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도전> 역대급 추격전, 또 하나의 레전드 탄생

 

<무한도전> ‘공개수배에 대한 시청자들의 반응은 폭발적이다. 그저 그런 또 하나의 추격전이 아닌가 하고 생각됐던 이번 프로젝트는 그러나 전혀 다른 역대급 추격전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런 평가가 나오게 된 것은 이번 프로젝트가 가진 독특한 상황 설정에서 비롯된다.

 


'무한도전(사진출처:MBC)'

공개수배는 마치 비슷한 제목의 범인 추적 대국민 프로그램처럼 기획되었다. 실제 부산의 형사들이 추격전에 투입되었고, <무한도전>의 멤버들은 자신들을 체포하려는 이들 형사들로부터 탈주하는 미션을 부여받았다.

 

부산이라는 실제 공간과 그곳의 형사가 투입됐고 게다가 부산 시내 곳곳에서 결과적으로는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 시민들은 가상이 아닌 실제 상황이다. 그러니 여기에 갖가지 죄목으로 쫓기는 범인이 된 <무한도전> 멤버들이 아니라면 이건 마치 미국의 <캅스> 같은 경찰이 실제 범죄현장을 덮치는 과정을 보여주는 리얼리티쇼처럼 보여질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에 <무한도전> 멤버들이 투입되면서 이 리얼리티쇼는 절묘하게도 가상의 상황극과 엮어질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추격전이 가진 긴박감과 동시에 웃음까지 잡을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실제 형사들이 본부의 지원을 받으며 <무한도전> 멤버들을 추격하는 과정은 손에 땀을 쥐는 긴장감을 유발했고, 한편 그렇게 쫓기는 멤버들이 보여주는 리액션들은 웃음을 유발하기에 충분했다.

 

흥미로운 건 형사들에 의해 붙잡힌 <무한도전> 멤버들이 만만찮은 저항을 선보였다는 점이다. 잡혔다가 몰래 도망친 박명수나 정준하에 대해 형사들도 혀를 찼다. 물론 그건 실제 수갑이 아니었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지만 그래도 이들이 그간 여러차례의 추격전을 통해 얻게된 노하우가 빛을 발했던 것도 사실이다.

 

이 과정에서 유재석은 역시 에이스다운 면모를 보여줬다. 그는 누구보다 비상한 두뇌와 단단한 체력과 순발력으로 형사들의 추격을 물리치며 자신들에게 주어진 미션을 수행해나갔다. 역대급이었던 건 방공호로 마련되어 있던 충무시설에서 차량을 찾는 과정이었다. 마치 미로처럼 생긴 그 특별한 공간은 이번 추격전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여겨지게 만들었다.

 

유재석은 역시 추격전에도 또 웃음에도 베테랑이었다. ‘충무시설에서 차량을 찾아 옛 해사고에 휴대폰을 찾으러 간 유재석은 들려오는 음산한 벨소리에 여러 차례 건물 밖으로 뛰쳐나오며 이거 공포특집이야라고 말해 보는 이들에 큰 웃음을 선사했다.

 

광희는 의외로 추격전에 강한 면모를 보여줬다. 소심한 성격은 추격전에서는 주도면밀함으로 드러났고 비가 오는 와중에도 좁은 공간에 숨어 형사가 지나치기를 기다리는 모습을 보여주는 등 반전의 주인공이 되었다.

 

무엇보다 이 프로젝트가 괜찮았다 여겨지는 건 이것이 예능으로서도 더할 나위 없는 웃음과 긴박감을 주었지만 동시에 공적으로도 훌륭한 기획이었다는 점이었다. <무한도전> 멤버들을 본 부산시민들이 몰려들어 팬심으로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는 그 과정을 프로그램은 시민의 제보로 편집해 넣었다. 즉 시민의 제보 하나가 범인 검거에 있어서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가를 이 프로젝트가 여지없이 보여줬다는 점이다.

 

그런데 왜 하필 부산이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부산이라는 공간과 특유의 부산사투리가 이 추격전을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지게 만들어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실제로 그 많은 범죄를 소재로 한 영화들이 부산을 배경으로 만들어졌고 특유의 부산사투리는 거친 남자들의 세계를 표현하는데 최적이었다.

 

마치 하나의 게임처럼 시작했던 게 <무한도전>의 추격전이다. 하지만 이번 공개수배는 이 추격전이 하나의 리얼 상황처럼 특정 현실 공간에서 벌어졌다는 점에서 역대급이다. 리얼과 가상이 적절히 조화되고, 웃음과 긴박감이 넘나들며, 게다가 재미와 의미까지 모두 더한 이번 공개수배는 그래서 또 하나의 추격전 레전드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사극의 진화, <뿌나>에 이은 <육룡>

 

사극의 전형은 아마도 왕이 명을 내리고 신하들은 일제히 통촉해 주시옵소서!”하며 외치는 장면이 아닐까. SBS <육룡이 나르샤>에는 그런 장면이 없다. 아니 아예 왕은 전면에 등장하지도 않는다. 동시대를 다뤘던 KBS <정도전>에서 그래도 공민왕도 나오고 공양왕도 나오며 공민왕의 어머니인 명덕태후도 나오는 것과는 사뭇 다른 그림이다.

