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이루어질지니’, 사탄 김우빈과 사이코패스 수지가 그려낸 천년의 사랑

다 이루어질지니

이건 마치 김은숙 작가가 모래로 쌓아 만들어낸 거대한 세계 같다. 태초와 현재, 고려와 아라비아, 한국과 두바이, 현실과 상상... 같은 무수한 씨실과 날실을 엮어 짠 이야기의 직물 같다. 그것이 모래 같은 상상의 이야기를 재료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연기처럼 손아귀에 잡히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야기는 구체적인 물질이 아니어도 보는 이의 가슴을 파고든다. <아라비안 나이트>의 샤흐라자드가 그 힘을 보여줬듯이.

 

아무 것도 없이 바람에 서걱거리는 모래만 가득한 사막에 모래바람을 타고 나타나는 지니의 이야기가 탄생한 것도 그래서일 게다. 김은숙 작가의 넷플릭스 드라마 <다 이루어질지>는 바로 그 지니의 이야기를 가져와 시공을 뛰어넘는 대서사시로 재해석했다. 마술램프에서 나타나 무엇이든 세 가지 소원을 들어주는 지니가 주인공이니 일단 일상과 맞닿아 있는 평범한 이야기일 수는 없다. 하늘을 날아다니고, 시공을 초월하며 마법을 부려 누군가를 부자로 만들어주기도 하고 때론 젊어지게 해주기도 하는 존재가 주인공이니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중요한 건 이 상상의 세계로 빚어진 이야기가 우리의 삶에 어떤 비의를 전할 것인가다. 그건 알라딘의 마술램프 이야기로 익숙한 세 가지 소원을 들어주는 지니에 의해 역설적으로 파멸하는 인간들을 통해 전하는 욕망의 허망함에 대한 것이다. 마술램프의 정령 이블리스(김우빈)는 그래서 소원을 이뤄지게 해주는 존재가 아니라, 그 세 가지 소원을 통해 인간을 시험대에 올리는 존재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그 욕망에 의해 파멸에 이른다. 이블리스가 신이 창조해낸 인간을 사랑하지 않고 하찮게 여기는 이유다. 

 

하지만 고려시대 아라비아까지 노예로 끌려왔다가 이블리스를 만나게 된 소녀는 오히려 그를 시험대에 올린다. 세 가지 소원을 죽어가면서도 모두 타인을 위해 빌었던 것. 이블리스는 이제 환생으로 다시 태어난 소녀를 통해 자신이 하찮게 여겼던 인간과 또다시 내기를 벌여야 하는 운명에 처했다. 그 소녀는 바로 기가영(수지)이다. 사이코패스로 개구리의 배를 가르고 또 가르면서도 아무런 감정이 없던 소녀. 그래서 엄마도 그녀를 일찌감치 버렸지만, 괴물이 될 수도 있었던 그녀를 사람으로 만든 건 할머니와 마을 사람들이다.

 

“니가 누구를 안아 주모 내도 니를 안아줄 끼고 니가 누구를 칼로 끄으모 내도 니를 칼로 끄을 끼다. 니가 누구를 직이모 내도 니를 죽일 끼다. 이게 내랑 니 규칙이다, 알았나?” 할머니가 내건 규칙과 더불어 가영은 닭 잡는 낫으로 글을 가르쳐주고 개를 향하던 끌로 나무를 파 장승 만드는 법을 알려주고 날 선 칼로 요리를 하게 해준 마을 사람들의 보살핌으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게 된다. 감정 없는 돌멩이 같은 가영을 할머니와 마을 사람들은 보석처럼 키워줬던 것. 

