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것 김민기의 삶이 우리에게 남긴 숙제들

한국 포크 음악과 민중음악의 선구자이자 전 학전 대표였던 김민기가 별세했다. 향년 73세로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삶 전체가 우리에게 던지는 이야기는 현재의 문화 예술계가 귀기울여 들어야 할 것들이 적지 않다.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

‘아침이슬’처럼 떠난 김민기

지난 21일 김민기가 별세했다. 향년 73세였다. 그는 떠났지만 그는 ‘아침이슬’처럼 여전히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았다. ‘나 이제 가노라’며 ‘저 거친 광야’로 떠난 그는 이제야 좀 ‘서러움 모두 버리고’ 갈 수 있었을까. 그의 삶의 행적을 좇다보면 ‘시대의 아픔’이 곳곳에서 느껴진다. 스무살에 내놓은 ‘아침이슬’이라는 곡 하나만 두고 봐도 그렇다. 1971년에 낸 데뷔앨범에 들어 있던 그 곡은 김민기의 의도와 전혀 상관없이 유신 정권 반대 시위 현장에서 울려퍼졌다. 결국 정권이 금지곡으로 지정했던 그 곡은 김민기 평생의 꼬리표처럼 따라다니게 됐다. 

 

물론 김민기 스스로도 시대의 아픔 한 가운데서 노래를 불렀다는 사실은 그가 당시 했던 활동들을 통해 알 수 있다. 독재정권과 정면대결을 벌였던 시인 김지하를 만나고 일찍이 야학에 뛰어들었으며 김지하가 쓴 희곡인 ‘금관의 예수’ 공연에 참가해 주제가인 ‘주여 이제는 여기에’를 작곡했던 김민기였다. 70년대 마당극 운동의 시발점으로 평가받는 마당극 ‘아구’에 참여했고 군 생활 이후에는 인천 부평 봉제공장에 취직해 공장 노동자들을 위한 야학을 하며 ‘공장의 불빛’ 같은 음악극을 만들었다. 우리에게는 운동가요의 대명사처럼 불리며 광장에서 울려퍼졌던 ‘상록수’는 사실 공장노동자들의 합동결혼식 축가였다. ‘공장의 불빛’ 제작으로 중앙정보부에 연행되기도 했던 김민기는 10.26 사태가 벌어진 후에는 농부로서의 삶을 살기도 했고, 탄광에서 일을 하기도 했다. 노동자들의 삶을 몸소 살았던 것이다. 그리고 1987년 6월 민주화항쟁을 통해 그의 금지곡들은 일부 해제되었다. 70년대부터 80년대까지 이어져온 혹독한 독재정권의 그늘 아래서 그의 삶을 가장 낮은 자들 곁에 있었다. 그들을 위해 살았고, 그 삶이 노래가 됐고, 그래서 핍박받았지만 끝내 그 노래들과 함께 민주화 운동의 결실을 얻을 수 있었다. 우리네 현대사의 아픈 구석들을 들여다보면, 그의 노래가 떠오르는 건 우연이 아니다. 그 삶이 그 시대의 아픔들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르네상스맨, 김민기

‘검푸른 바닷가에 비가 내리면, 어디가 하늘이요 어디가 물이요- 그 깊은 바다 속에 고용히 잠기면 무엇이 산 것이고 무엇이 죽었소-’ 김민기가 쓰고 곡을 만든 ‘친구’는 고등학생이 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절창이다. 가사는 시이고 곡 또한 단순하지만 한번 들으면 잊히지 않을 정도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실제 친구의 죽음을 경험하고 썼다는 이 곡을 보면 싱어 송 라이터로서의 김민기의 면모가 일찍이 드러난다. 거기에는 문학이 있고 음악이 있다. 그런데 그의 활동은 그 틀에 머물지 않는다. 그는 노래도 만들고 불렀지만 음악극도 했다. 연극 또한 직접 만들었던 것. 1991년에 소극장 학전을 개관하고 그가 직접 연출한 ‘지하철1호선’은 지난해까지 8천회 이상 상연했고 무려 70만명의 관객이 함께 했다. 

