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격지심과 우월감, 그리고 나 자신

인순이(김현주)는 플랫폼 앞에서 망설인다. 그녀는 전과자다. 고등학교 때 실수로 사람을 죽였다. 그래서 그네들 말로 별을 달았다. 복역하고 나와서도 그 별은 그녀에게 결코 지워지지 않는 주홍글씨다. 전과자라는 이유로 일자리에서 쫓겨나는 마당에 그녀는 “앙심품지 말라”는 주인의 말까지 들어야 하는 처지다. 별을 단 여자에 대한 사회의 편견은 그녀의 삶 자체를 송두리째 뽑아 버린다. 그러니 그녀가 선택하려는 것은 달려오는 열차를 향해 몸을 날리는 것이다. 그런데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난다. 전과자라는 편견에 가려 이 세상에서 아무도 불러주지 않을 것 같았던 자신의 이름을 누군가 불러준 것이다. 그것은 바로 상우(김민준)다. 유상우. 어렸을 때 둘도 없던 친구.

플랫폼으로 뛰어들 운명을 막아준 상우의 부름으로 인순이는 그래도 다시 살아보겠다 마음  먹는다. 그것은 어린 시절, 자신에게 전과자란 낙인이 붙기 이전의 기억으로의 회귀다. 어린 시절 잃어버렸던 엄마도 찾게 되고 상우와 다시 만나게도 되지만 편견은 저 바깥의 세계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엄마는 다른 사람들에게 인순이를 코디라 소개하고 그것도 모자라 이태리로 유학을 보내버린다. 상우는 동료들에게 인순이가 영국의 왕립디자인스쿨을 나왔다며 거짓말을 한다. 심지어 엄마는 전과사실이 밝혀지자 이유를 묻기는커녕 ‘남부끄러운’ 자신의 심정만 토로한다. 밖에서도 안에서도 별을 단 전과자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은 마찬가지. 그래서 그녀는 다시 플랫폼에 선다.

그런데 그 순간, 인순이는 또 누군가의 부름을 받는다. 그녀는 죽기 위해서가 아니라 떨어진 취객을 살리기 위해서 플랫폼을 뛰어내린다. 그리고 그 사건은 별을 단 전과자를 ‘지하철녀’라는 새로운 이름의 별(스타)로 만들어버린다. 그것은 그녀에게 벌어진 두 번째 기적이지만 그 기적 또한 그녀가 바라던 일은 아니다. 인순이가 바라는 것은 그저 자신의 이름으로 누군가에게 불리는 것이다. 어린 시절 놀이터에서 엄마의 부름에 집으로 돌아가던 아이들을 보며 간절히 원했던 것. 사회가 전과자라는 별을 달아 그녀를 부를 때 진정으로 듣고 싶었던 것. 엄마가 연극배우 이선영의 딸로서 소개할 때 진정으로 소개되고 싶었던 것. 또한 어울리지 않는 유명인이라는 껍데기로 불릴 때 돌아가고 싶었던 것. 그것은 바로 자신이다.

‘인순이는 예쁘다’는 전과자, 지하철녀처럼 수많은 이름으로 불려지는 그녀가 자신의 이름, 박인순으로 불려지는 과정을 찾아가는 드라마다. 인순이뿐만 아니라 드라마 속 인물들은 저마다 자신의 이름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서 살아간다. 인순의 엄마인 선영은 유명인이라는 허울 속에 살아가고, 그녀를 영원한 팬으로서 추앙하는 상우의 아버지 병국은 책임으로만 존재하는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살아간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이 만나면서 거기에는 어떤 가능성이 피어난다. 선물을 주겠다는 병국의 말에 물질적인 어떤 것을 기대했던 선영이 막상 병국이 가져온 붕어빵을 먹는 장면은 그들이 서로를 만나면서 자기 자신에 가까워질 수도 있겠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처럼 인순과 상우의 관계 역시 자격지심과 우월감으로 극과 극을 대변되면서 그 간극을 좁혀나간다. 따라서 드라마가 궁극적으로 도달할 곳은 자격지심과 우월감을 모두 훌훌 벗어버리고 자기 자신으로서 서로를 만나는 그 지점이다. 이것은 사랑이 가진 가능성이다. 진정한 사랑은 허울이 아닌 그 사람 자체를 가감 없이 받아들일 때 가능한 것이라는 전언이다. 별을 달거나 별이 되거나 그 어느 것도 원하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에 의해 그렇게 불려지는 인순이처럼 수많은 나 아닌 나의 모습들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현대사회. 그 속에서 진정한 행복은 자신을 그 무엇도 아닌 자신으로서 인정하면서 예쁘다고 말할 때 가질 수 있는 것이며, 그것은 다름 아닌 사랑으로서 가능하다는 말을 인순이는 주문처럼 말하고 있다. “괜찮아. 난 착해. 난 예뻐. 난 사랑스러워. 난 훌륭해. 난 특별한 존재야.”라고.

