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체될수록 강해지는 인과관계에 대한 욕망

'인셉션'을 만든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아마도 에셔의 그림들 혹은 영화 속에도 나오는 '펜로즈의 계단'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이 틀림없다. 에셔의 그림들을 한참 쳐다보고 있으면 갖게되는 느낌들, 즉 어느 것이 진짜이고 어느 것이 가짜인가가 불분명해지는 그 경계가 주는 순간적인 당혹감과 해방감을 이 영화는 잘 끄집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펜로즈의 계단'이 상승과 하강이라는 흐름을 무화시켜버렸듯이, '인셉션'이라는 영화는 꿈과 현실이라는 경계를 해체시킨다.

영화가 보여주는 장면들이나 진행되는 방식이 굉장히 복잡하게 느껴지지만, 사실 이 영화의 스토리는 그다지 복잡하지 않다. 누군가의 꿈 속으로 들어가 그 머릿 속에 숨겨진 사실을 끄집어내는 일을 하는 코브(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과거의 어떤 사건 때문에 현상수배되어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데, 부호이자 영향력이 있는 사이토(와타나베 켄)가 나타나 그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한다. 피셔(킬리언 머피)의 머릿속에 생각을 심어준다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겠다는 것. 그래서 코브는 팀을 짜서 피셔의 꿈 속으로 들어가는데 무의식에 의해 쉽게 발각되지 않기 위해 꿈 속의 꿈으로 몇 단계를 더 들어간다.

꿈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꿈이 가능하게 하는 그 비논리성은 어떤 해방감을 주면서도 보는 이를 혼동에 빠뜨린다. 게다가 단순히 꿈 하나로 침투해 들어가는 게 아니라, 꿈 속의 꿈을 무려 다섯 단계나 들어가기 때문에 이야기는 더 복잡해진다. 첫 번째 단계인 현실에서 두 번째 단계인 꿈으로 들어가 밴을 타고 총격전을 벌이고, 그 과정에서 다시 세 번째 단계의 꿈 속 배경인 호텔로 들어간다. 그리고 거기서도 또 다시 네 번째 단계의 꿈인 눈 속의 요새로 들어가고 마지막 다섯 번째 단계인 림보(무의식의 밑바닥)까지 들어가는 이 일련의 과정은 그 액션과 일련의 놀라운 장면들의 연속으로 지루할 틈을 주지 않지만 그러면서도 마치 저 '펜로즈의 계단'을 눈으로 좇는 것처럼 혼동을 준다.

한참 꿈의 꿈 속으로 계속 파고들어가다 보면 도대체 어느 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파악하기 어려운 상태에까지 이르게 된다. 현실과 꿈을 혼동하게 될 즈음, 그것의 진위를 알려줄 수 있는 유일한 장치는 토템이다. 팽이처럼 생긴 코브의 토템은 그것을 돌렸을 때 만일 꿈이라면 영원히 멈추지 않고 돌아간다. 꿈이라는 자유자재의 상상력의 공간 속을 활보하면서도 이 영화가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혹 이것이 현실이 아니고 꿈이면 어떡하지?'하는 그 두려움 속에서 인물들은 임무를 수행해나가고 저마다 현실로 빠져나오기 위한 안간힘을 쓴다. 이른바 '킥(꿈 속에서 깨어나게 하는 장치)'의 시간에 몰두하게 되는 것. 킥은 아리아드네(영화 속 꿈의 설계자의 이름이 아리아드네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의 실타래처럼 이 꿈의 미로에서 벗어나기 위해 반드시 쥐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 꿈과 현실을 구분하려는 욕망은 영화 속 인물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런 인물들의 이야기를 바라보는 관객의 입장 역시 어떤 것이 현실이고 어떤 것이 꿈인지가 명확했으면 하는 욕망으로 이 영화를 바라본다. 영화는 꿈이 가진 공간의 힘으로 인과관계들을 마구 뒤섞어놓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그걸 바라보는 관객의 앞뒤 전후 사정을 엮어놓으려는 욕망은 더욱 커진다. 전단계의 꿈에서 보았던 작은 오브제는 다음 꿈에서 다른 형태로 나타나는데, 거기에 대해 영화가 아무런 부연설명을 하지 않더라도 관객들은 자동적으로 그것을 연결해서 생각하게 된다.

