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도>의 정체성은 늘 위기를 기회로 바꾼 것에 있었다

 

<무한도전>이 위기란다. 하긴 위기란 수식어를 하도 달고 다녔던 <무한도전>이라 그런지 그리 낯설게 느껴지지도 않는다. 물론 위기론이라는 말까지 나오게 된 건 최근 몇 가지 악재들이 겹치게 되면서다. 불안장애로 인해 방송중단을 선언한 정형돈은 위기론에 방아쇠 역할을 했다. 다시 5인 체제가 된데다 새로 들어온 광희는 아직 100% 적응이 완료된 상황이 아니다.

 


'무한도전(사진출처:MBC)'

게다가 최근 박명수의 웃음사냥꾼웃음사망꾼이라는 노잼이 된 데에 대한 불안감도 위기론 속에는 뒤섞여 있다. 10% 초반대로 다시 떨어진 시청률. 여기에 방송 복귀한 노홍철이 <무한도전>에 합류할 것인가에 대한 추측에 대해 찬반이 나뉘어있다는 점도 <무한도전>으로서는 부담을 갖게 되는 요인 중 하나다.

 

하지만 이 모든 위기의 징후들에도 불구하고 <무한도전>이 위기라고 여겨지지 않는 건 왜일까. 가장 큰 건 김태호 PD라는 존재다. 출연자들이 계속 바뀌거나 이탈하는 상황이 위기론을 들고 나오게 만드는 요인으로 지목되지만 사실 최근의 예능 프로그램들은 출연자들이 아닌 그걸 만드는 PD에 의해 좌지우지된다고 말할 수 있다.

 

심지어 유재석이라고 해도 어떤 제작자와 프로그램을 만나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확연히 달라진다. <삼시세끼> 같은 프로그램의 성공 지분은 이서진이나 옥택연보다 나영석 PD가 더 많다. <삼시세끼>를 나영석 PD가 아닌 다른 PD가 만든다면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다. <무한도전>에서 우리는 항상 전면에 나와 있는 출연자들을 보고 있지만 사실 그 뒤에 서 있는 김태호 PD의 지분을 무시할 수 없다.

 

출연자들의 무한도전은 이미 김태호 PD무한도전으로 바뀐 지 오래다. 김태호 PD가 새로운 형식 도전을 쉬지 않고 해왔기 때문에 이미 최고의 위치에 선 출연자들도 계속 <무한도전>에서 거듭날 수 있었다. 만일 <무한도전>에 진짜 위기가 생긴다면 그건 김태호 PD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일 것이다. 몇몇 출연자들의 문제가 아니고.

 

5인 체제는 이미 식스맨 프로젝트를 통해서 봤듯이 오히려 위기가 아니라 기회다. 당시 5인 체제라는 불안감이 식스맨 프로젝트라는 대어를 낚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식스맨 프로젝트는 이미 광희가 식스맨이 됐다고 해서 시효가 끝난 건 아니다. 당시에 후보자들로 올랐던 식스맨들은 사실상 <무한도전>의 객원 MC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필요할 때면 언제든 출격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5인 체제의 나머지 빈 자리는 오히려 <무한도전> 시스템을 자극해줄 수 있는 요소이기도 하다. 너무 익숙해져 변수가 사라져버린 6인 체제보다는 한 자리의 변수를 남겨놓음으로써 새로운 관계의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고정으로 6인을 채우려하기보다는 그 한 자리를 매회 프로젝트별로 필요할 때마다 새로운 인물로 채워 넣어준다면 그건 신선한 느낌을 줄 수도 있다.

 

박명수의 이른바 웃음사망꾼이나 웃음장례식<무한도전>식의 위기 대처 능력을 여실히 보여준 아이템이라고 볼 수 있다. 과거 <무한도전> 망작의 상징처럼 거론됐던 좀비 특집을 생각해보라. 너무 짧은 시간에 실패로 끝나버린 그 도전을 김태호 PD는 앞뒤에 상황극적 요소들을 덧붙여 실패 과정 자체를 하나의 웃음의 요소로 바꿔주었다. 박명수의 웃음사냥꾼도 그 노잼 아이템을 앞뒤 웃음장례식이라는 상황극을 더함으로써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어낸 것이다.

