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스 온 파이어’, 걸그룹 오디션이 지겨웠다면 이 여성보컬그룹 오디션을 보라 

걸스 온 파이어

또 오디션이야? 아마도 JTBC ‘걸스 온 파이어’에 대한 시청자들의 선입견은 익숙하게 봐왔던 아이돌 오디션의 어떤 풍경이 아니었을까. 차례 차례 어디 만화를 찢고 나온 듯한 비주얼의 출연자들이 등장하지만, 어설픈 춤실력에 실망하거나 춤은 잘 추는데 노래실력은 엉망인 이들이 자신들의 아직 부족한 실력을 애써 매력으로 채워보려 안간힘을 쓰는 그런 오디션... 하지만 그건 ‘걸스 온 파이어’에 대한 단단한 착각이고 선입견이다. 

 

그런 선입견을 잘 알고 있다는 듯이, ‘걸스 온 파이어’는 첫방부터 1대1 맞짱승부를 통해 이 오디션이 그런 뻔한 걸그룹 오디션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걸 보여줬다. 스스로를 구례에서 올라온 돌+I라고 소개한 감담영이 연 첫 무대부터가 달랐다. 그의 무대는 마치 한영애가 시간을 되돌려 소녀가 되어 부르는 것처럼 자유분방했고 물론 만만찮은 노래실력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그래서 김담영이 무난하게 첫 번째 맞짱승부에서 승리해 다음 무대로 진출할 거라 여겨졌지만, 스스로의 가능성을 ‘미지수’라 부른 조예인이 기타를 치며 부르는 무대는 이런 예상을 모두 깨버렸다. 오디션 심사계의 ‘시조새’로 불리는 윤종신 심사위원이 극찬했던 것처럼 조예인의 목소리 톤은 독보적이었고, 중저음에서 고음까지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진성과 가성의 중간 정도를 내는 데서 나오는 공명감의 조절은 기가막혔다. 걸그룹? 이건 거의 보컬리스트를 뽑는 오디션에 가까웠다. 

 

실제로 ‘걸스 온 파이어’는 우리가 흔히 오디션으로 많이 봐왔던 걸그룹을 뽑는 그런 오디션이 아니다. ‘국내 최초 여성보컬그룹’을 결성하는 오디션이다. 따라서 끼와 열망은 대단하지만 노래는 적당히 춤은 어느 정도 하는 수준으로는 참여조차 하기 어려운 오디션이다. 반대로 노래는 기본 이상이어야 하고 춤이 아니라도 표현으로서의 퍼포먼스를 할 줄 알아야 하며 끼와 열망은 당연한 이들만이 가능한 오디션이다. 

 

이런 오디션이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두 번째 맞짱승부에 올라온 괴물토끼 윤민서는 아이브의 ‘일레븐’을 집착과 광기에 가득한 화자의 목소리로 표현해내 한 편의 뮤지컬 같은 무대를 만들었다. 가창력이 완벽하게 뒷받침 되어 있어 낯설 수도 있는 그 표현들이 선우정아 심사위원의 표현대로, ‘기술’의 차원을 넘어 ‘예술’이 될 수 있는 무대였다. 하지만 이토록 압도적인 무대를 선보여 괴물토끼가 아니라 ‘괴물’처럼 여겨졌던 윤민서가 당연히 압승할 거라고 생각했던 건 다음 무대를 펼친 ‘행복한 쿼카’ 최아임에 의해 깨져버렸다. 

 

박혜원의 ‘막차’를 자신의 이야기를 하듯 부른 최아임은 그 진심이 얹어진 무대로 모두를 몰입하게 만들었고, 발라드가 끄집어내는 슬픔의 감성을 모두에게 전파시켰다. 파워풀한 가창력의 소유자처럼 보이지만, 그걸 애써 강조하기보다는 꾹꾹 눌러 가사에 진심을 얹어 전하려는 그 모습이 오히려 더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윤민서라는 괴물의 무대와 박혜원이라는 감동의 무대. 물론 승패는 갈렸지만 승패가 그리 의미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훌륭한 무대들의 향연이었다. 

