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트하우스'가 개연성 없는 막장에 시청자를 중독시키는 방식

 

SBS 월화드라마 <펜트하우스>는 사실 뻔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 틀은 전형적인 권선징악의 복수극이다. 김순옥 작가가 늘 해왔던 방식의 반복. 사회적 공분을 일으킬 만큼 추악한 악당들의 갖가지 행태들이 먼저 공개되고, 그렇게 당하던 이들이 저들에게 처절한 응징을 해주는 방식이 그것이다.

 

<펜트하우스>라는 제목은 이 드라마가 지목하고 있는 공분의 대상을 명확히 보여준다. 이미 JTBC 드라마 <SKY 캐슬>이 끄집어냈던 것이기도 하지만 거기에는 이른바 대한민국 0.1%의 부를 차지한 이들이 갖고 있는 천박한 선민의식과 갑질 그리고 그것을 핏줄로 이어받는 자식 교육의 문제다. 물론 <SKY 캐슬>은 그 문제의식을 가져와 완성도 높은 작품으로 만들어냈지만, <펜트하우스>는 완성도보다는 그 소재의 자극성만을 끌어왔다. 완성도? 자극과 당장의 사이다를 위해서라면 그런 건 별 중요하지도 않다 여겨지는 대본과 연출이 <펜트하우스>에서는 곳곳에서 발견된다.

 

게다가 천민자본주의의 갑질과 대물림되는 불공정한 교육의 문제에 <펜트하우스>는 '부동산'이라는 뇌관까지 더했다. 현재 한정 없이 치솟는 부동산 시장으로 인해 가뜩이나 신경이 곤두서있는 대중들은 <펜트하우스>가 꺼내놓은 부동산을 통한 일확천금의 소재에 양가적인 감정을 갖는다. 그것을 하나의 로망처럼 여기면서도, 그것이 저들 가진 자들만이 가능한 일이라는 점에서 상대적 박탈감을 갖는다.

 

드라마는 이 양가감정을 끌어와 헤라팰리스라는 국내 최고가의 부동산에 입주한 이들에 대한 분노를 끌어내고, 이들과 대적해 나가는 오윤희(유진) 같은 서민이 복수를 꿈꾸는 심수련(이지아)과 공조해 부동산 사업에 뛰어들고 그래서 부동산 재개발을 통해 서민들의 피눈물을 자신들의 주머니 속 돈으로 만들어내던 악당들 주단태(엄기준), 이규진(봉태규), 하윤철(윤종훈)을 곤경에 처하게 만드는 이야기를 통해 사이다를 던진다. 오윤희는 결국 이 부동산을 통한 복수(?)로 헤라팰리스에 입주한다.

 

드라마는 매회 공분의 대상들이 하는 악행들을 마치 불길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던져 넣는 장작처럼 제공한다. 주단태는 불륜에 불법적인 일들을 자행하고, 이규진은 이를 위해 폭력까지도 스스럼없이 쓰는 악마의 모습을 드러낸다. 헤라팰리스에 사는 아이들 역시 악마들처럼 그려진다. 오윤희의 딸 배로나(김현수)를 지속적으로 괴롭히는 주석훈(김영대), 주석경(한지현), 하은별(최예빈), 유제니(진지희) 같은 아이들은 학생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운 악마의 모습을 드러낸다.

 

드라마를 보는 내내 시청자들은 그래서 이들의 악다구니에 거슬리지만 자극을 받고, 공분을 일으키는 악역들에 뒷목을 잡으면서 동시에 이들과 대적해가며 조금씩 돈을 벌어 부유해지고 하나씩 복수를 해나가는 심수련과 오윤희의 공조에 빠져든다. 그래서 마치 드라마는 누구나 이야기만 들어도 속이 퍽퍽해지는 고구마 현실(부동산, 교육문제)을 끌어와 죽 나열해 보여주고 거기에 사이다 한 잔씩을 주는 방식으로 시청자들을 조금씩 그 세계에 중독시킨다.

 

이런 전형적인 권선징악의 방식이 잘못된 건 없다. 게다가 대중들이 공분을 일으키는 특권층들의 불공평한 부동산이나 교육문제를 밑그림으로 끌어온 건, 드라마가 현실의 결핍을 가져와 판타지로 채워주는 그 기능에 부합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드라마를 막장이라고 부르며 마치 발암물질 보듯 하게 되는 건 이런 이야기의 소재나 틀거리 때문만이 아니다.

