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룡이 나르샤>에서 가장 변화무쌍한 유아인의 이방원

 

SBS <육룡이 나르샤>에서 가장 변화가 많은 인물을 꼽으라면 누가 될까. 단연 이방원(유아인)이다. 아버지 이성계(천호진)가 이인겸(최종원) 앞에 무릎을 꿇는 장면을 본 후, 대의에는 그것을 실행할 힘이 있어야 한다는 걸 뼈저리게 깨달은 이방원은 그렇게 절망적인 성장기를 거친 후 정도전(김명민)의 동굴에서 가슴 떨리는 희망을 찾아낸다. 신조선을 세우려는 그 웅지. 이 시기 이방원의 모습은 비로소 꿈을 찾아낸 자의 설렘으로 가득 했다.

 


'육룡이 나르샤(사진출처:SBS)'

생각을 깊이 하기 보다는 행동이 앞서는 그는 아버지 이성계가 머뭇거리는 일을 저질러버리는 과감한 성격을 보여준다. 어딘지 불안한 청년기의 그는 그러나 홍인방(전노민)에게 붙잡혀 고신을 당할 때는 아버지를 떠올리며 결코 꺾어지지 않겠다고 버텨냄으로써 또 한 차례의 성장을 하게 된다. 그리고 정도전을 스승으로 모시며 뜻을 함께 할 때 그는 탁월한 전략가이자 행동가가 된다.

 

그러던 그가 홀로 서게 되는 것은 정몽주(김의성)를 선죽교에서 살해하면서다. 이 사건으로 육룡은 비로소 조선 건국에 박차를 가하게 되지만 이방원은 아버지 이성계에게도 또 정도전에게도 버림받는 존재가 된다. 사실상 그의 결행에 의해 비롯된 조선 건국에서 그의 자리가 없다는 점은 그가 분노하게 되는 이유다.

 

육룡 중 가장 뛰어난 인물이었던 그가 고립되게 되자 그는 이제 스승이었던 정도전과 대립하게 되고 심지어 아버지 이성계와도 대결하는 인물이 된다. 그 명석했던 인물이 이른바 킬방원으로까지 변모하는 이 일련의 과정이 이토록 드라마틱할 수가 없다. 본래 이방원이라는 역사적 인물이 가진 삶 자체가 그렇다고 해도 그 공은 유아인이라는 배우에게 있을 것이다. 이 변화무쌍한 삶을 제대로 연기로 소화해내지 못했다면 이방원이라는 인물에 이토록 시청자들이 공감할 수 있을까.

 

사실 정몽주를 때려죽이고 나아가 아버지를 거스르며 정도전은 물론이고 형제들까지 모두 죽인 후 비로소 권좌에 오르는 인물이 이방원이다. 결코 시청자들에게 그 공감대를 주기가 쉽지 않은 인물이라는 것. 하지만 드라마의 대본이 그만큼 촘촘히 잘 설계되어 있는 면도 있지만 이를 소화해내는 유아인의 자연스러운 연기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변화해가는 이방원에 대한 공감을 넘어서 심지어 어떤 심리적인 지지까지 하게 만드는 면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

 

이미 <베테랑>이나 <사도> 같은 작품을 통해 한층 성장한 유아인의 연기를 발견했지만 그가 이토록 호흡이 긴 <육룡이 나르샤> 같은 사극에서도 그 드라마의 힘을 계속 추동시킬 만큼 괜찮은 연기자라는 걸 새삼스럽게 확인하게 된다. 그저 동안의 미소년처럼 보이던 그가 어느 순간 분노의 칼을 뽑아 들 때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잔혹해지는 얼굴로 돌변하고 그러면서 또 눈물을 쏟아낼 때면 그 안에 숨겨진 가녀린 속내에 마음 한 구석이 측은해진다.

 

고집스럽게 이타적인 영웅 이성계나 오로지 백성을 위한 조선 건국의 목표에만 매진하는 정도전과 비교해보면 이방원은 1인 다역의 역할이나 마찬가지다. 그 쉽지 않은 연기를 이렇게 잘 소화해내는 유아인에게서 연기자로서의 또 한 번의 성장 또한 읽어내게 된다. 참 괜찮은 배우의 기분좋은 성장이다

<장영실>, 어째서 이 좋은 소재가 이렇게 그려질까

 

KBS 주말사극 <장영실>은 충분히 이 시대에도 의미가 있는 소재다. 장영실(송일국)이란 청춘이 가진 처지가 현실과 맞닿아 있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 천출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특별한 재능이 있어도 출사하지 못하는 처지가 그렇다. 결국 조선을 떠나겠다고까지 마음먹었던 장영실이 아니던가.