 

그가 만든 학전(學田)은 ‘배우는 텃밭’이라는 의미다. 그 이름 그대로 예술인들의 텃밭이 됐다. 설경구, 김윤석, 황정민, 장현성, 조승우 등 무수한 배우들이 이 곳을 거쳐갔고, 동물원, 들국화, 장필순, 박학기, 권진원, 유리상자, 윤도현 등이 이 곳에서 노래했으며 고 김광석은 1천 회 공연을 했다. 그가 운영한 학전은 출연자들에게 그 날의 공연 수익을 밝히고 정산하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방식으로 운영됐는데, 그건 그 스스로 예술인들의 텃밭이 되겠다는 그 취지에 합당한 방식이었다. 그는 스스로도 문학과 연극과 음악을 아우르는 예술인이면서 동시에 그런 예술인들을 든든하게 받쳐주는 ‘학전’의 대표이기도 했다. 늘 적자에 시달리며 경영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스스로에게는 ‘돈 안되는 일’을 자처함으로써 예술인들을 살게 하는 일에 앞장섰던 후원자에 가까웠다. 

 

뒷것 김민기

“나는 뒷것이야. 너희는 앞것이고.” 그가 학전을 세워 했던 일들은 그가 생전에 했던 이 말 하나로 설명된다. 그건 물론 뮤지컬, 아동극, 가수들의 공연 등을 무대에 올리는 역할을 자신은 뒤에서 하는 사람이라는 걸 말한 것이지만, 스포트라이트를 예술인들에게 내려주고 자신은 무대 아래서 그걸 비춰주는 역할을 자임한 그의 삶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학전’이라는 이름 자체가 나서지 않고 묵묵히 예술가들의 못자리가 되어주겠다는 의지가 담긴 것이 아닌가. 

 

결국 김민기의 생애는 개관 후 33년 간이나 버텨왔지만 재정난으로 지난 3월 폐관한 학전과 거의 닮았다. 건강이 악화됐고 지난해 가을 위암 진단을 받고 투병하면서도 끝까지 학전의 레퍼토리들을 다시 무대에 올리겠다는 강한 의지를 내보였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그 뜻은 이뤄지지 않았지만 그는 우리네 예술계에 영원히 든든한 ‘뒷것’으로 남았다. 

 

올해 4월에 방영됐던 SBS 다큐멘터리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 3부작은 그가 뒷것을 자임하며 남긴 우리네 예술계의 흔적들을 담아 커다란 감동을 주었다. 다큐멘터리가 담아낸 내용을 보면 그가 뒷것을 자임한 건 예술인들만이 아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피혁공장에서 일하며 만난 노동자들의 어려움을 알고 노동자들을 위로해주는 ‘공장의 불빛’이라는 음악극을 만들었고, 어린 나이에 일터로 나온 그들에게 야학의 길을 열어 주기도 했다. 농사꾼이 되겠다고 연천에 내려가서도 그는 농민들의 뒷것을 자처했다. 중간유통업자들 때문에 농민들이 제 값을 못받고 소비자도 비싸게 쌀을 사야하는 현실을 알고는 직거래를 통해 모두가 좋은 길을 열어주기도 했다. 공부를 하고 싶어도 못하는 아이들을 위해 무료 야간학교를 열었고, 달동네 아이들을 위한 유아원 건립을 위해 공연을 해달라는 요청에 기꺼이 나서기도 했다. 또 ‘지하철 1호선’이 큰 성공을 거뒀을 때도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어린이들을 위한 아동극에 뛰어들었다. 돈 안되는 일, 하지만 꼭 필요한 일에 앞장섰던 거였다. 