끝없는 논란에도 불구, 대마불패 신화 건드리나

‘태왕사신기’에 대한 논란은 도대체 어디까지 갈까. 430억 원이 투여된 덩치 큰 대작만큼이나 논란도 끝이 없다. 지난 6월 네 번째로 방송연기를 발표했을 때, MBC의 반응은 의외였다. 아무리 외주제작사의 몸피가 커졌다고는 하지만 MBC는 거기에 대해 뭐라 한 마디 토를 달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MBC가 그렇게 여유 있는 상황이었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급작스런 ‘태왕사신기’의 연기로 비어있는 월화의 밤을 채우기 위해 8부작 ‘신현모양처’가 급조되었지만 당연히(?) 반응은 없었고, ‘태왕사신기’와 겹쳐 SBS에서 방영하게 된 ‘쩐의 전쟁’은 당시 수목의 밤을 뜨겁게 달구며 MBC를 안타깝게 했다. 한편 화려한(?) 캐스팅과 소재만 난무하고 제대로 된 스토리가 부재했던 주말드라마 ‘에어시티’는 60억이 투여되었지만 시청률 10% 내외를 오가는 저조한 상황이었다.

이 정도의 상황에서 MBC가 그저 침묵으로 일관했다는 것은 언뜻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뚜껑을 연 작품이 어느 정도의 질을 담보했다는 것. 송지나 작가의 대본은 짜임새가 있었고, 김종학 PD의 연출은 명불허전이었으며, 배용준은 그만이 가질 수 있는 아우라로 작품 전체를 이끌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잡음은 생겼다. 완성도 높은 사전제작을 주창했던 ‘태왕사신기’는 결국 시간에 쫓기는 ‘생방송 편집’을 하기에 이르렀고 급기야 테이프 입고가 늦어져 20분이나 뉴스를 연장 편성하는 초유의 사태를 만들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편성제작부문 김정규 부위원장은 ‘태왕사신기의 오만, 그리고 MBC의 굴욕’이라는 제목의 보고문을 통해서 “지난달 중순에는 제작시간 부족을 이유로 23회 방송이 어려우니 마지막회로 예정돼 있던 ‘태왕사신기 스페셜편’을 방송하겠다고 요구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이 일련의 사건들을 두고 보면 ‘태왕사신기’는 방송사의 고유권한인 편성권마저 뒤흔들 정도의 힘을 발휘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것들은 모두 작품에 대한 욕심에서 빚어진 결과일 수도 있다. 보다 좋은 작품을 만들다 보니 나타난 부작용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 부작용이란 결국 우리네 드라마의 고질병인 시간에 쫓기는 방송제작 행태에서 비롯된 바가 크다. ‘태왕사신기’의 잇단 논란들은 그 고질병이 대작이라는 힘을 등에 업고 이제는 편성까지 좌지우지하는 상황에 이르렀다는 걸 보여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작품 자체에도 영향을 미쳤다.

