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만’, 월화 11시 편성, 재방도 없는 이유는 뭘까

한사람만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 JTBC 월화드라마 <한 사람만>은 이 우리에게 익숙한 아프리카 속담을 떠올리게 한다. 아버지에게 학대받는 산아(서연우)를 구해내기 위해 시한부 판정을 받은 여성들이 나선다. 표인숙(안은진)은 그 아버지를 향해 골프채를 휘두른 장본인. 그런데 그를 그 곳까지 차로 데려간 인물은 성미도(박수영)이고, 자신이 몽유병 증세가 있다는 사실을 내세워 범인을 자처하는 인물이 강세연(강예원)이다.

 

그리고 마침 그 자리에 누군가의 사주를 받아 그 아버지를 먼저 살해하러 갔던 민우천(김경남)은 산아를 표인숙의 할머니 육성자(고두심)의 집에 데려다주고 그곳에서 인숙이 어린 시절 동반자살 하려던 가족 속에서 자신을 구해낸 여자아이였다는 걸 알게 된다. 그렇게 산아를 구해내기 위해 벌인 일로 관계를 맺게 된 표인숙, 성미도, 강세연 그리고 민우천은, 서로 자신들이 범인을 자처하려 한다. 

 

그런데 실제 범인은 산아의 엄마였다. 그럼에도 이들은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 산아가 잘 살아가기 위해서 엄마가 범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해서는 안된다 생각한다. 어차피 시한부 인생인 표인숙은 자신이 모든 걸 뒤집어쓰려하고, 그를 사랑하게 된 민우천은 자신이 그간 저지른 죄에 대한 벌로 이 사건의 범인을 자처하려 한다. 그들이 이런 선택을 하는 중심에는 한 아이, 산아가 있다. 그 ‘한 사람만’이라도 살아가게 하는 것에서 이들은 그 각박하고 부조리한 삶 속에서 작은 희망의 씨앗을 찾으려 안간힘을 쓴다. 

 

<한 사람만>은 삶과 죽음, 죄와 벌, 절망과 희망, 사랑과 미움 같은 묵직한 질문들이 한 작품 안에 녹여진 드라마다. 호스피스에 입원해 있는 이들은 마치 코미디 속의 인물들처럼 웃고 엉뚱한 소리를 해대며 살아가지만, 그것은 이들이 곧 죽음을 맞이할 사람들이라는 걸 애써 누르고 긍정함으로써 보이는 모습들이다. 루게릭 환자로 결국 죽음을 맞이한 문영지(소희정)의 에피소드는 그래서 슬프지만, 그는 죽어가면서도 아이 임지후(김수형)에게 죽음마저 긍정하게 만든다. 그 아이 ‘한 사람만’ 잘 살아갈 수 있다면 그 엄마는 기쁘게 눈을 감을 수 있었던 터다. 

 

이 드라마 속 인물들 중에는 유독 ‘한 사람만’ 바라보며 그의 행복을 위해 기꺼이 살아낸 이들이 등장한다. 표인숙 ‘한 사람’을 바라보며 살아온 육성자가 그렇고, 임지후 ‘한 사람’을 보며 눈을 감은 문영지가 그러하며, 이미 죽을 날을 앞두고 있지만 딸 강세연 ‘한 사람’에게만 집착하는 그의 엄마나, 하산아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나선 표인숙은 물론이고, 표인숙 ‘한 사람만’을 위해 기꺼이 모든 죄를 뒤집어쓰겠다고 나서는 민우천이 그렇다. 

 

어떤 한 사람은 삶 자체가 주변사람들을 살아갈 수 있는 온기를 만든다. 표인숙 같은 인물이다. 그로 인해 평생을 살인청부를 하면서도 무감정하게 살아왔던 민우천도 ‘진짜 삶’을 찾아낸다. 반면 어떤 한 사람은 그 삶 때문에 주변사람들을 살 수 없는 고통 속에 몰아넣는다. 산아의 아버지가 그렇고, 아동성범죄자로 출소한 박두진이나, 겉과는 다른 검은 속내를 숨긴 채 모종의 음모를 꾸미고 있는 구지표(한규원) 같은 인물들이 그렇다. 

