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로망과 남자의 로망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이 욕망하는 캐릭터의 트렌드는 달라지기 마련. 최근 두 아이콘이 그 트렌드의 정수를 헤집는 중이다. 하나는 ‘궁’의 명랑소녀에서 ‘커피 프린스 1호점’의 미소년으로 온 윤은혜, 그리고 또 하나는 ‘왕의 남자’의 미소년에서 ‘개와 늑대의 시간’의 남자로 온 이준기다. 이 두 아이콘의 변신은 이 시대 남녀 각각의 로망을 끄집어낸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청춘 멜로의 진화, 명랑소녀에서 미소년으로
‘커피 프린스 1호점’의 고은찬(윤은혜)은 남장여자. 겉모습은 남자이고 실제는 여자이니 남자와의 트렌디한 연애는 애초부터 글러먹었다. 그래서 이 남장여자는 한참을 우정과 의리로 우회해 사랑을 찾아가는 중이다. 그런데 그 사랑의 과정을 담은 청춘 멜로 드라마의 캐릭터가 가진 색다른 결은 굉장한 파괴력을 갖고 있다. 그것은 기존 멜로 드라마들이 트렌디해지면서 주지 못했던 설렘 같은 것이다. 마치 잊고 있던 청춘의 한 때를 기억하며 가슴이 뛰는 느낌을 갖는 것. ‘커피 프린스 1호점’은 한 마디로 불감증에 걸린 가슴을 ‘두근두근’하게 만드는 드라마다.

그런데 왜 하필 남장여자라는 캐릭터였을까. 바로 여기에 해답이 있다. 여성 캐릭터의 진화는 여성들의 사회진출과 함께 비례적으로 변화를 거듭해왔다. 과거 최루성 멜로 드라마 속의 여성 캐릭터는 눈물 하나로 충분히 당대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여성 캐릭터들은 신파로 오인 받는 눈물을 거두고 가슴 설레는 신데렐라의 로망을 꿈꾸게 되었다. 신데렐라는 차츰 가녀린 모습에서 가난하지만 씩씩한 명랑소녀로 변신했고 이 부분이 윤은혜가 등장하는 시점이다. 소녀장사 이미지의 윤은혜는 ‘궁’의 채경을 만나서 명랑소녀 전성시대의 정점을 보여줬다.

하지만 이 또한 남성에 의해 거두어지거나 보호받는 캐릭터로 여전히 남성의 그늘이 남아 있었다. 완전히 남성의 테두리를 벗어나 오로지 독립적인 여성으로서 오히려 남자를 선택할 수는 없는 걸까. 여성의 사회진출이 남녀관계의 진정한 동등함을 요구할 때 윤은혜는 명랑소녀에서 미소년으로 변신했다. 남장여자가 되자 먼저 종속적이던 여성의 모습은 사라졌다. 그들은 의리와 우정으로 만남을 시작하지 구질구질한 남녀관계로 서로를 작업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이 고은찬이란 캐릭터는 그러면서도 두 남자를 한 손아귀에 쥐고 있는 캐릭터란 점이다. 여기가 여성들의 로망을 살짝 드러내는 부분이다.

전문직 장르 드라마의 부활, 미소년에서 남자로
반면 ‘개와 늑대의 시간’의 이수현(이준기)은 평범한 듯 보이면서도 강력한 카리스마를 내재한 캐릭터다. 눈앞에서 킬러에 의해 어머니가 살해되는 장면을 목격했으니 애초부터 평탄한 삶은 글러먹었다. 그래서 일상에 지쳐 나른한 남성들의 아드레날린을 자극해 칼과 총알이 날아다니는 모험의 세계로 인도할 이 오딧세우스는 태국이라는 이국적인 공간 속에 온 몸을 던지는 중이다. 그런데 이 평탄한 삶을 던져버리고 거친 복수의 길로 뛰어든 이수현이란 캐릭터는, 사회적으로 고개 숙인 남성들의 피를 끓게 하는 구석이 있다.

이준기는 왜 그의 명성을 만들어준 미소년이란 캐릭터를 그다지도 버리고 남자로 서고 싶었을까. 사회의 남녀 성차가 사라지는 것과 비례해서 드라마 속 남성캐릭터들은 마초적인 캐릭터에서 한없이 미소년으로 변모해왔다. 그것은 드라마의 주 시청층이 여성이라는 점에서 그 여성 캐릭터의 변화에 발맞춰 변모된 결과. 남성 캐릭터들은 한없이 친절해졌고 심지어 울기 시작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사극과 전문직 장르 드라마에서 남성시청자들의 존재가 증명된 뒤, 남성 캐릭터는 다시 카리스마의 부활을 예고하고 있다. ‘주몽’이나 ‘하얀거탑’은 끝없이 욕망을 분출하는 남성의 로망이 투영된 드라마다.

