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의 여왕’, 김지원은 ‘행복한 왕자’ 같은 변화를 보여줄까

눈물의 여왕

“내가 어렸을 때 <행복한 왕자> 보고 느낀 건 딱 하나였어. ‘하여튼, 집 나가면 개고생이다’. 아니, 왕자 입장에서도 이런 데 살 때가 좋았겠지. 괜히 밖에 나갔다가 볼 꼴, 못 볼 꼴 다 보고, 어? 보석이며 눈알이며 다 남 퍼주고 에휴, 쯧쯧쯧.” tvN 토일드라마 <눈물의 여왕>에서 해인(김지원)은 오스카 와일드가 쓴 동화 <행복한 왕자>에 대해 현우(김수현)에게 그렇게 말한다. 

 

3년 전 너무나 사이가 좋았던 두 사람이 독일 포츠담 상수시 궁전을 찾았을 때의 모습이다. 그 궁전이 바로 그 행복한 왕자가 살던 곳이었다는 현우의 이야기에 해인이 보인 반응이었다. 알다시피 <행복한 왕자>라는 동화는 생전 부유하게 살 때는 몰랐지만 마을 광장 높은 탑 위에 금과 보석으로 치장한 채 서있는 동상이 되어서야 비로소 세상의 가난하고 불쌍한 이들이 많다는 걸 알고는 눈물을 흘리던 왕자의 이야기다. 그 가난한 이들을 위해 제비에게 사파이어로 된 제 눈까지 떼서 나누어주는 이야기. 

 

<눈물의 여왕>이 갑자기 에필로그를 빌어 꺼내놓은 동화 <행복한 왕자> 이야기는, 해인이 현재 마주한 상황과 그로 인해 그가 겪을 변화를 예감하게 만든다. 퀸즈백화점 사장으로 도도하게 세상 위에 군림하며 살아왔던 해인은 갑작스런 희귀병으로 3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은 후 변화를 겪는다. 먼저 로맨틱 코미디 장르에 걸맞게 남편 현우에 대한 감정이 새록새록 피어난다. 부정맥도 아닌데 남편 보고 심장이 떨리고, 어떤 날엔 남편 눈망울을 보면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다가도 어떤 날엔 남편의 넓은 가슴에 안기고 싶어진단다. 

 

물론 이 도도한 여왕이 그런 자신의 감정을 애써 부인하려하고 비서에게 마치 남이야기처럼 하는 장면은 어딘가 설레면서도 빵빵 터지는 코미디로 그려진다. 너무 섹시해보여서 세상에 내놔도 괜찮을까 싶어진다며 마치 남 이야기하듯 하는 해인의 이야기가 설레면서도, “진짜 꼭 병원 가 보라 그러세요. 아픈 거야 그건.”이라는 나비서(윤보미)의 자못 진지한 리액션은 여지없이 그 설렘을 깨고 들어와 웃음을 터트리게 한다. 

 

하지만 이 코미디는 어딘가 진짜 해인에게서 벌어지는 심경의 변화에 대한 예고다. 주치의를 찾은 해인은 자신이 이상하다며 그 증상을 이렇게 말한다. “불쌍한 걸 보면 동정심이 생겨요.” 스스로 “피가 차가운 여자”였다며 그런 적이 없다고 말하는 해인은 자꾸만 “공감이 된다”는 ‘증상(?)’을 이야기한다. 사무실에 든 잡상인 남자에 화를 내다가 그의 아기가 인큐베이터에 있다는 이야기에 짐짓 나비서에게 화를 내는 척 그 아기가 인큐베이터에 있을 때까지만 봐줄 거라며 그 남자를 도와준다. 

