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가족드라마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지금 우리네 가족드라마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 가족드라마는 우리 드라마의 전통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오랜 세월 대중과 함께 해온 드라마 장르다. 하지만 최근 들어 가족드라마는 본래 이 장르가 추구하는 가족애의 범주를 넘어서고 있다. '소문난 칠공주'와 '조강지처 클럽'을 통해 파괴되어 가는 가족의 틀을 극단으로까지 끌고 가 보여주면서 자극적인 가족드라마의 가능성을 보여준 문영남 작가는 '수상한 삼형제'로 확고한 위치를 확보했다. 지금 이 드라마는 35.4%(AGB닐슨 자료)의 시청률로 전체 주간시청률 1위에 올라있다.

한편 일일 가족드라마로 시청률 장기집권(?)을 해온 KBS 일일드라마 역시 과거와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너는 내 운명'이 막장드라마라는 오명을 얻은데 이어, 종영한 '다함께 차차차' 역시 배배 꼬인 관계와 지나치게 질질 끄는 드라마 진행으로 '욕하면서 보는 드라마'의 대열에 들어갔다. 이 드라마의 이런 자극에만 치중하는 경향 때문일까. 그럼에도 종영하는 시점 이 드라마의 시청률은 33.5%로 전체 주간시청률 2위를 기록했다.

'천만번 사랑해'는 대리모라는 설정에, 자신이 준 자식이 배우자의 형의 자식이라는 거의 현실에서는 일어나기 어려운 우연적 상황을 통해 신파적으로 눈물샘을 자극하는 전략을 취했다. 이 드라마는 자식을 얻기 위해 첫째 며느리에게는 대리모를 강요하고, 둘째 며느리가 그 대리모를 한 여자라는 것을 알게 된 시어머니가 그녀를 내쫓는 패륜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이러한 며느리 수난사라는 설정은 작금에는 현실성이 거의 없는 이야기로, 가족드라마의 퇴행 현상을 잘 보여준다. 그럼에도 이 가족드라마의 시청률은 전체 4위인 25.9%에 올라 있다.

어째서 가족드라마들이 과거의 훈훈한 가족 이야기의 범주를 지키지 못하고 파국적인 이야기로 달려가고 있는 것일까. 결국은 시청률 때문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이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다. 비교적 몇 년 전만 하더라도 훈훈한 가족애를 다루면서도 시청률 최고를 차지하던 시대가 있었으니까. 중요한 것은 드라마를 보는 시청층의 눈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한류의 위상을 통해 미드와 일드 같은 선진적인 드라마와 접촉하면서, 우리 드라마들은 그간 실험을 통해 어떤 식으로든 진화의 길을 모색해왔다. 하지만 유독 가족드라마는 그 자리에 멈춰서 있었다. 왜? 변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고정적인 시청층을 확보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가족드라마가 변화하지 않고 머문다는 것은 그 자체로 퇴행적인 양상을 예고하는 길이다. 흐르지 않는 물이 썩듯이 확장의 길이 아닌 과거의 틀에 만족하던 가족드라마는 결국 가족애라는 끈끈한 힘을 자극을 위해 이용하기 시작했다. 막장의 탄생이다. 가족 복수극의 유행이다. 이처럼 변화를 모색하지 않는 가족드라마가 막장이 될 가능성이 높은 이유는 이 장르가 가진 독특한 특성에서 비롯한다. 드라마는 기본적으로 갈등을 근간으로 하는데, 가족드라마의 갈등은 가족 간에 벌어지기 때문에 분명, 윤리적인 한계가 존재한다. 싸우다 극단적인 상황까지 치달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막장드라마는 이 윤리의 선을 넘어섬으로서 자극을 극대화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그렇다면 가족드라마가 갈 길은 결국 이것밖에 없을까. 그렇지 않다. 최근 몇몇 드라마들이 가족드라마의 또 다른 길을 보여주고 있어 주목된다. 작년에 등장해 호평은 물론 시청률까지 최고를 기록한 '찬란한 유산'이 대표적이다. 이 가족드라마는 전형적인 가족의 틀을 갖고 있으면서도 가족애를 넘어서는 인간애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자신의 유산을 자식이 아닌 타인에게 준다는 설정은 혈연과 가족의 고리를 넘어선다. 이것은 최근 '그대 웃어요'나 '별을 따다줘(물론 멜로드라마 성격이 강하지만 그 안에 가족의 형태에 있어서)' 같은 작품으로 그 계보를 이어가고 있다. 타인이지만 가족처럼 살아가는 그들의 감동적인 이야기는 가족드라마의 확장으로 보인다. 가족에서 유사가족으로의 확장.