 

인간은 하찮은 존재라는 자신의 신념을 증명하려는 지니 앞에 기가영은 의외의 인간이다.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이코패스이기 때문에 욕망 자체가 별로 없다. 시험에 빠뜨리려는 이블리스와 시험 자체가 무소용인 기가영의 대결은 그래서 팽팽해진다. “우리 할머니가 인간은 선한 존재랬어. 세상에서 나쁜 건 나 하나야.” 그렇게 말하며 네가 틀렸다는 기가영 앞에서 이블리스는 수천년 간 자신이 봐왔던 인간의 파멸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엉뚱하게도 기가영은 첫 번째 소원을 그 증명의 내기에 쓴다. 길에서 만나는 5명의 인간의 소원을 들어주고 그들이 과연 파멸하는지 아닌지를 보자는 것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사이코패스인 기가영이 순수한 인간이 존재할 수 있다는 증명을 해낼 대표자로 나선다는 설정은 흥미로운 면이 있다. 인간적 관점에서는 감정 없는 사이코패스가 연쇄살인마로 주로 그려지지만, 영겁의 세월 동안 삶과 죽음을 무수히 목격하고 경험한(영생 혹은 환생을 통해) 그 전지적 신의 관점에서 보면 사이코패스는 감정이 없이 욕망도 없는 존재처럼 보인다. 그건 마치 이블리스의 시선과도 비슷하다. 죽이고 살리는데 아무런 감정이 없는 이블리스나 기가영이나 그리 다른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탄 이블리스와 사이코패스 기가영의 대결은 흥미진진해진다. 

 

그 대결은 일종의 수수께끼다. 과연 그런 순수한 인간이 존재하는가를 두고 벌이는 정령과 인간의 ‘세 가지 소원’이라는 룰을 갖고 벌이는 도박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전지적 신의 관점으로 흘러가는 서사는 그래서 보통의 드라마들과는 다른 진입 통로를 갖고 있다. 일상적 서사 안에서 극적 사건이 벌어지며 펼쳐지는 것이 아니라, 아예 수천 년의 시간을 두고 벌어지는 일이고, 그것도 고려와 아라비아, 한국과 두바이, 천국과 지옥 등등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반 판타지 서사의 진입 통로는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이블리스와 기가영이 사막 한 가운데서 만나 티격태격하며 벌이는 초반의 이야기는 일상과 동떨어져 있기 때문에 때론 황당하고 때론 낯설게 다가온다. 하지만 그 진입 장벽을 넘어서면 이제 이야기의 무한한 세계 속에서 펼쳐지는 정령과 인간의 대결과 사랑 그리고 그 안에 담겨진 운명과 슬픔, 그리움 같은 것들을 통해 작품이 건네는 기막힌 위로와 감동 그리고 깨달음 같은 것을 경험할 수 있다. 

 

13부작으로 넷플릭스 드라마로서는 꽤 긴 호흡처럼 초반에는 여겨졌지만, 뒤로 가면 갈수록 13부작도 부족할 지경의 폭발적인 상상의 세계들이 계속 펼쳐진다. 그러면서 이 모래폭풍처럼 다가와 인간들을 시험에 빠뜨리다 자신도 시험에 빠져버리는 이블리스라는 존재를 통해 인간과 삶의 비의를 슬쩍 들여다보게 된다. 인간은 어떻게 인간이 되는가. 13부를 다 들여다보고 나면 이런 질문이 가슴 한 켠에 남아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김은숙 작가는 특유의 은유적 표현들을 통해 삶의 아이러니를 작품 속에 담았다. 사탄이라 불리지만 더할 나위 없이 선해 보이는 이블리스나, 사이코패스지만 그 차가움으로 누구보다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기가영이라는 존재 자체가 그렇고, 영원한 삶을 욕망하는 인간이지만 정반대로 불멸자가 되어 고통받는 반인반령의 존재도 등장한다. 특히 모든 걸 다 이루어지게 해주는 전지전능해보였던 이블리스가 정작 자신의 비극적인 운명 앞에 무력해지는 상황이나, 금은보화를 원하는 욕망 속에서 파멸하는 한 도시의 이야기는 바로 그런 삶의 아이러니를 기막히게 표현해낸 상상이 아닐 수 없다. 