 

아픈 엄마가 수술을 해야 하는데 시집 갈 때 쓸 돈이라며 수술을 하지 않으려 한다며 우는 직원의 이야기를 화장실에서 몰래 듣고는 “아픈 거야 고치면 되지 왜 울고 난리”라고 툴툴 대면서도 그 이야기에 공감되어 눈물을 보인다. “제가 원래 안 그랬거든요. 누가 아프거나 말거나 울거나 말거나 아무 상관도 없었는데 왜 자꾸 공감이 돼죠? 남편 보고 설레질 않나? 아무래도 제 뇌가 정상 기능을 잃어가고 있는 것 같거든요?” 주치의에게 해인이 털어놓는 이 말은 그에게서 벌어지고 있는 변화를 잘 보여준다. 

 

게다가 해인은 이제 “안하던 짓”을 해보겠다고 공언한다. 건강하게 오래 살겠다고 남들 다 하는 거 안하고 살았는데 아무 소용이 없었다며 억울하단다. 그래서 하고 싶은 거 이제 하면서 살겠단다. 그건 과연 ‘행복한 왕자’의 삶을 살겠다는 것일까. 경제성이니 효율이니 하면서 1조클럽에 들어가는 것을 목표로 하고 싶은 것들도 안하고 감정 또한 드러내지 않으며 ‘피가 차가운 여자’로 살아왔던 것 대신, 다른 삶을 살아보고 싶단다. 

 

<눈물의 여왕>은 이제 이 드라마의 제목이 어떤 의미인지 꺼내놓고 있다. 그 눈물은 아마도 저 ‘행복한 왕자’가 비로소 동상이 되어 마을을 들여다보고는 알게 됐던 가난하고 불쌍한 이들을 향해 흘리는 것일 테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고, 눈물 따위는 결코 흘릴 것 같지 않았던 해인의 눈물은 그래서 그것이 진정한 ‘행복’이 될 수 있다는 걸 말해준다. 

 

해인의 이런 변화와는 대척점에 서 있는 윤은성(박성훈)이 돈이면 누군가의 은인이자 가족이나 다름 없는 반려견을 죽여도 상관없다 생각하는 감정 없고 공감도 못하는 사이코 패스라는 점은 이 드라마가 하려는 이야기를 분명하게 해준다. 약자들을 향해 눈물을 흘리고 가진 것들을 다 내어주면서 드디어 진짜 행복을 찾아가는 해인과, 더 많은 걸 갖기 위해 감정 없는 사이코 패스처럼 살아가는 윤은성으로 대변되는 자본화된 비정한 세상에 대한 대결구도가 그것이다. 

 

해인은 사랑에 대해 윤은성에게 이렇게 말한다. “행복한 걸 함께하면서 달콤한 말을 해주는 게 아니라 싫어서 죽을 것 같은 걸 함께 견뎌주는 거야. 어디에 도망가지 않고 옆에 있는 거.” 달콤함이 아니라 쓴 걸 함께 견뎌주는 것. 그것이 사랑이고 그걸 실천하는 것이 진정한 행복일 수 있다고 해인은 말하고 있다. 그는 불치병에 걸렸고 시한부 인생 판정을 받았지만 그래서 어떤 의미로 보면 그건 병이 아니라 어쩌면 고쳐지는 중인 거라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눈물의 여왕>은 그래서 이 해인이라는 인물의 감정 변화를 기분좋게 꺼내놓는 과정이 작품의 메시지나 다름 없는 관건인 드라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 역할을 맡은 김지원이라는 배우의 연기는 대체불가라는 생각이 든다.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것만 같은 도도한 모습에서 마치 그 얼음이 녹아 눈물처럼 흘러내리는 그 변화를 이토록 설득력 있게 연기해내고 있으니. 그가 앞으로 할 ‘안하던 짓’을 계속 기대하게 만들 정도로. (사진:tvN)

‘눈물의 여왕’, 김수현의 시월드와 신데렐라 뒤집기는 왜 빵빵 터질까

눈물의 여왕

“나 그 때 왜 그랬지? 왜 귀여웠지? 왜 막 귀엽고 필살기 쓰고 홍애인 설레게 만들고 그래 가지고 내 팔자를 내가... 꼬았지? 안 귀여웠으면 이런 결혼도 안 했을텐데, 내가.” 술에 취한 백현우(김수현)는 울면서 절친 김양기(문태유)에게 신세한탄을 한다. 그런데 그건 자기 자랑인지 신세한탄인지 알 수 없는 말들이다. 이 웃픈 상황이 웃음을 만든다. 백현우 본인은 진심으로 펑펑 울며 속내를 토로하고 있지만 보는 이들에게 그 장면은 빵빵 터지는 웃음을 만든다. 