 

세상에 작은 희망을 던지는 그런 한 사람이 될 것인가. 아니면 살아갈 가치가 없는 누군가에게는 절망을 주는 한 사람이 될 것인가. <한 사람만>은 멜로와 스릴러를 더해 이 묵직하고 진중한 질문을 던지는 드라마다. 물론 죽음을 전면에서 다루고 있기 때문에 다소 무겁고 어두운 면이 있지만, 그것이 지향하는 건 삶이고 희망인 드라마.

 

그래서 아쉬움이 더 남는다. 시청률이 0%대라고 그 진정성과 가치마저 홀대받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다. 그 가치를 알아보는 시청자들은 그래서 이 드라마가 밤 11시에 편성되어 주목받지 못하고 심지어 재방도 하지 않는 것에 안타까움과 아쉬움을 표하고 있다. 단 ‘한 사람만’이 아닌 보다 많은 이들이 볼만한 가치가 충분한 드라마기에.(사진:JTBC)

‘죽사남’ 최민수, ‘모래시계’ 인생 캐릭터 경신할 판

정말 대단한 연기라고 말할 수밖에 없겠다. MBC 수목드라마 <죽어야 사는 남자>의 사이드 파드 알리 백작(본명은 장달구) 역할을 연기하는 최민수 이야기다. 우리에게 아직까지도 <모래시계> “나 떨고 있냐?”라는 대사로 기억되는 그는 이번 작품을 통해 인생 캐릭터를 경신할 판이다. 

'죽어야 사는 남자(사진출처:MBC)'

이번 작품이 최민수의 연기 인생에 남다르다고 여겨지는 건 코믹한 과장 연기로 하나의 캐릭터를 완성해냈다는 점 때문이다. 마치 짐 캐리의 연기를 떠올리게 하는 그의 백작 연기는 의도적으로 과잉되어 있다. 마치 만화의 한 대목에서 나온 듯한 그런 비현실적인 캐릭터지만, 그것이 이 작품이 갖고 있는 판타지, 주제의식을 그대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1970년대 중동에 근로자로 가서 일하다 성공한 억만장자 로맨티스트. 자신에게 딸이 있다며 공주와의 결혼을 거부하는 그에게 왕은 그 딸을 데려오라고 명하고, 만일 데려오지 못하면 그의 모든 것들을 빼앗겠다고 엄포를 놓는다. 그래서 어마어마한 재력으로 못할게 없는 이 억만장자가 한국으로 들어와 딸을 찾고 그 관계를 회복해가는 이야기가 이 드라마의 줄거리다. 

보통의 드라마라면 이런 키다리 아저씨를 가진 딸 이지영A(강예원)가 당연히 주인공 역할을 할 것이다. 그래서 처음 <죽어야 사는 남자>가 방영됐을 때 이지영A가 자신의 지위를 회복해가는 그 과정이 드라마의 주요 내용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보면 볼수록 실제 이 드라마의 주인공은 이지영A라기보다는 백작이라는 것이 명백해진다. 물론 거기에는 최민수가 구축해내고 있는 놀라운 연기력이 작용한 덕분이기도 하지만.

초반 백작이 엉뚱하게도 이지영A의 남편인 강호림(신성록)의 내연녀인 이지영B(이소연)를 딸로 착각하고 그녀 역시 거짓말을 하면서 고구마 전개가 이어졌지만, 이제 백작이 진짜 딸이 누구인지를 알게 된 상황부터는 반전이 이뤄지고 있다. 그가 자신의 아버지인 줄 모르는 이지영A에게 무심한 척 챙겨주는 백작의 부정이 훈훈한 풍경들을 연출하고 있는 것. 고아원에서 딸을 만난 백작이 그녀의 하이힐 굽이 부러진 걸 보고 자신의 신발을 벗어주는 장면에는 우습기만 했던 그의 딸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묻어난다.