가족드라마는 지금, 막장으로 갈 것인지, 아니면 유사가족이라는 인간애로 확장될 것인지의 갈림길에 서 있다. 물론 이도 저도 아닌 전통적인 가족드라마의 형태도 지속적으로 등장할 것이지만, 그것이 현재적인 관점에서 과거만큼의 공감을 얻을 수 있을 지는 미지수다. 분명한 것은 진화를 꿈꾸지 않는 한, 가족드라마가 갈 길은 상투적인 보수적 코드의 반복이거나, 파국적인 가족드라마의 윤리적 탈선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확장으로의 길을 모색해봐야 하지 않을까. '그대 웃어요'나 '별을 따다줘' 같은 드라마가 주목되는 이유는 그 가족의 범주를 넘어서려는 노력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지붕킥'의 이순재, '그대 웃어요'의 최불암

많은 연기자들이 있지만 지금 우리네 아버지를 대변하는 연기자 둘을 찾으라면 단연 이들을 떠올릴 것이다. 이순재와 최불암. 이 둘은 지금 시대의 아버지들이 겪는 두 가지 양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들의 캐릭터 이미지에 공감하는 대중들의 마음 속의 아버지를 가늠하게 한다.

먼저 '거침없이 하이킥'의 야동순재를 통해 전 세대로 그 공감대를 넓힌 이후, '지붕 뚫고 하이킥'의 멜로순재로 돌아와 여전히 대중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연기자, 이순재. 그는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는 이 시대에 어떻게 아버지들이 적응해 나가고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야동순재'에서 중요한 것은 '야동'이 의미하는 '야한 동영상'이 아니라, '야동'이라는 용어가 가지는 젊은이들의 인터넷 문화이다.

이순재는 단지 야한 걸 봤기 때문에 젊은이들의 마음까지 사로잡은 게 아니라, 어색하지만 바로 그 인터넷 문화로 파고들어온 아버지와의 공감대가 순식간에 세대의 벽을 넘어섰기 때문에 젊은이들의 마음 속에 자리하게 된 것이다. 그는 '지붕 뚫고 하이킥'에 와서는 이제 잠깐 젊은이들의 문화를 어깨 너머로 보는 것이 아니라 아예 그 문화를 노년에도 똑같이 누리려 한다. 로맨스 그레이를 연기하는 그가 김자옥을 위해 각종 이벤트를 하고, 줄리엔의 김자옥에 대한 호의에 질투하는 모습은 나이와 상관없이 똑같은 연애 감정을 표현한다.

이순재라는 아버지가 보여주는 핵심적인 것은 이처럼 젊은이들의 문화와 소통하기 위해 과거 고압적이었던 아버지의 이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김자옥 앞에서 방귀를 참다가 결국 장례식장에서 그가 폭발하듯 방귀를 꾸는 순간, 우리는 권위적인 아버지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게 된다. 이순재는 '지붕 뚫고 하이킥'에서 여전히 사위와 딸에게 고압적인 아버지지만 그것은 늘 시트콤이라는 틀 속에서 그 이면을 드러내며 무너져 내린다.

반면 '그대 웃어요'의 최불암은 정반대의 위치에서 우리네 아버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이 드라마에서 최불암이 연기하는 강만복이라는 캐릭터는 지나간 아버지 시대의 향수를 떠올리게 하는 인물이다. 아침에 일어나 국민체조를 하는 이 아버지는 '돈보다 귀한 것은 인연'이라는 전통적인 가치를 쥐고 달라진 현 세태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본다.

그 '귀한 인연' 때문에 과거 자신과 가족들을 살 수 있게 해주었던 회장님의 아들, 서정길(강석우)이 흥청망청 사업에 실패하자, 그를 거두어 사람을 만들어보려고 한다. 하지만 이미 달라진 세태 속에서 아버지의 이 안간힘은 쓸모없는 일처럼 여겨진다. 서정길은 '인연보다는 돈'에 휘둘려 자식까지도 거래하는 파렴치한 인물이다. 이 한 세대를 거쳐 강만복이라는 아버지와 작금의 서정길이라는 아버지가 보여주는 달라진 모습은, 이 드라마가 풍자하려는 세태를 잘 보여준다.