 

손아귀에 쥐어진 것처럼 여겨지다가도 어느 순간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로 형상화된 지니의 모습은 그 자체가 이러한 욕망의 허망함을 드러내는 상징이다. 진흙으로 빚어진 인간은 그래서 그 모래를 끝없이 갈망하며 손아귀에 쥐려 하지만, 결국은 죽어 그 모래 같은 한 줌의 재로 사라지는 운명을 뒤늦게야 깨닫지 않던가. 결국 인간의 증명은 그런 가진 것에 의한 기쁨이 아니라, 오히려 가진 것을 잃었을 때 갖게 되는 슬픔과 눈물 같은 것일 수 있다고 김은숙 작가는 이 드라마를 통해 말하고 있다. 모래알처럼 그저 억겁의 세월 동안 부서지고 스러질 수밖에 없는 존재지만, 누군가 아파하고 고통스러워하며 슬퍼하는 감정들이 더해져 반짝반짝 빛나는 그런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고. (사진:넷플릭스)

‘더 글로리’, 통쾌하고 먹먹하고... 이토록 완벽한 인과응보가 있을까

더 글로리

“아우 얘 맨발로 괜찮니? 왜 하필 니트를 입었어? 젖으면 무거울 텐데. 물이 너무 차다. 그치. 춥다. 우리 봄에 죽자 응? 봄에.” 절망 끝에 어린 문동은(정지소)이 죽기 위해 물 속에 들어갔을 때 저 편에 또 다른 사람이 죽으려 한다. 그걸 보고는 문동은 그 사람을 구한다. 그런데 그렇게 구해진 사람이 자신을 구한 이가 어린 소녀라는 걸 알고는 그렇게 맨발에 니트를 입고 물에 들어온 걸 걱정하는 엉뚱한 말을 한다. 그러면서 너무 추우니 봄에 죽자고 한다. 지금 말고.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더 글로리> 파트2에 등장하는 이 시퀀스는 웃프다. 절망의 끝을 보여주지만 그 곳에서 희망을 전한다. 결국 그 어느 누구도 도와주지 않는 현실 앞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만이 이 고통을 해결해줄 거라 생각했던 그들의 마음은 못내 아리고 아프다. 하지만 그 순간 그들을 구하는 건 다름 아닌 자신과 같은 사람이 있고, 그래서 그 누군가를 구하고픈 마음이라는 걸 이 시퀀스는 보여줌으로써 우리를 웃게 만든다. 유머가 들어 있는 이야기지만, 그건 우리 삶의 진실을 담고 있지 않은가. 혼자서는 버텨내기 어려운 삶이지만 그걸 공감함으로써 웃음으로 넘어서고 기대며 살아갈 수 있는 것. 

 

<더 글로리> 파트2가 드디어 공개됐다. 파트1이 끝나고 너무나 기다리던 시청자들에게는 단비와 같은 나머지 내용들이 전개됐다. 과연 문동은은 이 지난한 복수극을 어떻게 마무리할까. 그 끝은 제목처럼 ‘영광스러운’ 빛으로 가득할까. 시청자들은 기대감과 더불어 어떤 마무리가 될 것인가에 대해 파트2를 그 어느 때보다도 목 놓아 기다렸다. 그리고 공개된 파트2는 이러한 기다림이 헛되지 않았다는 걸 보여준다. 통쾌한 인과응보에 먹먹한 생존자들의 온기가 더해지며 더할 나위 없는 엔딩을 통해 진짜 희망과 위로를 전하고 있어서다. 

 

“왜 없는 것들은 세상에 권선징악, 인과응보만 있는 줄 알까?” 이렇게 말했던 박연진(임지연)이고, 그건 안타깝게도 가진 자들이 죄를 지어도 벌 받지 않는 우리네 현실 그대로를 말하는 것이지만, 문동은은 그런 말 앞에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고 그들을 지옥 끝까지 몰아붙인다. 스포일러이기 때문에 자세한 그 과정을 말하긴 어렵지만, 놀랍게도 문동은이 짠 계획은 공고하게만 보였던 저들의 벽에 균열을 일으키고 결국 그들끼리 치고받는 파멸로 그들을 이끌어간다. 

