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인 곽원갑> 그 몸이 말해주는 것들

앙상한 체구의 달라이 라마는 성지순례를 온 비구니들과 수녀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종교라는 것은 신뢰와 존중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종교에 대해서는 무한한 신뢰를 가져야 하지만 다른 종교에는 존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겁니다.” 한 수녀님께서 물으셨다. “선생님께서는 많은 종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달라이 라마가 말했다. “세상의 사람들은 각기 다른 성향을 가집니다. 우리는 모두 같은 눈, 같은 코, 같은 입을 갖고 있어도 좋아하는 음식은 다르지요. 종교는 그런 것입니다.” 우연히 TV에서 보게된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이다. 이연걸은 2005년 10월 그의 아내 리지와 함께 달라이라마를 만나기 위해 다럄살라를 방문했다. 10여년 전 불교에 귀의한 그에게 달라이라마가 한 얘기도 비슷한 것이었을까.

테러가 화두가 된 세상 속의 아름다운 몸
액션과 폭력적인 영상에 길들여진 우리 눈에 몸은 하나의 무기로도 보인다. 실제로 어떤 몸은 폭탄을 장착하고 민간인들을 향해 뛰어들기도 하고, 어떤 몸은 무고한 기자를 납치해 살해하기도 한다. 어떤 몸은 뉴욕의 무역센터 건물로 비행기를 몰기도 하고, 어떤 몸은 정치적 이념과는 전혀 무관한 올림픽 선수들을 무참히 살해하기도 한다. 이것이 우리가 네모난 세상 속에서 익숙하게 보았던 우리들의 추악한 몸이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뮌헨>, 이제 곧 개봉할 워쇼스키 형제의 <브이 포 벤데타>, 거장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폭력의 역사>,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크래쉬>... 모두 이 추악한 몸이 벌이는 테러와 폭력의 문제를 화두로 삼고 있는 영화들이다. 9.11 테러가 이제 그 의미를 찾는 시점이 다가오자 영화들은 일제히 테러리즘에 대한 자아성찰을 시도하고 있는 듯 하다.
그리고 동양에 이연걸이 있다. 그는 내한 인터뷰 기사에서 “전쟁이 끊이지 않는 현대사회에 폭력은 폭력을, 복수는 복수를 낳는다는 것... 폭력과 테러가 난무하는 서방세계에 복수의 반복은 악순환일 뿐”이라고 말했다. <무인 곽원갑>이 단순한 이소룡류의 격투기나, 성룡류의 오리엔탈 롤러코스터, 혹은 서극류의 환타지가 아니라는 걸 말해주는 대목이다. 그는 곽원갑이라는 인물을 통해 진정한 무도(武道)의 길을 펼쳐보인다. 몸은 잘못이 없다. 문제는 마음 속의 두려움이다. 그 두려움을 넘어서 타인의 몸까지 껴안을 수 있을 때, 몸은 더이상 추악한 무기가 아니라 아름다운 그 무엇이 된다.

진정한 무도가 완성된 그 후
최고의 무술인이 되겠다는 욕망에 사로잡힌 몸은 무기로 변해 라이벌인 진대인을 죽이고 만다. 폭력의 시작은 끝이 처참하다. 진대인의 제자는 곽원갑의 노모와 어린 딸을 살해한다. 눈이 뒤집힌 곽원갑은 칼을 들고 진대인의 집을 찾아간다. 진대인의 시신이 놓여진 곳 옆에서 진대인의 아내와 딸이 두려움에 떨고 있는 모습을 본 곽원갑은 칼을 버리고 만다. 그 상황에서 곽원갑은 자신의 딸과 노모의 모습을 진대인 아내와 딸에서 발견하게 된 것이다. 자시의 신뢰(사랑하는 딸과 노모를 위해 복수를 해야한다)와 동시에 존중(진대인의 아내와 딸도 마찬가지의 고통을 겪고 있다)이 생겨난 것이다.
1인자가 되는 순간에 곽원갑은 나락의 길을 걷는다. 자살을 시도하지만 맹인소녀 문을 만나 마음의 상처를 치료하면서 진정한 무인의 길을 깨닫게 된다. 무기가 아름다운 몸으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에 앞못보는 맹인소녀의 도움이 있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곽원갑은 고향으로 돌아와 진대인의 아내와 딸을 찾아 사죄한다. 이로써 그는 진정으로 강한 자, 자신의 두려움을 이겨낸 자가 되는 것이다.
만일 영화가 여기서 끝났다면 이 영화는 세상에 대한 폭력과 그 폭력에 대처하는 동양적인 대안을 제시한 영화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영화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완성된 무인은 시대적 소명을 갖게 되고, 서구열강과 일본에 대항하는 중국의 영웅이 된다.

