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품달', 절묘한 제목에 담긴 의미들

'해를 품은 달'(사진출처:MBC)

'해를 품은 달'이란 제목은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을까. 물론 음양을 통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해는 양, 즉 왕을 뜻하고 달은 음, 즉 여인을 뜻한다. 이 사극에서 해는 훤(김수현)이고 달은 월이라고도 불리는 연우(한가인)다. 이처럼 '해를 품은 달'은 그 제목만으로도 이 사극이 멜로를 지향하고 있다는 걸 극명하게 드러낸다. '해를 품은 달'이란 훤과 연우의 가까운 듯 먼 그 안타까운 운명적인 사랑을 그리는 사극이다.

달이란 본래 기억과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상징이기도 하다. 콘텐츠들 속에서 달이 종종 그리움과 동의어로 사용되는 건 그 때문이다. 해가 뜨면 달은 사라진다. 즉 눈 앞의 현실은 그리움이나 추억 같은 과거의 기억을 마치 없는 것처럼 저편으로 밀어낸다. 그래서 하루의 현실이 지나가고 이제 오롯이 자신으로 돌아오는 밤이 되면 그 없었던 듯 떠오르는 것, 그것이 바로 달, 그리움이다.

그래서 '해를 품은 달'은 기억의 문제를 다루는 드라마이기도 하다. 기억을 잃고 월(月)이 된 연우는 자신을 비춰주었던 해(훤)의 곁에서 액받이 무녀로 살아가며 조금씩 기억을 찾아낸다. 이것은 마치 그믐이었던 달이 초승달과 반달을 거쳐 보름달로 바뀌는 그 과정을 그려낸다. 하지만 연우는 훤과의 관계를 통해 차츰 기억을 떠올리게 되지만 그것이 자신의 기억이 아니라 남의 기억(신기로 들여다보는)이라 여기게 된다.

그리고 그 기억이 자신의 것으로 되돌아오는 시간은 바로 '일식'이다. 사실상 '해를 품은 달'이란 제목은 이 일식을 뜻하는 것이다. '해를 덮어버리는 달'은 잠시 현실을 지워버리고 과거의 기억만을 오롯이 띄우는 시간이다. 이 반전의 시간에 연우가 어린 시절 세자빈으로 있을 때 거처했던 은월각의 혼령받이로 들어가는 장면은 그래서 절묘하다. 그것은 현재의 월이 과거의 연우를 만나는 장면이다. 그래서 월이 자신이 연우임을 알고 비로소 훤을 만나는 시간이기도 하다. 이것은 해와 달이 겹쳐지는 현상, 일식으로 상징화된다.

이렇게 보면 음양 사상과 무속적인 판타지가 뒤섞인 이 사극 콘텐츠에 왜 무녀라는 낯선 인물들이 들어왔는가가 설명된다. 일식은 특히 사극에서 무녀들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에피소드다. '선덕여왕'에서 일식이라는 현상은 미실이 민초들을 현혹시키는 방법으로 활용된다. 이 에피소드에서 무녀들은 이야기의 중심에 들어와 있었다. 이것은 과거 정통사극 시절에서도 마찬가지다. 그 때도 무녀들은 일식이라는 설정과 함께 왕의 실정을 드러내는 이야기에 단골로 등장하곤 했다.

'해를 품은 달'이 가진 판타지적인 요소들은 이처럼 해와 달, 그리고 일식이라는 자연현상을 인물들로 상징화한 스토리와 엮어냄으로써 생겨난 것들이다. 멀리 떨어져 마주보고 있지만 결코 닿을 수 없는 그 아련함은 이 압도적인 자연현상에 그리움 같은 애절함을 부여한다. 이것은 '해를 품은 달'이 가진 기존 사극과는 상반되는 정조를 만들어낸다. 기존 사극들이 수많은 에피소드들이 쏟아져 나와 숨 쉴 틈 없이 흘러가는 소설적인 흐름을 갖고 있었다면, 이 사극은 조금은 멈춰 서서 그 순간의 감정을 깊이 느껴보는 시적인 정조를 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제목에서부터 우러나는 마치 한 편의 시 같은 느낌은 그래서 대중들이 이 사극에 빠져들게 되는 가장 큰 요인이 되고 있다.