 

그 복수의 과정은 ‘인과응보(因果應報)’, 즉 ‘선을 행하면 선의 결과가 악을 행하면 악의 결과가 반드시 뒤따른다’는 그 뜻 그대로 이뤄진다. 예를 들어 가진 자들의 개가 되어 저들이 시키는 대로 폭력을 일삼다가 이제는 주인을 물려했던 손명오(김건우)가 결국 저들에 의해 자신이 했던 것 같은 폭력으로 최후를 맞이하는 식이다. 약에 취한 이는 약으로 끝을 마주하고, 입을 잘못 놀린 이는 말을 못하는 형벌에 취하며, 부모 잘 만나면 죄를 지어도 벌을 받지 않는다 여겼던 이는 바로 그 부모로부터 배신당해 벌을 받는다. 

 

그 복수는 단순하지 않고 결코 쉽게 전개되지도 않는다. 문동은의 평생에 걸친 치밀한 계획이 있고 그를 돕는 주여정(이도현)과 강현남(염혜란) 같은 이들이 있는데다, 죄를 지은 자들이 가진 저마다의 엇나간 욕망들이 결합되어 파멸의 불꽃이 타오른다. 단순한 복수가 아니라 어째서 저들의 엇나간 욕망이 자신들을 나락으로 이끄는가 하는 그 사필귀정의 과정을 자연스럽게 그려낸다. 

 

게다가 복수만이 이러한 끔찍한 폭력 앞에 무너졌던 피해자들에게 끝이 아니라는 것 역시 드라마는 끝까지 놓치지 않는다. 피해자들은 복수로 저들의 파멸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영광과 명예를 되찾는 것이 그 목적이라는 걸 주여정의 목소리를 통해 전한다. “피해자들이 잃어버린 것 중에 되찾을 수 있는 게 몇 개나 된다고 생각하세요? 나의 영광과 명예 오직 그것뿐이죠. 누군가는 그걸 용서로 되찾고 누군가는 복수로 되찾는 거죠. 그걸 찾아야만 비로소 원점이고 그제야 동은 후배의 열아홉살이 시작되는 거니까요.”

 

<더 글로리>는 그래서 복수극의 끝장을 보여주면서도 동시에 피해자들이 어떻게 서로를 의지하고 그래서 “봄에 죽자”며 살아갈 수 있는 힘을 내는가를 그 단단한 연대를 통해 그려낸다. 실로 김은숙 작가는 기꺼이 이 땅의 폭력으로 인한 피해자들을 위해 칼춤을 추는 망나니가 되기를 자처한 듯 대사 하나하나에도 공을 들였다. 멜로에서 그토록 달달했던 김은숙 작가의 대사들이 이토록 살풍경한 저주로도 바뀔 수 있다는 걸 이 작품은 보여준다. 

 

김은숙 작가가 피해자들의 망나니를 자처했다면 배우들은 그 대본 위에서 기꺼이 김은숙 작가의 망나니가 되었다. 극의 중심을 끝까지 잃지 않고 잡아낸 송혜교의 연기 변신은 그 스펙트럼을 확장시켜 향후의 작품들을 기대하게 만들었고, 여기에 이도현, 임지연, 염혜란, 박성훈, 정성일, 김히어라, 차주영, 김건우, 정지소, 신예은 등등 모든 연기자들이 마치 작두를 탄 듯 신들린 연기를 보여줬다. 특히 임지연과 김히어라의 미친 악역 연기와 이 복수극에 따뜻함과 간절함을 더해준 염혜란 그리고 배우로서의 남다른 존재감을 드러낸 정성일, 박성훈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모두가 <더 글로리>의 훌륭한 망나니들이었다. 