 

tvN 토일드라마 <눈물의 여왕>은 박지은 작가 특유의 코미디로 문을 열었다. 그 코미디는 고정관념을 뒤집는 아이러니로 펼쳐진다. 그많은 신데렐라 스토리들이 그려내곤 했듯이, 흔히들 재벌가와 결혼했다고 하면 인생 역전의 판타지를 떠올릴 테지만, 퀸즈그룹 재벌가의 딸이자 퀸즈백화점 사장인 홍해인(김지원)과 결혼한 백현우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 그 때 왜 자신이 귀여워 홍애인을 설레게 만들어 스스로 팔자를 꼬았는지 한탄을 하고 있으니.

 

<눈물의 여왕>은 재벌가 신데렐라 스토리를 남녀를 뒤집어 놓은 이른바 ‘남데렐라’ 버전으로 꺼내놓은 후, 그렇게 막상 신데렐라가 되어 재벌가의 사위가 됐지만, 판타지와는 전혀 다른 마치 현실 버전의 처월드(시월드의 처가버전)가 열리게 됐다는 기막힌 블랙코미디로 또 한 번 뒤집는다. 이 재벌가 처월드에 빠져버린 남데렐라가 눈물을 흘리며 결혼을 후회하고 이혼까지 결심하는 일련의 과정들은 그래서 그간 우리가 봐왔던 시월드와 신데렐라 이야기를 모두 뒤틀어놓은 지점에서 빵빵 터지는 웃음을 만든다. 

 

“나만 보면 돼.” 재벌가 입성이 결코 만만치 않을 거라 여긴 백현우에게 홍해인이 하는 이 말은 그 숱한 왕자님들이 신데렐라들을 재벌가에 들일 때 했던 현실성 없는 이야기들이고, 저녁 9시마다 모여 ‘종례’하듯 대화를 나누고 크리스마스니 생일이니 제사니 하는 걸 함께 가족이 하다보니 ‘내 시간’이 사라진 백현우의 처지 역시 숱은 시월드에 입성했던 며느리들이 겪던 일들이다. 

 

백현우가 일년에 15번이나 차린다는 제사는 어떤가. 옛날 진짜 양반가에서는 남자들이 다 제사준비를 했다며 저마다 빵빵한 전문 이력을 가진 사위들이 제사상을 모두 준비하는 풍경이라니! 그러면서 손끝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는 홍애인의 동생 홍수철(곽동연) 같은 인물은 시월드에 시어머니도 보다 더 얄미운 ‘시누이’의 처가 버전처럼 그려진다. 이건 마치 시집살이에 손과 눈에 물 마를 날 없는 며느리의 재벌가 처가 버전 미러링 같다. 그래서 백현우의 신세한탄과 눈물이 주는 빵빵 터지는 웃음 속에서는 블랙코미디적인 통쾌함이 묻어난다. 

 

이 블랙코미디에는 박지은 작가 특유의 디테일들이 채워져 있다. 제사상 차림에 하버드에서 케미컬 전공한 사위가 그 전공으로 전이 제대로 익혀졌나를 파악한 후 “뒤집어!”를 외치는 장면이나, 파슨스 디자인 스쿨을 나온 또 다른 사위가 플레이팅을 하는 제삿날 장관(?)을 보며 “재능 낭비”라는 백현우의 툴툴대는 모습이 그렇고, 우울증으로 정신과를 찾은 백현우의 처가살이 신세한탄을 다 듣고 난 후 의사가 도리어 상담이라도 받은 듯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사랑해”라고 고백하는 장명도 그렇다. 평범한 삶이 오히려 재벌가 사위의 삶보다 낫다는 반전과 더불어, 환자가 오히려 의사의 마음을 다독이게 만드는 아이러니까지 그 코미디에는 담겨 있다.

