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어로는 아닙니다만

 

하늘은 나는 건 기본이고, 시간을 되돌리고, 심지어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예지한다. 아마도 마블의 슈퍼히어로물이라면 이들은 지구를, 아니 우주를 구원했을 게다. 하지만 JTBC 토일드라마 ‘히어로는 아닙니다만’의 초능력자들은 지구는커녕 본인도 구원하지 못한다. 이유는 저마다 병을 얻어 능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것도 불면증, 우울증, 비만 같은 현대병을.

 

복만흠(고두심)은 예지몽 능력자지만 불면증에 걸렸다. 잠을 자야 꿈을 꾸고 꿈을 꿔야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예지할 수 있을 텐데 그 능력 자체가 불면증에 의해 원천봉쇄된 것이다. 복만흠의 아들 귀주(장기용)는 눈을 감고 행복했던 기억을 떠올리면 그 때로 되돌아갈 수 있는 타임슬립 능력자다. 하지만 아내가 사고로 사망한 후 우울증에 빠져버렸다. 술에 빠져 어두운 방구석에 스스로를 가둔 채 살아가는 귀주는 더 이상 타임슬립을 할 수 없게 됐다. 복만흠의 딸 동희(수현)는 하늘을 날 수 있는 비행능력자지만 비만으로 몸이 너무나 무거워졌고 결국 날 수 없게 됐다. 한 때는 모델이었고 그래서 남자들이 따랐지만, 이제 몸이 무거워지자 떠나가려는 남자들을 붙잡아두기 위해 와인바에 카페, 병원까지 차려주며 붙잡아두려 하지만 하나둘 떠나간다. 

 

이 정도면 눈치챘을 게다. ‘히어로는 아닙니다만’은 그 흔한 슈퍼히어로물의 서사와는 다른 결을 가진 작품이라는 걸. 초능력을 통해 불가능한 미션을 해결하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고, 현대병으로 능력을 잃은 초능력 가족을 내세워 현대인들의 초상을 풍자하는 이야기다. 즉 초능력자라고 설정되어 있지만, 그건 그런 능력자들조차 벗어날 수 없는 현대병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초능력자들도 현대병을 앓아 능력을 잃을 정도인데, 우리 같은 평범한 이들이 흔하게 겪는 현대병의 아픔은 얼마나 클 것인가. 

 

흥미롭게도 이 능력을 잃은 초능력 가족을 구원하는 건 엄청난 초능력자가 아니다. 그저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도다해(천우희)라는 인물이다. 물론 그 평범이란 초능력이 없다는 뜻이지 보통의 서민이란 의미는 아니다. 도다해는 의도적으로 부유한 만흠 가족을 털어먹기 위해 접근한 이른바 ‘목욕탕 패밀리’의 일원이다. 도다해가 엄마라 부르는 백일홍(김금순)과 동생으로 여기는 그레이스(류아벨) 그리고 삼촌이라 불리는 노형태(최광록)이 그 패밀리다. 이들은 도다해의 진짜 가족이 아니고 사기꾼 집단이지만 어딘가 유사가족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런데 사기결혼을 위해 만흠의 집안에 접근하고 집까지 초대받아 귀주와 그의 딸 이나(박소이)와도 다해가 가까워지면서 이 능력을 잃어버린 초능력 가족에게 변화가 생겨난다. 행복한 기억 자체가 없어 타임슬립 능력을 잃어버린 귀주가 다해를 통해 그 능력을 발휘하는 일이 벌어지고, 다해가 슬쩍 차에 넣은 수면제로 잠을 자게 된 만흠은 짧은 꿈속에서 예지몽 비슷한 걸 보게 된다. 결혼해 후손을 이어주면 500억 건물을 내주겠다고 만흠은 말했지만 남자들이 떠나가려 하고 마침 귀주와 다해가 결혼을 하게 되면 건물까지 빼앗길 수 있다고 조바심을 내는 동희는 런닝머신 위를 달리고 달리며 살을 빼고 다시 날고 싶어진다. 

