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 그는 모든 위대한 낮은 자들의 뒷것이었다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

“나는 뒷것이야. 너희는 앞것이고.” 김민기가 했다는 그 말은 그의 삶과 그가 가난한 예술인들을 위해 만들었던 학전(學田)이 해온 일을 압축해 설명해준다. 학전을 세워 ‘지하철 1호선’ 같은 최장기 공연은 물론이고 다양한 뮤지컬, 아동극 그리고 가수들의 공연을 무대에 올렸던 김민기. 하지만 그는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무대 위가 아니라 무대 아래서 스포트라이트를 비춰주는 역할을 자임했다. ‘학전’이라는 이름 그대로 나서지 않고 묵묵히 예술가들의 못자리가 되어준 것이다.

 

SBS 다큐멘터리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 3부작은 개관 후 33년을 버텨왔지만 재정난과 김민기의 건강악화로 지난 3월 폐관한 학전과 이 소극장을 세운 김민기의 삶을 담았다. 제목에도 담긴 ‘뒷것’이라는 표현은 그 자체가 먹먹하다. 모두가 앞으로 나서려 애쓰는 세상이 아닌가. 그런데 뒤를 자처한다는 뜻이 담긴 데다, ‘것’이라는 표현 또한 자신을 낮추는 뉘앙스가 담겨 있어서다. 

 

다큐멘터리가 포착한 김민기의 삶은 모든 위대한 낮은 자들의 뒷것을 자처하는 삶이었다. 다큐멘터리에 참여한 황정민, 장현성, 강신일, 이정은 등등 무수히 많은 유명 배우들은 물론이고, 고 김광석을 비롯해 윤도현, 강산에, 정재일, 노영심 같은 음악인들의 면면을 통해 알 수 있듯이 학전은 그들의 든든한 못자리였고, 그 못자리를 지킨 건 다름 아닌 뒷것 김민기였다. 

 

하지만 김민기가 뒷것을 자처한 건 학전을 통한 가난한 예술인들만이 아니었다. 피혁공장에서 일하며 만났던 노동자들의 어려움을 알고는 그걸 음악으로 담아 무수한 노동자들을 위로해준 ‘공장의 불빛’이라는 음악극을 만들었고, 어린 나이에 일터로 나온 그들에게 야학의 길을 열어 주었다. 노래가 모두 금지곡이 되고 모든 길이 막혀 농사꾼이 되겠다고 연천에 내려가서도 그는 농민들의 뒷것이었다. 중간유통업자들 때문에 농민들은 제 값을 못받고 소비자도 비싸게 쌀을 사야하는 상황에 직거래를 통해 모두가 좋은 길을 열어줬던 거였다. 

 

그는 공부를 하고 싶어도 못하는 아이들을 위해 신정동에 중학교 과정을 무료로 가르치는 야간학교를 열기도 했고, 농사 짓겠다고 내려가서도 달동네 아이들을 위한 유아원 건립을 위해 공연을 해달라는 요청에 기꺼이 나서기도 했다. 또 ‘지하철 1호선’의 큰 성공을 거뒀을 때도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어린이들을 위한 아동극에 뛰어들었다. 돈이 되지 않지만 꼭 필요한 일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다큐멘터리가 조명한 김민기의 뒷것의 삶을 들여다 보면, 그가 뒷것을 자처해 지지해온 세상의 진정한 앞것들이 무엇인가가 새삼스럽게 눈에 띤다. 그들은 가난해도 삶과 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작품을 통해 말하는 에술가들이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며, 집의 생계를 위해 하고픈 학업도 포기하고 어린 나이에 생업에 나선 학생들이고, 결코 돈벌이의 마음으로는 할 수 없는 농사를 짓는 농군들이며 나아가 우리 사회의 미래가 될 어린이들이다. 즉 김민기가 뒷것을 자처해 지지해온 것들은, 그 무엇보다 소중한 가치를 가진 존재들이지만 세상의 앞것을 자처하는 이들에 의해 가려져 뒷것으로 치부되어온 것들이다.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는 그래서 모든 위대한 낮은 자들의 뒷것을 자처한 김민기의 삶을 들여다 본 다큐멘터리면서, 그 삶이 지탱했던 진짜 세상의 앞것이 되어야할 존재들을 위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실로 이런 존재들이 있어 세상은 그나마 살아갈 수 있고 또 살만해지는 게 아닐까 싶다. 결국 학전은 간판을 내렸지만 모두가 염원하듯 병을 툴툴 털어버리고 돌아와 다시 부활하는 학전의 모습이 보고 싶다. 그 어두운 시대에도 늘 깨치고 나아가 끝내 이겼던 그의 모습처럼. (사진:SBS)