최근 들어 등장했던 ‘히트’나 ‘에어시티’같은 전문직 장르 드라마들은 남성 캐릭터들은 다시 미소년으로 갈아치웠다는데 있다. 멜로와 장르 드라마의 부조화에서 불거져 나온 문제의 근원은 남성 캐릭터가 너무 친절하다는 점이다. 이준기가 미소년의 대명사로 등장한 것은 한창 남성 캐릭터들이 예뻐지다 그 정점에 올랐던 2006년. ‘왕의 남자’의 공길(이준기)은 사실 그 예쁘게 우는 남성 캐릭터의 극점이었다. 그것은 이준기라는 연기자의 성공과 동시에 커다란 족쇄를 의미했다. 그 이미지를 버리려 남자가 되려는 이준기라는 연기자의 축과, 남성의 로망을 다시 끄집어 내줄 새로운 카리스마가 필요해진 전문직 장르 드라마라는 축이 만난 것이 ‘개와 늑대의 시간’이다. 여기서 이준기가 연기하는 이수현이란 캐릭터는 과거의 그저 마초적이기만 한 카리스마가 아닌, 겉으로는 공길 같은 부드러움이 있지만 내적으로는 야수 같은 강렬함을 가진 카리스마를 갖고 있다.

여자의 로망과 남자의 로망
재미있는 것은 이 두 연기자의 이미지 변신이 한 발작이 아닌 반 발작 정도의 지점에 있다는 점이다. 윤은혜는 과거의 이미지를 그대로 가져왔지만 캐릭터가 주는 소명대로 소년의 이미지를 부가시켰다. 이준기는 여전히 미소년의 풍모를 가졌지만 순간순간 숨겨진 야수성을 보여준다. 이렇게 된 것은 이 두 연기자가 자신의 이미지 변신과 연기자로서의 평가를 제대로 받기 위해 들인 치열한 노력의 결과가 아닐 수 없다. 이 한 발작이 아닌 반 발작이란 의미는 이들의 변신이 단지 오버에 의해 억지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방증한다.

멜로드라마의 쇠퇴 이후 그 대안처럼 등장한 전문직 장르 드라마의 부침은 이제 이 두 장르의 공존을 모색하는 시기로 넘어가는 듯 하다. 그것은 여성 시청자층으로 대변되던 과거에서 점차 남성 시청자층이 늘고 있는 현재가 만나는 지점이다. 그 핵심에는 여자의 로망과 남자의 로망이 있고 그걸 대변하듯 등장한 연기자들은 바로 윤은혜와 이준기다.

‘디워’라는 블록버스터의 재미는 어디서 오나

주로 게임업계에서 두각을 나타난 우리네 CG기술은 주로 해외 게임업체들의 하도급 형태로 공력을 쌓아왔다. 해외 게임업체들이 우리나라 CG 샘플을 보고 놀라는 것은 ‘그 정도의 제작비로 어떻게 이렇게 대단한 CG를 만들어내느냐’는 것이었다. 이런 당시의 CG 기술들은 이후 게임업체들에 의해 활용되면서 지금의 우리네 게임산업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 커다란 견인차 역할을 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영화 쪽에서의 CG 활용은 제한적이었다. 주로 폭파장면 같은 특수효과쪽에 활용은 되었지만, 전략적으로 CG를 활용한 블록버스터를 만들어 전 세계를 공략하는 할리우드 같은 시도는 별로 없었다. 그만한 제작여건도 거의 전무인 상태인데다 투자는 어불성설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심형래 감독이 들고 나온 ‘용가리’는 사실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것은 실제로 총체적인 부실로 드러났다. 스토리는 둘째치고 CG는 실감나지 않았고 출연한 인물들조차 연기력 논란을 일으킬 정도였다.

당시 CG가 실감나지 않은 것은 캐릭터를 모델링하는 능력이나 동작을 구현하는 애니메이션 능력이 떨어져서가 아니었다. 문제는 할리우드가 가진 CG와 실사를 합성하는 기술과 노하우가 부재했기 때문이다. 절치부심한 심형래 감독이 ‘디워’의 어떤 부분에 모든 정력을 쏟았을 지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그리고 그 노력은 실제 결실로 나타났다. ‘디워’가 보여준 CG와 실사의 합성 노하우는 아직까지 우리 영화가 보여주지 못한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아마도 CG에 관심이 있거나 같은 업계에 일하는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본다면 먼저 그 압도적인 CG에 혀를 내두를 것이다.