 

재벌가 딸과 결혼한 평범한 남자의 이야기. 그 자체로는 그리 새로울 것 없는 구도지만 성역할을 뒤집고 신데렐라 판타지를 혹독한 처월드 현실로 뒤집어 놓는 것으로 <눈물의 여왕>은 새로운 웃음과 색다른 기대감을 만들었다. 과연 이 처월드로부터 탈피하려는 백현우는 그가 원하는 대로 자신의 삶을 되찾고 사랑 또한 다시 확인할 수 있을까. 펑펑 울면서 빵빵 터지는 웃음을 선사한 김수현의 열연과 더불어, 이 인물이 그려나갈 색다른 관계의 판타지와 웃음에 시청자들의 마음도 빠져들기 시작했다.(사진:tvN)

‘나의 해방일지’가 해방시킨 배우들의 무한 매력들

나의 해방일지

김지원 하면 먼저 떠오르던 작품이 <태양의 후예>였다. 윤명주라는 캐릭터는 서대영(진구)과의 애틋한 사랑이야기로 사랑받았고 김지원은 인생캐릭터를 얻었다는 평가를 받은 바 있다. 하지만 이제 김지원의 인생캐릭터는 JTBC 토일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의 염미정으로 경신되지 않을까. “날 추앙해요”라는 처음엔 낯설었지만 이제는 거의 유행어가 된 대사가 한동안 김지원이라는 배우를 따라다닐 것일 테니 말이다. 

 

좋은 작품은 좋은 캐릭터들이 있기 마련이고, 좋은 캐릭터들은 배우들의 매력을 끄집어내기 마련이다. <나의 해방일지>가 그간 숨겨져 있던 배우들의 무한한 매력을 해방시키고 있다. 김지원이 염미정이라는 인생캐릭터로 툭툭 던지는 엉뚱한 말들은 묘하게도 이 배우가 가진 차분하면서도 내면에 뜨거운 용암을 품고 있는 듯한 매력이 뿜어져 나왔다. 

 

<나의 해방일지>에서 배우의 매력을 해방시키는 건 예사롭지 않은 대사들이다. “날 추앙해요”도 그렇지만 염미정이 구씨(손석구)와 함께 밤중에 산길을 오르며 깔리는 내레이션은 너무나 인상적이다. “어려서 교회다닐 때 기도제목 적어내는 게 있었는데 애들이 쓴 거 보고 이런 걸 왜 기도하지? 성적, 원하는 학교, 교우관계 고작 이런 걸 기도한다고? 신한테? 신인데? 난 궁금한 건 하나밖에 없었어. 나 뭐예요? 나 여기 왜 있어요?”

 

염미정과 함께 이른바 ‘추앙커플’로 불리는 구씨도 만만찮다. 아마도 <나의 해방일지>에서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가 아닐까 싶은 이 인물은 대사도 별로 없고 일을 하거나 소주를 마시는 게 대부분인 행동들을 보여준다. 그러다 갑자기 멀리 뛰기 선수처럼 훌쩍 어떤 무한의 경계를 뛰어넘는 모습으로 시청자들의 시선을 확 끌어당기더니, 옆구리에 칼이 들어와도 꿈쩍도 안하는 자신을 염미정이 “쫄게 한다”는 말로 기막힌 추앙의 감정을 드러낸다. 

 

<마더>에서 강렬한 인상으로 등장했던 손석구는 <최고의 이혼>에서 이엘과 호흡을 맞추며(그러고 보니 <나의 해방일지>로도 인연이 이어지고 있다) 독특한 멜로의 분위기를 보여준 바 있다. <멜로가 체질>과 영화 <연애 빠진 로맨스>로 이어진 손석구의 이런 분위기 있는 연기는 <나의 해방일지>에서 드디어 귀결점을 찾은 듯한 느낌이다. 