“테니스는 관계야.” 루카 구아다니노 ‘챌린저스’

챌린저스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이 테니스를 소재로 하는 영화를? 청춘의 사랑과 욕망의 감정을 섬세하면서도 폭발력있게 담아냈던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을 기억하는 관객이라면 고개가 갸웃해질 법하다. 하지만 영화 시작부터 가슴을 울리는 EDM과 더불어, 땀을 뚝뚝 흘리며 테니스 코트를 뛰어다니는 아트(마이크 파이스트)와 패트릭(조쉬 오코너)의 경기를 감각적으로 연출해내는 장면만으로도 고개가 끄덕여질 수밖에 없다. 역시 테니스를 소재로 해도 뻔한 승부의 세계와는 다른 새로운걸 기대하게 만드는 감독이다. 

 

영화는 테니스라는 스포츠 경기에 빗대, 테니스 유망주 타시(젠데이아)에게 동시에 빠져버린 아트와 패트릭의 사랑과 욕망을 그린다. 처음에는 패트릭과 사랑에 빠지지만 감정 싸움에 부상까지 당하며 헤어진 타시는 아트에게 위로받으며 아내이자 코치가 된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13년 후 코트에서 아트와 패트릭은 경쟁자로 다시 만난다. 여러 숨겨진 사건들이 드러나고 감정들이 뒤섞이면서 경기의 승패는 타시와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좌우할 것 같은 팽팽한 긴장감으로 펼쳐진다. 

 

“테니스는 관계야.” 타시가 아트와 패트릭을 처음 만났을 했던 그 말은 영화 후반부에 오면 그 의미가 확실해진다. 타시는 테니스가 혼자만 잘하면 되는 운동이 아니라는 의미로 그렇게 말했다. 경쟁자를 어떻게 꺾었는가 하는 승패보다는 공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나누는 그 관계가 진정한 명승부를 만든다는 것이다. 명승부가 어디 스포츠에만 있을까.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 식으로 요즘의 정치를 빗대 말한다면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당의 승패에만 집착해 이기는 경기에만 나가려 하기 보다는, 생각이 다른 경쟁자라도 일단 코트에 올라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야말로 국민들에게 박수받을 수 있을 거라는.(글:동아일보, 사진:영화'챌린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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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즈니+ 오리지널 드라마 ‘지배종’으로 새로운 얼굴 보여준 한효주

지배종

큰 키에 잘 관리된 몸 그리고 작은 얼굴에 빛나는 피부까지... 딱 봐도 우리와는 다른 유전자를 가진 것 같은 배우들이 적지 않다. 그런데 영상으로 볼 때마다 감탄하게 만드는 아우라를 가진 배우들을 직접 만나보면 너무나 다른 느낌을 가질 때가 많다. 그건 화면과 실물 사이의 차이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접하는 배우들이 그 모습 자체가 아니라 작품 속 캐릭터라는 옷을 입고 있기 때문이다. 배우들은 그 자체로도 매력적이지만, 캐릭터에 몰입한 배우들은 더더욱 매력적이다. 실제로 봤을 때 심지어 못알아볼 정도로 캐릭터의 색깔을 온전히 채우고 있는 배우라면 더더욱 그렇다.