 

시청률은 <무한도전>의 위기론이 나왔던 가장 많은 요인 중 하나지만 사실 <무한도전>은 아이템에 따라 시청률 등락이 가장 다이내믹하게 나오는 프로그램이다. 일정한 시청률을 유지하는 것보다는 늘 새로운 도전을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이 <무한도전>의 정체성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즉 시청률보다 중요한 건 <무한도전>이 계속 도전을 하고 있느냐 하는 점일 게다.

 

<무한도전>이 위기라고? 글쎄 상황이 좋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위기는 아니다. 아니 오히려 위기를 기회로 바꿔온 과정이 <무한도전>이라는 프로그램의 정체성이기도 하다. 김태호 PD는 성공과 실패에 대해 성공하면 그걸로 좋은 것이고 실패하면 또 한 번의 도전할 기회를 얻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 말은 결과가 아닌 과정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이고, 사실상 될 때까지 도전하겠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그래서 무한도전인 것이다.



<무도>와 <런닝맨>, 게임 예능의 딜레마와 해법

 

<무한도전> 뱀파이어헌터 특집은 호평과 혹평을 동시에 남겼다. 새벽에 모여 뱀파이어를 잡는 미션이 부여되지만, 이미 그들 중 뱀파이어가 된 정형돈과 그에게 물려 역시 뱀파이어가 된 유재석이 있어 팽팽한 심리전이 만들어졌다. 뱀파이어인 정형돈과 유재석이 탄 차에 길이 올라타면서 그 심리전은 더 흥미진진해졌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기존에 갖고 있던 <무한도전> 멤버들의 캐릭터 때문에 상황이 작위적으로 흘러가는 단점도 드러났다.

 

'무한도전'(사진출처:MBC)

어쨌든 캐릭터 쇼이기 때문에 그런 단점조차 쇼의 일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부분에는 <무한도전>이 게임 쇼를 할 때 나타나는 일종의 딜레마가 숨어 있다. 게임이라는 것은 그 방식이 익숙해지면 지루하거나 식상해지기 마련이다. 따라서 늘 낯선 형식을 시도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낯설다는 것 역시 보는 이들을 불편하게 만들기는 마찬가지다. 어느 정도 초반부를 몰입해서 들여다봐야 후반부에서 더 강한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이 초반부의 낯설음을 견디게 해주는 것은 결국 캐릭터다. 게임의 미션은 달라져도 <무한도전> 멤버들의 캐릭터는 익숙하기 때문에 시청자들은 이 캐릭터에 집중하면서 서서히 미션을 이해해나가게 된다. 하지만 여기에는 하나의 전제도 필요하다. 그것은 시청자들이 <무한도전>을 계속 보면서 그 캐릭터들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저 어느 날 무심코 돌려 <무한도전>을 보게 된 시청자라면 이 초반부의 낯설음이 어떤 장벽처럼 여겨질 수 있다.

 

이것은 <런닝맨>도 마찬가지다. <런닝맨> 환생 특집은 그런 면에서 이번 <무한도전> 뱀파이어헌터 특집과 유사한 면을 보인다. <런닝맨> 환생 특집은 초반부에 이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 것인가를 전혀 가늠할 수 없었다. 그래서 80년 전의 시청에서 벌어지는 미션은 다소 지루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미션이 일단락되고 80년 후의 다른 모습으로 환생한 런닝맨들의 이야기는 흥미로움 그 자체였다. 누가 누구로 환생했는가를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과거의 인연이 현재의 환생과 미션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실로 기발한 발상이었다.