 


'육룡이 나르샤(사진출처:SBS)'

왕이 전면에 나오지 않자 대전의 모습도 거의 없다.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건 도당의 풍경이다. 도당은 고려후기 최고의 정무기관으로 도평의사사라고도 불린다. 하지만 이런 역사적 사실보다 중요한 건 이 도당이 지금 현재의 국회를 연상시킨다는 것이다. 왕이 등장하지 않을 정도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이 시대, 그 실세는 도당3인방이라고 불리는 이인겸(최종원), 길태미(박혁권), 홍인방(전노민)이다. 물론 이들은 가상인물이다.

 

이것은 <육룡이 나르샤>의 독특한 인물구성이다. ‘육룡이 그렇듯이 거기에는 실존인물인 이성계(천호진), 정도전(김명민), 이방원(유아인)과 함께 가상인물인 분이(신세경), 땅새(변요한), 무휼(윤균상)이 뒤섞여있다. 이런 구성은 이미 김영현, 박상연 작가의 전작인 <뿌리 깊은 나무>에서도 시도됐던 것이다. 거기에서도 세종(한석규)이라는 실존인물과 강채윤(장혁), 소이(신세경) 같은 가상인물이 함께한다.

 

이들 가상인물들은 그저 역사적 인물들을 보조해주는 캐릭터가 아니다. 그들은 오히려 이 역사의 뒤안길에서 실제 역사를 만들어낸 주역들로 그려진다. 전면에는 역사적 인물이 있지만 그 이면에는 그들을 돕거나 그들이 어떤 결심을 하게 만드는 요인으로서의 가상인물들이 자리한다. 이것은 <뿌리 깊은 나무>에 이은 <육룡이 나르샤>라는 사극이 이제 어떤 새로운 진화의 단계를 보여주고 있다는 증거들이다.

 

사극이 역사로부터 조금씩 떼어져 나와 상상력을 가미하기 시작한 건 이병훈 감독이 시작했던 이른바 퓨전사극이라고 불리는 시도에서부터였다. <허준>, <대장금> 같은 작품이 그것이다. 이들은 실존인물이지만 역사적 사료가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아 나머지 행적들은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다시 쓰여졌다.

 

이렇게 상상력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만들어지자 사극은 좀 더 과감한 시도들을 보여준다. 즉 결국은 권력자의 기록이 될 수밖에 없는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것들을 상상력으로 재구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추노> 같은 사극은 역사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분명 존재했을 노비들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놀라운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사극이 역사에서 점점 벗어나 심지어 역사의식 자체를 버리고 상상력 깊숙이 들어가자 사극은 하나의 장르극일뿐 사극 특유의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해를 품은 달>이나 <성균관스캔들>은 현대적 장르물이 단지 과거의 어떤 시점을 배경으로 재연된 느낌을 주었다. 물론 그것이 의미 없다는 건 아니지만 사극이라면 응당 있어야만 될 것 같은 역사의식이 배제된 느낌은 사극만이 가진 독특한 영역을 허물어뜨리게 되었다.

 

그래서 사극이 다시 회귀한 것이 <정도전>이나 <징비록> 같은 정통사극이다. 다시 역사와 역사의식을 회복시키는 것이 사극의 명맥을 이어갈 수 있는 힘이라 여기게 된 것이다. 그래서 역사적 사료에 충실한 정통사극이 다시 주목을 받았으나 이 또한 역사라는 틀의 한계에 머물러 있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결과라 보기는 어려웠다.

 

이런 일련의 흐름에서 보면 <뿌리 깊은 나무>에 이어 <육룡이 나르샤>가 구축해가고 있는 역사와 가상의 공존방식은 사극의 대안적인 진화가 아닐까 싶다. 역사이기 때문에 우리는 과거를 들여다보는 것이지만 그 과거는 현재를 위한 것이다. 그러니 현재의 대중들이 갖고 있는 역사의식과 상상력이 투영되어야만 그 역사는 박제된 것이 아닌 살아 움직이는 것이 된다.

 

역사란 이처럼 팩트에만 머물러 있을 때 오히려 왜곡의 길을 걸을 수 있다. 역사의 기록은 권력자들에게는 팩트일 수 있어도 피권력자들에게는 왜곡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역사적 인물과 가상인물이 한 공간에서 대화를 나누고 그 결과로서 어떤 역사를 그려나가는 이야기는 그 자체로 우리가 역사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하는 관점이 들어있다. 이것은 저 역사학자 E.H 카가 말한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맥락을 잘 구현해낸 것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사극조차도 역사를 바라보는 이런 식견을 드러내고 있는 상황이다.