 

‘히어로는 아닙니다만’은 이처럼 능력을 잃은 초능력자들을 지극히 평범한 다해라는 인물이 구원하는 서사를 통해 누군가를 배려하고 위로하고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이 시대의 초능력이라는 걸 보여준다. 그리고 에둘러 누구나 초능력 같은 가능성을 가진 존재들이지만, 우리가 사는 현실이 그걸 발현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이야기도 꺼내놓는다. 초능력자가 등장하지만 이 드라마가 로맨틱 코미디이자 가족드라마 나아가 휴먼드라마가 되는 이유다. 

 

‘히어로는 아닙니다만’은 또한 최근 ‘한국적’ 장르물들이 갖는 특징이 무엇인가를 명확히 드러내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미 ‘무빙’을 통해 보여진 것처럼, K드라마는 슈퍼히어로가 등장해도 가족의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 ‘오징어게임’ 같은 데스 서바이벌 장르에도 저마다의 인간적인 사연들로 인해 현실감을 주는 게 K드라마가 가진 힘이라면 ‘히어로는 아닙니다만’도 그 궤를 같이 하는 작품이라 할만하다. 초능력자가 등장하는데도 이토록 중력과 온기가 느껴지는 드라마라니. 눈이 즐거운 것보다 마음이 끌리는 K드라마의 특징을 이 작품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동백꽃’, 한 송이가 피어나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나를 잊지 말아요’ 라는 꽃말 하나를 남기고 향미(손담비)는 떠났다. 박복한 삶에도 그 마지막 순간까지 새 삶을 꿈꿨던 그지만, 연쇄살인범 까불이에 의해 속절없이 그 삶은 꺾였다. 하지만 그 꺾인 삶을 기억하는 이들이 있었다. 동백(공효진)은 까불이가 남긴 쪽지를 통해 향미가 자기 대신 죽음을 맞이했다는 걸 알고는 돌변했다. 참지 않겠다는 것. 용식(강하늘)은 호수에서 떠오른 사체 앞에서 넋을 잃었다. 향미에게 협박을 받아왔던 노규태(오정세), 또 죽여 버리겠다고 향미에게 차를 몰았던 제시카(지이수)마저 자신이 그를 죽인 건 아닌가 죄책감에 빠졌다. 한 사람의 삶은 그렇게 쉽게 잊히는 게 아니었다. 물망초의 기원처럼 향미는 그렇게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았다.

 

KBS 수목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이 사람을 바라보는 방식은 바로 이 향미를 바라보는 방식 그대로다. 어느 마을 이름도 잘 모를 법한 부평초 같은 삶을 살다 간 누군가를 깊게 들여다보는 것이다. 밑바닥 인생을 살았던 향미의 존재감이 그 누구보다 빛나게 된 건 바로 이런 시선 때문이다. 고아에 미혼모로 살아왔던 동백과, 동백의 삶을 그렇게 힘들게 만들었던 엄마 정숙(이정은)을 드라마는 누가 잘 했고 못 했고를 떠나 똑같은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이 드라마가 이런 따뜻하고도 공평한 시선을 통해 시청자들에게 위로를 주는 건, 우리 모두가 외롭고 힘겹게 살아가지만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동백은 혼자 버려져 세상을 버텨왔다고 생각했지만 알고 보니 보이지 않는 엄마의 시선이 늘 닿는 위치에 있었다. 까불이에게 죽을 위기에 몰렸을 때 기적 같은 우연 때문에 살 수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그의 곁에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목숨 따위 던져버릴 준비가 되어 있는 엄마가 있었다.