 

김민기가 삶 전체로 전하는 메시지

그는 떠났지만 그 삶은 우리에게 선명한 메시지를 남긴다. 먼저 예술이란 시대와 공명한다는 사실이다. 시대의 아픔을 느끼고 그것을 담아낸 예술은 당대의 대중들과 호흡함으로써 생명력을 갖게 된다는 걸 김민기는 보여줬다. 그렇게 세상은 예술을 만들고, 예술은 세상을 바꾸는 일이 가능할 수 있었다. 또 모든 것이 자본화되고 상품화되어가는 세상에 ‘돈 안되는 일’이 오히려 예술이 해야 하는 일일 수 있다는 걸 그는 보여줬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누군가 뒷것을 자임하는 존재가 필요하다는 사실 또한 알려줬다. 만일 문화예술에 대해 정부 등이 나서 지원을 한다면 든든한 뒷것의 전형을 보여준 김민기의 선택들을 들여다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또 앞것을 자임하는 현실들 앞에서 그 현실을 떠받치고 있는 무수한 뒷것들이 존재한다는 것 또한 김민기는 보여줬다. 가난해도 작품을 통해 세상을 말하는 예술가들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들, 돈벌이의 마음만으로는 할 수 없는 농사를 짓는 농부들 같은 존재들이 있다는 것. 김민기는 그런 이들이 세상을 지탱하고 있다는 걸 삶 전체로 우리에게 전했다. (글:시사저널, 사진:SBS)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 그는 모든 위대한 낮은 자들의 뒷것이었다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

“나는 뒷것이야. 너희는 앞것이고.” 김민기가 했다는 그 말은 그의 삶과 그가 가난한 예술인들을 위해 만들었던 학전(學田)이 해온 일을 압축해 설명해준다. 학전을 세워 ‘지하철 1호선’ 같은 최장기 공연은 물론이고 다양한 뮤지컬, 아동극 그리고 가수들의 공연을 무대에 올렸던 김민기. 하지만 그는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무대 위가 아니라 무대 아래서 스포트라이트를 비춰주는 역할을 자임했다. ‘학전’이라는 이름 그대로 나서지 않고 묵묵히 예술가들의 못자리가 되어준 것이다.

 

SBS 다큐멘터리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 3부작은 개관 후 33년을 버텨왔지만 재정난과 김민기의 건강악화로 지난 3월 폐관한 학전과 이 소극장을 세운 김민기의 삶을 담았다. 제목에도 담긴 ‘뒷것’이라는 표현은 그 자체가 먹먹하다. 모두가 앞으로 나서려 애쓰는 세상이 아닌가. 그런데 뒤를 자처한다는 뜻이 담긴 데다, ‘것’이라는 표현 또한 자신을 낮추는 뉘앙스가 담겨 있어서다. 

 

다큐멘터리가 포착한 김민기의 삶은 모든 위대한 낮은 자들의 뒷것을 자처하는 삶이었다. 다큐멘터리에 참여한 황정민, 장현성, 강신일, 이정은 등등 무수히 많은 유명 배우들은 물론이고, 고 김광석을 비롯해 윤도현, 강산에, 정재일, 노영심 같은 음악인들의 면면을 통해 알 수 있듯이 학전은 그들의 든든한 못자리였고, 그 못자리를 지킨 건 다름 아닌 뒷것 김민기였다. 

 

하지만 김민기가 뒷것을 자처한 건 학전을 통한 가난한 예술인들만이 아니었다. 피혁공장에서 일하며 만났던 노동자들의 어려움을 알고는 그걸 음악으로 담아 무수한 노동자들을 위로해준 ‘공장의 불빛’이라는 음악극을 만들었고, 어린 나이에 일터로 나온 그들에게 야학의 길을 열어 주었다. 노래가 모두 금지곡이 되고 모든 길이 막혀 농사꾼이 되겠다고 연천에 내려가서도 그는 농민들의 뒷것이었다. 중간유통업자들 때문에 농민들은 제 값을 못받고 소비자도 비싸게 쌀을 사야하는 상황에 직거래를 통해 모두가 좋은 길을 열어줬던 거였다. 