 

이 뻔한 막장의 중독이 위험한 건, 이런 고구마와 사이다가 존재한다면 드라마의 개연성이나 완성도 따위는 상관없다는 식의 접근방식에서 나온다. 도대체 저런 일이 가능할까 싶은 엉터리 개연성으로 당장의 사이다를 던져주는 건 전혀 현실성과는 거리가 있다는 점에서 시청자들에게는 오히려 더 큰 허탈감을 줄뿐이다. 그건 마치 당장 목이 말라 바닷물을 들이키는 것이나 마찬가지니 말이다.

 

드라마가 현실에 어떤 의미를 제시하는 건 중요한 목적 중 하나지만, 반드시 꼭 의미만을 지향할 필요는 없을 게다. 하지만 적어도 개연성 자체를 무시하고 내놓는 사이다란 오히려 현실에서 돈을 가진 자들이 마음껏 갑질 하는 삶이 당연하다는 식의 의식을 드러낼 뿐이다. 권선징악의 막장드라마들이 맨 마지막에 가서야 비로소 악당들이 무너지는 결말로 끝을 내지만, 그 과정의 대부분을 악당들의 세상으로 채워 넣음으로써 오히려 그들의 행태를 정당화하거나 당연하게 내세우는 듯한 불편함을 안기는 건 그런 이유 때문이다.

 

이건 일종의 공해하고, 문제의식을 드러내기보다는 세상은 본래 그렇다는 걸 정당화하는 또 다른 방식이 아닐까. 이건 드라마일뿐이야 라고 말하지만, 거기 담겨진 부동산이나 교육문제는 결코 드라마로만 치부될 일이 아니다. 그래서 그런 개연성 없는 이야기들은 마치 현실에 있는 부동산이나 교육문제가 가진 심각함을 너무나 단순화하는 방식으로 가려버린다. 간간히 던지는 바닷물을 사이다인양 던져주고, 그걸 마셔봐야 갈증만 더할 뿐이라는 걸 마치 알고 있다는 듯 드라마는 영악한 미소를 짓고 있는데.(사진:SBS)

명쾌한 권선징악 <마녀>, 고구마 현실이 한몫 했다

우리는 이미 KBS 월화드라마 <마녀의 법정>이 어떤 결말을 맺을 것인가에 대해 대부분 알고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 결국 마이듬(정려원)은 잃어버렸던 엄마를 찾았고, 엄마를 그렇게 만들었던 조갑수(전광렬)는 법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마이듬과 함께 여러 사건들을 수사해온 여진욱(윤현민)과의 로맨스까지. 이런 권선징악과 해피엔딩은 이 드라마가 초반에 깔아놓은 문제들로 인해 이미 정해진 결말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 의외의 반전 같은 게 있을 리 없다. 흔히들 법정드라마가 가진 가장 중요한 요소로 반전을 꼽지만 <마녀의 법정>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반전을 주기보다는 예상했던 대로의 권선징악을 그렸다. 그러니 이야기만으로 보면 조금은 밋밋했을 드라마다. 이미 다 알고 있고 또 그러하기를 기대했던 것들을 드라마가 그대로 보여주는 느낌.

하지만 이런 반전 없는 사이다의 법정극이 반전의 성공을 기록했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사실 월화드라마의 경쟁 속에서 최약체로 지목됐었고, 실제로도 낮은 시청률로 시작했던 드라마가 <마녀의 법정>이었지만 그 끝은 최고 시청률에 호평 가득한 드라마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도대체 무엇이 이런 반전의 성공을 가능하게 한걸까.

이렇게 된 건 아무래도 경쟁작들의 부진과 무관하지 않다고 보인다. 기대작으로 떠올랐던 SBS <사랑의 온도>가 지지부진한 사랑과 이별 공식을 왔다 갔다 하면서 시청자들의 관심에서 멀어졌고, MBC <20세기 소년소녀>는 아예 처음부터 끝까지 관심을 받지 못했다. 이렇게 된 건 이 두 드라마가 지나치게 사적인 멜로의 늪에 빠져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사회적인 의제들을 드라마 속으로 가져온 <마녀의 법정>은 더 도드라질 수 있었다. 성 평등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워진 요즘, 성폭력과 성희롱, 성추행 같은 성범죄 사건들을 소재로 가져온 <마녀의 법정>은 다소 그 결말은 권선징악으로 정해져 있다고 해도 그 자체가 주는 카타르시스는 분명했다. 

일상으로 침투해 있는 성폭력의 문제들을 콕콕 짚어 법정으로 끌고 나온 이 드라마는 사실 그것만으로도 시청자들의 정서를 잡아 끌 수 있었다. 직장에서 혹은 가정에서 아니 어디서든 벌어지는 문제들이지만 단죄되지 않고 넘어가던 성범죄의 사례들이 어떤 피해자들을 만들어내고 또 사건이 밝혀지는 과정에서 피해자들이 오히려 2차 피해를 입는 일들을 이 드라마는 제대로 건드렸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드라마가 이토록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건 답답한 현실을 드라마로나마 시원하게 해결해주는 마이듬 같은 사이다 캐릭터가 있었기 때문이다. 철저히 승소만을 바라보며 피해자의 입장조차 생각하지 않던 이 캐릭터가 차츰 문제를 해결하며 성장해가는 모습은 시청자들에게도 흐뭇한 일이 되었다. 