'해품달', 기억과 착각의 변주곡

'해를 품은 달'(사진출처:MBC)

요즘 어떤 것에 매료되는 것을 흔히들 '앓이'로 표현한다. 특히 드라마가 성공하면 그 드라마는 물론이고 캐릭터에 대한 '앓이'는 당연히 따라붙는 영광의 수식어가 됐다. '해를 품은 달(이하 해품달)'도 바로 그 '앓이'의 드라마다. 그토록 절절하게 연우(김유정)를 외치던 어린 훤(여진구)의 절규가 귀에 쟁쟁하고, 떠나면서도 훤의 강녕을 비는 연우의 오히려 담담한 서신은 보는 이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성장한 훤(김수현)은 죽었다 생각하는 연우(한가인)를 앓고, 시청자들은 왕이 된 훤과 액받이 무녀가 된 월이 운명적으로 만나지만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는 그 안타까운 장면에 '해품달'을 앓는다.

'앓이'란 결국 기억의 장난이다. 어린 시절 훤이 연우를 만나지 않았던들, 그녀와 어떤 함께 한 기억을 갖지 않았던들, 그가 그토록 연우를 앓지는 않았을 터다. 훤은 어느새 장성한 왕이 되어있지만 과거 연우와의 기억 속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연우는 깊은 상처 때문에 바로 그 훤과의 기억만을 잃어버린다. 과거의 기억 속에 머물고 있는 훤과 그 기억을 잃어버린 연우. 바로 이 균열의 지점에서 '앓이'가 만들어진다.

그토록 그리워하던 이가 바로 옆에 있으면서도 '그럴 리 없다'며 부정하는 것은 그 '앓이'가 얼마나 깊었던가를 잘 말해준다. 훤은 자꾸만 월에게서 그녀가 연우라는 증거들을 찾아내고 놀라지만, 그것을 '미혹'으로 여긴다. "미혹됐다. 하지만 떨쳐버릴 수가 없구나."라는 훤의 대사는 그래서 보는 이를 더 아프게 한다. 한편 연우 역시 점점 돌아오는 과거의 기억들을 무녀인 자신에게 생긴 '신기'로 여긴다. 연우가 교태전 앞에서 과거 기억을 떠올리고는, 그것이 자신의 신기로 훤의 과거를 보게 된 것이라 생각하는 장면은 그래서 아프다. 그들은 아주 가까이 서 있지만 '앓고' 있는 서로를 알아보지 못한다.

이 가깝지만 먼 거리감이 바로 '해품달'을 앓게 하는 가장 큰 힘이다. 흔히 '그리움'을 담는 콘텐츠들이 사랑하는 당사자들 사이에 물리적인 먼 거리를 세워둔다면, '해품달'은 기억과 착각이라는 거리를 두는 셈이다. 사실 무녀라는 설정(그것도 주인공으로)은 사극에서 그다지 익숙한 것이 아니지만, 이런 신기로 착각하는 장치가 가진 힘을 생각해보면 실로 절묘한 선택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기억과 착각의 거리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리움은 이뤄질 수 없는 것일수록 절절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훤과 연우의 '앓이'는 기억과 착각의 거리 속에서 점점 깊어지지만, 이 거리가 좁혀져 결국 서로를 알아본다 해도 채워지기가 쉽지 않다. 그것은 왕과 무녀라는 신분의 거리가 그들 앞에 다시 놓이기 때문이다. 멜로라는 '앓이'의 장르가 기능하는 것은 남녀 사이에 놓여진 끝없는 장애와 거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해품달'은 사극이라는 틀거리를 통해 이러한 남녀 사이의 거리두기를 끝없이 만들어내는 그 지점에서 '앓이'의 강도가 깊어지게 된다.

이렇게 그리움이라는 '앓이'의 실체를 놓고 보면 '해를 품은 달'이라는 상징적인 제목이 새삼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해와 달은 그만큼 먼 거리에 놓여져 있지만 달은 그 해의 볕을 받아 빛을 낸다. 그런 점에서 달과 해는 멀리 있어도 서로를 (마음에) 품고 있는 셈이다. 그것은 결국 그리움의 또 다른 이름이 아닌가. 이것은 또한 우리가 고전을 통해 익숙한 달과 그리움의 이야기에 닿아있다. 멀리 있어도 달을 보며 자신의 님도 저 달을 보고 있으리라는 아련한 생각. 이것이 '해품달'을 보면서 우리가 느끼는 가슴 한 켠의 설렘과 절절함이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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