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극 같은 ‘82년생 김지영’, 그 담담함의 의미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게 평점 테러할 영화인가 하는 것이었다. 영화 <82년생 김지영>은 개봉 전부터, 캐스팅 당시부터 쏟아져 나왔던 악플들과 비난들에 휩싸였던 작품이다. 이른바 남혐 여혐 갈등을 조장하는 영화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 어디서도 혐오나 갈등 조장의 연출이나 내용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물론 원작 소설도 ‘혐오’하고는 거리가 멀지만 영화는 더더욱 담담해졌다고나 할까. 마치 한 편의 가족극을 보는 듯한 담담함.

 

가족극의 시선으로 보면 <82년생 김지영>은 육아와 가사 그리고 경력단절을 겪는 김지영(정유미)이 어느 날 갑자기 자신도 모르게 정신적인 문제를 갖게 되고, 이를 남편은 물론이고 온 가족이 나서서 해결하려 애쓰는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잘 다니던 회사를 육아와 가사 때문에 그만두고 경력단절을 겪는 여성이라는 주인공의 상황과, 그가 시댁에서 겪는 혼자만 소외되어 있는 것만 같은 상황은 여러 모로 젠더적 관점이 들어있다 볼 수 있다.

 

이런 이야기가 어디 새삼스러운가. 종영한 MBC <이상한 나라의 며느리> 같은 프로그램에서도 수시로 등장하는 이야기고, KBS 주말드라마에는 단골로 등장하는 소재다. 시대는 바뀌고 있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가부장적 체계 속에서 사회적으로도 또 심지어 가족 시스템에서도 김지영은 스스로도 자각하기 힘들 정도로 보이지 않는 차별을 겪는다. 그래서 그는 어딘가 자신이 잘못되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이렇게 말한다. “그냥 옛날 생각 자꾸 나고, 해 질 무렵에는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데, 그래도 괜찮아.”

 

하지만 스스로도 괜찮다 말했던 김지영은 사실 전혀 괜찮지 않다. 어쩌면 그렇게 괜찮다고 말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살아야 하는 상황이 오히려 그 문제를 더 악화시킨다. 갑자기 다른 사람에 빙의해 그간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김지영은 하기 시작한다. 자신도 모르게 쌓이고 쌓인 문제들을 끄집어내놓지 않고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살아가자, 그 억압을 빙의라는 형태로 꺼내놓기 시작한 것.

 

사실 <82년생 김지영>에서 가장 큰 사건은 바로 이 빙의사건 정도다. 나머지는 김지영을 걱정하는 남편과 그 누구보다 그를 이해하고 껴안아주는 어머니와의 공감이고, 빙의사건을 계기로 플래시백 되어 보여지는 과거 김지영이 살아왔던 삶 속에 저도 모르게 내재되어 있던 차별들이다.

 

<82년생 김지영>에는 딱히 두드러지는 악역이 없다. 김지영의 시어머니도 또 친아버지도 차별 섞인 말을 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악의를 갖고 있는 건 아니다. 모두가 함께 모여 담소를 나누는 명절에 며느리인 김지영에게 시누이가 귀한 만큼 며느리도 친정에 가게 해주는 배려 없이 “음식 좀 내와라”하는 시어머니는 물론 감정을 건드리는 면이 있지만 그렇다고 그게 악의적인 건 아니다. 또 밤늦게 다닌다며 김지영을 나무라면서 “바위가 굴러오면 피해야 한다”는 논리로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가 피하지 못하는 걸 나무라는 아버지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이야기는 시대착오적이지만 그건 악의라기보다는 살아왔던 사회에서 오래도록 그 가부장적 시스템 속에서 학습된 결과라고 보인다.

 

이건 아내를 사랑하고 이해하려 애쓰며 또 어떻게든 도와주려 하는 남편이지만, 어느 날 아르바이트를 하겠다고 나선 김지영에게 “일 그만두게 한 것도 미안한데 그 딴 아르바이트나 하냐”고 말하는 남편 정대현(공유)도 마찬가지다. 그는 아내를 누구보다 걱정하고 사랑하지만 그가 처한 세계와 환경은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하고 있다. 김지영을 돕기 위해서 필요한 건 자기 관점에서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그의 입장에 들어가 보는 일이다.