 

한효주는 그런 배우다. 작품을 하지 않을 때면 가볍게 차려 입고 여행을 다니는 걸 즐긴다는 이 배우는 그렇게 다녀도 사람들이 잘 알아보지 못한다고 한다. ‘동이’룰 촬영할 때 생긴 유명한 일화가 그걸 잘 말해준다. 어느 식당에 당시 함께 촬영했던 배수빈과 같이 갔는데 식당 아주머니들이 배수빈은 알아보면서 자신은 알아보지 못하더란다. 그래서 한효주가 머리를 묶으며 “저 동이에요”라고 말해 모두를 깜짝 놀라게 했다는 이야기다. 그만큼 그는 작품을 할 때마다 외적으로든 내적으로든 다른 느낌을 주는 배우가 되고 싶어한다. 

 

물론 초창기 한효주 하면 우리에게는 인이 박혀 버린 하나의 이미지가 있는 게 사실이다. 그건 바로 ‘미소천사’다. 특유의 건치에 환한 미소가 잘 어울리는 한효주는 초창기 윤석호 감독의 ‘봄의 왈츠’나 ‘찬란한 유산’ 그리고 ‘동이’ 같은 작품들을 통해 건강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배우로 대중들에게 각인됐다. 주로 어려워도 슬퍼도 꿋꿋이 웃으며 살아가는 캔디형 이미지랄까. 특히 ‘동이’ 같은 사극으로 20대에 MBC 연기대상은 물론이고 백상예술대상 같은 상들을 휩쓸면서 한효주의 이미지는 바로 그 건강한 미소로 대변되는 단아하고 여성스런 이미지로 상당부분 굳어진 면이 있었다. 

 

하지만 한효주는 그 이미지 하나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2013년 영화 ‘감시자들’에서 그는 감시반의 신참에서 점점 전문가로 성장해가는 과정을 통해 설경규, 정우성 사이에서도 도드라진 연기를 선보였다. 또 2015년 개봉한 영화 ‘뷰티 인사이드’에서는 무려 123인 1역의 연인과 사랑에 빠지는 역할로 배우 21명과의 감정연기를 소화해냈다. 또 6년만의 드라마 복귀작이었던 ‘W’를 통해서는 웹툰 속에서 튀어나온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 판타지 장르의 연기를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한효주의 다양한 시도에도 한 가지 고정된 연기 영역이 있었다면 그건 바로 멜로다. 그는 자타공인 멜로퀸으로서의 배우의 길을 걸어왔다. 그건 살짝 미소만 지어도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그의 외모와 이미지가 만들어준 축복이었지만, 배우로서 그런 틀은 족쇄나 다름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작년과 올해 한효주의 행보는 이러한 족쇄를 확실히 끊어버리고 또 다른 새로운 영역으로 나아간 시간들이 아닐 수 없었다. 디즈니+에서 작년에 방영된 ‘무빙’과 올해 방영되고 있는 ‘지배종’에서의 한효주는 이전의 멜로퀸의 이미지와는 너무나 다른 새로운 얼굴들이었으니 말이다. 

 

‘무빙’에서 한효주가 연기한 이미현이라는 인물은 젊어서는 안기부 엘리트 요원으로 활동했지만 나이 들어서는 성장한 김봉석(이정하)의 어머니이자 김두식(조인성)의 아내로 돈가스 식당을 운영하는 인물이다. 연령대의 폭이 넓을 수밖에 없고, 또 그 상황과 연령에 맞는 역할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젊은 날의 이미현은 같은 안기부 엘리트 요원으로서 김두식과 함께 액션과 더불어 달달한 멜로를 그려내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아들이 공중부양 능력을 갖고 있다는 걸 알게 된 후부터 그는 칩거해 평범한 돈가스 식당 사장이자 헌신적인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는 인물로 변신한다. 그렇지만 아들을 지켜내고 남편인 김두식을 구하기 위해 다시 총을 든 모습에서는 안기부 엘리트 요원다운 액션에 모성과 사랑이 더해진다. 그래서 그저 멜로 퀸이라는 평범한 수식어로는 규정할 수 없는 한 사람의 다양한 삶과 인생이 느껴지는 연기에 도전할 수 있게 됐고 한효주는 그걸 보기좋게 해낸다. 