강만복이라는 아버지는 그래서 혼자 남은 듯한 쓸쓸함에 노년을 보내지만 그래도 이 부족한 이들을 모두 가족이라 생각하며 가슴으로 끌어안는다. 돈 때문에 평생의 인연이 끊어지는 그 과정을 목도하면서 혼자 책상에 머리를 숙이고 눈물을 삼키는 강만복의 모습은 우리 시대 아버지의 또 다른 면을 보게 한다. 달라진 세태 속에서 자꾸만 잊혀져가는 아버지의 자리를 떠올리게 하는 인물이 강만복이고, 최불암은 어쩌면 허허 웃은 그 웃음 속에 담긴 수만 가지 뉘앙스로 그걸 가장 잘 연기해내고 있는 연기자라고 할 것이다.

우리 시대의 아버지는 이제 이 권위 없는 시대의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 않다. 시대는 늘 젊은이들의 것이고, 아버지는 그들과의 소통을 위해 그 세계를 기웃거리거나, 달라진 세태를 안타까워하며 과거의 가치를 향수하며 잊혀져 간다. 이순재와 최불암은 바로 그 아버지들의 모습을 대변해내는 연기자로 우리의 마음 한 구석에 자리하고 있다.

드라마가 그리는 자매들, 그 관계가 불편한 이유

한때 '연애시대'에서 남녀의 사랑보다 진한 자매애를 보여주면서 많은 이들을 흐뭇하게 해주었던 은호(손예진)와 지호(이하나)의 이야기는 이제 옛이야기가 되어버렸나. 드라마 세상은 온통 자매들의 수난시대로 그려지고 있다. 한 남자를 두고 연적이 되어 서로 싸우는 볼썽사나운 자매들의 모습을 우리는 이제 드라마 속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도대체 무엇이 자매들을 이처럼 불편한 관계 속으로 밀어 넣었을까.

'천사의 유혹'의 주아란(이소연)과 윤재희(홍수현)는 자매지간이지만 그 사실을 모른 채 서로가 서로에게 복수를 하는 관계가 되어있다. 그 중심에는 신현우(한상진)에서 얼굴을 바꾼 안재성(배수빈)이 자리하고 있다. 주아란에 의해 죽음에 몰린 신현우를 살려낸 윤재희는 안재성으로 모습을 바꾼 그의 복수를 돕지만, 안재성은 복수를 위해 다시 주아란과 가까운 관계를 연출한다. 이 자매들은 모두 애타게 어린 시절 헤어진 언니와 동생을 찾고 있지만, 이제 모든 것을 잃게 된 주아란은 동생인줄 모르는 윤재희에게 어떤 짓을 할 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천만번 사랑해'의 고은님(이수경)과 오난정(박수진)은 부모들의 재혼으로 맺어진 자매지간이다. 외국생활에서 알게 된 백강호(정겨운)를 오난정이 혼자 짝사랑하지만, 백강호는 고은님을 사랑하게 되고, 결국 결혼에까지 골인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연출된 오난정이 고은님에게 "감히 내 남자를 뺐어?"하고 드잡이하는 장면은 많은 시청자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그대 웃어요'는 요즘 보기 드문 착한 드라마지만, 여기에도 불편한 자매들의 한 남자를 둔 사랑이야기는 등장한다. 강현수(정경호)는 서정경(최정윤)을 대학시절부터 쭉 짝사랑해왔지만 결국 퇴짜를 맞게 되는데, 하필이면 그녀의 동생인 서정인(이민정)과 다시 사랑에 빠지게 된다. 문제는 강현수와 서정인이 사랑하는 모습을 보면서 서정경의 마음 또한 흔들린다는 것. 그녀는 현수에게 "다시 날 사랑해주면 안되니?"하고 묻는다. 아무리 한 남자에게 사랑의 감정이 생겼다고 해도, 이미 자기 동생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마당에 이런 행동을 하는 언니라는 존재는 그다지 쉽게 공감가지 않는다.