반전 없는 명쾌한 권선징악. 적어도 성범죄에 있어서만큼 어쩌면 시청자들은 이런 단순 명쾌함을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물론 성범죄를 다루는 법정에서 승소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마녀’가 되어야 한다는 그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그래도 <마녀의 법정>은 어떤 지향점만은 분명히 전해줬다고 여겨진다. 성 범죄로 더 이상 고통받는 이들이 없는 세상과 나아가 성 평등한 세상에 대한 희망.(사진:KBS)

‘피고인’ 시청자들이 그토록 사이다 엔딩 기대했건만

SBS 월화드라마 <피고인>이 종영했다. 모두가 바라던 해피엔딩. 박정우(지성)는 차민호(엄기준)를 결국 사형수로 감방에 집어넣으며 정의를 실현했다. 마지막 시청률도 28.3%(닐슨 코리아)로 최고 시청률을 기록했다. 모든 것이 정의로 돌아간 해피엔딩에 최고 시청률까지 기록했지만 어딘지 시청자들의 반응은 찜찜하다. 사이다이긴 한데 어딘지 김빠진 사이다란다. 도대체 왜 이런 문제가 발생했을까.

'피고인(사진출처:SBS)'

가장 큰 문제는 이 드라마가 연장 2회를 더해 18회를 끌고 왔던 그 힘이 고구마 전개에서 비롯됐다는 점이다. 고통스런 상황에서 벗어나려 안간힘을 쓰는 박정우를 다시금 원상태로 돌려놓는 방식을 반복하면서 생겨난 시청자들의 갈증을 동력으로 삼았던 것. 마지막회까지 이렇게 갈증들을 증폭시켜놓았기 때문에 웬만한 엔딩으로는 그게 채워지기가 어려웠다. 

특히 마지막 회에서 차민호가 사형수가 되는 걸 피하기 위해 정신병자인 척 가장하며 법망을 피해나가려는 상황에 갑자기 나연희(엄현경)가 증인으로 등장해 자신이 차민호를 사랑했다고 말하며 아이 역시 차민호의 아들이라고 밝히는 장면은 너무 신파적이었다. 결국 그 증언이 차민호의 마음을 움직여 그 실체를 드러내게 만들고 그것 때문에 사형수가 된다는 건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결말이다. 

그토록 권력자들을 좌지우지하며 잘 빠져나가던 차민호가 “본래는 착한 사람이었다”는 이야기에 감상적으로 빠져버리는 이야기는 18회 동안 쌓아 놓은 정의 구현을 통한 사이다 결말에 대한 갈망들을 허탈하게 만드는 일이다. 갑자기 약해진 악역이 신파적 상황에서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해피엔딩을 만들기 위한 의도적 결말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시청자들이 느끼는 진정한 갈증을 해소시켜주지 못했다. 

권선징악이라는 단순한 구도조차 명쾌하다고 보기 어려운 <피고인>은 그래서 나아가 어떤 주제의식을 제대로 드러내지도 못했다. <피고인>이라는 제목이 암시하듯 이 드라마는 애초에 “누가 이 시대의 피고인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진중한 질문을 담아낼 수도 있었다. 박정우라는 무고한 인물이 피고인이 되고, 정작 살인자인 차민호가 권력을 손에 쥐고 버젓이 잘 살아가며 법망을 빠져나가는 그 구도만 잘 살려냈어도 충분한 일이었다. 

하지만 <피고인>은 그런 주제의식을 끝까지 이어나가지 못했다. 고구마 전개를 통한 시청률 낚기에 더 집중하는 모양새를 보였던 것. 물론 주제의식 같은 메시지보다 이야기의 재미를 추구하는 것이 잘못됐다 말하긴 어렵다. 하지만 이야기가 개연성을 잃어버리면서 억지 반전을 통해 만들어내는 충격요법이 진정한 이야기의 재미를 주기는 어렵다. 

최근 들어 이만한 시청률을 가져간 드라마도 드물었지만 <피고인>은 여러모로 적지 않은 문제들을 남긴 드라마였다. 시청률이 올라갈수록 시청자들의 혹평도 늘어갔다는 건 그 문제를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러니 어쩌면 애초에 고구마를 통해 시청자들의 감정을 억압함으로써 시청률을 겨냥하고 있는 이 드라마에 제대로 된 엔딩을 기대하기는 어려웠을 지도 모른다. 애초 사이다 엔딩은 고구마 전개의 끝에 보상처럼 주어질 것처럼 여겨진 환상이었을 지도.