정교한 논리적 장치로 해체된 만큼의 인과관계를 관객들이 스스로 연결하려는 욕망에 시달리다 보면 어느새 영화의 마지막 순간에 도달하게 된다. 그리고 그 부분에서 명확해졌다고 생각되는 인과관계, 꿈과 현실은 다시 오리무중 상태로 바뀐다. 꿈과 현실을 알려줄 토템 팽이가 그 진위를 알려주지 못하고 돌아가는 상태로 영화가 끝나버리기 때문에 관객들은 끊임없이 이 놀란 감독이 구축해놓은 '펜로즈의 계단'을 순환해서 뱅뱅 돌며 꿈과 현실에 대한 나름의 해석들을 내놓을 수밖에 없다.

이것은 '인셉션'이라는 영화만이 가진 관객을 끌어들이는 독특하면서도 강력한 매력이 된다. 마치 'A특공대'나 '매트릭스'를 보는 것 같은 장르적 재미가 그 재미의 근간을 만들어내면서도, 그 위에 꿈과 현실을 혼동시킴으로서 만들어낸 복잡한 인과관계는 관객으로 하여금 결과에 맞는 원인을 찾아다니게 만든다. 그만큼 우리 생각이 가진 인과관계의 욕망이 크다는 이야기다. 논리에 맞지 않는 장면이나 그림이 등장했을 때, 그 당혹스러움을 우리는 나름의 인과관계의 고리로 묶는다. 호텔 장면에서 무중력 상태로 액션을 벌이는 비논리적인 장면을 보면서 '아 그래 저건 전 단계의 꿈에서 지금 밴이 다리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그 상태이기 때문이야'하고 생각하듯이.

하지만 어디 세상의 모든 일들이 어찌 인과관계로 엮여져 있을까. 영화를 보러 가기 전 누군가는 갑자기 도로 한 가운데서 벌어진 자동차 사고를 목격했을 수도 있다. 그 충격적인 사건과 영화를 보는 일에는 아무런 연관관계가 없다. 그저 벌어진 사건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본능적으로 이 두 각각의 사건을 엮어 하나의 이야기로 구성하려는 욕망을 갖게 된다. 이것은 수많은 컷들과 신으로 사실은 툭툭 끊어져 있는 필름들이 하나로 편집되어 이야기를 구성하는 영화라는 장치의 가장 근원적인 작동원리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보면 놀란 감독은 바로 이 점 영화가 가진 작동원리를 영화적인 문법을 가지고 뒤집는 시도를 한 것이다. 마치 에셔가 그린 '펜로즈의 계단'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 시도의 완성자는 놀란이 아니고 관객이다. 관객은 이 혼동의 영화 속으로 들어가 영화가 논리로서 오히려 해체해놓은 환상적인 장면들에 당혹스러워 하면서도, 영화를 보러온 자로서 익숙한 인과관계 엮기의 노력을 통해 오히려 꿈과 현실을 구분하려는 노력 자체가 무위에 이른다는 것을 알게 된다. 즉 누군가 바라보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이 '인셉션'이라는 내적 논리의 세계는, 그걸 바라본 관객들에 의해 비로소 완성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복잡한 영화(사실은 복잡해 보이는)에 이토록 많은 관객이 든 것은 바로 이런 이 영화만의 독특한 작동방식 때문이다. 우리는 영화를 보며 놀라운 장면에 당혹스러워하고, 그 당혹스러움을 넘어서기 위해 끊임없이 인과관계를 스스로 만들어내다가, 어느 순간 그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고 극장을 나서게 된다. 만일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자신이 들어왔던 그 극장의 분위기가 어딘지 낯설게 여겨졌다면 그것은 바로 이 에셔의 그림처럼 뱅뱅 도는 ‘인셉션’이라는 영화의 의도가 제대로 먹혔다는 반증일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장황한 이 글 역시 그 의도대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주말극의 새로운 도발, 착한 주말극이 반가운 이유