 

염미정의 언니로 왜 날 아무도 사랑하지 않냐며 시종일관 투덜대지만 어딘가 그래서 귀여운 염기정 캐릭터를 입은 이엘과, 그 염기정과 조금씩 가까워지며 연인이 되어가는 조태훈(이기우) 역할을 연기한 이기우도 마찬가지다. 차였지만 찬 것 같은 기분에 좋아하는 조태훈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염기정이 드디어 조태훈과 연인 관계가 되는 순간은 역시 예사롭지 않은 박해영 작가의 대사로 두 캐릭터가 빛을 발했다. 

 

엉뚱하게도 머리만 밀면 해방될 것 같아 올 겨울엔 ‘아무나’ 사랑하든 머리를 밀든 둘 중 하나는 하자고 결심했다는 염기정에게 조태훈이 던지는 대사가 심쿵 그 자체다. “머리 밀지 마세요. 제가 할게요. 아무나.” 머리 밀지 말라는 대사도 곱씹어보면 너무 웃기고, 아무나라는 표현도 웃기지만 이토록 심쿵한 사랑고백이 있을까 싶다. 이러니 이 배우들까지 반짝반짝 빛나 보이지 않을 수가 없다. 

 

<나의 해방일지>에서 ‘인생캐릭터’를 이야기하며 염창희 역할의 이민기 역시 빼놓을 수 없다. 한없이 조잘조잘 투덜대며 하루하루의 스트레스를 잘근잘근 씹어대는 인물. 그런데 이 인물이 끝없이 던지는 이야기들은 기상천외하고 엉뚱하면서도 이상하게 공감이 간다. 그토록 노래를 불렀던 차, 그것도 5억이나 가는 차를 구씨를 통해 얻어 타게 된 염창희가 그런 경험이 자신을 ‘여유롭게’ 바꿔놓았다고 말하는 대사가 그렇다. 

 

할머니 산소, 동네 저수지 같은 곳을 혼자 그 차를 타고 다녔다는 염창희는 의외로 자랑하러 다닐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은 자신을 우연히 만난 헤어진 여자친구에게 털어 놓는다. “몰랏는데 나 운전할 때 되게 다정해진다. 희한하게 핸들 잡자마자 다정해져. 어려서 사회과부도 보는 거 좋아했거든? 희한하게 그것만 보면 시간 가는 줄 몰라.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도시를 머릿속으로 막 다녀. 춘천도 가고 광주도 가고 부산도 가고 울릉도까지. 꼭 그 때 같애.” 갈망할 때는 투덜대기만 했는데, 막상 하게 되니 여유로워지는 마음. 그걸 ‘다정’이라고 표현하는 대사로 염창희라는 캐릭터가 그걸 입은 이민기라는 배우가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물론 이들 뿐만이 아니다. 삼남매의 동네 친구로 지긋지긋한 도시의 삶을 질깃질깃하게 살아내는 지현아 역할의 전혜진, 염기정의 동창이며 조태훈의 누나인 조경선 역할의 정수영, 염기정 회사의 로또 선물하는 이사로 갈수록 매력을 드러내는 박진우 역할의 김우형, 진짜 그런 곳에서 싱크대를 만들고 있을 것만 같은 염제호 역할의 천호진, 역시 딱 진짜 같은 삼남매 엄마 곽혜숙 역할의 이경성, 미친 존재감을 드러내는 동네 카페 사장 오두환 역할의 한상조, 가끔 찾아오는 초등학교 교사 석정훈 역할의 조민국까지... 배우들이 저마다 빛난다. 작품 하나에 이렇게 많은 인생캐릭터라니... 배우들이 추앙할만한 작품이 아닐 수 없다.(사진:JTBC)