 

‘지배종’은 이제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미소천사’로 불리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웃음기 빠진 모습으로 윤자유라는 인물을 설득시킨다. 2025년 생명공학기업 BF가 성공시킨 인공 배양육 기술을 두고 벌어지는 여러 각계의 욕망과 갈등을 다룬 이 작품에서 한효주는 이 새로운 근미래의 세계관을 단박에 몰입시키는 연기로 드라마의 문을 연다. 드라마 시작과 함께 BF의 기술을 윤자유가 소개하는 장면을 위해 한효주는 테드 영상을 연구하고 모든 대사를 외워 연기에 임했다고 한다. 이로써 윤자유가 보다 전문적이면서 어떠한 외압에도 흔들리지 않는 인물이라는 걸 보여주면서 동시에 시청자들이 자연스럽게 이 세계 속으로 들어올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물론 우채운(주지훈)이라는 인물과의 섬세한 감정 교류가 등장하기도 하지만, 한효주는 ‘지배종’을 통해 그간의 멜로 이미지에서 자유로워진 연기를 선보였다. 웃던 얼굴이 굳게 입을 다물자 진지함은 더 깊어졌다. 또한 시시각각 벌어지는 위기 속에서도 과감한 결단을 내리는 모습은 윤자유라는 인물이 얼마나 흔들리지 않는 자신만의 소신과 의지를 가지고 있는가를 알 수 있게 해줬다. 

 

‘지배종’을 통해 한효주의 연기가 보여주는 페르소나는 이 작품의 배역인 윤자유라는 이름에 그대로 녹아 있다고 여겨진다. 그는 이제 가슴을 설레게 하는 멜로는 물론이고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과 액션에, 치열한 심리를 보여주는 내면연기까지 자유로운 배우로 성장했다. 그 성장 과정이 우연이 아니고 매너리즘을 벗어난 부단한 도전과 치열한 노력 속에서 이뤄진 것이란 점에서 어떤 영역에서의 자유란 그저 얻어지는 게 아니라는 걸 이 배우의 페르소나는 보여준다. 그저 미소 한 번 지으면 주변을 환하게 만드는 걸 타고난 이가 그 미소를 거두자 거기 가려져 있던 단단한 내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 어떤 영역에서 지배종이 되기 위해서는 바로 그 자유로움을 얻기 위한 노력의 시간들이 전제 되어야 한다는 걸 한효주의 페르소나는 말해주고 있다. (글:국방일보, 사진:디즈니+)

‘비밀은 없어’, 위선적인 세상에 날리는 고경표, 강한나의 로맨틱 팩트 펀치

비밀은 없어

“정신 차렷! 여기 있는 사람들 다 자기 일 하러 온 거야. 갑질 당하러 온 사람? 여기에 아무도 없어!” 송기백(고경표)은 약한 스텝들만 골라서 지능적으로 괴롭히는 갑질 아이돌 피엔(장원혁)에게 그렇게 일갈한다. 잘 나가는 아이돌이라 그가 없으면 프로그램이 굴러가지 않는 현실 때문에 늘 갑질을 당해도 누구 하나 제지하는 이가 없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전기 감전을 당한 후 속에 있는 말을 숨기지 못하고 꺼내놓게 된 송기백의 일갈에 모두가 충격을 받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고소해한다. 

 

이 장면은 JTBC 수목드라마 ‘비밀은 없어’가 가져온 코미디와 판타지의 정체가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사회생활에서 어디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며 사는 이가 몇이나 될까. 아니 갑질이 일상인 세상에서 오히려 하고 싶은 말을 꾹꾹 눌러야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아닌가. 송기백 역시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회인이지만, 전기충격 후 갑자기 생겨난 후유증(혹은 능력이라 해야할까)은 그간 하지 못했던 말들을 마구 쏟아놓는 상황들을 만들어낸다. 

 

챙겨주는 척 하면서 자기 일을 떠넘기는 선배들에게 “귀찮은 건 후배들 다 시키면서 뒤에선 일 못한다고 욕하는 거 모를 줄 아냐?”고 쏘아대고, 후배의 미래를 걱정하고 위하는 척 하지만 사실은 제 안위만 생각하며 이 김에 푹 쉬라고 말하는 상사에게 “뭘 자꾸 쉬라고 하시냐”며 그건 쉬는 게 아니라 “벌 받는 것”이고 “결국 귀찮은 일은 다 시킬 것 아니냐”고 속에 있는 말을 꺼내놓는다. 