 


'장영실(사진출처:KBS)'

그런데 초반 <장영실>의 이런 흥미로운 설정은 어찌 된 일인지 점점 매력이 떨어져간다. 그 흙수저로 태어난 장영실에 대한 공감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던 그를 알아봐주는 세종(김상경)이나 마치 형처럼 그를 허물없이 대해주고 밀어주는 이천(김도현) 같은 인물들이 일찌감치 그를 일으켜 세워주기 때문이다.

 

게다가 심지어 소현옹주(박선영)와 장영실은 신분을 뛰어넘어 연정을 가진 관계로까지 그려진다. 이건 역사에도 나와 있는 이야기가 아니고 현실적으로도 가능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런데도 굳이 이런 멜로 설정까지 집어넣는 건 흙수저로 태어나 가진 게 없었던 장영실을 사실상 모든 걸 다 가진 인물로 느껴지게 만든다.

 

장영실에 대한 찬양에 가까운 이야기는 그가 명나라에 가서 주태강(임동진)의 집에 있는 전설의 물시계 수운의상대를 재현하는 데에도 등장한다. 그는 얘기만 들었지 한 번도 실제 본적이 없는 수운의상대를 척척 재현해낸다. 그런 장영실을 주태강은 경이로운 눈길로 바라본다. 장영실이 조선으로 돌아올 때 주태강은 심지어 조선의 과학이 명나라를 앞지르고 있다는 얘기까지 꺼내놓는다. 제 아무리 드라마라고 해도 이런 식의 극단적인 찬양은 <장영실>이라는 사극에 마치 군대에서 만드는 정훈 영상물 같은 느낌을 덧씌운다. <장영실>은 왜 이 특별한 인물에 대한 현재적인 재해석은 보이지 않고 찬양만 가득할까.

 

이와 상반된 느낌을 주는 작품은 SBS <육룡이 나르샤>. <육룡이 나르샤>에서 정몽주(김의성)와 이방원(유아인)의 이야기는 우리가 역사책에서 배워왔던 것과는 사뭇 다르다. 이 드라마는 이 인물들을 현재의 관점으로 재해석해 놓았다. 정몽주가 그래도 고려를 지키려는 시대에 역행하는 인물처럼 그려진다면 이방원은 신조선이라는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해 모두가 못하는 것들을 실행해 옮기는 인물로 그려진다. 물론 이방원을 완벽한 인물로 그리는 건 아니지만 확연히 현재의 관점이 투영되어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사극이 과거가 아닌 현재를 다룬다는 건 이제 누구나 알고 있는 일이다. 즉 과거의 역사를 소재로 하지만 그 역사를 굳이 지금 현재 들춰본다는 건 그 관점이 현재에 맞춰져 있다는 걸 말해준다. 그렇다면 <장영실>은 어떨까. 장영실이라는 인물을 이 사극은 모든 걸 다 갖춘 과학자로 그려낸다. 그는 천문의 이치를 꿰뚫어보는 인물이면서 동시에 뭐든 척척 만들어내는 기술자이기도 하다. 그에게는 천출이라고 해도 청춘의 그림자가 그리 느껴지지 않는다. 왜 이토록 현재와 호응하지 못하는 걸까.

 

<장영실>이라는 사극이 그 좋은 소재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창조 경제같은 구호로 느껴지는 건 바로 이런 점들 때문이다. <장영실>은 어째서 <육룡이 나르샤>의 이방원 같은 신선한 해석을 하지 못하는 것일까. 심지어 옹주와 사랑하는 비현실적인 이야기까지 집어넣어 도대체 무슨 얘기가 하고 싶은 것일까. 장영실처럼 노력하면 지금의 청춘들도 출사해 성공할 수 있다고? 글쎄. 거기에 호응하는 현재의 청춘들이 몇이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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