 

동백의 아들 필구(김강훈)는 아빠 없는 아이로 손가락질 받으면서도 엄마를 생각해 꿋꿋이 버텼다. 하지만 뒤늦게 필구가 자기 자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친부 강종렬(김지석)은 그의 주변을 떠나지 못한다. 어느 새 저도 모르게 옹산으로 달려와 있는 강종렬은 필구 주변을 빙빙 돌며 그를 챙기려 한다. 아마도 동백의 엄마 정숙도 그런 마음이었을 게다. 한 걸음 떨어져 있지만 마음만은 항상 그 곳에 있는.

 

늘 속없이 웃고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용식의 뒤에는 억척스럽게 일하며 그를 뒤에서 보살펴온 엄마 곽덕순(고두심)이 있었다. 앞에서는 등짝 스매싱을 날리지만 혹여나 몸 상할까 늘 걱정하며 냉장고에 보약을 챙겨 넣어주고, 며칠을 고아 삶은 오리탕을 먹인다. 또 수사에 도움이 될 CCTV 자료를 얻기 위해 영심이네서 밭일까지 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거기 전화해 당장 갖다 주라며 엄포를 놓기도 한다. 늘 자기가 잘 나서 일이 잘 된 것처럼 여기며 티 없이 살아가는 용식이지만 그런 삶의 뒤에는 곽덕순이 있었다.

 

심지어 그 누구보다 찌질하지만 마을에서 그나마 명망(?)을 유지하며 살아온 노규태에게도 그가 그렇게 살 수 있게 된 보이지 않는 보살핌이 있었다. 바로 이혼한 전 부인 홍자영(염혜란)이다. 향미가 사체로 호수에서 떠오르고 유력 용의자가 되어 임의 동행되어 갈 처지가 된 노규태에게 나타난 홍자영은 변호사의 카리스마로 그를 위기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강종렬의 자식이 있다는 소문을 추적하며 기사화하려는 기자들에게 든든한 보호막을 쳐주는 옹산 어벤져스 아주머니들 역시 보이지 않는 보살핌들이다. 그 아주머니들은 동백을 겉으로는 백안시하기도 했지만 “김치는 있냐”고 물으며 속으로는 챙겨주는 이들이었다. 동백을 든든히 챙겨주는 용식이와 엄마 정숙, 용식을 챙겨주는 덕순, 향미를 챙겨줬던 동백, 필구를 챙기려는 강종렬, 노규태를 보살피는 홍자영... 이런 따뜻한 보살핌들이 있어 우리는 살아갈 수 있는 게 아닐까.

 

누군가를 끝까지 기억해주고, 또 보이지 않게 마음을 쓴다는 건 어떤 기적들을 만들어내는 걸까. 아마도 <동백꽃 필 무렵>이 그려내려 한 것이 그것이고, 시청자들이 이 작고 촌스러운 시골 마을의 이야기에 깊은 감동과 위로를 받게 된 이유가 그것일 게다. 동백꽃 하나가 핀다는 것은 기적 같은 일이지만, 그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것. 그 꽃이 피어나기 위해 무수히 많은 보이지 않는 따뜻한 볕들이 어디선가 비춰주고 있었다는 것. 모두가 홀로 외롭게 버텨내고 있는 삶이지만, 지금 당신은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것. 누군가에게 기억되는 당신은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을 <동백꽃 필 무렵>은 얘기하고 있다.(사진:KBS)

‘동백꽃’, 공효진·고두심·이정은에게 꽃길을 내어주고 싶다

 

어떤 사람의 현재 행동은 그간 그 사람이 살아왔던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마련이다. KBS 수목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동백(공효진)은 옹산이라는 곳에 들어와 술집 까멜리아를 열었을 때부터 벌써 마을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어딘가 잔뜩 주눅 들어 있고 자존감이 바닥이라 갑자기 나타나 자신이 예쁘다고 최고라고 돌직구를 날리는 황용식(강하늘)에게 “내가 뭐라고”라는 말을 습관처럼 내놓는다.