하지만 백작은 이런 딸에 대한 마음을 드러내면서도 그 고유의 캐릭터는 변함이 없다. 최민수는 여전히 과장된 표정 연기를 통해 자못 진지해진 순간에도 빵 터지게 만드는 상황을 연출한다. 진지한 연기를 줄곧 해왔던 최민수에게서 이런 코믹 캐릭터가 탄생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완전히 그 캐릭터에 빙의되어 몰입하지 않게 되면 어색하게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이 드라마의 제목 <죽어야 사는 남자>가 지칭하는 남자는 다름 아닌 백작이 아닐까 싶다. 이미 딸에게는 죽은 것으로 되어 있는 백작은 자신이 가진 재력으로 딸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하지만 그것이 그녀의 진정한 행복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지점이 이 드라마가 내세우는 주제의식일 것 같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녀의 꿈인 드라마 작가의 길을 계속 걷게 하는 것이 백작의 딸이 되는 것보다 그녀에게는 더 큰 행복일 수 있다는 것. 그런 의미에서 백작은 딸을 위해서 ‘죽어야 사는 남자’가 아닐까.

어쨌든 <죽어야 사는 남자>는, 이런 흥미로운 캐릭터를 구축하고 그 힘으로 드라마의 동력을 만들어낸 최민수라는 배우의 저력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 되었다. 결코 쉽게 해낼 수 없는 연기를 통해 드라마에 흥미를 만들어내고 또 그것을 드라마의 주제의식과도 연결시켰다는 점에서 최민수의 백작 캐릭터는 당분간 쉽게 잊히지 않을 것 같다. <모래시계>의 인생 캐릭터를 경신할 정도로.

‘죽사남’, 이런 속물들 보고 있으니 웃기기보다는 씁쓸하다

도대체 누가 죽어야 산다는 얘기일까. MBC 수목드라마 <죽어야 사는 남자>의 제목은 실로 아리송하다. 그래도 드라마를 보며 느끼는 건 이런 속물적인 세상이어서 참으로 살맛이 안 난다는 점이다. 코미디로 포장하고 있지만 웃기기보다는 오히려 씁쓸함이 더 남는 풍경들이 <죽어야 사는 남자>에는 가득 채워져 있다. 

'죽어야 사는 남자(사진출처:MBC)'

35년 만에 딸을 찾으러 온 사이드 파드 알리 백작. 우리 이름으로 장달구(최민수)는 엄청난 재력의 소유자다. 하지만 제 아무리 돈이 많아도 그렇게 오랜 세월을 혼자 지내게 한 딸 앞이라면 최소한의 부채감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장달구는 부채감은커녕 딸 앞에서도 당연한 듯 재력을 과시한다. 최고급 스포츠카를 선물하고 명품 옷과 가방 구두를 사서 딸의 집으로 보낸다. 처음 딸을 만난 자리에서도(물론 그건 진짜 딸이 아니었지만) 스포츠카를 넣을 주차장을 위해 그만큼 큰 집을 사준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런 장달구의 딸에 대한 마음보다는 자신의 재력을 자랑하는 듯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가 가짜 딸이라는 걸 알게 된 이지영B(이소연)는 거기에 대한 원망의 말 한 마디가 없다. 아버지만 있으면 된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녀의 마음 속에는 아버지의 재력에 대한 욕망이 꿈틀거린다. 그래서 자신이 가짜라는 걸 알면서도 내연관계에 있는 유부남 강호림(신성록)에게 가짜 부부 행세를 하자고 제안한다. 