 

누군가를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자신 또한 구하는 일이 아닐까. <더 글로리>는 피해자 문동은이 어떻게 생존해내는가를 통해 그런 이야기를 전한다. “한때는 그런 생각을 했어요. 누가 됐든 뭐가 됐든 날 좀 도와줬다면 어땠을까. 그렇게 열여덟 번의 봄이 지났고 이제야 깨닫습니다. 저에게도 좋은 어른들이 있었다는 걸. 친구도 날씨도 신의 개입도요. 그리고 봄에 죽자던 말은 봄에 피자는 말이었다는 걸요. 저를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잘 크진 못했어요. 하지만 언젠가는 어느 봄에는 활짝 피어날게요. 오래오래 건강하세요.” 그렇게 김은숙 작가와 송혜교는 문동은의 목소리를 통해 피해자들에게 진심어린 위로와 희망을 건네고 있다. (사진:넷플릭스)

왕자보다 망나니, 이토록 다크한 김은숙과 송혜교라니

더 글로리

“난 왕자님은 필요 없어요. 난 왕자가 아니라 나랑 같이 칼춤 춰줄 망나니가 필요하거든요.” 문동은(송혜교)이 주여정(이도현)에게 선을 긋는 이 대사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더 글로리>의 색깔을 분명히 드러낸다. 그리고 이건 그간 판타지와 멜로를 오가는 작품을 줄곧 써왔던 김은숙 작가와 멜로 퀸으로 자리매김해온 송혜교가 이 작품을 통해 건네는 일종의 선언 같은 것이다. 달달한 멜로를 기대했다면 그건 섣부른 기대일 뿐이라고. 이 작품은 피가 철철 흐르고 살점이 문드러져 그 상처의 고통이 화면 바깥으로 전이되어 올 정도의 살풍경한 폭력과 복수가 그려질 것이라고. 

 

박연진(신예은)과 그 패거리들로부터 심각할 정도의 학교폭력을 당했지만, 그 누구도 고교시절의 문동은(정지소)을 그 지옥에서 구해주지 않았다. 모두가 방관했고, 심지어 선생님은 친구들끼리 그럴 수도 있는 일을 왜 키우냐며 피해자인 문동은의 뺨을 때렸다. 엄마조차 돈 앞에서 딸이 당한 폭력을 방치했다. 온 몸이 박연진 패거리들 때문에 맞고 찢어지고 심지어 지져져 흉터 아닌 곳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였지만 그 누구도 금수저 부모를 둔 박연진과 그 패거리들이 문동은에게 저지르는 폭력을 막아주지 않았다. 

 

그러니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 같았던 문동은은 한겨울 차가운 강물 앞에도 서보고, 한 발만 나서면 이 모든 고통이 사라질 수 있을 것 같은 건물 옥상에도 서보지만 그 순간 ‘꿈’을 가져보려 한다. 그 꿈은 바로 ‘박연진’이다. 어차피 죽을 거면, 또 사는 게 지옥이라면 혼자 죽지 않고 혼자만 지옥에 사는 게 아니라 저들과 함께 죽어 함께 지옥불에 떨어지겠다는 꿈. 문동은은 이제 복수의 일념 하나로 버텨내며 검정고시를 거쳐 대학을 가고 과외 선생을 하며 돈을 벌면서 저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계속 주시한다. 그러면서 아주 오래도록 철저한 복수를 계획하고 하나씩 실천해 나간다. 

 

<더 글로리>는 전형적인 복수극이지만, 그렇다고 속 시원한 사이다 판타지만을 보여주는 그런 드라마는 아니다. 대신 가해자와 피해자 그리고 방관자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문동은 이라는 인물과 그의 복수의 시선을 통해 하나하나 촘촘히 그려나간다. 한 사람의 삶 전체를 망가뜨렸던 가해자들이고, 또 현재도 여전히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저들은 부자라는 이유로 명품에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호화로운 삶 속에서 살아간다. 꿈은 없는 자들이 꾸는 거라며 자신의 꿈은 그저 ‘현모양처’라고 말했던 박연진은 잘 나가는 건설사 대표 하도영(정성일)과 가정을 꾸려 어린 딸과 단란하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문동은이 그들의 삶 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반짝반짝 빛나는 것처럼 보이던 저들의 삶의 추악한 실체들이 까발려지기 시작한다. 직접적으로 가해자를 처단하는 그런 방식이 아니라 그들의 욕망이 서로를 파탄으로 만들고 또 그 과정에서 실체가 공개됨으로써 ‘사회적 죽음’을 만들어내려는 문동은의 복수극은 어딘가 다르다. 그건 이 사회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갑과 을로 나뉘어 돌아가는 두 세계의 폭력을 드러내는 일이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을 때는 가진 자가 못 가진 자 위에 군림해 갖은 폭력을 일삼지만, 못 가진 자가 복수를 계획할 때는 상황이 정반대가 된다. 가진 게 없어 잃을 것도 없는 문동은이 모든 걸 다 가지고 있는 박연진을 압도할 수 있는 이유다. 게다가 문동은은 살려고 복수하는 것이 아니다. 같이 죽고 싶은 것이다. “우리 천천히 말라죽어 보자. 연진아. 나 지금 너무 신나.”