 

노래와 퍼포먼스만이 아니라 작사 작곡 능력을 갖춘 출연자도 돋보였다. 만만찮은 끼를 가진 중국에서 온 레타와 맞선 자작곡 ‘누워있고 싶다’를 선보인 자넷서가 그 주인공이다. 그의 무대는 마치 프로 가수의 쇼케이스를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한번 듣고 나니 2절부터는 ‘아 걍 다 때려치고 누워있고 싶다-’라는 후렴구를 따라부르게 됐다는 영케이 심사위원의 말이 실감되는 무대. 그냥 발표해도 차트에 오를 것 같은 공감가는 가사와 따라하고 싶은 훅이 느껴지는 곡을 오디션 무대에서 보게 될 줄이야. 

 

절친으로 참가했지만 라이벌로 이수영과 맞짱승부를 하게 된 김예빈의 무대도 돋보였다. 블루스 록 장르의 ‘Better babe’를 톡톡 터지는 탄산수처럼 시원시원한 고음의 매력으로 소화하며 뇌쇄적인 퍼포먼스까지 펼쳐보였다. 뮤지컬계에서 떠오르는 샛별로 이아름솔이 ‘천둥호랑이’라는 수식어에 걸맞게 제시제이의 ‘Mamma knows best’를 진짜 뮤지컬을 하듯 폭풍 가창력으로 소화했지만, 오디션만 이번이 네 번째라는 이나영이 자신의 진심을 차곡차곡 쌓아가며 부른 박정현의 ‘미안해’는 더더욱 진짜 뮤지컬 같은 무대를 보여줌으로써 모두를 감동하게 만들었다. 

 

3세대 아이돌 에이프릴의 메인보컬 출신 김채원과 맞붙었던, ‘그세계 아이돌’ 이송화의 무대도 충격 그 자체였다. 세계 최초 K팝 AI 아이돌 ‘이터니티’로 데뷔해 ‘얼굴없는 가수’로 활동해온 이송화는 레드벨벳의 ‘몬스터’라는 곡을 진짜 괴물의 탄생을 알리는 듯한 무대로 소화해냈다. 사이버 세상에 더 이상 머물지 말고 밖으로 나와달라는 MC 장도연의 재치 있는 멘트가 공감가는 실력자였다.

 

‘걸스 온 파이어’가 이른바 K팝이 아닌 ‘뉴K팝’을 주창하며 ‘여성보컬그룹’을 탄생시키겠다고 내세운 기치에는 ‘결국 중요한 건 본질’이라는 메시지가 읽힌다. 가수라면 노래를 잘해야 하는 게 기본이고, 또 그걸 잘 표현해내는 게 본질이라는 것. 화려한 퍼포먼스만이 아닌 진짜 마음을 건드리는 음악의 본질로 돌아가자고 이 프로그램은 말하는 듯하다. 아마도 오디션이 ‘거기거 다 거기’라는 선입견을 가진 분들이라면 이 프로그램을 한 번 보는 것만으로도 그 선입견을 깨주는 메시지에 깊게 공감하지 않을까 싶다. 첫방을 내놓은 것뿐이지만 벌써부터 다음 출연자들이 어떤 무대를 선보일지가 기대된다. (사진:JTBC)

‘눈물의 여왕’, 울지 않는 마녀 이미숙과 우는 남자들 김수현, 홍수철

눈물의 여왕

홍만대(김갑수) 회장은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휠체어를 몰아 계단 끝에서 자신을 죽음을 향해 내던지기 전, 그는 마지막으로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생을 마감했다. 자신이 죽어야 모슬희(이미숙)라는 마녀의 손아귀에 들어간 퀸즈 그룹의 모든 것들을 다시 가족들에게 되돌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왜 미소를 지으며 끝을 맺었을까. 복수의 의미도 담겨 있을 테지만, 가족들에게 보내는 따스한 마음의 의미도 있지 않았을까. 극단적인 선택을 결행하기 전, 그가 홍해인이 두고 간 녹음기에 남겨뒀을 메시지가 궁금해진다. 거기에는 아마도 그 미소의 의미를 이해하게 해줄 그의 마음이 담겨 있을 테니. 