 

그는 공부를 하고 싶어도 못하는 아이들을 위해 신정동에 중학교 과정을 무료로 가르치는 야간학교를 열기도 했고, 농사 짓겠다고 내려가서도 달동네 아이들을 위한 유아원 건립을 위해 공연을 해달라는 요청에 기꺼이 나서기도 했다. 또 ‘지하철 1호선’의 큰 성공을 거뒀을 때도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어린이들을 위한 아동극에 뛰어들었다. 돈이 되지 않지만 꼭 필요한 일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다큐멘터리가 조명한 김민기의 뒷것의 삶을 들여다 보면, 그가 뒷것을 자처해 지지해온 세상의 진정한 앞것들이 무엇인가가 새삼스럽게 눈에 띤다. 그들은 가난해도 삶과 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작품을 통해 말하는 에술가들이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며, 집의 생계를 위해 하고픈 학업도 포기하고 어린 나이에 생업에 나선 학생들이고, 결코 돈벌이의 마음으로는 할 수 없는 농사를 짓는 농군들이며 나아가 우리 사회의 미래가 될 어린이들이다. 즉 김민기가 뒷것을 자처해 지지해온 것들은, 그 무엇보다 소중한 가치를 가진 존재들이지만 세상의 앞것을 자처하는 이들에 의해 가려져 뒷것으로 치부되어온 것들이다.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는 그래서 모든 위대한 낮은 자들의 뒷것을 자처한 김민기의 삶을 들여다 본 다큐멘터리면서, 그 삶이 지탱했던 진짜 세상의 앞것이 되어야할 존재들을 위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실로 이런 존재들이 있어 세상은 그나마 살아갈 수 있고 또 살만해지는 게 아닐까 싶다. 결국 학전은 간판을 내렸지만 모두가 염원하듯 병을 툴툴 털어버리고 돌아와 다시 부활하는 학전의 모습이 보고 싶다. 그 어두운 시대에도 늘 깨치고 나아가 끝내 이겼던 그의 모습처럼. (사진:SBS)

야인 한대수의 멸망의 밤’, 그가 꿈꾼 행복의 나라로

 

X같은 세상 다 썩어가네. 총알은 튀고 또 피바다 되어- 비린내 나는 이 끝없는 전쟁, 공해와 질투, 또 오해와 권투. 돈 좇아가다 다 지쳐버렸네. 어린애들은 다 미쳐 버렸네.’ 한대수가 2000년에 발표한 ‘Eternal sorrow’에 수록된 멸망의 밤은 쌍스럽게도 욕으로 가사를 시작한다. 그에게 세상은 욕이라도 해야 될 어떤 곳이다. 그 곳은 피 비린내 나는 끝없는 전쟁이 벌어지는 곳이고, ‘이웃사랑을 비웃는 사기의 천국이다. 종교가 사람을 구원하기는커녕 바로 그 믿음이 다르다는 이유로 쓰러진 사람 옆구리를 차 창자가 터진전사들을 만드는 곳이다. ‘지옥이 따로 있나. 바로 여기 있지.’

 

'한대수(사진출처:서울뮤직)'

멸망의 밤이 그러하듯 한대수의 노래에는 거침이 없다. 마치 세상 바깥에서 세상을 들여다보며 툭툭 던지는 이야기 같다. 우리 같이 세상 안에서 생존해내기 위해 무수한 분노와 좌절감을 꿀꺽 삼키며 살아가는 서민들은 그래서 한대수의 노래를 들으면 마음 한 구석의 억눌렀던 무언가가 터져 나오는 듯한 기분을 갖게 된다. 한대수 하면 지금도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물 좀 주소라는 곡이 그렇고 행복의 나라로라는 곡이 그러하다.

 

흔히들 한국의 밥 딜런으로 한대수를 이야기하곤 하고 실제로 그가 밥 딜런의 영향을 받은 국내 포크 가수들 중 한 명이라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사실 밥 딜런의 영향을 받은 국내 포크 가수들은 한대수 이외에도 꽤 많다. ‘담배라는 절창을 불러낸 서유석도 있고, 낮은 읊조림으로 세상을 날카롭게 노래한 김민기도 있으며, 미국적 포크를 우리식의 민요로 수용해낸 양병집이나 정태춘도 빼놓을 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대수가 주목되는 건 현실에 대한 날선 비판의식을 지금까지도 가사에 녹여 부르는 현재진행형의 가수라는 점 때문이다.