 

<더 글로리>라는 복수극은 처절하고 자극적이지만 김은숙 작가의 은유적 설정들이나 대사들은 그 복수극에 울림을 만들어낸다. 예를 들어 건축가가 꿈이었던 문동은이 복수를 시작하면서 이를 바둑에 비유하는 장면이 그렇다. 바둑은 “자기 집을 잘 지으면서 남의 집을 부수면서 서서히 조여 들어와야 한다”고 주여정이 설명하자 마치 그것이 자신의 복수방식이라는 듯 “마음에 든다”고 문동은이 말하는 것. 

 

게다가 압권은 그 대사를 거의 웃지 않는 얼굴로 무심하면서도 섬뜩하고 그러면서도 슬픔을 머금은 낮고 처연한 목소리로 연기해내는 송혜교의 연기다. 그 연기가 더해져 자극적인 복수극에 어떤 품격 같은 것이 만들어진다. 잊지 않기 위해서 웃지 않는다는 이 인물이 그래서 가끔 그를 돕는 강현남(염혜란) 앞에서 웃는 모습을 슬쩍 드러낼 때 그 웃음은 그간 송혜교가 출연했던 그 어떤 멜로보다 더 가슴에 와 닿는다. 

 

최근 들어 학교폭력은 드라마의 주요 소재로 자리했다. 그만큼 이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있다는 이야기다. <더 글로리>는 물론 문동은이 하나하나 저 가해자들을 향해 압박해가는 복수극의 묘미가 담겨 있지만, 그 밑바닥 깊숙이 이 인물로 대변되는 피해자와 약자들의 상처를 들여다보려는 작가의 시선도 느껴진다. 김은숙 작가도 송혜교 배우도 지금껏 보지 못한 새로움을 담고 있지만, 그 새로움이 신선하게 다가오는 이유다. (사진:넷플릭스)

'더 킹', 멜로는 설레지 않지만 세계관은 궁금한 아이러니

 

SBS 금토드라마 <더 킹 : 영원의 군주(이하 더 킹)>은 김은숙 작가의 야심이 엿보이는 기획이다. 평행세계라는 우리에게는 다소 낯선 설정을 가져왔고, 대한제국과 대한민국을 오가는 그 세계관 역시 우리네 드라마에서는 잘 다뤄지지 않았던 것이기 때문이다.

 

두 개의 세계가 있고, 그 세계에 서로 다른 삶을 살아가는 도플갱어가 존재한다는 설정은 그 자체로 흥미롭다. 결국 각각 독립되어 있던 이 두 개의 세계가 만파식적을 통해 서로 넘나들 수 있는 차원의 문이 열리면서 사건이 벌어진다.

 

두 개의 세계를 각각 지켜내려는 이곤(이민호)과 정태을(김고은)이 있는 반면, 두 개의 세계를 교란시켜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버리려는 이림(이정진)이 있다. 이림은 대한제국의 황제 자리를 꿰차려 하다 갑자기 나타난 누군가(정태을의 신분증을 가진)에 의해 저지되고 반쪽으로 갈라진 만파식적을 통해 대한민국을 넘나들게 된다.