 

tvN 토일드라마 ‘눈물의 여왕’은 제목에서도 느껴지지만 한 편의 ‘동화’ 같은 로맨틱 코미디다. 퀸즈가라는 왕궁에서 살아오던 공주 홍해인(김지원)은 온갖 시련을 맞이하게 된다. 시한부 판정을 받았고, 사랑했지만 그걸 표현하지는 못했던 남편 백현우(김수현)와 이혼한 데다, 모든 걸 모슬희라는 마녀에게 빼앗겼다. 하지만 그 위기는 홍해인에게 그간 잊고 있던 진정한 삶의 가치가 무엇인가를 다시금 깨닫게 해준다. 

 

퀸즈가에서 쫓겨난 백현우는 그걸 알게 해주는 흑기사 같은 인물이다. 그는 이혼했지만 홍해인 옆에 끝까지 남아 그의 행복을 위해 노력한다. 저 마녀가 장악한 퀸즈가를 되돌려 놓으려 한다. 그런데 이 흑기사 캐릭터는 우리가 동화에서 봐왔던 그 모습과는 사뭇 다른 면이 있다. 툭하면 눈물을 흘리는 흑기사다.

 

처가살이를 토로하며 술에 취해 흘리던 눈물은 어딘가 찌질해 보였지만 그의 눈물은 깊은 공감의 발현이라는 게 갈수록 드러난다. 홍해인을 너무나 사랑하고 그래서 그 도도하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얼굴 이면에 담긴 아픔이나 상처를 공감한다. 그래서 눈물을 흘리고 또 흘린다. 로맨틱 코미디에서 이토록 우는 남자가 주인공인 경우가 있었을까 싶을 정도다. 

 

그런데 그 눈물은 약해서 흘리는 게 아니다. 오히려 타인의 아픔을 이해하는 능력의 눈물이다. 그와 정반대 위치에 서 있는 모슬희나 그의 아들 윤은성(박성훈)이 눈물 한 방울을 보여주지 않는 모습과 대비해 보면 그 가치가 무엇인가가 드러난다. 자신이 원하는 걸 갖기 위해 아들마저 보육원에 보내버리면서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던 모슬희는 괴물처럼 그려진다. 비뚤어진 모성을 가진 이 괴물은 아들을 학대한 양부모를 죽인 건 자신이라며 그것이 아들을 위한 자신의 마음이라 말하는 자다. 어찌 보면 윤은성에 대한 연민의 감정마저 들게 만드는 괴물 모성의 모습이 아닌가. 

 

‘눈물의 여왕’에는 또 한 명의 우는 남자가 있다. 그는 홍수철(곽동연)이다. 모슬희와 함께 사기를 치고 도망쳐버렸지만 그는 아내 천다혜(이주빈)와 아들 건우를 그리워하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다. 바보처럼 윤은성의 사기에 넘어갔고 능력자인 누나 홍해인에 대한 열등감에 눈이 멀어 그런 사건을 만들었지만 이 남자가 사랑하는 방식은 순정 그 자체다. 돌아와 용서를비는 천다혜 잘못을 저질렀지만 홍수철에 의해 구원받는다. 가짜 얼굴로 연기하던 그의 눈에는 눈물이 피어난다.

