 있는 대비가 막고 수렴첨정을 하자 대목은 돈줄을 죄어 군권마저 흔들 수 있다는 걸 보여 주려 한다. 편수회가 이끄는 양수청은 그래서 백성들을 상대로 돈을 빌려줬다가 일시에 회수함으로서 나라의 돈 가뭄을 만들어 버리려 한다. 결국 돈이 없으면 군사들도 흩어질 수밖에 없다는 걸 간파한 것. 

<군주>의 이야기는 한편의 게임처럼 구성되어 있다. 왕세자로 있던 이선은 부모를 모두 잃고 또 충신이었던 한규호(전노민)마저 자신의 잘못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만든다. 결국 죽을 위기를 간신히 벗어나지만 세자의 신분은 이제 저잣거리의 장사꾼 막내가 되어버린다. 그 밑바닥에서부터 다시 시작해 자신의 신분을 되찾는 이야기가 바로 <군주>다. 그런데 그 모든 이선의 이야기의 근거가 바로 편수회의 대목 때문에 비롯된 것들이다. 

허준호의 이런 존재감을 우리는 과거 사극 <주몽>에서 일찍이 발견한 바 있다. 주몽의 탄생 이전에 그의 길고 긴 모험담의 전사를 만들어낸 장본인이 바로 허준호가 연기한 해모수였다. 마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 같은 형상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해모수의 존재감은 그래서 <주몽>이라는 사극의 초반 동력을 만들기에 충분했다. 

사극뿐만이 아니다. 최근 개봉된 영화 <불한당>에서 허준호는 정통파 주먹의 보스 역할로 등장해 처연함마저 느끼게 하는 최후를 보여준 바 있다. 결국 그 장면을 통해 주인공들의 브로맨스가 시작된다는 점을 두고 보면 역시 허준호는 출연하는 작품마다 뒤편에 서서 실제 작품의 동력을 만드는 연기자라는 걸 확인하게 된다. 

옆에 서거나 아니면 반대편에 서서 빛나는 역할을 하는 것보다 중심에 서서 빛나는 건 어쩌면 더 쉬운 일인지도 모른다. 빛을 받는 주인공이 더 빛나는 순간은 그 반대편에 서 있는 그림자가 더 깊어질 때다. 허준호라는 연기자는 바로 그 깊어진 그림자다. 그것이 작품 전체에 드리워져 있어 힘을 만든다는 점에서 실질적인 주인공이라 해도 무방할.

임시완, 아이돌에서 연기돌, 연기돌에서 연기자로

이제 임시완에게 더 이상 아이돌이라는 지칭은 어울리지 않을 것 같다. 2012년 <해를 품은 달>에 어린 허염 역할로 잠깐 등장했을 때만 해도 그가 이렇게 빨리 성장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제국의 아이들이라는 아이돌 그룹의 멤버로서 곱상한 외모가 연기보다 더 많이 보였기 때문이다. 

사진출처:영화<불한당>

하지만 2013년 <변호인>에서 국밥집 아들 진우 역할로 분해 갖은 고문을 당하는 청년을 연기하는 임시완에게서 아이돌의 이미지는 말끔히 지워져버렸다. 그 아픔이 관객에게 그대로 전해질 정도로 그는 진우의 그 처연하기까지 한 모습을 연기했다. 텅 비어버린 듯한 눈빛은 바로 그 시대의 아픔을 고스란히 담아내기에 충분했다. 

연기자라는 호칭은 그러나 그렇게 호락호락하 게 주어지는 게 아니었다. 2014년은 그래서 임시완에게는 마치 롤러코스터처럼 추락했다 상승하는 연기의 진폭을 보여준 해였다. MBC 드라마 <트라이앵글>에서 그의 연기는 그다지 주목되지 않았다. 마치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캐릭터는 과장되게 느껴졌고, 당연히 그 캐릭터는 시청자들을 몰입시키지 못했다. 

하지만 그 해 말 <미생>이 다시금 그의 연기자로서의 진가를 끄집어냈다. 마치 자신의 이야기를 건네는 듯, 때론 안으로 감정을 누르고 때론 밖으로 터트려내며 임시완은 장그래라는 캐릭터를 통해 연기자가 되어갔다. 물론 그것은 너무 잘 맞는 옷이어서 그에게 넘어서야할 도전이 되는 캐릭터였다. 지금도 장그래의 잔상이 그에게서 느껴질 정도로.

그런 점에서 최근 개봉한 영화 <불한당>의 현수라는 인물은 이 장그래라는 옷을 벗고 임시완이 또 다른 옷을 챙겨 입었다는 점에서 그에게는 중요한 변곡점이 되는 캐릭터가 되었다. 작은 키에 어딘지 가녀리게까지 느껴지는 임시완의 이미지는 이 작품 속에서는 오히려 반전효과를 만들어냈다. 저렇게 예쁘장한 외모에서 어떻게 저런 폭발력이 나오는가가 놀라움을 줄 수 있을 만큼. 