 

거기에는 동백이 그간 고아로서 또 미혼모로서 살아오며 겪은 결코 쉽지 않은 세월들이 묻어난다. 모두가 엄마 손을 잡고 하교할 때 혼자 덩그러니 운동장에 남아 있는 그 경험이나, 미혼모에 술집을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자신을 야릇하게 쳐다보는 사내들과 자신을 여시처럼 백안시하는 여자들의 시선이 얼마나 그를 위축되게 만들었을까. 그래도 가끔 이 온순하기 이를 데 없어 보이는 동백이 하마로 변하는 건 그나마 아들 필구(김강훈)가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자신이 손가락질 받는 것이야 그렇다 쳐도 아들까지 그런 취급받는 건 용납하지 못했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황용식의 엄마 곽덕순(고두심)만은 다른 마을 아낙네들과 달리 동백을 ‘베스트 프렌드’로 대해준다. 마치 딸이나 되는 것처럼 살갑게 음식을 만들어 챙겨주고 그 힘겨움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듯 다독여주며 용기도 준다. 아직 늦지 않았다며 좋은 사내 만나 행복하게 살라고 등을 두드려준다. 동백은 그런 덕순에게 “아주머니 같은 엄마가 있었으면 했다”는 속내를 털어놓는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덕순이 동백을 이토록 챙기는 이유는 그 역시 비슷한 삶을 살아냈기 때문이다. 혼자되어 아들 용식을 키워냈던 것. 그래서 덕순과 용식은 마치 동백과 필구의 훗날처럼 보이기도 한다. 동병상련을 가진 덕순이 동백을 그토록 챙기고 다독여주는 건 그래서 어찌 보면 자기 자신을 다독이는 일처럼 보인다.

 

물론 자신의 아들 용식이 동백을 좋아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덕순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지만 그렇다고 치사하게 동백을 찾아가 머리채를 잡는 일 따위는 하지 않는다. 그는 그것이 용식이 잘못한 일이라며 그를 닦달하고 대신 동백에게는 “영영 나와 인연을 끊을 참이냐”며 여전한 살가운 마음을 드러낸다. 덕순에게서는 동백을 이해하고 챙기려는 마음과 그럼에도 아들의 미래를 걱정하는 마음이 뒤섞인다.

 

하지만 덕순은 금세 상황을 알아차린다. 동백을 지키려 추태를 부리는 노규태(오정세)와 한바탕 주먹질을 하고 경찰서에 끌려왔지만 동백이 구설에 오르는 걸 원치 않아 입을 꾹 다물고 제 잘못으로만 덮으려 하는 용식과, 그 곳을 찾아와 마치 필구가 그런 일을 당했을 때 하마로 변해 들이받았을 것처럼 노규태를 들이받으며 용식을 구해내는 동백을 보고 두 사람이 좋아할 수밖에 없겠구나 하는 걸 덕순은 깨닫는다.

 

그리고 어렸을 때 자신을 버리고 떠났던 동백의 엄마 조정숙(이정은)도 그렇게 긴 세월의 공백을 그가 보여주는 현재의 모습을 통해 드러낸다. 치매 증세를 갖고 있어 오락가락하는 동백의 엄마는 박카스를 쉬지 않고 마시며 하루 종일 집안일을 한다. 그리고 끝나고 나면 퇴근해도 되냐고 동백에게 묻는다. 그 행동들은 그간 자식까지 버리고 간 그의 삶이 결코 쉽지 않았다는 걸 말해준다. 박카스 한 병에 피로를 풀어가며 그 엄마는 딸 버렸다는 죄책감에 얼마나 자신을 일에 혹사시켜왔을까.

 

동백을 버린 엄마의 마음을 읽어낼 수 있는 건 딸을 떠나며 꼭 ‘동백’이라 이름을 부르게 하라 당부한 사실이다. 그건 동백꽃이 활짝 필 때 태어난 딸에 대한 그의 마음이면서, 혹여나 훗날 찾아올 수 있는 그 이름 길을 내기 위한 마음이기도 하다. 빚 독촉 때문에 시달렸던 동백의 어린 시절 기억은 엄마가 딸을 버린 일이 비정하지만 그를 미워해서가 아니라는 걸 짐작케 한다.