 

<82년생 김지영>은 영화 개봉 전 마치 엄청난 일이라도 벌어질 것처럼 평점 테러까지 이어졌지만, 심지어 가족극처럼 보일 정도로 담담하고 소소하다. 그런데 이것은 이 작품이 소소해서가 아니라 김지영이 겪는 차별의 문제가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우리네 일상에 내재되어 있는 이른바 ‘먼지 차별’이기 때문이다. 만일 이 영화가 더 극적인 상황이나 사건들을 가져왔다면 그건 특정한 상황에서 벌어지는 차별의 문제로 오도될 수 있었다. 따라서 그 담담함과 소소함 속에 이 영화가 가진 진짜 메시지가 담겨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가족이 다 함께 봐도 될 법한 영화다. 우리의 어머니와 우리의 아내 그리고 당대의 아버지들까지 모두 같이 겪었을 힘겨움을 새삼 다시금 떠올리게 하는 영화다. 한 인간에 대한 휴머니즘의 관점으로 보면 당연한 공감대를 주는 영화이기도 하다. 문제는 그 당연한 것들이 당연하지 않게 받아들여지고 마치 성별 갈등을 조장하기라도 할 듯 오도하는 일이다. 평점 테러? 영화를 보면 그런 일이 왜 벌어지고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게 될 것이다.(사진:영화'82년생 김지영')

‘멜로가 체질’, 이병헌 감독의 드라마 도전 결코 실패 아닌 건

 

JTBC 금토드라마 <멜로가 체질>은 한 마디로 미스터리다. 보면 볼수록 매력적인 캐릭터들과 클리셰를 훌쩍 뛰어넘는 재기발랄하고 의미심장한 대사들의 향연이 펼쳐지지만 어찌 된 일인지 시청률은 급상승한 마지막회조차 1%대에 머물렀다. 심지어 1.0%로 자칫 1% 밑으로 떨어질 뻔한 회도 두 차례나 있다. 올해 영화 <극한직업>으로 1천만 관객을 훌쩍 넘긴 이병헌 감독의 드라마 도전. 어째서 시청률은 화답하지 않은 걸까.

 

우선 전제해야할 건 시청률과 완성도는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주말드라마가 30% 시청률을 낸다고 해도 모두 완성도 높다는 평가를 받지 않듯이 시청률 1%짜리 드라마라고 해도 완성도가 낮다는 뜻은 아니라는 점이다. 시청률은 대중성의 잣대일 뿐 완성도와는 그리 상관이 없을 수 있다.

 

<멜로가 체질>은 완성도 높은 작품이다. 스스로가 ‘본격 수다 블록버스터’라고 기치를 내걸었듯이 속사포로 이어지는 대사들이 독특한 맛을 낸다. 인터넷에서 이미 회자되고 있는 <멜로가 체질>의 명대사를 검색해보면 그 말맛의 공력이 얼마나 깊은가를 새삼 확인할 수 있다. “그 마음이 하루 갈지, 천년 갈지, 그것도 생각하지 마. 마음이 천년 갈 준비가 돼있어도 몸이 못 따라주는 게 인간이야. 시간 아깝다.” 같은 대사나 “사는 게 그런 건가. 좋았던 기억 약간을 가지고 힘들 수밖에 없는 대부분의 시간을 버티는 것.” 같은 대사를 보면 우리가 보통의 드라마에서 접하는 틀에 박힌 대사와는 확연히 다르다는 걸 알 수 있다.

 

어찌 보면 남녀가 만나 사랑을 하고 헤어지고 아픔을 견디고 다시 재회하며 사랑을 이어가는 그 일상을 담아낸 이 드라마는 그 이야기 소재만을 두고 보면 상투적일 수 있다. 특별히 새로울 게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드라마를 보게 되면 그 상투적인 상황이 전혀 상투적이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된다. 결국 상투성을 깨는 건 한 걸음 더 깊게 들어가는 구체성과 디테일이라고 했던가. <멜로가 체질>은 특정 상투적 상황을 겉치레로 훑고 지나가지 않고 그 안에서 느끼는 인물들의 복합적인 감정들을 파고 들어간다. 그리고 그것이 오묘한 대사들로 드러난다.

 

상투성을 깬다는 건 실로 어려운 일이고 작품에 있어서 새로움을 더하는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이지만 그것이 반드시 대중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대중성은 어쩌면 적당한 상투성에 일정 부분의 반전이 더해질 때 더 효과를 보기 마련이다. 특히 영화처럼 완전한 몰입 상태로 보는 콘텐츠와는 조금 다른(물론 최근에는 드라마도 영화적 몰입을 요구하기 시작했지만) 드라마의 경우는 익숙한 상황 속에서도 기묘한 대사들로 그 상투성을 시종일관 뒤트는 것이 대중들을 유입시키는 데는 오히려 장애요소가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른바 너무 꽉 짜인 완성도가 작품으로서는 좋지만 대중성에서는 좋지 않은 아이러니가 만들어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드라마 도전이 처음인 이병헌 감독에게 <멜로가 체질>의 낮은 시청률은 그래서 더더욱 미스터리로 다가왔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너무나 틀에 박힌 상투성으로 심지어 30% 이상의 시청률을 내는 드라마들을 너무나 많이 봐온 필자에게 <멜로가 체질>은 구원 같은 작품으로 다가온다.