 

하지만 이 흥미롭고도 놀라운 미션을 보여주는 <런닝맨>에서도 <무한도전>과 똑같은 딜레마가 생긴다. 즉 초반부의 설정이 다소 낯설고 따라서 지루하게까지 여겨질 수 있다는 점이다. 특히 이번 미션의 경우 80년 전의 상황 자체가 이 이야기의 전제가 되기 때문에 도입부가 너무 길게 느껴지는 단점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어느 정도 익숙해져야 묘미를 느낄 수 있는 게임 예능이 TV라는 조금만 느슨해져도 순식간에 채널이 돌아가 버리는 매체와 부딪쳐 생겨나는 간극이다.

 

<무한도전>은 물론 늘 게임쇼를 하지는 않기 때문에 이런 면에서 <런닝맨>보다는 자유로운 편이다. 하지만 <런닝맨>은 다르다. 아예 게임 버라이어티를 기치로 내세우고 있기 때문에, 매번 새롭고 낯선 게임을 할 것인가 아니면 이미 익숙해진 게임을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생길 수밖에 없다. 지금껏 한 번도 시도된 적이 없었던 초능력자 미션이나 추리형식을 넣은 셜록 홈즈 미션 같은 독특한 서사의 게임은 <런닝맨>의 팬들을 열광시킨다. 하지만 새롭게 유입된 시청자들에게는 그 형식이 낯설다 못해 어렵게 여겨질 수 있는 단점도 있다.

 

최근 <런닝맨>은 한동안 그다지 복잡하지 않은 단순한 게임 미션을 반복해왔다. 배경을 달리하지만 그저 일대일 혹은 팀 대결을 통해 승자를 가르는 단순한 게임들이었다. 그간 그토록 많이 나왔던 스파이 미션이나 배신 이야기는 한 동안 잘 보이지 않았다. 거기에는 위에서 언급한 게임 예능이 가진 딜레마에 대한 제작진의 고민이 깔려 있다. 마치 영화 같은 <런닝맨> 특유의 게임 미션이 한동안 나오지 않았던 것은 그것을 고민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보편적인 시청층을 배려하려는 제작진의 고민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런닝맨> 환생 특집은 최근 한 동안 시도되지 않았던 새로운 게임 형식에 대한 갈증을 풀어주기에 충분했다. 1938년의 시청과 2013년의 시청이라는 시공간을 뛰어넘는 서사는 거기에 환생이라는 장치를 넣어(이름표만으로 이 장치가 가능하다는 것이 놀랍다) 훨씬 풍부한 이야기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예능이 아니라 마치 영화 같은 <런닝맨>의 진면목이 이번 특집으로 다시 드러난 셈이다.

 

물론 이런 시도는 시청률에는 불리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시청률을 고민하는 방송사의 중역들에게는 난감한 일이다. 엄청난 화제성에도 불구하고 <무한도전>과 <런닝맨>의 시청률이 15%에 머물러 있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언젠가 <무한도전>의 김태호 PD나 <런닝맨>의 조효진 PD는 이 답보상태의 시청률에 만족한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이 말은 그저 반복적인 미션에 자극을 붙여 시청률을 높이기보다는 그래도 새로운 도전을 하는데 소홀하지 않겠다는 자기 다짐처럼 들린다. 그리고 그런 다짐은 두 예능 프로에 대해 대중들이 보내는 절대적인 지지의 이유가 될 것이다.

<무도> 외주화 검토 후폭풍이 말해주는 것

 

공식적인 발표도 아니다. 아마도 회의석상에서 잠깐 나온 얘기였을 것이다. 하지만 MBC 김재철 사장이 <무한도전>을 외주화하는 것을 검토할 수 있다는 얘기가 흘러나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대중들은 공분했다. 외주화를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무한도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무려 19주째 결방을 참으며 파업에 들어간 <무한도전>을 지지하는 대중들의 그 마음. 그 마음이 간단히 무시되었기 때문이다.