<디데이>의 미래병원, 우리 사회의 자화상

 

병원이 이 모양인데 무슨 희망이 있습니까?” 119 구급대원이 응급환자를 구조해 왔지만 대량수혈이 필요한 환자는 받지 않는다는 게 방침이라는 의사에게 구급대원은 그렇게 말한다. 지진으로 정상적인 운용이 어려운 병원이라지만 환자를 길거리에서 죽어가게 만든다는 건 의사로서 아니 인간으로서는 비상식적인 일이다. 그래서 의사가 내세우는 건 이른바 병원의 방침이다. 그 결정은 자신이 내리는 것이 아니라 병원이 내리는 것이라 치부하는 것이다.

 


'디데이(사진출처:JTBC)'

JTBC 드라마 <디데이>의 이 구급대원이 던지는 질문은 마치 우리 사회에 대한 질문처럼 다가온다. 이 드라마에서 미래병원(이름에 미래를 붙인 건 의도적이었을 게다)은 우리 사회를 상징하는 것만 같다. 즉 병원이 이 모양인데 무슨 희망이 있냐는 일갈은 재난으로 사람이 죽어가는 마당에 방침 운운하며 생명을 방치하는 우리 사회의 절망을 떠올리게 한다. 이런 식으로는 미래병원의 희망, 아니 이 사회의 미래는 없을 것이다.

 

미래병원의 이 이야기는 재난 대책 마련을 위해 대통령이 각 부처 장관들과 회의를 하는 장면에서도 그대로 연출된다. 지금 저 바깥에서는 국민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장관들은 이 일의 책임 소재를 피하려고만 안간힘이다. 서로 자신의 부처가 해야 할 일이 아니라며 다른 부처에 일을 떠넘기는 걸 보다보면 정말 이 나라가 희망이란 건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미래병원에는 두 종류의 의사들이 있다. 그 놈의 방침에 철저히 입각해 환자가 설혹 수술 중 사망하게 되더라도 책임 소재를 없애려는 박건 병원장(이경영)이 있고 그에 동조하는 한우진(하석진) 같은 의사가 있는 반면, 눈앞의 환자를 외면하지 않고 1%의 가능성도 버리지 않으려는 이해성(김영광) 같은 의사가 있다. 박건은 사람 목숨이 다 똑같다는 말은 틀린 말이라고 말한다. 그는 재난 속에서도 보건복지부 장관을 살리는 일에만 열중한다. 그것이 병원 경영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재난이 터지자 미래병원의 문을 닫아걸면서 박건은 이런 논리를 내세운다. 이런 재난은 국공립병원들이 짊어져야할 일이라고. 자신들처럼 사립병원들은 재난상황에 환자들을 받을 이유가 없다는 것. 이것은 철저히 상업 논리다. 의료민영화가 만들어낼 미래의 풍경을 미래 병원 박건 병원장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병원은 돈을 버는 곳이지 생명을 살리는 곳이 아니다.

 

<디데이>는 물론 서울 한복판에 벌어지는 지진이라는 가상의 재난상황을 그리고 있지만 그 이야기는 다름 아닌 지금 현재 우리들 이야기다. 여기서 병원과 국가와 인간은 거의 동격이나 마찬가지다. 환자를 살리기보다는 돈 버는 게 우선인 병원이나 당장 힘겨워 죽음 같은 생계의 고통을 겪고 있는 국민을 살리기보다는 나라 경제 운운하며 돈 버는 일을 전면에 내세우는 국가, 아니 나아가 사람이 사람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회가 아니라 서로 살기 위해 생존경쟁을 벌이게 되어버린 시스템 속에서 비정해져버린 사람들은 모두 같은 이야기를 건넨다.

 

재난이 말해주는 건 위기상황에서 비로소 드러나는 인간의 증명이다. 평상시에는 수면 밑에 깔려 있어 잘 보이지 않던 일들이 위기를 맞게 되면 수면 위로 떠오른다. 이해성의 어머니가 사실은 한우진의 의료과실에 의해 식물인간 상태가 되었지만 미래병원장 박건이 병원의 입장에서 이를 덮어버린 일은 그래서 사실 재난은 터지기 이전부터 이미 우리들 모르게 진행되고 있다는 걸 말해준다.

 

그래서 <디데이>가 보여주는 인간의 증명은 또한 병원의 증명이기도 하고 국가의 증명이기도 하다. 우리가 살아가는 곳이 본래 어떤 모습이었는가를 이 드라마는 아프게도 우리 눈앞에 펼쳐 보여준다. 그리고 선택하라고 한다. 당신은 자신이 인간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해낼 것인가. 지금 현재 우리 사회에서 암암리에 벌어지고 있지만 묻혀지고 있는 비인간적인 일들. 결코 드라마를 드라마로만 볼 수 없는 이유다.