마치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처럼 영화 도입 부분에 감옥에서 현수가 거구의 상대와 대결하는 장면을 보며 “어 저 놈 봐라”하며 짜릿한 쾌감과 끌림을 느끼는 재호(설경구)의 시선은 고스란히 관객들의 시선이 되었다. 그리고 그가 감옥을 나와 패거리들과 싸울 때 시계를 감은 주먹으로 상대방을 곤죽으로 만들어버리는 장면에서는 더 이상 연약한 이미지의 임시완은 사라져버렸다. 

<불한당>이 보여주는 재호와 현수의 피와 눈물이 범벅되는 브로맨스는 어떤 남녀 간의 멜로보다 더 진하게 그려진다. 그래서인지 남자들의 세계를 보여주는 액션과 그 속에서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상대방을 생각하는 마음을 담아내는 임시완의 연기는 굉장히 섬세하게 느껴졌다. 증오와 분노와 형제애 같은 정이 뒤범벅된 감정연기는 그래서 관객들을 그 인물 속에 빠뜨리기에 충분했다. 

자기 모습에 가까운 캐릭터를 연기해내며 연기돌이라 불렸던 임시완은, 이제 사뭇 상반된 캐릭터 역시 연기해내면서 온전히 연기자라 불러도 될 만한 성장을 보여줬다. 이제는 무대에서 노래하고 춤을 추는 것보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연기를 하는 모습이 더 익숙하고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변호인>부터 단 4년 사이의 일이라고 보기엔 놀라울 만큼의 성장이다.

‘쌈마이웨이’, 이 짠한 청춘들에게 기꺼이 빠져드는 까닭

이건 우정일까 사랑일까. 저건 쌈일까 썸일까. KBS 월화드라마 <쌈, 마이웨이>의 고동만(박서준)과 최애라(김지원)은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라 모르는 게 없을 정도로 가까운 친구사이. 그래서인지 두 사람은 남녀로서의 연애감정이라는 건 애초에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어 보인다.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대기 일쑤고, 쏘아붙이는 건 일상이다. 

'쌈마이웨이(사진출처:KBS)'

그런데 그렇게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인 듯 보이지만 상대방에 곤경에 처하거나 무시를 당하는 걸 보면 그들은 마치 자기 일인 양 나선다. 남자친구가 바람을 피운 사실을 알고 절망할 때도, 친구 결혼식에 갔다가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 대신 마이크를 잡았다가 그녀의 실체가 발각되어 남자들에게 무시를 당할 때도 최애라는 고동만을 찾는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고동만은 귀찮아하면서도 최애라에게 달려간다. 그건 친구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도움을 주는 우정처럼 보이지만, 슬쩍 슬쩍 선을 넘어 사랑 같은 감정이 뒤섞인다. 서로를 너무나 잘 알아 둘 다 꿈에서 멀어진 길을 걷고 있다는 것에 대한 깊은 공감이 있고, 그래서 상대방이 현실 앞에서 무시당할 때 마치 자기가 무시당하는 것처럼 화를 낸다. 무시당할 사람이 아니라고 상대방에게 하는 이야기는 그래서 마치 자기에게 하는 말처럼도 들린다. 

<쌈, 마이웨이>는 제목에서 드러나듯 현실이 ‘쌈마이’라도 ‘마이웨이’를 간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무슨 일인지 과거에 저지른 한 번의 실수로 국가대표 태권도 선수에서 멀어져 버린 고동만은 근근이 살아가지만 여전히 태권도에 대한 꿈을 접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그를 유일하게 인정해주는 코치의 도장 주변을 뱅뱅 돈다. 태권도에서 격투기로의 전향을 생각하며. 

한 때는 백지연 같은 아나운서를 꿈꿨던 최애라는 어쩌다 보니 백화점에서 손님들에게 인사하는 안내 일을 하고 있다.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마이크를 잡고 싶지만 이 청춘에게 현실은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고동만의 돌려차기와 최애라의 마이크. 그들이 꿈꿨지만 주어지지 않은 이 두 가지는 <쌈, 마이웨이>가 깔아놓고 있는 청춘들의 현실을 담아낸다. 

짠한 현실 앞에서 이 청춘들은 서로를 지지해준다. 눈물 흘리는 친구를 안아주고 등을 토닥여준다. 그리고 그것이 당연히 우정이라 생각하지만 그걸 바라보는 이들의 시선에서는 결코 우정의 차원이 아니다. 바로 이 지점이 <쌈, 마이웨이>가 갖고 있는 청춘들의 이야기에 덧붙여진 멜로가 피어나는 곳이다. 