하지만 시사회 이후 ‘디워’에 계속 제기되고 있는 문제는 스토리다. 기자들이나 평론가들의 반응은 하나 같이 스토리가 엉성한 점을 아쉬움으로 꼽았다. 여기에 대해서는 심형래 감독조차 인정한 바이다. 그의 논지는 ‘스파이더맨’이나 ‘트랜스포머’, ‘킹콩’, ‘쥬라기공원’, ‘인디펜던스데이’를 예로 들어 그 영화들의 스토리 역시 별 것 아니며, 블록버스터는 스토리와 상관없이 볼거리만으로도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논지는 지금 인터넷에서 ‘디워’를 두고 벌어지는 설전의 중심에 서 있다.

실제로 최근 할리우드에서 개봉했던 일련의 블록버스터들, ‘스파이더맨3’, ‘캐리비안의 해적3’는 물론이고 ‘트랜스포머’까지 시나리오의 스토리로 보면 그다지 대단할 것 없는 전개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것은 심형래 감독이 얘기하듯이 블록버스터(아마도 SF나 환타지 블록버스터를 말하는 것일 것이다)의 재미가 인물이나 뒤통수를 치게 만드는 기발한 스토리 전개 같은데 있는 게 아니라 실상은 볼거리에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할리우드가 상상력을 자극하는 대형 CG에 엄청난 물량을 투여하고 그 위험부담을 맥도날드 같은 다국적기업과 나누며, 전 세계 배급망을 확보해 개봉 1,2주차에 모든 마케팅비용을 쏟아 부어 투자금을 회수하고 수익을 올리는 과정 속에서, 저변을 되도록 넓히기 위해 스토리는 절대로 복잡해서는 안 된다. 단순한 스토리에 대신 영화는 철저히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한 재미에 집중해야 성공 가능성이 높아진다. 블록버스터가 지향하고 있는 지점은 흔히 예술영화나 극영화가 제시하는 삶의 비의 같은 것이 아니다. 재미에 집중된 이 영화들의 지향점은 영화의 또 한 가지 갈래가 될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이다. 실제 지금 극장들은 이 방향으로 진화해가고 있다.

여기서 중요해지는 것은 자잘한 캐릭터의 디테일이나 대사의 집중도보다는 블록버스터가 보여주는 볼거리의 참신함이다. 어디선가 본 듯한 장면들을 또다시 돈을 내고 본다는 것은 어딘지 아까운 일이다. 심형래 감독이 언급한 스토리가 그저 그런 ‘스파이더맨’의 재미는 거미인간이 뉴욕의 도심을 휙휙 날아다닌다는 점이며, ‘인디펜던스데이’의 재미는 외계인이 도시를 때려부순다는 그 설정에 있고, ‘트랜스포머’의 재미는 변신로봇 자체가 주는 유아적 욕망이 눈앞에서 실현된다는 점에 있다. ‘킹콩’의 재미는 이 거대한 생물체가 도시라는 정글을 마구 때려부수는 장면들의 재미이며, ‘쥬라기공원’은 공룡을 실제로 본다는 그 자체가 재미이다. 이 블록버스터들은 모두 볼거리의 참신함에 있어서 훌륭한 CG와 만나면서 충분한 만족감을 주었다.

그렇다면 ‘디워’가 가진 볼거리의 참신함은 어떨까. 먼저 용이 되어야 한다는 이무기라는 소재, 조선시대에 도성을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관군들과 이무기 군단들과의 전쟁 설정 같은 것들은 참신하다. 게다가 후반 40분 동안 폭풍처럼 몰아치는 LA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방불케 하는 이무기와 헬기, 탱크, 비행기들의 액션 장면들은 ‘디워’라는 롤러코스터가 가진 볼거리라는 측면의 가능성을 충분히 담보하고도 남는다. 여기에 CG의 디테일을 감안해서 본다면 볼거리의 재미는 더 커질 수 있다.

하지만 아쉬운 점들이 있다. 우리의 관객이나 외국의 관객 모두에게 특별한 볼거리가 될 수 있었던 조선시대 장면들이 특수촬영으로 이루어지면서 어딘지 CG의 힘을 약화시켰다는 점이다. 또한 최고의 CG 실사 합성 능력을 보여준 LA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장면들은 기존 블록버스터의 전통에 충실한 맛은 있지만 아쉽게도 ‘디워’만의 차별성을 찾기는 어렵다는 점이다. 한 평론가는 “차라리 LA가 아니라 남산타워 같이 우리에게 익숙한 것들을 부수는 이무기였다면 더 볼거리가 많았을 것”이라고 했다. 이 부분에 일부 공감하게 되는 것은 영화 속에서 관습적으로 괴수나 적의 공격을 받는 LA나 뉴욕이라는 도시를 너무 많이 봐온 탓은 아닐까.