 

<동백꽃 필 무렵>의 세 여성, 동백, 덕순 그리고 정숙은 그 신산한 삶이 겹쳐져 보인다. 결코 평탄한 삶을 살아오지 않았지만 그들은 그래서 서로를 이해한다. 힘겨운 길을 함께 걸어가고 있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든든한 위로가 되어준다. 거기에 그 삶을 이해하며 너무나 일찍 철이 들어버린 필구와 그 삶을 “장하다” 칭찬하는 용식이 겹쳐진다. 그들은 어렵게 살았다. 그래서 그 어려움을 너무나 잘 이해하고 힘이 되어주고 싶어 한다.

 

동병상련의 마음은 그래서 <동백꽃 필 무렵>이 가진 그 어떤 드라마들보다 강력한 마력이 아닐까 싶다. 저들의 힘겨운 삶을 들여다보며 “맞아 맞아”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되고, 스스로를 비하하며 “내가 뭐라고”하는 그들에게 동백꽃으로 꽃길을 내어 주고픈 마음이 시청자들에게도 새록새록 생겨나게 만드는 그 힘. <동백꽃 필 무렵>을 보며 펑펑 울다 웃게 되는 이유다.(사진:KBS)

<디마프>, 조인성 특별출연이 특별하게 다가온 까닭

 

종영한 tvN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에는 조인성이 나왔다. 그런데 그는 특별출연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다. 사실 조인성 정도면 어떤 드라마에서든 주연 자리는 당연한 일처럼 여겨진다. 그가 출연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드라마를 챙겨보려는 팬들도 적지 않을 테니.

 

'디어 마이 프렌즈(사진출처:tvN)'

하지만 조인성은 <디어 마이 프렌즈>에서 한 발 뒤로 물러나는 위치를 기꺼이 감수했다. 그가 맡은 연하라는 캐릭터는 슬로베니아에 거주하는 인물이다. 완이(고현정)와 함께 그 곳에서 사랑을 피웠지만 불의의 사고로 두 다리를 못 쓰게 되었다. “장애인과 유부남은 안 된다(물론 뒤에 와서는 이런 편견을 모두 깨지만)”는 엄마 난희(고두심) 때문에 그녀는 그를 떠나와 돌아가지 못한다. 그런 자신을 질책한다. 그럼에도 연하는 그 먼 곳에서 그녀를 기다리는 그런 인물이다.

 

가끔 컴퓨터 모니터를 통해 완이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초반부에 등장하고, 점점 그가 당했던 사고와 그로 인해 완이와 떨어져 지내게 된 사연 등이 소개되며, 나아가 난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슬로베니아까지 날아온 완이와 다시 사랑을 시작하게 되는 이야기로 발전하지만, 연하는 이 드라마에서 중심적인 인물로 들어오지는 않는다. 그것은 그가 다리를 다친 후 그 자리에 멈춰선 수동적인 인물로 살아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완이를 도무지 잊을 수 없을 거라는 걸 알게 되면서 그는 그녀를 보기 위해 귀국하는 능동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것은 두 사람의 사랑이야기면서 동시에 연하의 자기 극복 이야기이기도 하다.

 

중요한 건 조인성이 이 역할을 맡아 드라마를 빛내주면서도 동시에 어르신들의 이야기가 중심에 설 수 있도록 한 발 뒤편으로 물러나는 걸 기꺼이 감수했다는 사실이다. 이 드라마에서 그는 특별출연이라고 되어 있지만 사실은 무게감 있는 조연에 가깝다. 어르신들이 저마다 앞으로 나와 스스로의 이야기를 하는 드라마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

 