‘나의 해방일지’, 손석구에 대한 추앙이 말해주는 것들

나의 해방일지

“날 추앙해요. 난 한 번도 채워진 적이 없어. 개새끼, 개새끼 내가 만났던 놈들은 다 개새끼. 그러니까 날 추앙해요. 가득 채워지게. 조금 있으면 겨울이에요. 겨울이 오면 살아있는 건 아무 것도 없어요. 그렇게 앉아서 보고 있을 것도 없어요. 공장에 일도 없고 낮부터 마시면서 쓰레기 같은 기분 견디는 거 지옥 같을 거예요. 당신은 어떤 일이든 해야 되요. 난 한 번은 채워지고 싶어. 그러니까 날 추앙해요. 사랑으론 안돼. 추앙해요.”

 

JTBC 토일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미정(김지원)은 구씨(손석구)에게 뜬금없이 ‘추앙’이라는 단어를 쓴다. 일상적으로 쓰이지 않는 말. 그래서 시청자들은 그 대사가 너무 현실과 동떨어진 붕뜬 느낌을 준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2회 말미에 ‘추앙’이라는 대사가 나온 후 2주가 지나 5회 정도에 이르자 이 대사는 어딘가 유행어처럼 될 조짐을 보인다. 적어도 “날 추앙해요”라는 말 한 마디로 <나의 해방일지>를 보는 사람과 보지 않는 사람을 쉽게 구분할 정도다. 

 

추앙이라는 단어는 미정이 뱉어 놓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단어는 구씨를 떠올리게 만든다. 사전으로 추앙이라는 단어가 ‘높이 받들어 우러러 봄’이라는 뜻을 찾아보는 구씨. 그리고 뜬금없이 미정에게 “확실해? 봄이 오면 다른 사람 돼있는 거? 추앙하다 보면 다른 사람 돼있을 거라며?”하고 툭 던지는 말이나, “하기로 한 건가?”하고 미정이 묻자 “했잖아. 아까 낮에.”라며 바람에 날아간 모자를 갖다 주려 넓이 뛰기 선수처럼 하늘로 날아올랐던 일을 말하는 구씨. 

 

<나의 해방일지>에서 구씨라는 캐릭터는 독보적이다. 그 어떤 드라마에서도 보지 못했던 인물이고 그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 말투, 말까지 예사롭지 않다. 누군가 던지는 질문에 답변을 하지 않아 답답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그렇게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이가 갑자기 온몸으로 보이는 ‘추앙의 행위’는 그 답답함을 일거에 날려 보낼 만큼 더 강력한 힘으로 터져 나온다. 

 

미정네 집 밭일과 공장일을 도와 주급을 받으며 살아가고, 멀리 걸어 나가야 있는 마트에서 결국은 술이 모자라 또 나가야 할 걸 알면서도 꼭 두 병씩만 사서 집에 돌아오는 사람. 그리고 홀로 평상에 앉아 산 저편을 바라보며 소주를 마시고, 비바람이 몰아쳐도 그러려니 멍하니 그 비를 맞고 있는 사람. 이상하게도 마음이 측은해지고 ‘추앙’ 같은 비일상적인 단어도 막 쓰고 싶게 만드는 그런 사람이 구씨다. 

 

도대체 이 미스테리한 인물의 정체는 뭘까. 왜 박해영 작가는 이런 인물을 미정네 집 근처에 포진해 놓은 걸까. 미정을 추앙하는 몸짓으로 웅크렸던 날개를 펴고 날았던 일 때문에 창희(이민기)는 하루 종일 구씨 이야기를 한다. “오늘 날 진짜 뜨거웠거든? 머릿 가죽 다 벗겨지는 줄 알았거든? 인간 염창희 이렇게 고추 따다 뒤지는구나. 고추는 뭐고, 나는 뭐고, 태양은 뭔가, 정신이 오락가락하는데 구씨 뛰는 거 보자마자 그냥 정신이 번쩍 드는데...”