아리랑을 영화음악으로 삽입할 정도로 한국적인 걸 강조하는 심형래 감독도 미국시장을 두드리기 위해서는 타협해야될 부분들이 많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한국적인 정서를 강조한다는 것 자체가 미국시장 속 블록버스터 공식을 벗어난다는 점에서 안전하지 못한 것 또한 사실이다. 그렇더라도 블록버스터에 있어서 우리 것을 조금 더 고집하는 것이 위험성은 있겠지만 결국 새로운 볼거리라는 측면에서 미국시장과 우리시장을 다 노릴 수 있는 방법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현장기록 병원’에서 본 인간의 위대함

온 몸에 붕대를 칭칭 동여맨 소년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의외로 ‘아버지에 대한 걱정’이었다. 전신 85%의 화상을 입은 14살 소년은 또래 소년들이 그렇듯이 아파서 칭얼대거나 짜증을 부리지 않았다. 일반병실로 옮기고 싶다는 소년의 마음 속에는, 자신이 불길 속에서 목숨을 걸고 구해낸 아버지가 잘 있는지가 궁금할 뿐이었다. 충격을 받을까봐 쉬쉬하다가 아버지는 일반병실로 옮겨갔다고 한 가족들의 거짓말을 믿고 있는 소년. 하지만 아버지는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소년, 불길 속에서 아버지를 구하다-그 후’편에서 수종이의 투병기를 감동적으로 담아낸 ‘현장기록 병원’은 말 그대로 병원이란 현장의 생생한 기록을 담아내는 프로그램이다. 특별히 재미를 위해 만들어놓은 연출도 없고 그저 무미건조하게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을 뿐인 이 프로그램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왜일까. 거기에는 여기저기 주사바늘이 꽂힌 채 그저 누워 있는 환자들의 모습과 그 환자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상처를 치유해주려고 노력하는 의사,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볼 뿐 딱히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는 환자가족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카메라는 그들의 이야기를 따라간다.

수종의 누나들과 함께 찾아간 소년이 아버지를 구한 전남 여수의 집은 당시의 끔찍함의 흔적을 여전히 남기고 있다. 도움을 청하러 들어간 옆집 대문에는 아직도 수종의 손바닥 자국이 찍혀있고 그 집 대청마루에는 핏자국이 지워지지 않고 여전히 남아있다. 잔해 속에서 수종의 누나는 아버지의 젊은 시절 사진을 찾아낸다. 정작 구해내려던 아버지는 사망해 흑백사진 속에서만 웃고 있고, 그 사실을 모른 채 아버지의 무사를 기원하는 소년의 독백은 짧은 순간, 잊고 있던 인간의 위대함을 떠올리게 한다.

아버지의 힘이 소년에게 전해진 것인지, 아니면 소년의 아버지에 대한 기원이 간절했던 것인지, 소년의 몸은 몰라보게 좋아진다. 혼자 밥을 떠먹고, 혼자 걸어다니는 인생의 걸음마를 다시 시작하는 소년에게 어머니는 더 이상 숨기지 못하고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알린다. “빨리 일어나서 엄마랑 살자”하는 어머니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아들도 그저 멍하니 눈물만 흘린다.

‘현장기록 병원’이란 프로그램이 힘을 발하는 것은 질병이나 사고로 인해 죽음 앞에 내몰린 사람들이 가장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줄 때이다. 거기에는 소년의 속을 알 수 없는 고통과 투지 속에 숨겨진 어쩔 수 없이 가녀린 소년의 마음이 있고, 그런 아들 앞에서 강한 척 하지만 결국 아들의 무릎에 고개를 숙이고 마는 어머니의 마음이 있으며, 그런 그들에게 좀더 아프지 않고 좋은 치료를 해주지 못해 인간적인 고뇌에 빠지는 의사들의 마음이 있다. 병원은 이 프로그램이 그렇듯이 굳이 연출하지 않아도 그런 위대한 인간의 모습들을 보여준다. 생과 사의 기로에 선 맨 얼굴의 위대한 인간들을 발견하는 것, 그것만으로도 자신 속의 위대함을 잊고 사는 현대인들에게 꼭 필요한 경험이 될 것이다.