 

 

'무한도전'(사진출처:MBC)

사실 <무한도전>의 외주화는 현실성이 거의 없다. 물론 물리적으로는 가능하다. 김태호 PD 대신 대체인력을 투입하고, 아마도 김태호 PD가 없는 <무한도전>에 참여하지 않을 MC들을 역시 대체인력으로 채우고 대충 도전이랍시고 흉내 내서 무늬만 <무한도전>으로 꾸려서 방영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그게 어디 <무한도전>인가. 그건 아무 것도 아닌 프로그램일 뿐이다.

 

이것은 그간 <무한도전>이 어떻게 성장해왔는가를 생각해보면 간단히 이해되는 일이다. <무한도전>은 대중들과 함께 커왔다. MC들도 <무한도전>을 통해 성장했고, 프로그램도 같은 성장곡선을 그렸다. '대한민국 평균 이하'였던 그들은 이제 자타가 공인하는 국내의 최고 연예인들이 되었다.

 

그만한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능이라는 틀을 깨고 나와 끝없이 이어진 도전들. 단 몇 분 간의 실력을 보이기 위해 엄청나게 해온 보이지 않는 노력과 준비들. 그들은 이 프로그램이 아니었다면 전혀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댄스 스포츠를 했고 봅슬레이를 했으며 심지어 프로레슬링을 했다. 때론 다치기도 하고 너무 힘겨워 눈물이 쏟아지면서도 애써 웃으며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왜? 그것이 시청자들과의 약속이기 때문이었다. 시청자들은 도전함으로써 조금씩 성장해가는 그들을 보며 위안을 받았다. 따라서 그들에 대한 지지는 스스로에 대한 지지이기도 했다. 도전하면 반드시 성공하지는 못하더라도 그만한 보상을 받는다는 것. 적어도 그 진심은 전해진다는 전언. <무한도전>의 도전정신은 어찌 보면 그저 포기하며 살아갈 수도 있었던 대중들을 각성시킨 면도 적지 않다.

 

<무한도전>이 걸어온 이 길은 어쩌면 MBC가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기 위해 걸어왔던 길과도 다르지 않다. 갖은 외압 속에서도 꿋꿋이 할 말을 하는 MBC의 도전정신에 대해 많은 대중들이 지지했고 그래서 MBC는 성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작금의 MBC를 보라. 과연 대중들이 지지할 수 있을 만큼 제대로 된 길을 걸어가고 있는가. 외주로 대충 채워지고 있는 프로그램들에 대해 대중들은 지지를 거두고 있다. <무한도전> 외주화에 대한 생각은 MBC가 현재 걷고 있는 길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무한도전>은 따라서 일개 프로그램 하나가 아니라, 대중들과의 약속이고 대중들이 함께 참여하고 움직이는 유기체 같은 존재다. <무한도전>이 뭔가 도전하면, 대중들은 거기에 맞춰 호응해준다. 심지어 제작진들이 의도하지 않았던 의미조차 예리한 대중들은 발견하고 부여하며, 프로그램은 그것들을 모두 끌어안는 열린 자세를 유지한다. 이 대중과의 공조는 <무한도전>이 프로그램 그 이상인 이유다.

 

<무한도전>은 방송사가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프로그램이 아니다. 적어도 그 방송사가 대중들과의 공감을 생각하고 있다면 그래서도 안 된다. 그리고 이것은 사실 <무한도전>만의 일이 아니다. 그 어떤 프로그램이라도 방송사가 대중들을 무시하고 휘두르기 시작한다면 그 방송사는 존재 의미를 잃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무한도전>의 파업에 대한 대중들의 지지는 그래서 거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대중들이 MBC의 파업을 생각하는 것과 맞닿아 있다.

 

<무한도전>에 대한 외주화 발언만으로도 일파만파의 공분이 일어나는 것은, 작금의 MBC를 바라보는 대중들의 정서가 무엇인가를 잘 말해준다. 대중들의 지지가 없는 <무한도전>이 <무한도전>이 아니듯이, 대중들의 공감 없는 방송사도 방송사로서의 기능을 하기 어려울 것이다. <무한도전> 외주화 발언의 후폭풍은 현재 외주화되고 있는 MBC 프로그램에 대한 대중들의 정서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 되고 있다.