 

창희가 추앙하기 시작한 구씨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어서 이런 작은 변두리 마을에 자신을 가둬둔 채 살아가고 있는 걸까. 아직 그 정체가 밝혀지진 않았지만 구씨라는 인물 때문에 이 변두리 마을과 서울을 오가며 매일 가짜 행복과 가짜 위안에 지쳐가며 ‘채워진 적 없는’ 미정과 창희가 조금씩 변화해간다. 미정은 대뜸 구씨에게 “날 추앙해요”라는 말을 꺼내기도 했고, 비 오고 천둥치는 날 그가 걱정되어 그를 향해 달려가기도 했다. 창희는 구씨의 비상으로 무력하기만 했던 삶에 작은 활기를 찾아내고, 집을 찾아온 친구들에게 침이 마르도록 구씨 이야기를 쏟아낸다. 그 눈빛이 반짝반짝하다. 

 

구씨라는 인물은 그래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멈춰서 있음으로써 그와 관계하는 인물들을 반추해내는 그런 존재처럼 보인다. 미정이 구씨에게 “날 추앙해요”라고 말하며 겨울이 오기 전 “어떤 일이든 해야 되고” 한 번은 “채워져야”한다고 말한 건 그래서 마치 자신이 자신에게 하는 말처럼 들린다. 그건 친구들에게 구씨 추앙을 늘어놓는 창희도 마찬가지다. 그는 진짜 멋지고 싶다. 멋짐을 드러내려 애쓰는 게 아니라 그냥 진짜 멋진 그런 삶을 꿈꾸는 것. 

 

물론 그건 구씨의 실체가 아니다. 구씨는 결국 변두리 마을로 숨어들어 스스로를 감옥에 가둬놓은 알코올중독자일 수 있으니 말이다. 방 한 가득 채워진 빈 술병이 그걸 말해주고, 어쩌다 뜨거운 물을 발에 쏟아 다쳤어도 별 고통도 호소하지 않는 모습이 그렇다. 오죽 무료하면 마트에 갔을 때 네 병을 사면 한 번만 가도 될 그 길을 굳이 두 병씩 나눠 사서 또 걷겠는가. 그는 마치 시간을 죽이고 싶어 안달난 사람처럼 보인다.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은 사람.

 

그런데 그런 구씨에게 미정이 다가가고, 아무 조건 없이 “좋기만 한 사람”으로 구씨를 대하려 하면서 구씨도 변화한다. 주급을 받자 미정에게 문자를 보낸다. ‘돈 생겼는데 혹시 먹고 싶은 거. 나 구씨’라고. 그 추앙의 문자 하나가 미정을 웃게 만든다. 두 사람은 변두리 당미역에서 만나 흔한 돈가스를 별 대화 없이 먹는다. 하지만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던 사람이 보내는 문자 하나와 함께 먹는 식사는 남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흔하게 “언제 한 번 밥 먹자”고 말하는 그런 헛소리도 아니고 매일 의미 없이 보내고 맞장구치는 허망한 문자도 아니다. 온전히 ‘채워진 말이고 문자’일 테니. 

 

그래서 우리는 어쩌면 우리 마음 속 한 구석에 무언가에 소외되거나 상처 입은 채 더 이상 달리거나 날아오르기를 꿈꾸지 않고 날개를 접고 있는 저마다의 ‘구씨’가 있는 지도 모른다. 가짜 위로와 가짜 행복 속에서 허망한 말들과 무의미해 보이는 일상들을 버텨내며 꾹꾹 봉인해 뒀던 구씨. <나의 해방일지>는 그렇게 우리 모두가 갖고 있는 구씨를 찾아내게 하고 추앙하게 함으로써 그 답답한 곳으로부터 해방해주라 말하고 있다. “날 추앙하라”는 말은 그래서 타인에게 던지는 말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하는 말처럼 들린다. 저 거짓 속에서 함부로 대해왔던 스스로를 추앙하라고.(사진: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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