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만든 계속되는 연기자들의 부상과 끝없이 쫓기는 시간과의 전쟁 속에서 ‘태왕사신기’는 그 마지막회의 화룡점정을 하지 못했다. 시청자들의 “안 본 걸로 할 테니 다시 찍어달라”는 요구는 대작드라마에 대한 기대가 그만큼 컸다는 것을 보여주는 반증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대작드라마를 표방한 ‘태왕사신기’의 마지막으로는 너무 밋밋했던 데서 나온 비판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제 불거져 나온 것은 ‘대작’이라는 거창한 용어를 만든 430억 원이란 돈의 행방이다. MBC 노조측은 430억 원 중 배용준 개인에게 지급된 금액이 60억 원에 달한다고 하면서 대작이란 말은 허명에 불과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제작사와 배용준 측은 이것을 극구 부인하고 나서고 있어 그 진위를 알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이런 논란은 대작드라마가 남긴 깊은 후유증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더 큰 문제는 지금부터다. 그나마 배우들의 거품 개런티에 대한 자정의 목소리가 자리를 잡아가는 요즘, 이것이 ‘태왕사신기’의 대작 마케팅을 타고 다시 고개를 드는 것은 아닌가하는 우려 때문이다. 과정이야 어찌됐건 방송사의 편성까지 움직일 정도의 성공을 거둔 ‘태왕사신기’가 드라마 제작의 새로운 모델로 자리잡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다. 대마불사의 잘못된 신화가 드라마의 대작화를 부추기지는 않을까 하는 안타까운 생각 때문이다.

돈들이면 된다는 사고방식은 ‘대작드라마’의 환상일 뿐이다. 시청자들은 볼거리보다 스토리에 더 열광하며 그렇기에 드라마가 집중해야 할 것은, 규모보다는 참신한 연출과 다양한 소재발굴, 작가군의 양성 그리고 새로운 제작시스템의 도입 등을 통한 드라마의 완성도이다. MBC가 꿈꾸던 ‘태왕사신기’라는 쥬신의 별은 저 드라마 속의 담덕처럼 실제로 반짝반짝 빛났던 것이 사실이나, 그 별의 반짝임만큼 그림자도 깊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주부, 미취업자는 비전문직 이하인가

어떤 범주를 규정하는 용어는 때론 필요 없는 구획을 만들어 범주 바깥에 위치한 것들을 소외시킨다. 드라마에 있어서 소위 ‘전문직 드라마’라는 용어가 그렇다. 아마도 이 용어는 사랑타령 일색이던 멜로 드라마에 새롭게 등장한 드라마가 의사나 변호사 같은 전문직을 다루면서 비롯된 용어가 아닐까 생각된다. 따라서 당시의 전문직 드라마라는 용어는 분명 유용했다. 천편일률적인 짝짓기 드라마들 속에서 직업의 세계는 그 구태의연함을 깰 수 있는 유일한 방편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용어는 아직도 유용할까.

그렇게 해서 나온 소위 전문직 드라마들의 전문직을 보면 의사, 변호사 정도의 직업군을 꼽을 수 있을 정도다. 올 초에 여기에 다시 불을 붙인 직업도 역시 의사(하얀거탑, 외과의사 봉달희)였다. 이후 나왔던 ‘히트’, ‘에어시티’ 그리고 ‘개와 늑대의 시간’ 이 각각 형사와 공항직원, 그리고 국정원을 직업으로 다루고 있지만 이것을 전문직 드라마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다. 그것은 이 드라마들이 직업의 디테일을 살리는 드라마라기보다는 액션, 스릴러 같은 장르적 재미에 치중하는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전문직 드라마라는 용어는 다분히 소재주의로 오인될 소지를 갖고 있다. 무슨 무슨 직업을 다룬 드라마라는 식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하지만 본래 전문직 드라마라는 용어가 가진 요구는 특정 직업을 다뤄달라는 것이 아니었다. 구태의연하게 짜 맞춘 공식처럼 굴러가는 삼각 사각구도의 사랑타령에서 벗어나 드라마 속 인물이나 스토리의 디테일에 천착해달라는 요구였다. 그러니 전문직만을 내세우면서 정작 디테일을 살리지 못한 ‘에어시티’나 ‘로비스트’같은 참극이 발생하게 된다.

또한 사랑타령의 혐오를 드러내는 전문직 드라마라는 용어는 멜로 드라마의 가치를 폄하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즉 전문직을 다루는 드라마 속에 멜로가 들어가면 늘 논란이 벌어지는 것은 이것이 ‘무늬만 전문직 드라마’라는 의심을 받기 때문이며, 여기서 멜로는 암묵적으로 고리타분하고 좋지 않은 어떤 것으로 상정된다. 하지만 실제 상황을 두고볼 때, 전문직을 가진 사람들이 사랑에 빠지지 않고 모두 일만 하고 있는 것이 정말 리얼하고 디테일에 충실한 일일까. 우리는 이제 드라마의 발을 묶어두고 있는 편 가르기식 용어가 가진 족쇄를 풀어낼 필요가 있다.