 

‘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은...’ 같은 문구가 여전히 화장실에 붙어 있을 정도로 남자의 눈물은 여전히 흘리지 말아야 할 어떤 것으로 치부되는 세상이지만, ‘눈물의 여왕’은 정반대로 그 눈물이 가진 가치를 꺼내놓는다. 그래서 처음에는 ‘눈물의 여왕’이라는 제목의 의미가 눈물 흘리는 홍해인을 뜻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차츰 그 의미가 새로워진다. ‘눈물 흘리는 남자 백현우의 여왕 홍해인’이라는 뜻으로. 그러고 보면 모든 걸 되돌리기 위해 마지막 최후를 맞이하며 보였던 홍만대의 희미한 미소는 또 다른 눈물의 표현이 아니었을까 싶다. 

 

고 이어령 선생님은 ‘눈물 한 방울’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쓴 바 있다. ‘우리는 피 흘린 혁명도 경험해봤고, 땀 흘려 경제도 부흥해봤다. 딱 하나,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 눈물, 즉 박애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모르는 타인을 위해서 흘리는 눈물, 인간의 따스한 체온이 담긴 눈물. 인류는 이미 피의 논리, 땀의 논리를 가지고는 생존할 수 없는 시대를 맞이했다.’ 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할 눈물이란 없다. 그것만큼 가치 있는 것도 없다는 것을 이 드라마 속 새로운 남자들인 백현우나 홍수철 같은 인물들이 보여주고 있다.(사진:tvN)

지배종

 

지난 1월 KBS ‘다큐 인사이트’에서 2부작으로 방송된 ‘지속 가능한 지구는 없다’는 환경 위기의 문제를 전 지구적 차원에서 다룬 다큐멘터리다. 2부 ‘재활용 식민지’편은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로 불법 수출(?)되는 플라스틱 쓰레기 문제를 다뤘다. 값싼 플라스틱 쓰레기를 연료로 사용해 시멘트를 만들고 두부를 생산하는 공장을 16살 환경운동가 니나가 방문해 그 실태를 고발하는 내용이 담겼다. 값이 싸다는 이유로 플라스틱 쓰레기를 연료로 사용하지만, 그래서 쌓인 쓰레기들과 유해한 가스들은 인도네시아의 환경을 급속도로 오염시키고 있다는 내용이다. 니나는 산더미처럼 쌓인 플라스틱 쓰레기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며 어디서 온 것인가를 확인하는데, 미국, 유럽, 호주는 물론이고 우리나라에서 간 쓰레기들도 쏟아져 나온다. 

 

썩지 않는데다 태워도 유해가스가 나오는 플라스틱이 환경 오염의 주범이라는 사실은 이제 누구나 알고 있다. 그래서 플라스틱 재활용이 유일한 대안처럼 제시됐고 분리수거만 잘하면 문제가 해결될 거라는 믿음도 생겼다. 하지만 이건 사실이 아니다. OECD에 의하면 전체 플라스틱 쓰레기의 약 9%만이 재활용되고 19%는 소각되며 50%는 매립되고 22%는 통제를 벗어나 자연으로 흘러들어간다고 한다. 그러니 유일한 대안은 사실 플라스틱을 쓰지 않는 일이다. 인도네시아의 니나가 자국이 플라스틱 쓰레기로 채워지는 걸 전세계에 폭로하고 환경운동에 앞장서는 이유다. 

 