 

그가 하려는 일은 분명하다. 대한민국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이들을 유혹해 대한제국에서 권력을 가진 채 살아가는 그들의 도플갱어를 제거한 후 그 자리를 대체시키는 것. 또 정반대로 대한제국의 인물을 데려와 대한민국에 채워 넣음으로써 이 곳에서의 부와 권력을 동시에 차지하려 한다. 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다른 삶을 살아가는 두 세계의 인물들을 유혹해 자기 마음대로 배치하며 자신의 영향력을 넓혀나가려는 일종의 도플갱어 게임이다.

 

이곤은 차원의 문을 넘어 대한민국으로 들어와 정태을과 만나면서 점점 이 곳에 대한제국으로부터 넘어 들어온 자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된다. 정태을을 좋아하는 대한민국 형사인 강신재(김경남) 역시 어떤 이유에선지 대한제국에서 이 편으로 넘어와 성장한 인물이다. 그의 어머니가 도박에 빠져 자신을 탕진하며 사는 건 아마도 강신재와 바꿔치기 된 자신의 친자식의 문제와 무관하지 않을 게다.

 

이림은 대한민국으로 넘어와 제일 먼저 자신과 이곤의 도플갱어를 살해한다. 그의 궁극적인 목표는 이곤마저 살해하고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일 게다. 정태을은 대한제국에 그의 도플갱어인 루나가 살아있다. 정태을이 형사인 반면, 루나가 범죄자라는 상황은 향후 이 두 존재가 만나 어떤 대결구도를 이룰지 자못 궁금해진다.

 

이처럼 <더 킹>은 사실 두 세계의 도플갱어 게임이라는 그 세계관 자체가 꽤 흥미진진한 작품이다. 점점 본격화되어가는 이 게임에 주목하고 몰입한다면 향후 충분히 재미있는 드라마가 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런 좋은 세계관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더 킹>은 좋은 반응을 얻지 못하고 있고, 나아가 시청률도 조금씩 빠지고 있을까.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그건 우리가 이른바 김은숙표 드라마라고 하면 빼놓을 수 없는 '멜로'가 이번 작품에서는 생각만큼 시청자들의 가슴을 설레게 만들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롯한다. 그도 그럴 것이 <더 킹>은 막시무스라는 백마를 타고 이 세계로 넘어와 정태을을 만나는 이곤 황제의 모습을 초반에 담아냈는데, 이런 장면은 시청자들에게 또 '백마 탄 왕자와 신데렐라' 이야기가 아닌가 하는 기시감을 만들어 버렸다.

 

여기에 김고은과 이민호를 캐스팅한 부분 역시 그다지 좋은 선택이 될 수 없었다. 김고은은 여러모로 김은숙 작가의 성공작인 <쓸쓸하고 찬란하신 도깨비>에서의 모습을 자꾸 비교하게 만들었고, 따라서 그 상대로 등장하는 이민호는 <도깨비>에서 김고은의 상대였던 공유와 비교하게 됐다. 이민호가 연기하는 이곤의 황제라는 위치에서 나오는 특유의 어투들은, 아쉽게도 공유가 했던 그 어투처럼 몰입감을 주지 못했다.

 

김은숙 작가 특유의 멜로 대사들도 <더 킹>에서는 생각만큼 강력한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러니 대사 자체에서도 또 이를 소화하는 연기에서도 몰입이 되지 않아 시청자들에게 설렘을 주지 못하는 상황이 만들어졌고, 결국 <도깨비>와 비교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아쉬운 일이지만 이번 <더 킹>에서 김은숙표 멜로는 판타지의 황당할 수 있는 부분조차 몰입하게 만드는 힘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더 킹>은 그 세계관의 흥미로움으로 인해 이런 멜로의 약점들에도 불구하고 향후 전개가 궁금해지는 드라마가 되고 있다. 실제로 멜로만 빼고 보면 <더 킹>의 도플갱어 게임은 마치 잘 짜여진 본격 스릴러처럼 보이는 면이 있다. 아이러니한 결과가 아닐 수 없다. 김은숙 작가하면 먼저 떠오르던 멜로는 설레지 않지만, 대신 그 세계관의 대결이 궁금해진다는 건.(사진: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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