 

시청률 좀 낮으면 어떤가. 이렇게 하나의 세계를 완성도 높게 밀고 나가는 드라마는 분명 가치 있고 귀한 것이니 말이다. 모쪼록 이병헌 감독의 드라마 도전이 이번 한 번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시청률은 1%대였지만 공감은 100%였으니.(사진:JTBC)

‘의사요한’, 단순 사랑 아닌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려는 사랑

 

SBS 금토드라마 <의사요한>에서 강시영(이세영)은 차요한(지성)에게 “좋아해요”라고 말한다. 실제로 강시영은 차요한이 사실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질환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밤이고 낮이고 그를 걱정한다. 함께 데이트를 나와서도 앞에서 달려오는 사람이 혹여나 차요한에 부딪칠까를 걱정하고, 뜨거운 커피를 쏟을까를 걱정한다.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은 제 몸이 망가지고 있어도 그걸 모른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차요한은 자신의 집에 대신 몸 상태를 체크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매일 퇴근해서는 제 몸을 검사하고 잠을 잘 때도 카메라에 영상으로 그 모습을 일일이 기록해 혹여나 있을 수 있는 수면 중 행동의 위험성 또한 예방하려 한다.

 

그 질환에 걸린 이들이 손가락이 뜯기는 지도 모르고 손을 물어뜯거나, 각막이 손상되는 지도 모르고 눈을 비비는 그런 행동들을 하다 결국은 일찍 사망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강시영은 눈물을 쏟아낸다. 병원에 바이러스성 질환이 의심되는 환자가 들어오고 그 병동이 폐쇄 격리되자 강시영은 혹여나 그 곳으로 차요한이 들어오지 않을까를 걱정한다. 하지만 강시영이 환자를 돌보다 쓰러지게 되자 차요한 역시 그를 걱정해 폐쇄 병동에 들어와 문제를 해결한다.

 

좋아한다 말하고, 매일 밤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상대방을 걱정하며, 데이트를 하면서도 혹여나 있을 위험을 피하려 하는 강시영의 모습은 우리가 흔히 의학드라마 속에서도 보게 되는 멜로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의사 요한>이 강시영을 통해 그려내는 멜로는 분명히 다른 지점이 존재한다. 그건 그가 사랑하는 차요한이 감각을 느끼지 못하는 인물이라는 점 때문이다.

 

그래서 강시영과 차요한의 멜로는 스킨십보다는 감정을 공감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차요한의 상황을 애써 이해하려는 강시영에게 차요한이 그건 불가능한 일이라며 애써 그러지 말라고 하고, 그럼에도 강시영이 그걸 포기하지 않는 모습이 이들이 보여주는 멜로의 방식이다. 그건 남녀 간의 사랑으로 그려져 있지만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려는 의사로서 혹은 한 인간으로서의 사랑으로도 보인다.

 

차요한이 인간은 ‘타인의 고통’을 완전히 알 수 없다고 말하자 강시영이 그렇기 때문에 그걸 ‘이해하려 노력한다’는 이야기는 그래서 사랑이야기의 차원을 넘어 보다 깊은 인간애에 대한 통찰로 다가오는 면이 있다. 우리는 과연 ‘타인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 이해했다 생각하지만 착각인 경우가 많고, 그것이 미디어를 통해서 오해 혹은 오역되기도 하는 문제. 우리는 공감한다 말하지만, 그것이 진정한 공감인가에 대한 질문. 그런 것들이 <의사 요한>에서는 멜로에서조차 담겨진다.

 

강시영의 차요한에 대한 애착은 그래서 함께 산을 오르다 사고를 당해 산소호흡기에 의지한 채 삶을 이어가고 있는 아버지에 대한 상처가 겹쳐진다. 그래서 강시영이 차요한을 이해하려 애쓰는 건 마치 자신이 더 이상 아버지의 고통을 없애줄 수 없다는 사실과 그럼에도 이해하려 애쓰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

 

차요한은 고통을 느낄 수 없는 병을 갖고 있어 환자의 고통을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그 고통을 경감시키려 노력한다. 통증 그 자체가 아닌 그 사람을 들여다보려 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무통 증상을 보이는 환자에게 자신의 질환을 보여주면서 그래도 살 수 있다는 희망을 던진다. 타인의 고통을 우리는 완벽히 알 수 없지만 우리가 겪는 고통이 있어 타인의 그것을 미루어 이해하려 노력한다.