전문직과 그렇지 않은 일상적 직업군을 가르지 않고, 멜로와 비멜로를 가르지 않는 상황에서 디테일이 잘 그려졌는가 아닌가를 잣대로 드라마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 흔히들 말하길 전문직 드라마에서 의사, 변호사라는 직업이 전문직으로서 조명을 받을 때, 흔히 멜로 드라마가 담고 있는 주부들이나 청춘드라마가 보여주는 미취업자들은 비전문직 이하로 폄하되어야 하는가 하는 것도 생각해볼 문제다. 수많은 주부들이 등장하는 드라마들이 있지만 정작 주부의 디테일을 살리는 드라마가 있는지 고민해봐야 하지 않을까. 사실 모든 드라마가 다루고 있는 직업은 다 전문직이며(심지어 그것이 ‘메리대구 공방전’의 백수나 ‘내 남자의 여자’의 주부라도), 그 직업이 무엇이든 사람 사는 곳에는 멜로가 피어날 가능성이 있다. 문제는 디테일이다.

드라마 극과 극, ‘황금신부’와 ‘태사기’

AGB 닐슨의 지난주 주간시청률 조사 결과에 따르면 ‘태왕사신기’의 시청률은 29.8%로 전체 4위. ‘황금신부’는 24.1%로 그 뒤를 따르고 있다. 드라마의 완성도나 규모 등을 두고 봤을 때, 거의 극과 극에 서 있는 이 두 드라마의 시청률이 극과 극으로 나오지 않는다는 건 의외의 결과가 아닐 수 없다. 완성도가 못 미치는 드라마라고 해서 시청률이 안 나온다는 말은 적어도 ‘황금신부’에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다. 또한 그 반대의 위치에 서 있는 완성도나 규모에 있어 거의 극점에 달해있던 ‘태왕사신기’가 이 정도의 시청률에 머물렀다는 것도 언뜻 이해가 어렵다. 도대체 무엇이 이런 결과를 만든 것일까.

‘태왕사신기’가 RPG라면 ‘황금신부’은 대전게임
‘태왕사신기’는 게임으로 친다면 주인공이 아이템을 얻어가며 성장하는 RPG 게임에 해당될 것이다. 그런데 ‘황금신부’도 ‘태왕사신기’처럼 게임의 대전모드 형식을 취하고 있다면 이상하게 생각될까. 그러나 ‘황금신부’는 서로 얽히고 설킨 두 집안 사람들이 끝없이 대결하는 드라마로 게임으로 치면 대전게임을 닮았다.

먼저 상류층과 중산층으로 대변되는 두 집안의 환경 자체가 계층 간의 대결구도를 만든다. 준우(송창의)네는 영세한 식품업체인 소망식품을 가족들끼리 꾸려나가는 반면, 영민(송종호)네는 국내 굴지의 식품회사인 웰빙푸드를 경영한다. 전통의 떡을 생산하는 영세업체와 프랜차이즈 음식을 유통하는 대기업은 전통적 가치와 현재의 세태를 병치시킨다.

이런 양측의 팽팽한 긴장감은 그 가족들 간의 계속 연결되는 악연으로 대전 모드로 전환된다. 준우의 어머니인 한숙(김미숙)은 옛친구이자 영민의 어머니인 옥경(견미리)에게 성일(임채무)을 빼앗기고 이 악연은 대물림된다. 한숙의 아들 준우가 사랑하던 옥지영(최여진)이 옥경의 아들 영민과 결혼하면서 준우는 그 상처에 공황장애까지 겪게 된다. 물론 공황장애는 베트남 신부인 진주(이영아)의 극진한 사랑으로 극복하게 되는데, 공교롭게도 진주가 찾으려는 친아버지인 성일은 진주가 딸임을 부정한다. 이것만이 아니다. 한숙의 딸인 세미(한여운)는 옥경의 아들인 영수(김희철)과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물론 이런 관계는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한 번의 우연은 이해될 수도 있지만 두 번 이상 계속되는 우연은 그것을 의도로 보게 만든다. 그러니 ‘황금신부’의 대결구도는 드라마적으로 완결된 구조 속에서 탄생된 것이 아니라 작가에 의해 인위적으로 의도된 것이다. 따라서 ‘황금신부’를 리얼리티의 잣대로 보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것은 드라마를 권선징악과 죄와 벌의 당위의 구조로 만든다. 그 안의 인물들은 리얼한 것이 아니라, 죄를 지은 자는 벌을 받아야 한다는 당위를 향해가는 이 장기게임 같은 드라마의 재미있는 말로서 기능한다.