돈이면 다 되는 세상, <결혼계약>의 판타지

 

MBC 주말드라마 <결혼계약>은 촌스럽다. 어찌 보면 과거 7,80년대에나 어울릴 법한 신파적인 인물 강혜수(유이)가 주인공이다. 어찌하다 보니 사채업자들에게 시달리고 있는 그녀는 딸 은성(신린아)과 함께 꿋꿋이 살아간다. 하지만 도무지 갚을 수 없는 빚 때문에 쉬지 않고 일해도 버텨낼 재간이 없다. 그런 그녀에게 한지훈(이서진)의 제안은 유혹적이다. 간 이식을 받아야 하는 자신의 어머니를 위해 거짓 결혼을 하고 이식을 해주는 대가로 거액의 돈을 주겠다는 것.

 


'결혼계약(사진출처:MBC)'

돈 때문에 거짓 결혼에 장기 이식까지. 요즘 같은 세상에 있을 법한 일이다. 하지만 그 설정만 보면 너무 전형적인 신파극의 여주인공인지라 새로움이라던가 트렌디한 면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캐릭터의 전형성은 이야기 역시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 것인가를 쉽게 짐작하게 만든다. 즉 어찌 어찌해 계약을 통해 거짓 결혼을 하게 되었지만 차츰 이 돈이면 다 된다는 식으로 살아가는 한지훈이라는 인물이 조금씩 강혜수와 그녀의 딸 은성에게 사랑과 정을 느끼게 된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아들이 자신의 장기 이식을 위해 거짓 결혼까지 한다는 걸 이해하지 못하는 엄마 오미란(이휘향)이 자살할 결심을 하고 다행히도 그녀를 강혜수가 살려내고 설득하는 장면 역시 전형적인 신파의 한 대목 그대로다. “구차하게 살아도 사는 게 좋다는 혜수의 말에 오미란은 마음을 돌린다. 혜수의 처지와 오미란의 처지는 어떤 면에서는 통하는 구석이 생겨난다.

 

돈 밖에 모르는 것처럼 살아가는 한지훈이 강혜수와 은성에게 다가가는 장면은 겉으로 보기엔 장기이식을 전제로 하는 결혼 계약을 제대로 이행하기 위한 것처럼 보이지만, 차츰 거기에서 그의 무심한 듯 드러나는 진심이 보이는 건 역시 공식적인 관전 포인트다. 동정할 수밖에 없는 비련의 여주인공과 그녀와 계약으로 만나지만 차츰 계약 그 이상으로 가까워지는 남주인공의 밀고 당기는 멜로. 이만큼 전형적이고 나아가 촌스럽게까지 느껴지는 드라마가 있을까.

 

그런데 놀랍게도 이 모든 이야기의 설정부터 전개까지 다 알고 있는 뻔한 드라마에서 눈을 떼기가 쉽지 않다. 거기에 특별히 막장적인 자극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 혜수라는 인물의 현실적인 어려움을 들여다보는 순간부터 시청자들은 그녀가 그 수렁 같은 삶에서 벗어나기를 원하고 더 사랑받기를 원하게 된다.

 

이것은 마치 복수극의 또 다른 형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에 무수히 쏟아져 나오는 복수극들 역시 그 공식은 정해져 있다. 치가 떨리는 악역(요즘은 갑질 재벌2세가 대세다)이 등장하고 그에 의해 처절하게 당하는 주인공이 끝내 그 악당을 물리치는 이야기. 권선징악이 그것이다. <결혼계약> 역시 다르지 않다. 복수극의 악역을 이 드라마는 자본이 만들어내는 돈 세상이 맡는다. 결국 이 드라마에 대해 시청자가 원하는 권선징악이란 돈이 아닌 사람에게 무릎 꿇고 계약이 아닌 사랑에 빠지는 남자의 이야기가 아닌가.

 

<결혼계약>이라는 촌스럽고 뻔한 이야기에 빠져드는 이유는 그래서 드라마 바깥에서 찾아질 수밖에 없다. 왜 사람들이 이런 뻔한 이야기를 보고 싶어 하는 걸까. 실제로 돈이면 다 된다는 그 현실에 얼마나 마음을 다쳤으면 뻔한 드라마를 통해서라도 그것을 뒤집는 판타지를 간절히 원하게 된 걸까. 이것이 <결혼계약>이라는 드라마의 뻔해도 결코 약하지 않은 판타지의 정체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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