국가라는 이름으로는 폭력이 정당한 것인가
WBC(World Baseball Classic)에서 보았던 것처럼, 일본이라는 나라는 우리나 중국이나 반드시 이겨야할 대상이다. 과거의 문제가 현재도 반복되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이건 이 영화가 얘기하려는 것은 본래 아니었다. 폭력을 폭력으로 해결하는 것은 곽원갑 스스로도 몸소 겪었던 것이 아닌가. 물론 영화적 장치들은 되어있다. 상대편 일본선수가 곽원갑의 손을 들어주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이 풍경은 우리에게 낯선 장면이 아니다. 우리가 저 <바람의 파이터>에서 기대했던 진정한 무도의 길의 모습이 점차 민족주의적인 색채로 변해갔던 그 장면 말이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뮌헨>에서 말하는 ‘국가라는 이름 하의 무조건적인 충성’이 가져온 연쇄폭력은 개인의 불행을 담보로 한다. 개인적으로는 누구나 다 아름다운 몸을 갖고 있다. 하지만 국가라는 틀이 그 몸을 갖게 되면 추악한 모습으로 돌변한다. <무인 곽원갑>이 넘지 못한 선은 바로 이 액션영화로의 귀의에 있다. 그가 이 영화를 ‘한 무인의 삶을 통한 사회적인 드라마’로 일컫지 않고 ‘마지막 액션영화’로 소개한 것은 이런 이유다. 이연걸은 알고 있었다. 이 영화가 ‘폭력에 대한 철학적 대안’이 아닌 ‘액션영화’라는 사실을.

이소룡, 성룡, 이연걸로 오는 몸의 계보학
냉전시대에 탄생한 중국무술영화의 영웅, 이소룡의 몸은 파괴적이다. 적과의 대결 속에서 어떻게 하면 상대방을 효과적으로 살상하느냐가 그의 몸이 보여주는 매력이다. 그러다 우리는 성룡이라는 괴짜 무술인, 변칙 무술인을 만나게 된다. 그는 냉전을 비웃듯이 몸을 희화화시킨다. 똑같이 살상을 목표로 하지만 동작들은 말하는 것 같다. ‘정말 웃기지 않니? 이 몸이 말야.’ 성룡의 액션은 점차 체조화되고 무용화되어간다.
그리고 이연걸이 있었다. 그의 동작은 아름다웠다. 하나의 무술이면서도 몸의 예술, 무용이었다. 무술영화가 그 미적인 힘을 발휘하는 부분은 그 동작의 무용적인 특성에 있다. 아름다운 몸의 동작들을 보면서 우리는 감탄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액션영화들은 이 무용을 하는 듯한 몸을 폭력과 연결시켜 미학화한다. 느와르의 탄생이다. 타란티노의 <킬빌>이나 워쇼스키의 <매트릭스> 같은 영화는 모두 이 몸의 느와르를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많은 액션영화들은 아름다운 몸을 차용해 폭력적인 장면, 상황을 정당화하고 있다. 멋진 동작 하나를 보면서 우리는 빠져든다. 그러면서 저들이 왜 저렇게 싸우고 있는지조차 생각하지 않게 된다. 이것이 몸이 무기가 된 이유이다.

아름다운 몸을 탓하지 말라
성찰은 몸에서 나오는 게 아니고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달라이라마의 종교에 대한 성찰은 우리 몸을 아름답게 한다. 이연걸은 이제 그 몸의 차원을 보다 내적인 곳으로 끌어들인 것 같다. 그는 이제 나이들었고, 찍을만큼 많이 액션영화도 찍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젊을 때 고통은, 육체적 측면이 컸지만, 나이 들수록 마음의 고통이 커졌다. 마흔이 가까워오자 비로소 내가 처한 고통을 ‘객관화’하기 시작했다. 어려움은 바깥에서 주어지는 게 아니라 내가 그 문제를 어떻게 보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름다운 몸을 탓하지 말자. 그 몸을 폭력으로 내모는 수많은 사회적 모순들과, 그 몸을 전장으로 내모는 국가적인 폭력을 탓하자. 그리고 마음을 가다듬자. 몸은 아름답다.

가벼운 너무나 가벼운

윤석호 PD의 <봄의 왈츠>가 왈츠풍의 클래식이라면 표민수 PD의 <넌 어느 별에서 왔니>는 코믹하고 경쾌한 스타카토풍의 소품이다. <봄의 왈츠>가 하나의 운명적인 서사시라면 <넌 어느 별에서 왔니>는 쿡쿡 대며 웃다가 눈물이 나는 순정만화이다.

<봄의 왈츠>의 시작이 청산도의 바다를 잡아, 섬에 갇혀 점점 섬이 되어가는 한 사내의 어린시절을 그렸다면, <넌 어느 별에서 왔니>는 강원도 오지 첩첩산골에서 다시 만나는 과거의 아우라다. <봄의 왈츠>의 주인공들이 과거에 상처를 안고 살아가듯이, <넌 어느 별에서 왔니>의 김래원 역시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교통사고로 애인이 죽은 것. 하지만 이 드라마에서 상처를 다루는 방법은 <봄의 왈츠>와 같은 정공법이 아니다. 상처를 보여주고 그 기저의 감성을 갖고 다음의 드라마를 엮어간다기 보다는, 상처를 숨기고 살아가면서 언뜻언뜻 보이는 상처의 모습으로 드라마를 엮어간다. 따라서 드라마의 힘은 <봄의 왈츠>와 <넌 어느 별에서 왔니>가 서로 다르다. 전자는 과거의 상처에 힘의 근원이 있고, 후자는 현재와 미래에 어떻게 될 것인가에 그 힘이 있다.