<죽어야 사는 남자>에 나오는 대부분의 인물들이 이렇게 돈 앞에 속물적인 모습을 보인다. 강호림은 자신의 은행에 장달구가 거액의 돈을 유치해준 덕에 지점장의 완전히 다른 대우를 받는다. 그래서 그 돈이 빠져나가지 않게 하기 위해 그러면 절대 안 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이지영B와의 가짜 부부행세를 하는데 합의한다. 돈이면 다 되는 세상. 돈이 빠져나가면 그도 같이 나가라는 지점장의 이야기는 그래서 너무 현실적이라 씁쓸해진다. 

이 드라마에서 유일하게 속물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는 인물은 이지영A(강예원)다. 남편인 강호림이 자신을 무시하고, 시댁 식구들이 마치 하녀 부리듯 그녀를 부려먹어도 그녀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눌러가며 그걸 작품으로 승화하겠다고 한다. 드라마 작가가 되겠다는 그 꿈 하나를 위해 노력하지만, 그런 그녀를 남편과 시댁식구들을 무시하기 일쑤다. 유일하게 그녀를 응원해주는 건 딸과 그녀의 선배 미란(배해선)뿐이다. 

결국 이 모든 소동이 벌어지는 이유는 저 엄청난 재력을 가진 장달구라는 인물 때문이다. 그가 이 현실 속에 들어오게 되자 그들의 숨겨져 왔던 욕망들이 그를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러니 <죽어야 사는 남자>는 궁극적으로 이런 우리네 세태를 꼬집는 풍자극의 성격이 강하다. 

그래서 코미디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지만 웃으면서도 퍽퍽해지는 이상한 고구마의 느낌을 준다. 물론 아마도 이런 고구마는 결국 후반부에서 이지영A가 제 자리를 찾는 그 사이다 전개를 위한 포석일 것이다. 하지만 워낙 그 속물대잔치가 주는 고구마가 강해서인지 이러다간 사이다를 마시기도 전에 물릴 지경이다. 간간이라도 이지영A가 보여주는 사이다 한 모금이 절실해지는 시점이다.

‘언슬2’, 어째서 본격 여성예능을 시도하지 못할까

‘방송, 문화계의 멤버들이 꿈에 투자하는 계모임 꿈계에 가입하면서 펼치는 꿈 도전기를 다룬 프로그램.’ KBS <언니들의 슬램덩크2>에도 여전히 시즌1의 이 소개문구가 그대로 붙어 있다. 하지만 시즌1이 그나마 다양한 꿈에 도전하는 언니들의 모습을 보여줬다면 시즌2는 그 중 시청률이 잘 나왔었던 아이템인 ‘걸 그룹’ 도전을 전면에 내걸었다. 사실 <언니들의 슬램덩크2>의 몰락은 바로 이 부분에서부터 예고되었다고 할 수 있다.

'언니들의 슬램덩크2(사진출처:KBS)'

물론 시즌1에서 보여줬던 ‘언니쓰’의 활약은 프로그램 밖에서도 음원이 차트 1위를 차지했을 만큼 지지하고픈 모습들이었다. 거기에는 걸 그룹이 꿈이었던 민효린의 진정성이 있었고, 프로그램이 진행되면서 점차 혼신을 다하게 되는 모습들이 주는 뭉클함 같은 것들도 있었다. 하지만 시즌2를 한다면서 시즌1의 ‘언니쓰’ 부활을 전면에 들고 온 것에 진정성을 느끼기는 어려웠다. 지지와 응원을 표하기보다는 “또 걸 그룹이냐?”는 비판이 나오게 된 이유다. 

시즌2는 이미 우리가 봐왔던 시즌1의 ‘언니쓰’의 잔상들을 그대로 가져왔다. 춤과 노래를 전문가들 앞에서 선보이고 순위에 집착하는 언니들의 모습을 웃음으로 만들어내는 일. 역시 홍진경과 김숙은 전편에서도 그랬지만 언니쓰의 주춧돌이라는 것이 명백하게 느껴질 만큼 웃음을 잘 뽑아냈다. 여기에 한때 성악을 꿈꿨지만 성대결절로 노래하는 것 자체를 공포로 여기는 강예원의 도전기나, 어딘지 걸 그룹과도 또 예능 프로그램과도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한채영의 엉뚱한 자신감이 주는 웃음, 그리고 우리에게는 춤꾼으로 더 알려져 있지만 숨겨진 노래실력을 보여줄 공민지의 활약이 덧붙여졌다. 