<픽셀>, 덕후도 일반인도 재밌어질 수 있었던 까닭

 

<픽셀>80년대 아케이드 게임에 푹 빠졌던 이들에게는 대단히 특별한 영화다. 그들은 PC 게임 이전, 오락실에서 동전을 넣어가며 했던 갤러그나 동키콩, 팩맨을 기억할 것이다. 50원 짜리 동전을 집어넣고 한 시간 넘게 게임을 하면 마치 구경이라도 난 듯 아이들이 모여 감탄사를 흘리고, 주인아저씨는 동전을 되돌려주며 다신 오지 말라고 했던 그 기억. <픽셀>은 그 기억을 회고하는 것을 넘어서 그 게임 속으로 들어가는 영화다. 어찌 열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사진:영화<픽셀>

물론 이 영화의 장르는 코미디다. 홍보용 영상을 보면 마치 <인디펜던스 데이>같은 외계인 침공의 액션 블록버스터처럼 오인될 소지가 있다. 만일 그런 영화를 기대했다면 <픽셀>은 실망감만 안겨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80년대 아케이드 게임의 감성을 자극하는 가벼운 코미디 영화라고 본다면 빵빵 터지는 웃음 코드와 함께 꽤 유쾌한 시간을 가질 수 있다.

 

물론 <픽셀>이 그리고 상상하는 세계는 꽤 철학적이다. 현실 세계로 게임 캐릭터들이 쏟아져 나오고 그 캐릭터들에 의해 도시가 파괴된다는 이야기는 얼토당토않은 유치한 상상처럼 받아들여질 수 있지만, 거기에는 현실과 가상의 경계가 점점 희미해져가는 작금의 디지털 세계의 단면이 들어가 있다. 이미 현실 위에 가상의 이모티콘과 표식들을 집어넣는 증강현실은 점점 우리의 실제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가상과 현실의 차이는 진짜냐 가짜냐 같은 질적인 차이가 아니라, 실제에 가까운가 아닌가 하는 양적인 차이(픽셀의 차이)라고 얘기한 빌렘 플루서의 이야기를 <픽셀>은 농담처럼 던지고 있는 느낌을 준다.

 

하지만 그렇다고 <픽셀>이 굉장히 무거운 주제를 메시지로 던지는 영화는 아니라는 점이다. 다만 이러한 가상과 현실에 금을 긋고 있는 관객들에게 그걸 사정없이 깨는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자연스럽게 코미디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게 이 영화의 묘미다. 즉 팩맨이 도시를 갉아먹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대통령서부터 국방부 장관까지 심각해지는 상황들이나, 무수한 훈련으로 단련된 군인들이 지네게임의 지네들이 쏟아져 내려오는 것이 어쩔 줄 몰라 할 때, 이 한때는 아케이드 덕후로 살다 이제는 루저가 된 이들이 광선총으로 지네들을 일망타진하는 상황이 그렇다. 우습지 않은가. 한 도시와 국가의 미래가 게임 덕후이자 루저들의 손에 달려있다는 사실이.

 

이것은 게임 같은 것을 가상으로 여기며 쓸데없는 짓으로 치부해온 기성세대들의 뒤통수를 때린다. 가상이 더 이상 가상이 아니라 현실로 들어왔을 때 그 달라진 현실의 영웅은 다름 아닌 가상에서의 영웅들이다. 게임을 좋아하고, 인터넷에 푹 빠져 현실보다 더 그 가상의 세계가 익숙한 중년들은 물론이고 디지털 네이티브인 젊은 세대들이라면 이 이야기가 주는 풍자적인 웃음이 통쾌함마저 줄 수 있는 이유다.

 

<픽셀>은 그러나 굳이 게임 덕후가 아니라도 즐거울 수 있는 보편적인 이야기 틀을 갖고 있다. 즉 루저들의 성공기가 그것이다. 한때는 잘 나갔었지만 성장하며 변방으로 밀려난 그들이 어떤 계기를 맞아 영웅이 된다는 이야기는 누구나 공감하고 몰입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즉 루저가 되는 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 그들이 어떤 계기를 만나지 못하게 하는 시스템의 문제라는 것.

 

또한 이 영화는 아케이드 게임을 즐겼던 중년들이 이제 앱 게임에 빠져있는 아이들과 함께 보며 어떤 덕후적(?) 공감대를 가질 수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픽셀>은 한때는 모두가 그랬을 덕후들을 추억하는 영화면서 동시에 어딘지 소외되어 변방으로 밀려난 이들을 한바탕 웃게 해주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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