유명한 영화감독인 김래원은 뮤직비디오 촬영차 산골로 들어가고, 그곳에서 죽은 애인과 똑같은 정려원을 만난다. 잘 나가는 영화감독과 시골소녀의 만남. 어딘지 모르게 삐걱거릴 것 같은 그 만남은 표민수 PD 특유의 만화적 구성으로 시종일관 웃음을 터트리게 한다. 표민수 PD는 한 공간에 이질적인 신분의 남녀를 집어넣고 그 톡톡 튀는 대결구도를 잘 그려내는 감독이다. <풀 하우스>에서 비와 송혜교의 만남을 기억하는 시청자라면 김래원과 정려원의 만남 또한 익숙하다. 이질적인 만남을 부드럽게 연결시키는 것은 장소와 유머다. 우여곡절 끝에 정려원의 집에서 민박을 하게 되는 김래원의 모습은 저 도시에서 잘나가던 PD가 시골집에서 얼마나 무력한가를 보여주면서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반면 정려원은 시골소녀지만 그 시골에서는 김래원을 능가하는 능력을 보여준다. 이것은 당연한 것이겠지만 후에 정려원이 도시로 왔을 때 정반대의 상황을 연출하는데 고스란히 활용될 것이다.

이런 아이러니한 설정은 만화적인 화면 배치를 통해, 풋풋한 동화같은 느낌을 던져주면서 동시에 신분이 다른 남녀의 대결양상은 물론이고, 자연스러운 관계의 끈을 만들어낸다. 표민수표 드라마의 공력이다. 하지만 이 가벼운 이야기와 경쾌한 농담은 동시에 그 기저에 있는 캐릭터들의 무거운 아픔이 전제되어 있기에 힘을 발한다. 이것은 순정만화 속에 심각한 표정의 주인공들, 그리고 그 옆에서 우스워죽겠다는 듯이 키득대는 망가진 캐릭터가 공존하는 풍경과 같다. 요는 ‘뭐 그렇게 심각하게 폼을 잡냐. 누구는 안 아픈 줄 아냐.’는 식의 이야기다.

정려원의 캐릭터는 아마도 우리에게 익숙한 김삼순의 모습을 닮아있다. 시골에서 도시의 잘 나가는 PD, 김래원에게 한 방 먹인 정려원은 이제 도시로 와서 김래원에게 한 방 먹을 것이다. 하지만 정려원이 누군가.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다. 촌스러움으로 힘으로 맞서나가는 그녀의 모습에서 시청자들은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될 것이다. 이 드라마는 사랑이라는 표면적인 달콤함을 바르고 있지만, 달라진 상황 속에서 그걸 헤쳐나가는 정려원의 모습이 관건이다. 물론 현재지향적인 표민수 PD 특유의 톡톡 튀는 대결구도가 흥미를 제공한다.

<봄의 왈츠>의 구도는 어린시절의 우화가 만들어낸 반면, <넌 어느 별에서 왔니>의 구도는 산골오지에서 김래원이 정려원과 만나 벌이는 해프닝이 차지한다. 전자가 어린이를 내세웠지만 어른들의 드라마를 보여준 반면, 후자는 어른들이 나오지만 어린아이들 같은 대결구도의 드라마를 연출한다. 전자가 인파이터로 첫주먹을 날렸다면, 후자는 변칙복싱으로 대응했다. 첫 대결은 1:1 무승부다. 하지만 본격적인 대결은 다음주부터가 될 것이다. <봄의 왈츠>의 재하는 죽은 걸로 알고 오랫동안 가슴에만 묻어왔던 은영을 만나러 달려갔고. <넌 어느 별에서 왔니>의 정려원과 김래원은 본격적인 대결에 들어섰다. 이제 드라마의 구도는 완성되었고, 2라운드의 흥미진진한 전개가 시작될 것이다.

<하늘이시여>, 그 하드코어 세상이 말해주는 것들

아이들 성추행 사건이 공공연히 벌어지고, 그걸 막는 법을 만들어야할 국회의원이란 사람은 여기자를 성추행하고 뒤늦게 문제가 커지자 가게주인인줄 알았다는 망언을 해대는 세상이다. 할 수만 있다면 “하늘이시여!”하며 기도라도 올리고 싶은 심정이다. 드라마 <하늘이시여>에서 악마소굴 같은 곳에 있는 딸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친엄마 한혜숙의 마음이 그랬을까?
사회나 드라마나 TV 속 네모난 세상 속에서 보여지는 것은 늘 아름다운 세상만은 아니다. 때로는 추악한 모습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여지없이 사회문제에 무관심했던 사람들의 이목을 잡아끈다. 그 추악한 모습은 너무나 자극적이고 충격적이어서 일종의 안전장치를 채우기도 한다. 하지만 때로는 가감 없는 방송이 등장해 시청자들의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 놀라운 것은 방송사가 의도한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그런 방송에 시청률이 높다는 것이다.
물론 사회적인 이슈나 정치적 사건들을 만든 장본인들에게 의도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혹자들은 정치적 사건들 속에도 음모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번 최연희 의원 성추행 파문을 각종 현안에 대한 물타기로 보는 민노당의 입장이 그렇다). 하지만 그런 내용의 뉴스들을 내보내는 ‘편성’에는 역시 의도가 숨어있다. 공정함이 생명이라는 뉴스에도 공공연한 선정성 논란이 이는 마당에 드라마는 오죽할까. 시청률 확보라는 의도로 오랜 세월동안 수많은 노하우를 축적한 드라마는 그 유혹이 너무나 가깝다. 이것이 지나친 감정의 하드코어가 범람하는 드라마가 탄생하는 이유이다.