하지만 환경오염으로 인한 기후 변화가 전 지구적인 위기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고, 또 그것이 지구를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 않게 만들거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왜 우리는 이를 바꾸지 못할까. 거기에는 플라스틱에 의존해 흘러온 기존 산업들이 만만찮은 장벽으로 등장한다. 당장 지속 가능한 지구를 위한 선택으로 플라스틱을 전면 금지하거나 쓰지 않게 되면 이들 산업들은 위기를 맞이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실제로는 아니지만 ‘친환경’을 실천하고 있다는 식의 위장전술이 등장한다. 그러면서 소비자들이 갖게 되는 죄책감을 친환경 제품이라는 마크를 붙이거나, 재활용에 앞장서는 친환경 기업이라는 이미지를 더해 상쇄시킨다. 소비자들 역시 늘 해왔던 습관대로 소비하던 방식을 바꾸는 일이 쉽지 않다. 누구나 다 이대로 가면 위기가 닥친다는 걸 알면서도 세상이 바뀌지 않는 이유는 그 변화에 다양한 이익과 손실들이 부딪치며 갈등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최근 방영되고 있는 디즈니+ 오리지널 시리즈 ‘지배종’은 어째서 세상을 바꾸는 일이 결코 쉽지 않은가를 그 포스터에 담긴 문구 한 줄로 표현한다. ‘세상을 바꾼 자. 모두의 표적이 되다’가 그것이다. 근미래를 배경으로 새로운 인공 배양육의 시대를 연 생명공학기업 BF(Blood Free)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사건을 다룬 작품이다. 드라마는 인공 배양육이 왜 필요한가를 설득하는 BF 대표 윤자유(한효주)의 사업설명으로 시작한다. 우리는 그저 당연하다는 듯 고기를 소비하지만, 그 고기를 위해 무수한 소들이 사육되고 도축된다는 걸 마치 없는 사실처럼 여기며 살아간다. 윤자유는 그 과정을 눈앞에서 입체영상으로 보여주면서 환경 오염 문제나, 생명 윤리의 문제 같은 것들을 인공 배양육이 필요한 이유로 제시한다. 기업의 이름처럼 피(희생) 없이 생산된 고기를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시대. 얼마나 달콤한 이야기인가. 

 

하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친환경’이라는 포장지를 덧씌움으로써 소비의 죄의식을 상쇄시켰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던 플라스틱의 사례처럼, 인공 배양육도 일종의 기만술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들이 제기된다. 인공 배양육이 세균덩어리라는 소문이 떠돈다. 또한 윤자유가 사업설명을 하는 연회장 바깥에서는 이를 반대하는 시위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들이 든 피켓에는 ‘살인기업 BF 각성하라’라는 글귀와 더불어 ‘축산 다음 타깃은 어디?’라는 문구도 보인다. ‘식량을 위한 피’를 보지 않겠다고 주창하는 인공 배양육을 내놓은 생명공학기업에게 ‘살인기업’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분명하다. 인공 배양육의 탄생은 축산업자들의 도산으로 이어질거라는 것. 이처럼 세상을 바꾸려하는 일에는 만만찮은 반발과 도전이 이어진다는 걸 ‘지배종’은 보여준다. 플라스틱을 쓰지 말자고 쓰레기들을 하나하나 뒤져 그 출처를 밝히고 그 불법적인 일들을 폭로하는 16살 소녀 니나의 외침은 너무나 합당하고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것이지만, 그 맞은 편에는 플라스틱을 사용해 막대한 이익을 내고 있는 전 세계의 기업들이 서 있다. 그들은 소녀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척 하지만 실제로는 변화를 원하지 않고 그래서 심지어 이를 막기 위한 일들도 서슴지 않는다. 

 

변화에는 반발이 따른다. 이건 ‘지배종’을 쓴 이수연 작가가 지금껏 다양한 작품들을 통해 일관되게 그려온 세계의 역학이다. ‘비밀의 숲’이 검찰의 부패를 척결하고 그 조직을 개혁하려는 자와 이를 막으려는 세력과의 대결을 그렸다면, ‘라이프’는 병원에 대한 두 관점, 즉 생명을 다루는 곳이면서 자본의 논리에서 경영되 수밖에 없는 곳이라는 두 관점을 대변하는 세력의 대결을 그렸다. ‘지배종’ 역시 인공 배양육이라는 근미래에 화두로 대두될 수 있는 문제를 가져와 생명윤리와 환경문제로 포장되어 있지만 실상은 그 이면에 놓여진 기득권자와 새로운 세력 간의 대결을 그리고 있다. 