'글로리아'의 첫 장면은 요즘 드라마에서는 보기 드문 달동네 풍경에서 시작한다. 그 불빛이 반짝거리는 동네의 원경에서 안으로 들어가면 새벽부터 일어나기 위해 맞춰놓은 서너 개의 알람시계가 시끄럽게 울어대고, 주인공 나진진(배두나)이 부스스 일어난다. 그녀 옆에서 같이 일어나는 언니 나진주(오현경)는 어딘지 상태가 온전치 못하다. 척 봐도 알 수 있는 나진진의 곤궁함. 하지만 그녀는 씩씩하게 새벽부터 신문배달에 김밥장사, 게다가 세차 알바까지 분주한 시간을 보낸다. 가끔 진주가 사고를 치지만 진진은 그렇다고 절망하지 않는다.

반면 이 달동네 풍경과 대비되는 또 다른 그림으로 '글로리아'는 시작한다. 그것은 어딘지 절망적인 얼굴로 비행기에 앉아 있는 정윤서(소이현)다. 그녀 옆에 우연히 앉게 된 이지석(이종원)의 말대로 그녀는 "창문이라도 열려 있으면 꼭 뛰어내릴 것 같은 표정"이다.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정황으로 보면 그녀는 하고 싶던 발레를 못하게 되었다. 나진진과 비교해보면 절망의 이유조차 될 수 없는 것이지만, 그녀는 심지어 자살까지 생각한다.

달동네의 이웃들은 가족 같다. 사고뭉치지만 하동아(이천희)는 진진의 오빠나 되는 것처럼 그녀를 챙기려 들고, 그의 조카인 하어진(천보근)은 아침마다 진진의 김밥 장사를 돕고 진주와는 연인(?)처럼 친하게 논다. 김밥을 만들어 진진에게 납품(?)하는 셋집 주인 오순녀(김영옥)는 진진의 할머니 같다. 셋집에서 살며 나이트클럽 '추억 속으로'에서 일하는 손종범(이성민)이나 밴드마스터인 이윤배(김병춘), 웨이터인 박동철(최재환) 역시 이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가족의 일원이다. 그들은 가난해도 가족 같은 끈끈한 정이 있다.

반면 정윤서의 집안이나 이강석(서지석)의 집안은 모두 마치 모래알 같은 관계를 보여준다. 정윤서의 엄마(정소녀)는 딸을 제대로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윤서가 자살을 기도하자 그녀는 "사는 게 힘들어서 수면제 없이는 살 수 없는 나도 살아!"하며 딸을 나무란다. 이강석은 집안에서 이른바 서자다. 그의 친모는 자신을 찾아주지 않는 강석의 아버지 이준호 회장(연규진)의 관심을 끌려고 늘 사고를 친다. 아마도 그래서 홍콩으로 보내졌지만 질리게 술 마시고 도박하고 하는 것도 질려버린다. 그녀는 사는 게 너무너무 지겹다고 말한다. 서자 취급받는 이강석은 의붓형제인 이지석이 귀국하자마자 자신의 자리를 빼앗자 절망한다.

이 피 한 방울 안 섞여도 가족처럼 지내는 달동네 가족들과, 가족이란 테두리로 묶여있어도 모래알처럼 반목하는 상류층 가족들은 '글로리아'라는 드라마의 선명한 주제의식을 그대로 드러낸다. 돈 천 만원이 없어서 감방에 가게 된 진진을 빼내기 위해 전전긍긍하다가 결국에는 진진의 월셋방 보증금으로 문제를 해결한 것을 알게 되자 절망하는 진진에게 "그 천 만원 없다고 사람이 죽겠냐? 지금까지 살던 것처럼 어떻게든 살겠지 뭐."하고 말하는 하동아의 대사는 이 드라마가 가진 정서를 말해준다.