드라마의 하드코어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함께 드라마를 봤다. 드라마 속에서는 시어머니에게 대드는 며느리의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보기에 민망한 며느리가 채널을 돌리려고 하는데 시어머니가 말했다. “내가 언제 저 늙은이 저렇게 될 줄 알았지. 속이 다 후련하다!”
현실의 시어머니들이 이렇게 드라마 속에서 며느리의 입장을 대변하는 이유는 무얼까. 답은 명확하다. 나이가 많다고 해서 드라마 속의 인물에 감정이입되는 대상도 나이가 많은 건 아니라는 것이다. 예컨대 아줌마들도 <하늘이시여>를 보며 자경의 입장 속으로 빠져든다. 그렇다면 자경의 친엄마나 새엄마, 강예리, 왕모 등은 어떨까. 자경보다는 덜 하겠지만 역시 감정이입의 대상이 된다. 아줌마들은 드라마라는 게임의 틀 안에서 그 무수한 인물들 속에 자신을 집어넣으며 때론 웃고 울며 때론 분노하고 때론 통쾌함을 느끼는 것이다. 이것이 옷을 벗겨놓은 날 것의 드라마가 가진 본능적인 속성이다. 그러니 드라마 속 인물에 대한 평이 현실에 대한 관점과 다르다고 해서 놀랄 것이 없다. 그것은 감정의 게임이니까. 게다가 이건 그냥 보면 보는 것이고 보지 않으면 마는 드라마가 아닌가.

감정의 게임
놀라울 정도의 수위를 넘고 있는 선정성 시비에도 불구하고 계속 앞으로 전진할 수 있는 드라마의 힘은 바로 이 감정의 게임에 있다. 차라리 불륜이나 이복남매의 사랑같은 근친상간은 이제 입방아거리가 더이상 되지 못한다. 아들을 요정에 데려가 술판을 벌이는 아버지가 등장하고, 심지어는 술 취한 아들에게 여자까지 소개시켜 준다. 아내의 친구와 밀회를 즐기는 남편, 혼자 된 형수를 사랑하게된 시동생, 한 남자를 뺏고 빼앗는 싸움을 벌이는 자매, 친자매와 친형제 사이에 엮이는 결혼, 남자 고교생과 교실에서 키스하고 여관을 드나드는 여교사....
한 측면에서보면 도저히 이해안되는 상황들도 양자의 측면에서 보면 이해가 된다. 드라마는 이 ‘상대방 입장되어보기’ 감정 게임이라는 편리한 틀을 가지고 사람들의 금기를 건드린다. 신문기사에서 보면 혀를 찰 내용도 드라마로 보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글쎄 그 애가 그랬다니까?” “아! 그래서 그런 거였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내용 자체보다도 이런 감정의 게임을 주로 하는 드라마들은 사실 대부분이 앞으로 전개될 내용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심지어는 첫회에 모든 것을 알게되는 드라마도 있다. 달라지는 것은 주인공의 직업과 배경설정 등이다(이것도 그다지 다르지 않은 걸 보면 드라마 작가들만의 공식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채널을 고정시킨다. 이것은 빤히 다 아는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보는 하드코어와 다를 바가 없다. “이번 회에는 임채무가 자경이 친엄마를 만난대.” 다 알고 있지만 시청률은 올라간다. 왜 우리는 다 아는 내용을 또 확인하고자 하는걸까.

본격 하드코어 드라마 <하늘이시여>
우리에게 하드코어 드라마는 낯선 것이 아니다. 이른바 결혼을 지고선(至高善)으로 주장하는 짝짓기 드라마, 그런 드라마에 늘 등장하는 백마탄 왕자들 혹은 공주님들, 그들이 만나 사랑하는 신데렐라 혹은 온달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불륜 등은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드라마의 단골메뉴들이다. 이들이 엮어가는 닭살 애정과 감정 긁기의 하드코어에 우리는 번번이 빠져든다. 관성이자 중독이다.
<하늘이시여>는 하드코어 드라마의 이런 모든 요소들을 빠짐없이 갖고 있다. 누가 왕모와 결혼할 것인가가 이 드라마의 핵심이고, 물론 왕모는 현대판 백마탄 왕자이며 자경은 완벽한 신데렐라다. 딸이면서도 결혼을 반대하고 돈을 벌어오라는 못된 계모까지 갖고 있으니 금상첨화다. 하드코어 드라마가 갖는 중독성은 모두 갖고 있는 셈이다. 우리는 핍박받는 자경에게 동화되면서, 잘난 왕모가 집안 좋은 강예리를 차고 비천하기까지한 자경에게 지극정성하는 장면에 통쾌함을 느낀다.