사실 별거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의외로 연기자들은 드라마에서 자신이 서는 위치에 대해 민감하다. 특히 대중들의 뜨거운 관심을 받는 이들일수록 자신의 역할이 보조적인 것에 머무는 걸 용납하는 게 쉽지 않다. 그래서 심지어는 분명 조연인데도 불구하고 과한 연기로 주연을 가려버리는 중견 연기자들도 적지 않다. 결국 드라마가 팀플레이라고 생각한다면 제 아무리 연기력이 출중해도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그건 드라마를 망치는 일이기 때문이다.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담은 <디어 마이 프렌즈>는 김혜자, 나문희, 신구, 주현, 고두심, 박원숙, 윤여정 같은 쟁쟁한 중견 연기자들을 주인공으로 세웠다. 그분들은 모두 우리네 드라마에서 어머니, 아버지 역할을 해 오셨던 분들이다. 드라마가 어르신들의 이야기가 아닌 젊은 세대의 이야기를 더 많이 다뤄왔기 때문에, 이 분들은 항상 뒤편에 서서 보조적인 역할을 해주었다. 그 분들이 연기가 부족해서 그렇게 한 발 뒤로 물러나 계셨을까. 그것이 드라마 전체를 위해 도움이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디어 마이 프렌즈>는 이 분들이 그동안 어떻게 이 놀라운 연기력을 억누르며 뒤편에 서 있었는지가 놀라울 정도의 연기들을 보여줬다. 치매 연기를 하며 마치 아이처럼 우는 장면에서는 보는 이들을 모두 눈물짓게 만들었던 김혜자, 꼰대 남편에 대한 불만과 함께 여전히 남은 정을 보이는 따뜻한 연기를 선보인 나문희, 그 쉽지 않은 꼰대 역할을 제대로 보여준 신구, 속으로 깊은 상처를 안고 있지만 씩씩한 엄마로서 딸과 화해를 해나가는 변화를 연기한 고두심, 친구에 대한 깊은 우정과 오랜 세월 순애보를 안고 살아가는 여배우 역할을 실감나게 보여준 박원숙, 시원시원한 성격으로 보는 이들에게 사이다를 안겨준 윤여정 그리고 노년에도 여전히 멋있을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주현까지. 어느 한 명 빼놓을 수 없는 명연기들이 펼쳐졌다.

 

이들이 이렇게 속에 깊이 갖고 있던 연기에 대한 갈증을 제대로 풀어놓을 수 있었던 건 다름 아닌 노희경 작가가 그 마음껏 그 연기력을 펼쳐낼 수 있는 멍석을 깔아줬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인성이나 이광수 같은 이른바 특별출연연기자들은 기꺼이 뒤로 물러나 이분들이 전면에 나설 수 있게 해주었다. 다른 드라마에서는 저 어르신들이 해왔던 그런 역할을 즐겁게 자청했던 것.

 

이것은 <디어 마이 프렌즈>가 전하는 메시지와도 상응하는 이야기다. 지금껏 막연히 꼰대로 치부되어 왔던 어르신들의 목소리를 좀 더 담아내겠다는 것. 그러니 연기자들도 늘 뒤편에 있던 어르신들이 앞으로 나오고 앞에 서있던 젊은 배우들이 뒤로 물러나게 되었다. 조인성과 이광수 같은 연기자들의 특별출연이 특별하게 다가오는 건 그래서다.

 

물론 이런 배치와 이야기 구성은 있는 그대로의 현재의 어르신들의 모습을 무조건 긍정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지금 현재 고령화 사회의 길에 접어든 우리에게 어르신들은 변화를 요구받고 있다. 어버이가 어버이답지 못한 행동을 하는 현실 속에서 우리가 연장자라는 것 때문에 그것까지를 모두 수용하고 긍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디어 마이 프렌즈>는 그래서 현실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우리네 어르신들이 이랬으면 좋겠다는 비전을 담아냈다. 중견연기자들은 기꺼이 그 비전을 절절한 연기로 전해주었다. 조인성과 이광수 같은 젊은 배우들이 비껴 준 자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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