'다함께 차차차'에서는 친자매는 아니지만 같은 집에서 사는 사촌 간에 동생이 언니의 남자친구를 빼앗는 자극적인 내용이 방영되었다. 수현(이청하)이 사귀던 남자 이한(이중문)을 사촌동생인 진경(박한별)이 빼앗아 결혼하는 것. 애초에 착한 가족드라마의 뉘앙스를 풍겼던 이 드라마는 그러나 이 이해할 수 없는 관계설정을 통해 어떤 논란의 징조를 이미 보였던 것이 틀림없다. 부모가 반대하는 결혼을 하느냐 마느냐를 두고 질질 끌던 이 드라마는 결국 기억이 돌아온 강신욱(홍요섭)을 통해 그 결혼의 여부를 다시 물고 늘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드라마 속 자매들은 이처럼 한 남자를 사이에 두고 으르렁대게 된 것일까. 그것은 대본 작업에 있어서 지나치게 편의적이면서도 자극적인 관계 설정을 한 탓에 나타나는 결과이다. 사실 현실에서 한 남자를 자매가 동시에 사랑할 확률이 얼마나 될까. 물론 확률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마치 이것이 드라마 속의 공식처럼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딘지 잘못된 것 같다. 이러한 불편한 관계들은 그것이 주는 어떠한 인간 조건의 문제를 이들 드라마들이 건드릴 만큼 심도가 깊지 않고 진지하지도 않다는 점에서 고전이 다루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그저 현실성 없는 클리쉐의 반복일 뿐이다.

자매들 간의 남자 쟁탈전이 벌어지게 된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이 관계를 마치 공식처럼 갈등 요소로 끼워 넣은 탓에 생긴 것이다. 그다지 공감가지도 않고, 보기 좋은 장면도 아니며, 이해할 수도 없는 이 한 남자를 사랑하는 자매들의 이야기는 그저 극성을 끌어올리기 위한 자극적인 장치로 활용된다고 밖에 볼 수 없다. 물론 드라마들 역시 어떤 수위조절을 하고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이런 근친 사이에 벌어지는 지나친 사랑 관계의 압축은 가족드라마가 지켜야할 윤리적인 선을 넘어선다는 점에서도 문제가 있다. 혹 자매들이 서로를 위해주고 아껴주는 정상적인 이야기로는 재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모를 일이다.

드라마 시청에 있어서 기분이 차지하는 것들

세상에 저렇게 불쾌한 드라마가 시청률은 왜 저리도 높을까. 어쩜 이렇게 유쾌한데도 왜 시청률은 도무지 오르지 않을까. 물론 불쾌와 유쾌란 기분의 차원이지만, 누구나 드라마를 보며 이런 의문을 품어보지 않은 분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심지어 자신의 취향이 대중들의 취향과는 다르다는 조급한 결론에 도달하는 분들도 있다. 도대체 왜 이럴까.

그 이유는 시청률에 영향을 주는 것은, 이 불쾌와 유쾌를 나누는 기분의 차원뿐만 아니라, 그 위에 시청자와의 현실적인 공감대, 그리고 드라마의 완성도 같은 기준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떤 드라마가 유쾌한데도 불구하고 시청률이 낮다는 것은 다른 측면이 부족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또 반대로 불쾌함에도 불구하고 시청률이 높다는 것은 다른 측면이 그 부족함을 채워주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유쾌한 드라마, '천하무적 이평강'
‘천하무적 이평강’이나 종영한 ‘미남이시네요’ 같은 드라마는 대표적인 유쾌한 드라마다. 경쟁작에 밀려 시청률은 낮지만, 이들 드라마들은 시종일관 그 유쾌한 시간 속으로 대중들을 인도한다. 이들 드라마들은 현실적이라기보다는 판타지에 가깝지만 특유의 긍정적인 시선으로 보는 이들을 흐뭇하게 만든다. 이들 드라마들이 코미디의 특징을 가져가는 것은 바로 이런 긍정적인 극의 분위기를 코미디라는 장르를 통해 가장 잘 풀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현실 자체가 잘 느껴지지 않는 긍정적인 분위기의 드라마는 바로 그 현실 바깥에 서 있는 듯한 위치 때문에 모든 세대의 호응을 가져가지 못하는 단점이 있다. 즉 중장년층의 시선에서 보면 이 지나친 긍정론은 그들 세대에서 생각해왔던 ‘드라마는 그래도 현실적’이라는 기대치에서 멀어지기 때문이다. 반면 이 판타지는 만화의 세례를 받고 자라난 젊은 세대들에게는 오히려 열광하는 이유가 된다. 이들 드라마들이 시청률이 낮은 것은 작금의 지상파 TV 리모콘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세대가 중장년층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 완성도 높은 드라마들이 유쾌함에도 불구하고 시청률이 낮은 것은 주시청층과의 현실적 공감대가 잘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유쾌함에 풍자가 깃든 '그대 웃어요'와 '히어로'
하지만 ‘그대 웃어요’ 같은 드라마는 상황이 다르다. 이 드라마는 코미디라는 장르적 성격을 갖고 있으며 또한 유쾌하고 훈훈한 분위기를 유지하면서도 시청률까지 사로잡고 있다. 처음 10% 초반에서 시작한 이 드라마는 현재 20%에 육박하는 시청률을 향해 가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이 드라마가 사용하는 코미디가 지극히 현실과 맞닿은 풍자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그대 웃어요’는 웃음 뒤에 빈부의 문제나 소통의 문제 같은 현 사회의 현실을 떠올리게 하는 요소들이 있다. 이 현실까지도 껴안고 있는 판타지는 중장년층에게 편안한 장르인 가족드라마 속에 녹여지면서 더 힘을 발하게 된다.