 

밥 딜런이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되었다는 소식에 우리가 반색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착잡한 마음이 되는 건 우리네 가요계에서 한대수 같은 거장이 저 밥 딜런처럼 자유롭게 살아갈 수 없었던 현대사들 때문이다. 음악은 삶의 즐거움을 노래하기도 하지만, 또한 세상의 부조리를 시적 언어로 비판해낼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인물이 밥 딜런이 아니던가. 그가 부른 ‘Blowing in the wind’‘The Times They are a-Changin’ 같은 반전음악은 그래서 시대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었다. 하지만 우리네 풍토에서 이처럼 세상의 부조리를 노래했던 가수들은 한때 블랙리스트가 되어 핍박받기도 했다.

 

그래서 지금의 우리네 가요를 보면 너무 균형을 잃은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물론 한류의 첨병처럼 되어 있는 아이돌 음악이 의미가 없는 건 아니지만 너무 그쪽으로만 치우쳐져 있다는 것이다. 이 흐름 속에서 가사의 무게감은 갈수록 사라지고 표피적으로 흘러버린다. 한대수가 저 멸망의 밤에서 노래한 돈 좇아가다 다 지쳐버렸네라는 가사가 새삼 가슴에 박히는 건 그래서다.

 

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져 나오면서 대중들은 허탈감에 빠져 있다. 그 허탈감의 정체는 우리가 타고 있는 이 배가 누구의 손에 의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살아왔다는 그 자괴감, 배신감에서 비롯되는 것일 게다. 그러고 보면 최순실 게이트는 안타깝게도 아이들을 저 세상으로 보낸 세월호 참사를 그대로 닮았다. 만일 밥 딜런이 지금 여기 살아가는 한국인이었다면 어떤 노래를 했을까.

 

김용익 민주정책연구원장은 밥딜런이 한국인이었다면 받을 것은 블랙리스트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페이스북을 통해 밥 딜런의 노벨상 수상을 언급하면서 우리가 대중문화인들의 블랙리스트를 쓰고 있을 때 밥 딜런은 귀로 듣는 시를 쓰고 있었다. 그 시가 세상을 바꿔왔다. 이제 청와대만이 아는 대답을 듣고 싶다고 밝히기도 했다. 문재인 전 대표도 정부는 학문과 문화예술을 지원하되 간섭해선 안 된다. 블랙리스트 따위는 있어선 안 된다고 했다.

 

목마른 세상, 자꾸만 한대수의 노래들이 다시 들리는 나날들이다. 우리는 그가 부른 멸망의 밤을 겪고 있다. 이 어둠을 통과해 그가 꿈꾸던 행복의 나라로갈 수 있을까. ‘물 좀 주소의 그 갈증이 그 어느 때보다 공감되는 시절이다. 우리에게는 더 많은 한대수가 필요하다.

설경구의 무엇이 <힐링캠프>까지 킬링하게 했을까

 

방송의 힘을 과신하는 것일까 아니면 시청자의 의견 따위는 무시하는 것일까. 혹자는 <힐링캠프>에 설경구가 출연하든 누가 출연하든 무슨 상관이냐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맞다. 그것은 제작진들의 선택이다. 다만 방송의 목적이 시청자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게스트를 위한 것인지, 혹은 시청자를 낚기 위한 것인지는 생각해볼 문제다.

 

'힐링캠프'(사진출처:SBS)

<힐링캠프>에 설경구가 게스트로 출연하는 것을 대중들이 반대한 것은 그가 전처와 이혼하고 송윤아와 결혼하면서 생긴 잡음들 때문이었다. 그것이 진실인지 아니면 루머인지는 알 수 없다. 부부 간에 벌어지는 일은 당사자들이 아니라면 그 깊은 내막을 알기가 사실상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힐링캠프>에 설경구가 출연하는 것은 과연 바람직한 일일까.