 

송기백에게는 집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직장에서는 부유한 집안 자제인 것처럼 알려져 있고(그것도 송기백이 그렇게 한 건 아니다) 그것이 사회생활에 도움이 될 거라는 이야기에 그런 척하며 살아왔지만 송기백의 가족들은 그가 보내주는 생활비에 용돈에 의지하며 살아간다. 그런 가족에게 한 마디 못하고 살았던 송기백이지만, 그는 전기충격의 후유증으로 드디어 속내를 토로한다. “솔직히 내가 죽든 말든 지금 내가 주는 용돈에 생활비에 그게 더 중요한 거 아니야?”

 

물론 거짓말을 할 수 없게된 공인의 코미디를 담은 작품은 이미 있다. 라미란이 출연한 ‘정직한 후보’가 그런 작품이다. 하지만 ‘정직한 후보’가 신뢰를 잃은 정치권에 돈키호테처럼 등장한 거짓말 못하는 정치인을 통해 진실한 정치에 대한 판타지를 담는 작품이라면, ‘비밀은 없어’는 할 말은 있지만 차마 꺼내놓을 수 없는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모순 투성이 사회에 대해 후유증으로 헐크 혓바닥을 갖게 된 송기백이라는 아나운서를 통해 때론 코믹하게 때론 시원하게 풍자하는 작품이다. 

 

송기백이 아나운서이고 그 직업이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는 사실은 그래서 이 드라마가 갖고 있는 풍자적 코미디의 양면을 드러내는데 최적이다. 어딘지 바른 모습으로만 방송을 통해 비춰지지만 어디 그게 진짜 모습일 수 있을까. 그것이 깨지는 지점에서는 방송사고라는 형태로 드라마는 코미디의 웃음을 찾아낸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아나운서의 진짜 인간적인 모습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아나테이너’의 탄생과 맞닿아 있다. 

 

어째서 최근들어 많은 아나운서들이 프리를 선언하고 나와 아나테이너의 길로 들어서게 됐을까. 그건 방송이 점점 일상화되면서 공적 영역이라 여겨졌던 것들조차 사적인 리얼함을 요구하기 시작한 변화와 맞닿아있다. 즉 아나운서들의 신뢰는 이제 그 기계 같은 공적 업무의 영역만을 보여줄 때 생겨나는게 아니고 오히려 사적인 차원에서의 인간적 면모를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보여줄 수 있을 때 오히려 더 공고해진다. 그것이 진짜 모습이기 때문이다. 

 

이 방송에 생겨난 변화의 관점을 염두에 두고 ‘비밀은 없어’를 보면 왜 송기백이라는 아나운서가 후유증을 통해 점점 인간적인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그 과정에 온우주(강한나)라는 예능 작가와의 로맨틱 코미디적 관계가 필요했는가가 납득된다. 온우주는 예능 작가 특유의 감각으로 송기백이라는 단단한 아나운서의 껍질 이면에 예능적(인간적) 가능성이 있다는 걸 알아본다. 그래서 온우주와 송기백이 궁극적으로 그려나갈 멜로적 관계는 송기백의 벗겨진 껍질 안의 실체를 온우주가 매력으로 바라보게 되고 그걸 또한 타인들에게도 납득시키는 과정이 되지 않을까. 

 

‘비밀은 없어’는 코미디의 밀도가 높은 로맨틱 코미디다. 그래서 연속적으로 펼쳐지는 웃기는 상황들에 정신없이 웃으면서 때론 설레는 멜로 감정을 토핑처럼 맛볼 수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지금껏 사회생활과 가족의 생계를 위한 삶 때문에 벗어버릴 수 없었던 껍질을 온우주와 함께 하나씩 벗어가며 그걸 인정해가는 송기백의 모습은 단순한 로맨틱 코미디 그 이상의 감흥을 줄 것으로 생각한다. (사진: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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