드라마를 이끄는 힘은 분노이다
강한 중독은 강한 분노에서 비롯된다. 분노를 만드는 인물들은 거의 악마와 같은 수준이다. 자경의 새엄마는 “네가 결혼하면 돈 벌어다 줄 사람이 없으니 결혼 못시킨다”는 말도 안되는 논리로 시청자들의 감정에 상처를 낸다. 가해자가 말도 통하지 않으니 시청자들의 상처입은 답답한 감정은 폭발할 것만 같다. 잘난 자기를 찼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어려운 강예리는 “너까짓게..”하면서 자경의 머리끄댕이를 잡아당긴다. 자경에게 동화되어 극중 그녀가 받은 상처를 고스란히 갖고있는 시청자들은 자경을 보호해줄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갈구한다.
보통의 하드코어 드라마에서 그 보호의 역할은 왕자님이 맡는다. <하늘이시여> 역시 마찬가지지만 이보다 더 강력한 것이 들어있다. 그것은 친엄마이다. 친엄마가 가진 사랑이 왕자님의 그것과 비교할 수 있을까. 그런데 그 왕자님의 엄마가 친엄마이다. 친 딸을 며느리로 들인다는 비상식적인 설정에 대한 시청자와 드라마와의 암묵적인 계약은 바로 여기서 성립된다. 왕자에 친엄마의 보호막이 있으니 자경이 처한 지금의 현실은 그래도 살만하다. 그리고 앞으로는 저 악마들에게 보복을 할 수 있다. 분노를 가진 시청자들은 그 가해자들이 당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한다. 또한 한편으로는 사실이 밝혀지는 것을 불안해한다. 시청자들의 분노와 불안이 극에 달하면 달할수록 시청률은 치솟아오른다.

출생의 비밀이라는 감정의 시한폭탄
여기에 덧붙여지는 출생의 비밀이라는 장치는 두 가지를 가능케 한다.
그 첫번째는 자극적인 설정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숨겨진 출생의 비밀이 밝혀지자 “알고보니 배다른 남매였더라”라는 설정은 드라마 속에 근친간의 사랑을 가능케한다. 게다가 그것이 드러나는 순간,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는 운명이 된다(요즘은 법안이 바뀌어 이루어질 수도 있는 사랑이 되었지만). 가을동화의 준서와 은서가 그랬고, 피아노의 한재수와 이수아가 그랬으며, 진주목걸이의 김민종, 김유미, 아름다운 죄의 조은숙, 정준호, 최근 천국의 나무에서는 신현준과 최지우가 그러면서 하나의 트렌드가 되었다.
두 번째는 출생의 비밀이 앞으로 도래할 시한폭탄 같은 파장을 예감케한다는 것이다. 이로인해 시청자들은 그간 쌓여온 강한 분노 혹은 억압에 대한 융단폭격을 기다리게 된다. ‘드러난 사실’로 그간의 관계들은 모두 역전되고 해소될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된다. 하지만 당해왔던 오랜 시간에 비해 그 보복의 순간은 아주 짧다. 드라마는 해소와 함께 끝나는 것이기에, 사실이 드러나는 그 순간은 종영을 의미한다. 해소는 환상이다. 시청자들을 TV앞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끊임없는 가해이다. 적당한 시기에 드라마 속 악마들은 손톱을 드러내 아물려고 했던 상처를 긁어댄다. 시원한 듯 하지만 그 상처는 계속해서 덧나게 마련이다.

하드코어 세상, 하드코어 드라마
드라마가 세상을 반영한다는 것은 그것을 비판적으로 보았을 때에만 해당되는 말이다. 어느날 아침 출근길에 갑자기 다리가 끊어지고, 저녁 찬거리 사러나간 백화점이 무너지고, 길을 가다가 가스가 폭발하고, 지하철을 탔는데 누군가 불을 던지는 사회다. 아이들 연속 성추행 사건은 정치인들의 하드코어 취중난동 시리즈들에서 이미 예견된 바다. 최연희 의원에서 정점에 이른 이 시리즈는 술자리에서 욕설을 해 구설수에 오른 주성영 의원에서부터, 맥주병 투척사건의 곽성문 의원, 이어지는 박계동 의원의 맥주 투척사건, 묵사마 정형근 의원의 호텔방 소동으로 이어지는 정치드라마다. 대사의 수준은 DJ 치매노인 발언으로 극에 달한 ‘막말’이 일반적이다. 실제로 정치인들이 그런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적어도 TV는 그런 장면들을 보여준다.
우리는 왠만한 자극과 충격에는 둔감해져 있다. 정치드라마 속에서 정치인들이 벌이는 수많은 하드코어적 행태들은 우리에게 극도의 분노를 만들어낸다. 들은 늘 그런 거니까”, 하는 포기가 잇따른다. 포기 뒤에는 무관심이다. 무관심 속에 남는 것은 관성 밖에는 없다. <하늘이시여>는 작중인물들이 만들어내는 분노, 새엄마는 늘 나쁘고 친엄마는 늘 구원이라는 포기, 그럼으로 해서 남는 감정의 하드코어들에 의한 관성이 뒤범벅되어 나타난다.