 

방송의 효과면으로만 생각해봐도 <힐링캠프>와 설경구의 만남은 양자에게 모두 득이 되기보다는 독이 된다. <힐링캠프>는 설경구의 출연, 그것도 2회 분량으로 만들어 첫 회에는 변죽만 때리는 식의 편집으로 사실상 시청자를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늘 토크쇼에서 논란이 되었던 문제지만, 그것이 게스트 홍보를 위한 것이냐 아니면 시청자를 위한 것이냐는 여전히 뜨거운 문제다.

 

<힐링캠프>는 시청자가 굳이 원하지 않는 게스트를 데려왔고, 데려온 후에도 시청자가 원하는 내용은 쏙 빠져있는 첫 회를 구성했다. 굳이 ‘설경구의 눈물’ 운운하며 예고편을 내보낸 것으로 볼 때 첫 회 편집은 다음 회를 위한 꼼수인 셈이다. 첫 회가 그나마 <힐링캠프> 같은 분위기를 만든 것은 설경구의 얘기 그 자체보다는 김민기나 이창동 감독의 면면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이 방송은 과연 설경구에게도 도움이 되었을까. 설경구는 프로그램이 방영되기 이전부터 시청자들의 뭇매를 맞았다. 만일 설경구와 송윤아의 결혼에 얽힌 이야기들이 루머라고 하더라도 이런 방식의 해명은 그다지 효과를 발휘하기가 어렵다. 대중들이 과연 방송을 그렇게 신뢰하는가. 그것도 몇 차례 논란 연예인의 해명 방송이라는 지적을 받았던 <힐링캠프>를.

 

만일 루머라면 억울할 법도 하지만, 대부분의 연예인 루머는 그것이 생기는 이유가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실제 사실이 아니더라도 앞뒤 정황이 그렇게 만드는 수도 있고 해당 연예인의 이미지가 그 루머를 강화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니 루머란 연예인에게 있어서는 평상시의 삶과 어떤 식으로든 연관을 갖기 마련이다. 루머는 그래서 법적인 차원으로도 해결되지 않고(고소를 한다 해도 별 소용이 없다), 그렇다고 인간적인 호소를 통해서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다. 대중들과의 관계를 통해 서게 마련인 연예인들의 루머는 결국 대중들의 마음만이 풀어낼 수 있다.

 

과거 최민수가 자신은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지만 무조건 무릎을 꿇고 잘못했다 한 것은 자신의 존재근거가 결국은 대중들에게 있다는 것을 잘 알고 행한 현명한 대처였다. 최민수는 말을 믿지 않았다. 대신 산속에 칩거하는 방식으로 행동을 통해 대중들의 마음을 열었다. 루머란 토크쇼에 나와 답답한 속을 토로하는 것 정도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혹 <힐링캠프>는 자신들의 힘을 과신하고 있는 것일까. 대중들의 시선마저 교화시키고 바꿀 수 있다 생각하는 것일까.

 

<힐링캠프>의 설경구 출연이 본인의 힐링에 머물고 대중들에게 다가오지 못할 때 그것은 힐링이 아니라 킬링이 될 수 있다. <힐링캠프>는 대중들을 무시한 셈이고, 설경구 또한 프로그램에서는 속 시원할 수 있었을 지 모르지만 대중들과의 교감에는 그다지 성공적이라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프로그램의 시청률만이라도 성공해야 할 텐데, 어찌된 일인지 <힐링캠프> 설경구편의 시청률은 오히려 떨어졌다.

 

도대체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힐링캠프>란 말인가. ‘힐링’이 소통에 닿아있지 않을 때 그것은 자칫 교조적이고 계몽적인 문구가 되어 오히려 대중들에게는 그 자체로 폭력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때가 아닐까. 잠깐 논란을 통해 주목받을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중들과 소통하지 않는 토크쇼는 결국 그것이 제살 깎아 먹기가 된다는 걸 알아야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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