 

자신이 겪는 고통 혹은 우리가 갖게 되는 어떤 결핍이나 상실감. 그것이 있어 우리는 어쩌면 타인의 고통과 결핍, 상실감 같은 걸 이해하려 노력하게 되는 건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통증은 그저 고통만이 아니라 무언가를 이해하게 만드는 신호라고도 볼 수 있다. <의사 요한>은 이처럼 통증이라는 화두를 통해 우리네 인간은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를 그려내는 면이 있다.(사진:SBS)

‘열여덟의 순간’, 청춘의 미숙함이 풋풋함으로 다가오는 이유

 

미숙한 청춘의 아픔과 풋풋함이 느껴진다. 아마도 이건 JTBC 월화드라마 <열여덟의 순간>이 포착한 이 드라마만의 매력일 게다.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지만 자꾸만 오해를 받는 최준우(옹성우). 이전 학교에서 폭행과 절도로 강제전학을 당했다는 사실은 전학 온 학교에서도 단 하루 만에 도둑질을 했다는 누명을 쓰게 만든다.

 

실제로는 반장으로 학교 선생님들은 물론이고 학생들에게까지 완벽한 신뢰를 얻고 있는 마휘영(신승호)의 짓이라는 사실을 최준우는 알고 있지만 모른 척 한다. 하지만 최준우는 마휘영이 앞에서는 그를 도와주는 척하면서 사실은 그를 도둑으로 몰아가고 있다는 걸 알고는 그 앞에 나선다. 그러자 마휘영이 드디어 그 숨겨진 얼굴을 드러낸다. “알면 어쩔건데? 이 쓰레기 새끼야.” 그러자 최준우도 그토록 드러내지 않던 속내를 꺼내놓는다. “쓰레기는 너 아냐?”

 

<열여덟의 순간>의 이 엔딩 장면은 최준우라는 무존재감의 청춘이 자기 존재를 드디어 드러내는 순간이다. 드라마는 마휘영이라는 인물을 그저 악역으로만 세우려 하지 않았다. 그가 겪는 스트레스 또한 보여주었다. 학원에서는 공부 천재 조상훈(김도완)과 비교되고, 집에서는 모든 것에서 잘 난 형과 비교된다. 완벽하고 싶은 마휘영은 그 스트레스 때문에 아토피로 쉴 새 없이 손을 긁어댄다.

 

그런 그가 보복하듯 학원 선생의 시계를 슬쩍 쓰레기봉투에 버린 것이고, 마침 아르바이트생으로 거길 왔다가 그걸 수거해간 최준우가 범인으로 몰렸던 것이다. 마휘영이 최준우에게 “쓰레기 새끼야”라고 말한 건 그래서 어쩌면 스스로에게 말한 것인지도 모른다. 완벽하고 싶고 그래서 그런 척하지만 사실은 가식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 자신에게.

 

<열여덟의 순간> 첫 회는 이렇게 미숙해서 아픈 청춘들을 전면에 끄집어낸다. 최준우는 유수빈(김향기)이 안타까워했던 것처럼 ‘무존재감’으로 살아가는 청춘이다. 그 ‘무존재감’을 잘 표상하는 건 그의 이름표다. 그는 최준우라는 이름을 갖고 있지만 전학 와 마휘영의 부탁으로 얻게 된 중고 교복의 이태호라는 이름을 달고 다닌다.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으로 일하면서 붙은 박영배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의 이름이 최준우라고 애써 알리려 하지 않는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그런 그에게 유수빈이 다가와 이태호라는 이름표를 떼내 주며 말한다. “전학생. 너 귀신? 무슨 애가 색깔이 없어. 분하지 않아? 존재감 없이 사는 거.” 대신 종이를 붙여 최준우라는 이름을 써준 후 돌아서며 유수빈은 한 마디를 콕 집어낸다. “잘 가라 전학생. 잘 살아. 계속 그렇게 존재감 없이.”

 

한편 마휘영은 최준우와는 정반대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려 안간힘을 쓴다. 그래서 자신을 가장하기도 한다. 아마도 마휘영이 최준우를 “쓰레기”라고 부른 건 그런 가장된 모습을 알아차렸다는 사실 때문일 게다. 둘은 그래서 부딪치고 갈등하며 상처를 줄 것이지만 어쩌면 서로의 부족한 면들을 채워줄 수 있는 그런 존재들이 될 수도 있다.

 

무엇보다 무존재감으로 어딘가 아픔을 갖고 있는 듯한 최준우라는 인물이 주는 몰입감이 적지 않다. 그 모습은 어딘지 매일 입시와 경쟁 사회 속에서 버텨내고 있는 청춘들의 ‘침묵’을 보는 듯해서다. 소소한 청춘드라마처럼 보이지만, 섬세한 감정들이 교차하는 <열여덟의 순간>에서 젊은 날의 미숙했지만 풋풋했던 시절을 떠올려보게 되는 건 그 무존재감에 대한 안타까움과 공감이 함께 하기 때문일 게다.(사진: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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