절망의 바닥에서도 서로를 위무해주며 어떤 희망을 버리지 않는 것. 달동네 월셋방이지만 기타 하나 들고 "떡볶이를 사랑한 계란. 떡볶이 당신을 닮고 싶어서 난 하얀 얼굴에 고추장까지 뒤집어썼지. 아- 무정한 당신은 어묵에게로..." 같은 얼토당토않지만 이웃들을 웃게 만드는 노래를 멈추지 않는 것. 나진진의 말대로 솔잎을 먹고 살게 태어난 송충이라도 태어난 이유는 있는 법. 그래서 '추억 속으로'라는 한 물 간 나이트클럽은 이들에게는 새로운 희망의 무대가 된다.

"너희들은 여기가 삼류 나이트라고 비웃겠지만 난 아냐." 이 한 물 간 나이트클럽을 여전히 쥐고 놓지 않는 정우현(이영하)은 그래서 이 '글로리아'라는 조금은 구식의 드라마를 여전히 손에 쥐고 어떤 희망을 꿈꾸는 정지우 작가의 분신처럼 보인다. 이것은 세련된 상류층의 이야기들로 우리의 눈과 귀를 자극해왔던 주말극들에 대한 신선한 도발이다. '글로리아'라는 착한 주말극이 반가운 이유는 그 때문이다.

'해피투게더' 속 유재석, 박명수, 박미선, 신봉선의 진면목

'해피투게더'의 고정MC 네 사람은 지금 예능 세상에서는 아마도 가장 핫한 인물들일 것이다. '무한도전'과 '놀러와', 그리고 새로 시작한 '런닝맨'까지 합쳐 무려 일주일에 네 편의 예능 프로그램을 자기 식으로 소화해내고 있는 유재석은 물론이고, '무한도전'과 최근에 주목받는 '뜨거운 형제들'로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 박명수, '해피투게더'를 통해 아줌마 파워를 보여주고는 '세바퀴' 같은 주말 예능의 강자를 이끌고 있는 박미선, 그리고 여성 개그맨으로서 '패밀리가 떴다2'에 이어 '영웅호걸'에도 출연하고 있는 신봉선까지 '해피투게더'는 실로 쟁쟁한 MC들의 경연장이라 할만하다.

하지만 정작 이 당당하고 화려해보이기까지 하는 MC들이 '해피투게더'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지극히 소박하고 심지어 지질해 보이기까지 하다. '무한도전'이나 '뜨거운 형제들'에서 때로는 독하게까지 느껴질 정도로 버럭 대고 상대방을 몰아세우던 박명수는 '해피투게더'에 앉기만 하면 심하게 위축된 중년 남자로 돌아간다. 다닥다닥 붙어 앉을 수밖에 없는 자세지만 그래도 심하게 쪼그리고 앉은 그는 유재석이 만들어놓은 멍석 위에서 바보처럼 웃거나 스스로를 아낌없이 망가뜨림으로써 찾아온 게스트들을 편안하게 만들어놓는 역할을 한다.

집단토크쇼 '세바퀴'에서 그 집단적인 게스트들을 좌지우지하며 때론 아줌마 특유의 뻔뻔함으로 톡톡 쏘기도 하고, 때론 뻣뻣한 몸으로 춤을 추는 등의 손발이 오그라드는 몸 개그를 선보이는 박미선도 마찬가지. 그녀는 '해피투게더'에 앉으면 얘기 들어주는 푸근한 아줌마로 변신한다. 때론 엉뚱한 소리를 함으로써 면박을 받기도 하는 그녀 역시 이 프로그램에서는 모든 촉수를 게스트의 일거수일투족에 맞추고 있다. 이것은 가수들이 나오면 여지없이 망가지는 춤으로 분위기를 띄우고 젊은 세대 특유의 발랄함과 나이 든 세대까지 끌어안는 특유의 입담을 가진 신봉선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그녀 역시 '해피투게더'에서는 '영웅호걸' 같은 조금은 독하달 수 있는 프로그램에서 보여주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편안함을 선사한다.