이러한 양상은 '히어로'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드라마는 코미디가 갖는 과장된 상황들이 과장된 캐릭터들을 통해 그려지지만, 그 속에는 날카로운 현실 풍자가 들어 있다. 정의와 진실이 사라진 세상에서 작지만 그것을 지켜내려는 신념을 가진 자들의 안간힘은 이들 평범한 인물들을 '히어로'라고 부르는 이유가 된다. 물론 현재 이 작품은 '아이리스'라는 대작에 밀려 낮은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지만, 이 웃음 뒤에 남는 통쾌한 현실의 전복은 보다 폭넓은 시청층을 확보할 수 있는 가능성이 된다.

유쾌함과 불쾌함을 오가는 '수상한 삼형제'
반면 ‘수상한 삼형제’는 불쾌함과 유쾌함이 왔다 갔다 하는 냉탕온탕의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어떤 부분은 지극히 희화화되어 있지만, 어떤 부분은 불쾌할 정도로 자극적이다. 민폐형 캐릭터, 김건강(안내상)과 그 가족들이 지지고 볶는 이야기는 시청자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지만, 한편으로 늘 밝음을 유지하려는 김이상(이준혁)이 그래도 형제라며 함께 모여 우애를 과시하는 장면에서는 훈훈함도 느껴진다. 바로 이 지나치게 극적으로 그려지는 현실의 불쾌함과, 그래도 때론 어떤 긍정을 보여주는 유쾌함의 반복은 이 드라마가 그 아슬아슬한 줄타기 위에서 시청률을 끌어 올리는 요소로 작용한다.

중요한 것은 불쾌함만을 이끌어내면서도 시청률이 높았던 이른바 '욕하면서 보는 드라마'가 최근 들어서는 차츰 줄어들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여전히 논란의 소지를 갖고 있는 드라마들이 포진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들 드라마들의 시청률은 과거에 비해 그다지 높은 편은 아니다. 막장의 논란을 야기하면서도 시청률이 나오지 않은 '밥줘'라는 드라마는, 이제 제 아무리 시선을 받아도, 불쾌하기만 한 드라마를 이제는 대중들이 외면하고 있다는 것을 징후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드라마를 보는 관점은 다양하다. 어떤 이들은 작품성을 위주로 보고, 어떤 이들은 그저 심심풀이로 보기도 하며, 어떤 이들은 즐겁기 위해서 보기도 한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이 지극히 기능적인 관점, 즉 드라마가 우리를 즐겁게 해주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는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지금은 어떤 드라마의 특정 인물이나 상황에 대한 대중들의 즉각적인 반응이 그 어느 때보다 민감해지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아직도 여전히 이것이 시청률과 비례하지는 않는다는 데 제작자들의 고민이 있다. 일정한 작품성도 가지면서, 현실이 갖는 불쾌함과 판타지가 갖는 유쾌함을 어떻게 잘 엮는가의 문제는, 이제 대중들의 반응이 보이지 않는 제3의 제작자로 떠오르는 시대에 드라마의 성패로 자리하고 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