이렇게 보면 ‘황금신부’의 구조는 게임의 스테이지를 닮아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 첫 번째 스테이지가 진주를 통해 준우가 공황장애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면, 두 번째 스테이지는 다시 회사를 나가게된 준우가 진주와 얽혀 겪게되는 사회적 편견을 헤치고 나가는 것이며, 세 번째 스테이지는 준우의 동생인 세미와 시동생인 영수의 결혼을 반대하는 옥지영의 이야기가 된다. 이런 스테이지는 끝없이 계속된다. 하다 못해 옥지영의 과거가 밝혀지는 과정도 하나의 스테이지이며, 그녀가 진주와 전통떡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떡 배틀’을 벌이는 것도 또 하나의 스테이지다. 스테이지의 대미는 결국 성일이 진주의 친아버지임이 밝혀지는 것이 될 것이다.

단순한 스토리는 때론 강점이 된다
또한 ‘태왕사신기’와 ‘황금신부’는 스토리에 있어서도 극과 극을 달린다. ‘태왕사신기’의 스토리는 시청자들에게 복잡한 게 사실이다. 캐릭터와 스토리들이 유기적으로 짜여진 구조를 갖고 있어 한두 회를 놓치면 이해하기가 어렵다. 반면 ‘황금신부’의 스토리는 단순하다. 두 집안의 대결구도 정도만 알고 있으면 중간에 몇 회 빼먹더라도 다시 보기만 하면 금세 이해가 가는 스토리를 갖고 있다.

게다가 이 대결구도라는 것은 사실상 우리네 멜로 드라마들이 가졌던 대부분의 관습적 설정들을 다 모아놓은 것들이다. 굳이 설명할 필요 없이 “저 남자가 버린 딸이래”, “저 여자가 버린 남자래” 하는 말 하나면 쉽게 이해가 된다. 단순한 이야기 설정은 누구나 쉽게 그 게임에 참여할 수 있게 해준다. 이것은 ‘태왕사신기’같은 거의 처음과 마지막의 조각퍼즐이 딱 들어맞는 듯한 완성도 높은 스토리가 가질 수 없는 단순함의 장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무리 ‘황금신부’가 이런 역설적인 장점(떨어지는 완성도와 단순한 스토리가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하는)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 방영시간이 주중이었다면 결과는 달랐을 것이다. 주중 드라마의 기대치는 상대적으로 높은 반면, 주말 드라마의 기대치는 낮다. 요즘처럼 주5일 근무제에 금요일에 집을 비우는 가족들이 늘어나는 상황 속에서 밀도 높은 연속성을 가진 드라마는 오히려 시청자의 접근을 어렵게 한다.

‘황금신부’의 시청률 상승은 리얼리티보다는 시청자들이 익숙한 소재로 그 드라마가 전하는 메시지의 당위성을 게임이란 방식으로 풀어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요컨대 ‘황금신부’는 시청자의 예측을 깨는 스토리전개의 놀라움을 보여주는 드라마가 아니라, 시청자가 원하는 스토리를 보여주는 드라마다. 그것이 깊은 공감을 주었다면 그것은 드라마의 완성도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드라마가 깨려는 황금만능주의와 계층 간의 편견들이 실제 현실 사회에서 그만큼 두텁다는 반증일 가능성이 높다. 이것이 ‘태왕사신기’처럼 뛰어나거나 완성도가 높지 않고 조금 부족해도, 또 느슨한 스토리라도 시청자들이 준우와 진주의 사랑을 지켜보고, 지켜주고 싶은 이유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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