이것은 이미 한없이 자신을 낮추고 상대방의 캐릭터를 순발력 있게 콕콕 찍어내는 것으로 그것이 캐릭터로 굳어져 있는 유재석도 예외는 아니다. 그다지 새로울 것은 없지만, 그 특유의 편안함은 '무한도전'이나 '런닝맨' 같은 때론 절박해보이기까지 하는 상황보다는 '해피투게더'에서 더 잘 드러나는 편이다. 유재석의 진두지휘 아래 네 명의 MC들이 만들어내는 조합은 그래서 게스트들에게 유독 친절한 '해피투게더'만의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세대와 성별이 아무리 달라도 이 속에 들어오면 누구나 무장해제 되고 마는 그 분위기.

독한 예능들이 경쟁적으로 등장하는 상황에서 그 예능을 이끌어가는 MC들 역시 독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일까. '해피투게더'라는 마치 친정 같은 편안함을 연출하는 프로그램 속으로 들어온 이 네 명의 MC들의 모습이 이들의 진면목이라 느껴지는 것은 말이다. 경쟁 사회 속에 내던져진 자극의 피곤함에서 벗어나자 오히려 더 드러나는 진가처럼. 이것은 지금 목요일 밤 예능의 선두주자로서 17%에 가까운 시청률을 내고 있는 '해피투게더'가 가진 독특한 아우라라 할 수 있다. 이런 아우라 속에서 진가를 발휘하는 MC들의 진심이 시청자들의 마음에 닿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나쁜 남자', 유리가면 뒤에 숨겨진 자본의 얼굴

'여기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이들이 있다. 기억에서 조차 사라진 이들은 이렇게 작고 초라한 죽음으로 남아있는데 그들은 죽음으로 몬 사람들은 여전히 평온하다...(중략) 그들에게서 모든 걸 빼앗을 수만 있다면 난 기꺼이 악마이길 선택한다. 신이 그들 편이라면 악마는 나의 편이다. 나는 아무 것도 두렵지 않다.' '나쁜 남자'의 심건욱(김남길)이 살해된 부모의 묘 앞에서 오열하며 하는 이 내레이션은 일종의 선언문 같다. 심건욱은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다른 사람 인생 따위는 벌레보다 더 하찮게 여기는 해신이라는 그 껍데기를 쓴 그 인간들"을 무참히 부숴버릴 것이라 선언한다.

도대체 해신(으로 대변되는 인간들)은 무엇이고, 그들이 심건욱과 그 가족들에게 한 짓은 무엇일까. 그들이 무엇을 했기에 심건욱이라는 남자를 나쁘게 만든 걸까. 어린 시절 그를 입양했다 친자식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진 후 파양했다는 사실 때문일까. 아니면 그렇게 파양되면서 돌아가려던 부모마저 죽음에 이른 그 비극적인 운명 때문일까. 물론 그것이 심건욱에게 벌어진 비극적인 사건이지만 그것이 이 나쁜 남자가 그토록 부숴버리려는 해신의 실체를 전부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해신은 좀 더 보편적으로 바라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의 얼굴을 대변한다.

높은 빌딩과 화려한 파티, 값비싼 스포츠카와 요트, 갖고 있지만 사용하지도 않는 오피스텔. 해신이라는 자본이 가진 외모는 실로 유혹적이다. 거기 살아가는 이들은 명품백에 우아한 옷, 게다가 자본에 의해 잘 관리된 외모로 보는 이들을 선망하게 만든다. 문재인(한가인)이라는 캐릭터는 우리 같은 보통 사람의 시선으로 이 해신을 기웃거린다. 이 단단한 자본의 틀 안에서 태생적으로 평범하게 살도록 운명 지워진 그녀가 홍태성(김재욱)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하고 신여사(김혜옥)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이유는 그 해신이라는 자본 속으로 자신도 편입되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의 판타지일 뿐이다. 홍태성에게 접근해 그 어떤 선을 넘어서는 순간, 신여사는 그녀의 뺨을 때리며 "네까짓 게 뭔데 선을 넘어오려고" 하느냐며 다시 선을 긋는다. 그렇게 모욕을 당하면서도 다음날 다시 회사에 출근한 그녀는 오히려 신여사에게 사과를 한다. 잘못한 것도 없지만 생존하기 위해서. 우리가 문재인이라는 조금은 속물적인 캐릭터에 깊이 공감하는 이유는 그녀가 우리 같은 보통 샐러리맨들의 삶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매번 자본의 세계 속으로 출근해 때론 모욕을 받으면서도 그 쥐꼬리 만한 월급으로 대변되는 자본의 줄 한 자락을 잡기 위해 오히려 고개를 숙이며 살아가고 있지 않나.