드라마의 본성과 이야기하는 방식
<하늘이시여>가 갖는 중독성은 자극적인 관계설정과 시청자의 중독을 부추기는 거친 대사들, 그로인해 시청자들이 갖는 작중인물과의 동일시에서 비롯되는 분노 그리고 보복심리에서 비롯된다. 비정상적인 관계들(친딸을 며느리 삼으려는 어머니, 호적상 삼촌과 사랑에 빠진 조카)은 출생의 비밀에 덧대진 자극적인 관계설정의 산물이며, 분장사 비하발언이 계속된다거나 양딸의 결혼을 막기 위해 삼촌과 사랑에 빠졌던 딸의 과거를 예비 시어머니에게 폭로하는 새엄마와 같은 비상식적이고 극단적인 에피소드들은 분노를 부추기기 위한 전략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라마는 드라마다. 시청률이 지고선이 된 시대에, 임성한 작가가 “자신의 어머니가 즐거워할만한 드라마를 쓴다”고 말했듯이 재미있으면 됐지 뭘 바라냐고 하면 할 말은 없다. 드라마가 꼭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어야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게다가 사실 위의 얘기들은 비단 <하늘이시여>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대부분의 드라마가 갖는 전략들이다. 이것은 고대 소포클레스의 희곡에서부터 셰익스피어를 거쳐 지금까지 내려오는 극(drama)의 본성이다. 이 힘에 의해 우리는 드라마는 물론, 연극, 영화의 재미를 느끼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이야기하는 방식이다. 시청률을 높이기 위한 것이라지만 모두가 알고 있는 설정, 대사, 흐름을 답습하면서 중독성 강한 하드코어적 진행으로만 간다면 자칫 드라마의 퇴행을 가져올 수도 있다. 요즘 유행처럼 번지는 과거 드라마들의 리메이크가 이 퇴행적인 양상을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 이런 하드코어식의 드라마가, 많은 완성도 높은 드라마들을 보는 시청자들의 입맛을 변질시키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소프트코어 드라마를 기다리며
<하늘이시여>를 가지고 임성한 작가의 전작들, <인어아가씨>, <왕꽃선녀님>과 비교하면서 “원래 그 작가는 그렇다”고 치부하는 건 드라마 기획자들이 바라는 바이다. 오히려 어떻게 보면 임성한 작가는 작가라기보다는 드라마가 갖는 힘을 정확히 알고 있는 장인이라고 할만하다. 50부작을 60부작으로, 60부작을 75부작으로 마음대로 늘릴 수 있는 작가는 흔치 않을 것이다. 드라마 전쟁이라고 할만한 방송3사의 각축전 속에서 좀더 높은 시청률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고집스런 작가보다는 이런 전략에 능숙한 장인이 필요하다. 요는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의 눈이다. 드라마 기획자들은 모든 기획의 초점을 바로 시청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드라마가 강한 메시지와 새로운 주제, 형식을 반드시 추구할 필요는 없다. 드라마들이 하는 대부분의 이야기, “윤리적으로, 운명적으로 안되지만 사랑한다는 데 어쩔 것인가?”하는 정도의 주제라도 좋다. 문제는 완성도이다. 적어도 소프트코어 드라마를 기다리는 것은 그것이 시청자들에 대한 예의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하드코어가 범람하는 세상 속에서 노희경 작가의 <굿바이 솔로>가 신선하게 다가오는 것은 분노가 아닌 화해로, 포기가 아닌 기대로, 강한 자극에 벼려진 시청자의 눈을 적시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늘이시여! 이제 봄을 맞아 사람들이 하드코어를 더이상 바라지 않는 세상이 되기를....

애국가 대중화 논란에 대하여

각본 없는 드라마, <월드컵 2> 개봉이 100일 앞으로 다가왔다. 그 예고편을 보러갔다. 예고편이 시작되기 전에 간단한 국민의례가 있었다. 일동기립! 동해물과 백두산이∼ 장중하게 흘러가던 애국가가 갑자기 락 버전으로 바뀌면서 극장 안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어떤 이들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애국가에 맞춰 머리를 흔들고 춤을 췄고, 어떤 이들은 그 행태를 보며 혀를 찼다. 락의 강렬한 리듬과 애국가의 장중한 가사가 만나자 사람들은 깊은 혼동에 빠졌다.