만들 필요 없다, 그저 한 부분을 떼어내 보여줘라

'무한도전'(사진출처:MBC)

김태호 PD는 ‘만들어진 것’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을 갖고 있다. 그 ‘만들어진 것’은 기성관념일 수도 있고, 일상적인 관계일 수도 있으며, 사회적인 통념일 수도 있다. 물론 예능 프로그램으로 돌아오면 그것은 기성형식이나 상투적인 주제의식 같은 것이 된다. 김태호 PD가 ‘무한도전’을 통해 매번 만들어내는 웃음의 소재들과 형식들이 다른 것은 다분히 이런 성향 덕분이다. 물론 그 역시 어쩔 수 없이 대중성을 확보해야 하는 방송 PD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대중성을 확보하는 방식은 여타의 예능 PD와는 방향성이 다르다.

보편성의 웃음을 추구함으로써 대중성을 확보할 수밖에 없는, 그래서 시청률로 대변되는 대중들의 반응을 기웃거릴 수밖에 없는 방송 예능의 한계 속에서도 그는 대중을 따라가기보다는 대중을 이끄는 방식을 선택했다. ‘무한도전’은 그래서 따라온 대중들에게는 그 능동성에 걸맞는 달콤하기 그지없는 웃음을 선사하지만, 따라오기만을 원하는 대중들에게는 외계어처럼 들리기도 한다. 20% 안팎의 시청률은 어쩌면 그래서 김태호 PD의 적절한 선택인 셈이다. 그에게 지나치게 대중적인 것은 ‘만들어진 것’을 그저 잘 따라한 증거가 되고, 지나치게 무관심한 것은 자신이 정한 방향성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걸 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중간 어디 즈음에 김태호 PD는 자신이 서야할 예능의 방점을 찍는다.

이것은 김태호 PD가 언론을 상대하는 방식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만큼 언론의 인터뷰를 기피하는 인물도 없다. 그 이유를 들어보면 “자신의 뜻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언론에 노출되곤 한다는 것이다. 즉 자신이 하려는 얘기는 A인데, 언론은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것만 골라 B를 보여준다는 얘기다. 그래서 어찌 어찌 해 어렵게 김태호 PD를 만난다고 해도 그 인터뷰는 기자와 PD 사이의 좀 더 편안한 사적 관계를 만들어준다기보다는 오히려 팽팽한 거리감과 긴장감을 만들어내곤 한다.

이런 김태호 PD도 단박에 반하는 인물이 있다. 무언가 ‘만들어진 것’ 바깥에서 놀라운 도전정신으로 부딪치는 인물들이다. 이것은 아마도 ‘무한도전’이라는 프로그램을 하면서 생겨난 경향일 것이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고 제대로 된 경기장 하나 없지만 묵묵히 도전정신을 보여준 봅슬레이팀이 그렇고, 퉁퉁 부운 얼굴이 가장 아름다운 얼굴이라는 것을 보여준 여성 복싱선수가 그러하다. 김태호 PD의 페르소나, 유재석은 말할 것도 없다. 어떠한 미션을 줘도 성실함과 무모할 정도의 도전정신을 발휘하는 유재석이 없었다면 김태호 PD의 ‘무한도전’이라는 세계는 만들어지지 못했을 테니.

김태호 PD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며 장기하의 새 음반에 적극적인 애정공세를 펼친 이유 역시 마찬가지다. 서해안 고속도로 가요제에 참가를 권유했지만 자신의 새 음반이 성공할 자신감이 있다며 그 성공이 ‘무한도전’ 덕이라는 얘기를 듣고 싶지 않아 고사한 장기하의 무모할 정도의 도전정신을 그가 높게 산 것이다. 이 에피소드는 기성사회가 갖는 통상적인 관계의 틀 바깥으로 탈주한다는 점에서 김태호 PD의 성향과 그대로 만난다.