해신으로 대변되는 자본의 추악한 이면을 드러내기 위해 그 유리가면을 깨버리려는 나쁜 남자 심건욱은 경험적으로 그 실체를 아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 역시 이 자본의 욕망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래서 문재인이 홍태성에게 접근하고 그 해신으로 편입되려는 욕망을 이해한다. "나는 어떻게든 홍태성이랑 결혼해서 저 사람들 가족으로 만들 테니까. 나까지 밟고 올라오고 싶으면 어디 니 마음대로 한번 해봐." 심건욱이 해신에 복수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문재인이 그에게 하는 이 말은 그래서 자본에 대한 두 태도의 대결처럼 보인다. 편입되려는 욕구와 파괴하려는 욕구. 이 양반감정은 우리네 현대인들이 자본에 대해 동시에 갖는 두 가지 태도를 그대로 보여준다.

사실 심건욱이 본래 홍태성이었다거나 그렇지 않다거나 하는 문제는 극적 재미를 주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 드라마가 전하려는 메시지에는 그다지 중요한 건 아니다. '나쁜 남자'가 말하려는 것은 겉보기에는 우아해 보이지만 그 실체는 추악한 해신이라는 얼굴을 낱낱이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재인이 사표를 내고 나오면서 신여사에게 "멀리서 봤을 때 그 우아해보였던 모습의 실체를 본 게 가장 실망스러웠던 일"이라고 말하는 건, 그녀 역시 이제 심건욱이라는 나쁜 남자를 통해 막연히 동경했던 세상의 실체를 보게 됐다는 걸 말해준다.

그래서 '나쁜 남자'는 마치 제목만 두고 보면 현 트렌드를 반영하는 멜로처럼 보이지만 그 멜로 이면의 사회극을 담고 있는 드라마다. "나쁘다"고 스스로 말하지만 진짜 나쁜 것은 그를 그런 '나쁜 남자'로 만든 세상이다. 물론 드라마는 후반부에 이르러 신여사로 대변되는 절대악에 의해 만들어진 불행한 한 가족사로 회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래도 이 드라마가 벗겨낸 자본의 유리가면은 여전히 우리들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든다.

멜로라는 가면을 쓰고 사회의 부조리함을 거침없이 끄집어낸 '나쁜 남자'는 이 장르를 넘나들며 능수능란하게 이야기를 전개해낸 대본의 힘과, 미스테리와 스릴러적인 요소에 절절한 멜로를 잘 연결한 연출력, 그리고 무엇보다 김남길에서부터 오연수, 한가인, 김재욱은 물론이고 드라마를 팽팽하게 만들어낸 악역으로서의 김혜옥 같은 연기자들의 발군의 연기력(사실 이 드라마를 통해 발견된 것이나 다름없는)이 잘 어우러져 보기 드문 수작을 만들어냈다.

"어떻게 천 원짜리도 하나 안 갖고 다니냐. 동그라미 하나 적다고 무시하면 못써요." 재인의 동생 원인(심은경)의 요구에 홍태성이 지갑에서 오만 원짜리를 꺼내 주자 그녀가 건네는 이 말은 유머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안에 깊은 페이소스를 담고 있다. 뭐든 손만 내밀면 다 가질 수 있고 할 수 있는 돈. 하지만 그래서 추악해질 수 있는 돈의 세계는 우리가 늘 경험하는 바로 그 세계의 실체다. 우리가 '나쁜 남자'에 깊게 공감했던 이유는 바로 이 세계를 나쁜 남자의 시선으로 들여다봤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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