일류극장과 삼류극장 사이
그 광경은 오래 전 흑백 기억 속에 남아있는 극장에서의 한 장면을 끄집어낸다. 당시 죄지은 게 많은 군인출신 대통령들은 국민의례를 강화했다. 그것은 일본 제국주의 군대부터 배운 것이었다. 애국가는 하루에도 몇 번씩 울려퍼졌다. 하루가 저물어가는 저녁에는 온 나라사람들이 멈춰서서 애국가를 듣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이런 상황에 각종 경기는 물론이고 영화관까지 애국가가 들어오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우리는 영화를 보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해야 했다. 그런데 이때도 이른바 일류극장과 동네삼류극장의 풍경이 달랐으니, 일류극장은 애국가가 흘러나오는 와중에 사람들이 한 명도 빠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던 반면에, 동네삼류극장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애국가가 흐르는 동안, 발을 떡 하니 앞좌석에 얹어놓고 잡담을 하거나, 심지어는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그 극장 안에 흐르던 아나키즘적인 분위기는 혼자만 서서 국민의례를 할 수 없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그것은 일동기립하는 일류극장에서 혼자만 앉아있지 못하게 하는 파시즘적인 구석이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였다.

매국과 애국 사이
민주화운동을 거치면서 극장에서의 애국가는 사라졌다. 한 시대를 풍미한 촌스러운 애국가 소동은 더이상 먹혀들 일도 아니었다. 우리는 여전히 경기장에서 애국가를 들었지만 그다지 감흥이 없었다. 하지만 국가대표들이 나서는 국가간 스포츠는 달랐다. 국민스포츠로 자리잡은 축구는 2002년 월드컵을 통해 애국가를 하나의 장엄한 의식으로 다시 끌어들였다. 축구장에서 거대한 태극기가 펼쳐지며 울려퍼지는 애국가는 앞으로 벌어질 타국과의 경기를 앞둔 우리에게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불끈불끈 솟아오르게 했다.
하지만 이제 애국은 과거 파시즘의 그늘을 벗어야 했다. 사람들은 국기게양대에서 찬양받던 태극기를 두건으로도 쓰고, 치마와 브래지어로도 만들어 입었다. 애국은 보다 일상화되는 면모를 보였다. ‘국민’이라는 타이틀은 명품이 되었다. 국민스포츠인 축구는 국기인 태극기를 브랜드로 만들었고, 국가대표 축구팀응원단인 붉은악마 역시 브랜드가 되게했다. 애국은 잘 팔려나갔다. 나라를 파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그 이익이 나라로 돌아온다는 점에서 그건 매국이 아닌 애국이었다. 매국과 애국의 차이는 그 이익이 어디에 있느냐에 달려있었다. 그 어지러운 틈바구니 속에 윤도현이 있었다. 그는 ‘오 필승 코리아’를 부르며 ‘국민적인 스타’가 되었다.

이익과 이익 사이
월드컵의 엄청난 이익은 기업으로 돌아갔다. 당시 SKT는 또 하나의 브랜드가 된 붉은악마를 잘 활용해 엄청난 홍보효과를 거두었다. 그것은 붉은악마에게도 이득이 되었다. 그러나 월드컵이 끝나자 SKT는 붉은악마와 약속했던 축구에 대한 지원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더이상 순수한 응원모임이 아닌 이제는 하나의 기업이 되어가고 있던 붉은악마는 뒤늦게 자신들이 너무 순진하게 사업(?)을 추진해왔다는 걸 알게 되었다.
붉은악마와 SKT는 서로 등을 돌렸다. 붉은악마는 SKT를 ‘월드컵에만 반짝하는 거대기업’으로 몰았다. 이런 기회를 틈타 KTF가 붉은악마와 손을 잡았다. SKT는 붉은악마의 이미지를 자사의 이미지로 만들면서 붉은악마를 소외시키는 전략을 썼다. 그들은 ‘세계적인 응원문화를 SK텔레콤이 창출했다’고 발표했다.
그 틈바구니 속에는 또다시 윤도현이 있었다. 그는 ‘오 필승 코리아’를 다시 부르고 싶었지만 노래에 대한 저작권 분쟁으로 부를 수가 없었다. 2002년 당시, 붉은악마 서포터즈들이 형님 도와달라며 편곡자인 이근상 씨에게 편곡을 맡긴 ‘오 필승 코리아’는 순식간에 대박상품이 되었고, 그러자 이 곡은 편곡자인 이근상 씨와 붉은악마 회원인 강모, 김모 씨의 공동저작물이 되었다. 윤도현측은 이 곡을 새롭게 편곡해 응원가로 부르고 SKT의 광고CM으로도 사용하려고 했다. 하지만 저작권자인 강모, 김모 씨와 협의는 결렬되었다.
초기의 순수함은 사라져 버렸다. 이제 월드컵 홍보전쟁 속에서 누가 먼저 포문을 여느냐가 관건이었다. SKT는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냈다. 월드컵이라는 전쟁에서 제일 잘 팔리는 아이템인 애국을 가장 드러낼 수 있는 곡, 누구나 아는 곡, 한 때는 장중한 음악으로만 불리던 곡, 애국가를 락으로 편곡해 CM에 넣자는 것이었다. 애국가에는 저작권이 없었으므로 그건 바로 채택되었다.