김태호 PD의 이런 ‘만들어진 것’에 대한 거부는 ‘무한도전’이 왜 예술 같은 예능이 되었는가를 잘 말해준다. 사실 ‘무한도전’이 예능의 레전드가 된 것은, 그 하나 하나가 도전이었던 과정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많은 이들이 ‘무한도전’을 리얼 버라이어티라는 새로운 형식의 선구자 정도로 인식하지만, 사실 처음부터 그렇게 거창한 것은 아니었다. 김태호 PD의 말대로 표현하자면 “‘무한도전’이 거둔 가장 큰 공적은 예능 프로그램에 촬영 카메라와 마이크를 여러 대로 늘린 것”이다. 삽과 포크레인이 대결을 벌이던 ‘무모한 도전’이 뭔가 스펙타클하기는 해도 ‘깨알 같은 재미’를 선사하지 못한 것은 그 광경을 포착하는 카메라와 마이크가 몇 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장 방송국에 카메라를 더 달라고 요청했지만 요지부동. 김태호 PD는 결국 외주 카메라를 직접 모았다고 한다. 그들이 지금의 많은 리얼 버라이어티쇼의 바탕이 된 셈이다.

카메라가 늘어나자 비로소 각각의 인물들의 개성 넘치는 이야기들이 담기기 시작했고, 쌓여진 비디오테이프만큼 후반작업에 들어가는 공도 커지게 되었다. 깨알 같은 재미를 북돋워주는 자막이 붙기 시작했고 각각의 캐릭터는 좀 더 공고해졌으며, 그 캐릭터들을 각각 따라다니는 카메라로 인해 다양한 미션이 가능해졌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 많아진 카메라로 인해 캐릭터들 간의 중심과 변경의 벽이 무너진 것이다. 물론 메인 MC로서 1인자 유재석이 서 있지만 그만큼 비슷한 비중의 다른 인물들도 이제 수평적인 위치에서 멘트를 쏟아낸다. 즉 카메라를 좀 더 늘리겠다는 그 새로운 도전의 결과는 우리에게 이미 ‘만들어진 어떤 것’이 아닌 전혀 다른 세계를 가져왔던 셈이다.

그러나 김태호 PD의 ‘무한도전’이 예능의 벽을 넘어서 예술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열려진 작품세계(?)’ 덕분이다. 이미 ‘정해진 어떤 틀’ 속에서 움직이던 예능이 이제 미션 하나를 던져놓고 보는 하나의 실험이 되면서, 그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과정들은 독특한 흐름을 만들어냈다. 그 미션을 수행하는 인물들은 저마다 자신들의 일상적인 경험들과 습관들을 이 미션 속으로 끌어옴으로써 상황에 상징성을 부여한다. 스키 점프대 꼭대기까지 전원이 오르기 위해 벌이는 미션은 가상적이고 게임적이지만, 그것이 그려내는 이야기가 현실을 상기시키는 것은 그 때문이다. 게다가 이런 미션 과정에 가타부타 없는 설명은 대중들의 좀 더 적극적인 개입을 끌어낸다. 그래서 대중들에 의해 이런 저런 의미로 해석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무한도전’이라는 예능은 비로소 예술이 되어간다.

웃음은 과연 예술이 될 수 있을까. 이 질문의 답은 명쾌하다. 물론 중세시대를 거치면서 비극만이 예술인 것처럼 오인되기도 했지만, 이미 수많은 희극들이 우리에게 예술로 자리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웃음의 방송버전인 예능은 과연 예술이 될 수 있을까. 여기에는 의문점이 있다. 이것은 웃음이라는 소재 때문이 아니라, 방송이라는 매체 때문이다. 매스미디어로 대변되는 보편성을 따라갈 수밖에 없는 방송이 독창적인 웃음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어찌 보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태호 PD를 본다면 그것이 어렵긴 해도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물론 이 ‘무한도전’ 역시 방송 프로그램으로서의 보편성을 버릴 수 없는 것은 분명하지만, 어떤 경우 그 틀을 넘어 예술의 차원을 언뜻 우리에게 보여줄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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