 

사실 정치가 요구되는 건 바로 이러한 저마다의 이익을 추구하는 이들 사이에서 벌어질 수 있는 갈등과 분쟁들을 대화와 타협으로 이끌어내는 일이다. 선거 때마다 등장하는 보수와 진보는 그래서 잘 들여다보면 변화를 요구하는 자들과 이를 원치 않는 자들 사이의 대결구도로 등장한다. 물론 보수든 진보든 자기 목소리를 내는 건 잘못된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서로의 입장을 들어보고 어떤 타협점을 찾아가는 길이 아니라, 편가르기를 통해 상대를 무시하고 무너뜨리려 하는 건 잘못된 일이다. 세상을 바꾸는 일은 어렵고 또 그 과정은 당연히 어려워야 한다. 정쟁이 아닌 진짜 정치를 해야 하는 이유다. 총선이 끝나고 민심이 드러난 현재, 국민의 선택을 받은 자들에게 필요한 게 바로 이것이다. (글:이데일리, 사진:디즈니+)

“넌 선택받은 자야. 이제 달라져야 해.” 마이크 미첼, 스테파니 스티네 ‘쿵푸팬더4’

쿵푸팬더4

“넌 선택받은 자야. 이제 달라져야 해.” 애니메이션 ‘쿵푸팬더4’에서 용의 전사 포에게 시푸 사부는 새로운 소명을 알려준다. 이제 용의 전사 대신 평화의 계곡의 영적 지도자가 되어야 하고, 자신을 대신할 후계자를 찾아야 한다는 것. 하지만 포는 용의 전사로서 모든 이들에게 추앙받으며 살아가는 그 익숙한 삶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다. 돈으로 행복을 살 순 없지만 만두는 많이 살 수 있다는 자족적인 삶에 머무르려 한다. 하지만 최강 빌런 ‘카멜레온’이 나타나 계곡의 평화가 깨지게 되면서 포는 모험을 떠나고 자신을 뛰어넘는 변화를 받아들이게 된다. 

 

‘쿵푸팬더’의 성공요인은 물론 ‘쿵푸 하는 팬더’라는 독보적인 캐릭터의 힘이 가장 크지만, 팬더 자체에 대한 전 세계적인 관심과 인기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최근 중국으로 가게 된 푸바오 열풍을 통해서 새삼 확인한 것이지만, 팬더에 대한 인기는 전 세계적이다. 팬더 외교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논쟁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떠나는 팬더에 눈물을 흘린 건 푸바오의 경우만이 아니다. 프랑스의 위안멍, 일본의 샹샹이 떠날 때도 똑같은 풍경이 벌어졌다.  

 

마침 그 빈자리를 포가 채웠다는 이야기들이 나올 정도로, ‘쿵푸팬더4’에 대한 남다른 관심은 푸바오 열풍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실제로 떠난 푸바오에 대한 아쉬움은 물론이고 새로운 터전에 잘 적응할 것인가에 대한 걱정이 커서인지, 새로운 변화를 요구받는 포의 이야기 또한 각별하게 느껴진다. 

 

중국 도착 직후 푸바오는 앞구르기만 반복하는 모습으로 많은 우려를 낳았지만 지금은 잘 적응하고 있단다. 그 지표로서 새 사육사가 내민 손을 잡는 모습이 사진으로 소개됐다. 푸바오의 ‘할부지’ 강철원 사육사는 새 환경에서 팬더가 손을 사육사에게 내미는 건 중요한 적응의 징표라고 한 바 있다. 변화를 수용한 결과라는 것. 마침 총선을 치러서일까. 푸바오와 새 사육사의 사진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변화를 요구하는 유권자들이 내민 손을 이제 선택받은 자들이 맞잡아야 한다고.(글:동아일보, 사진:영화'쿵푸팬더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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