애국가와 안티애국가 사이
애국가와 락의 만남은 기묘했다. 락의 정신은 주로 반사회적이고 반체제적인 정서에서부터 출발하는데 그렇다면 윤도현의 애국가는 애국가인가, 아니면 애국가를 비판하는 안티애국가인가. 사람들의 혼동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한 나라의 애국가는 장엄한 그 어떤 것이기에 마음대로 가볍게 만들어버리면 안된다는 이들이 있었고, 지루하기만 했던 애국가를 보다 다이나믹하게 편곡해서 더 많이 부르게 하자는 게 뭐가 나쁘냐는 이들이 있었다. 이야기는 다시 군인이 대통령이던 시절, 일류극장과 삼류극장을 오가는 것 같았다.
그 중심에 다시 윤도현이 있었다. 이것은 다른 사람도 아닌 윤도현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만일 노브레인이나 조용필이 불렀다면 이건 논란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었다. 그들의 의도가 어떻든 늘상 체제전복적인 발언과 노래를 해온 노브레인이 부르면 분명 안티애국가가 될 것이고, 이제는 부동의 국민가수가 된 조용필이 부른다면 애국가가 될 것이 분명했다. 그것은 가수의 색깔 혹은 이미지와 관련이 있는 얘기였다. 하지만 윤도현은 달랐다. 그가 밟고 있는 곳은 그 어느 쪽도 아닌 중간의 어느 지점이었다.

락과 대중가요 사이
윤도현은 <정글스토리>에서 록커가 되기 위해 무작정 상경한 시골청년이었고, 콘서트 연습을 할 곳이 없어 황량한 벌판에 세워진 비닐하우스에서 맹연습을 했던 배고픈 록커였다. <윤도현밴드 Vol.3>라는 첫 앨범에서 <먼 훗날>이라는 곡으로 주목을 받았지만 그래도 윤도현이 자신의 이미지를 확고히 세운 것은 두번째 앨범으로 나온 <한국 락 다시 부르기>에서였다. 윤도현밴드의 이미지는 다소 거칠고, 하드하며 그로테스크하기까지 했던 당시 락 밴드들의 그것과는 달랐다. 깔끔하고 정돈되어있으면서도 윤도현만의 강한 힘이 잘 어우러져 있었다. 하지만 이 약간은 어정쩡한 중간지대 때문에 윤도현밴드는 초기, 락 팬들과 가요팬들 양자의 호응을 얻지 못했다. 가요팬들에게 여전히 락은 부담스러운 것이었고, 락 팬들에게 윤도현밴드는 너무 곱상해 보였다.
그는 <한국 락 다시 부르기>에서 우리네 한국 락의 정령들을 끌어모았다. 그가 선택한 노선은 역시 독특했다. 락의 대부라 할 수 있는 신중현은 물론이고, 배철수, 전인권, 강산에, 옥슨80, 샌드페블즈, 심지어는 송창식에 러시아 락의 전설인 빅토르 최에 이르기까지 우리 귀에 익숙한 다양한 노래들이 들어있었다. 그것들은 상당히 락의 저항정신을 담고 있는 노래들이었다. 놀라운 것은 그 모든 노래를 윤도현밴드만의 색깔로 편곡한 것이었다. 이러자 락 팬들은 ‘한국락’에 주목했고 가요팬들은 그 친숙한 노래를 부르는 깔끔한 이미지의 윤도현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2002년 월드컵, 윤도현은 락으로 부르는 응원가의 강렬한 힘과 대중적인 어필을 동시에 해내면서 국민가수가 되었다.

애국가 논란은 윤도현 밴드가 가진 힘
그런 그가 애국가를 불렀다. 그걸 가지고 애국가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느니, 잘 만든 ‘애국가 다시 부르기’라느니 하는 건 사실 윤도현밴드의 문제가 아니다. 올림픽 같은 걸 보면 외국가수들이 자기네 국가를 R&B 스타일로 부르는 모습을 왕왕 볼 수 있지만 그걸 가지고 뭐라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왜 유독 우리는 여기에 민감한 것일까.
윤도현밴드의 애국가 논란은 애국에 대한 우리네 정서가 심하게 뒤틀려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밖에는 안된다. 윤도현밴드의 소속사인 다음기획 김영준 대표는 윤도현밴드가 애국가를 부를 수밖에 없었던 전후사정을 설명하면서 소속, 단체 등을 떠나서 함께 응원가를 소개하고 부를 수 있는 쇼케이스를 마련하자는 제안을 했다. 응원가가 이렇게 힘을 발휘하는 모습은 마치 과거 수업시간 빼먹고 단체로 모여 응원연습을 했던 시절의 회색빛 기억을 떠올리게 만든다.
사정이야 어떻든 윤도현 밴드는 애국가 논란에서는 무죄다. 오히려 이 논란은 윤도현 밴드가 가진 힘을 거꾸로 말해준다. 돈과 이익에 얽힌 문제는 별개다. 윤도현 밴드도 자신의 상품가치를 정당하게 팔 수 있는 권리가 있다. 다만 의도했든 안했든 논란을 야기해 주목을 끌고있는 기업들의 행태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마치 과거 군인출신 대통령이 국민의례를 통해 세뇌시키려고 했던 애국의 망령을 다시 불러내는 것 같아 씁쓸하다. 이제는 돈이 절대권력이 된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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