박진영의 자리에 작곡가 김형석이 들어왔고 아이돌 육성 프로그램의 전문가들이 포진해 이들을 환골탈태시키는 과정이 이번 시즌2의 핵심이 될 것으로 보이지만, 어딘지 한 번 잘 우려내 먹은 사골을 다시 한 번 우리는 듯한 느낌이 적지 않다. 새로움이라고 해봐야 새로운 멤버들과의 조합이 보여주는 것일 뿐, 전편의 또 다른 반복으로 여겨지는 탓이다. 

무엇보다 시즌1의 진정성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 이번 시즌2가 가진 가장 큰 맹점이다. 결국 언니쓰를 다시 들고 나와 걸 그룹에 도전하겠다고 나선 이유가 간절한 소망이나 꿈같은 것이라기보다는 얄팍한 상업적인 이유가 더 크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방송사로서는 시청률을 내겠다는 것이고, 출연자들 역시 언니쓰가 만들어낸 그 효과를 또 한 번 기대하는 것이 아닐까. 이들을 육성해내는 전문가들 역시 꿈을 이뤄주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자신들의 존재가치를 드러내려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이건 선입견이고 편견일 수 있지만, 언니쓰를 굳이 재탕하겠다는 마음을 먹었을 때부터 예고된 선입견이자 편견이다.

첫 회에 5.4%(닐슨 코리아) 시청률에서 2회 만에 3.8%까지 추락한 건 그래서 쉽게 납득이 간다. 시청자들로서도 공감하기가 쉽지 않은데다, 시즌1의 언니쓰 활약에서 기대하게 했던 진정한 여성예능의 면면들을 이런 또 한 번 재탕하는 걸 그룹 도전으로 오히려 깎아먹는 결과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최근 몇 년 동안 우리 사회는 ‘여성’을 바라보는 비뚤어진 사회적 관념에 대한 문제의식을 조금씩 공유하기 시작했다. 강남역에서 벌어진 비극은 이 문제의식을 더욱 촉발시킨 계기로 작용했고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내면화했던 가부장적 사회의 통념들이 가진 폭력성을 발견하기도 했다. 즉 여성에 대한 의식들이 이렇게 급격히 변화해가고 있는 마당에, <언니들의 슬램덩크2>가 보여주는 퇴행은 이른바 여성예능을 기치로 내걸고 있으면서 보여줄 것이 ‘걸 그룹’밖에 없냐는 비판으로 이어진다. 

사실 어찌 보면 걸 그룹이라는 틀거리 자체나 이들을 육성시키는 과정 역시 그다지 여성을 여성 자체의 가치로 바라보는 의식을 담고 있다 보기 어렵다. 우리가 흔히 걸 그룹하면 떠올리는 그 이미지를 어떻게든 노력해서 결국은 반복하겠다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그 훈육의 과정은 마치 가부장적 틀을 그대로 갖고 온 우리네 사회의 성공 시스템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만 같다. 

물론 그들이 보여주는 엉뚱한 모습들에 웃음이 나올 수도 있지만 조금 더 민감해진 시선으로 현재 우리 사회가 억압하고 있는 여성이라는 문제를 들여다본 사람이라면, 그 웃음이 그리 유쾌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렇게 달라지고 있는 대중들의 의식을 왜 들여다보지 못하는 걸까. 좀 더 본격적인 여성예능을 왜 시도할 수는 없는 걸까. 그저 ‘걸 크러시’니 같은 포장만 요란하게 하지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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