<쌈, 마이웨이>는 특별한 소재나 대단히 놀라운 이야기를 갖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평범해 보이는 이 이야기에 마음이 가는 건 아마도 이 청춘들을 지지하고픈 마음이 생기기 때문일 것이다. 한 때는 저마다 큰 꿈을 꾸고 있었지만 어쩌다 현실에 날개가 꺾인 청춘들. 그래서 그들에 대한 지지의 마음은 마치 고동만과 최애라가 서로를 지지하는 마음으로 빙의하게 해준다. 이것이 짠하지만 설레는 이 청춘멜로에 빠져들게 되는 이유다.

예능블루칩 이상민, 하지만 과한 건 부족함만 못하다

최근 1년 사이 이상민은 예능블루칩으로 급성장했다. 이제 TV를 켜기만 하면 이상민이 나올 정도로 그가 출연하는 프로그램은 넘쳐난다. 가장 화제가 되고 있는 SBS <미운우리새끼>를 비롯해 <주먹 쥐고 뱃고동>, JTBC <아는 형님>, 채널A <풍문으로 들었소>, XTM <더 벙커>는 물론이고 새로 시작한 MBC <오빠생각>과 <섹션TV 연예통신>까지 무려 고정만 10개란다. 지상파에서 종편, 케이블까지 아울러 그는 한 마디로 제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아는형님(사진출처:JTBC)'

이렇게 된 것은 그가 지금의 예능 트렌드에 맞아 떨어지는 독특한 캐릭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2012년 Mnet <음악의 신>에 그가 등장했을 때만 해도 그 캐릭터는 독보적이긴 했지만 보편적인 느낌은 없었다. 사업을 하다 망하고 빚더미에 올라앉은 그였지만 그는 <음악의 신>에서 오히려 이런 실제상황을 웃음을 주는 ‘사기꾼 캐릭터’로 바꾸었다. 드러내놓고 사기를 치는 모습이 우스우면서도 동시에 그가 처한 현실적 상황과 연결되어 페이소스 같은 것까지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상민은 이처럼 자신이 처한 현실을 스스럼없이 드러냄으로써 오히려 대중들의 마음을 조금씩 파고들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당시 <음악의 신>을 통해 가진 캐릭터는 다소 마니아적이라는 점에서 한계가 있었다. 그런 한계를 벗어나게 해준 프로그램이 JTBC <아는 형님>이다. 한때 잘 나갔던 ‘형님들’ 중 한 자리를 차지한 이상민은 역시 그 빚더미에 올라앉은 자신의 처지를 캐릭터화 하는데 성공했다. 그래도 <음악의 신>과 달랐던 건 그가 강호동이나 서장훈 같은 현재 다른 예능에서도 활약하고 있는 인물들과 함께 함으로써 그 마이너적인 느낌을 상쇄시킬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드디어 그는 지상파에 제대로 입성했다. SBS <미운우리새끼>는 이상민에게는 제대로 날개를 달아준 프로그램이 아닐 수 없었다. 최근의 트렌드라고 할 수 있는 관찰카메라의 주인공이 된 데다, 어머니와 함께 출연한다는 점은 그가 가진 캐릭터를 시청자들이 보편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힘이 되어 주었다. 어머니의 관점에서 보는 빚에 허덕이는 아들의 모습은 고스란히 시청자들에게도 전파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찌 됐든 어려운 현실을 살아가기는 지금의 대중들도 마찬가지라는 점에서 이상민이 가진 ‘현실에 치이면서도 당당하게 살아가려 노력하는’ 모습은 지금의 정서와도 잘 맞았다. 저렇게 빚이 많은 사람도 열심히 살려 노력하는데 우린 그래도 나은 편이라는 상대적인 위로 또한 그 속에는 존재했다. 물론 그의 캐릭터가 주는 예능으로서의 재미도 빼놓을 수 없지만.

중요한 건 지금 괜찮은 주목을 받고 있는 이상민이 너무 과하게 빨리 소비되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는 점이다. 심정적으로 지지하는 마음을 갖게 된 것이 사실이지만 방송을 틀면 나올 정도로 한꺼번에 그런 이미지가 소비되다 보면 시청자들에게 금세 식상해질 수 있다. 그것은 자칫 역풍으로 돌아올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여러 방송을 있는 대로 다 하는 데는 그가 처한 현실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급해도 천천히 나가는 것이 더 오래 갈 수 있는 길이다. 그리고 그것이 어떤 면에서는 그가 정상적인 삶을 회복할 수 있는 더 빠른 길이 될 수도 있다. 적절한 균형과 속도조절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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