드라마 속 여성 캐릭터와 남녀관계는 진화 중

언제부턴가 여성 캐릭터가 ‘여성스럽다’는 표현은 더 이상 칭찬이 아닌 것이 되었다. 차라리 ‘섹시하다’거나 ‘도발적이다’라는 도전적인 이미지는 나은 편. ‘여성스럽다’는 이미지는 이제 ‘예쁜 척 한다’는 부정적인 이미지로 받아들여진다. 그래서일까. 여성 캐릭터들은 ‘예쁘고 청순 가련한’ 모습을 버리고, 한껏 ‘씩씩한’ 이미지로 변신 중이다.

‘커피 프린스 1호점’의 고은찬(윤은혜)은 이러한 트렌드의 정점에 있는 캐릭터. 남장여자라는 설정 속에 부정적인 의미로 보여지는 ‘여성스러움’은 철저히 가려진다. 그녀의 드러난 모습들은 술 취한 남자 하나 정도는 거뜬히 업을 수 있을 정도로 힘이 세고, 불량배들 몇은 두드려 팰 수 있을 정도로 싸움을 잘 하며, 앉은자리에서 자장면 다섯 그릇을 뚝딱 해치울 수 있는 식욕을 가졌다는 것이다.

말투는 물론이고, 걸어다니는 모습이나 다리를 쫙 벌리고 앉는 모습까지 영락없는 남자의 그것을 보여주는 은찬이란 캐릭터는 그러나 분명 여자다. 그러니 남자대 남자(?)로서 사장과 직원이 된 한결(공유)과 은찬에게서 사랑의 감정이 솟아날 즈음, 드라마는 재미를 갖게 된다. 시청자들은 그들이 서로에게 끌리고 사랑하고 있다는 점을 알고 있기에 남장여자에게 끌리는 남자로서의 한결이 우스우면서도 귀엽고, 그런 한결에게 끌리지만 다가가기 어려운 남장여자 은찬의 사랑이 애틋해진다.

여기저기 드라마마다 넘쳐나는 도식적인 사랑이 식상하게 느껴질 때, 이들의 사랑은 우정이나 의리의 탈을 쓰고 나타나 그 사랑을 교란한다. 한결이 은찬을 끌고 가 “한번만 안아보자 미치겠다”고 말하며 안을 때나, 은찬이 한결에게 갑자기 기습키스를 하고 변명을 해댈 때, 그리고 의형제를 빙자하면서 서로 곁에 두려는 마음을 전할 때, 사랑은 전면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뒤로 숨는다. 그러니 이들의 관계는 만나면 서로 까칠하고 헤어져 혼자 있을 땐 애틋해진다.

이러한 씩씩한 여성 캐릭터와 남자가 엮어 가는 사랑의 방식은 처음부터 남녀의 관계로 시작되지 않는다. 종영한 ‘메리 대구 공방전’에서 가진 것 없어도 꿈 하나로 씩씩한 메리와 대구가 사랑으로 발전하기 전까지 그들은 동료의식으로 가까워졌다. 입만 열면 ‘배신’이란 단어가 나오는 것은 같은 길을 어렵게 가고 있는 두 사람 사이에 무의식적으로 공유하고 있던 동료애 때문이다. 그것은 사랑보다는 우정이나 의리에 가까운 관계이다.

이러한 남녀간의 관계는 ‘9회말 2아웃’에 가서는 30년 지기란 설정으로 제시된다. 늘 서로를 까칠하게 대하는 난희(수애)와 형태(이정진)도 서로의 어려움을 봤을 때는 그 우정이 발동해서 마음이 가지만, 그것은 딱 거기까지만이다. 사랑은 아직 어딘가 멀리 있는 것이라고 이들은 착각한다. 그 착각이 주는 재미는 이들의 우정을 빙자한 사랑 얘기에 힘을 실어준다.

이런 드라마 속 여성 캐릭터의 변화와 이로 인한 남녀관계의 변화는 현 사회상을 어느 정도 반영한 결과다. 그만큼 여성들은 드라마 속 남녀 관계에 있어서(그것이 연애문제든 사회 속에서의 성별문제든) 남자라는 성에 귀속되지 않고 동등한 위치에 서 있는 모습을 보길 원한다. 이것은 과거 남성 중심적인 멜로드라마에서 여성 중심적인 멜로드라마로 진화한 결과다. 그 속에는 질척하지 않고 상큼 발랄한 순정만화 톤의 사랑을 꿈꾸는 여성들의 로망이 들어있다.

이들 드라마는 과거의 멜로드라마들처럼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지 않는다.  대신 “어이 친구! 우리 연애나 해볼까.”하고 묻는다. 그 엉뚱함에 쿡쿡 웃다가도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지는 것, 이것이 달라진 이들 드라마들의 연애방식이 주는 매력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