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누나>에서 <밀회>, <무도>까지 김희애 특급행보의 비결

 

백상예술대상에서 김희애는 단연 화제였다. 유재석이 <무한도전>에서 <밀회>를 패러디했던 물회에 대해 사과를 하며 김영철씨 만나면 꼭 특급칭찬 해달라고 농담을 하자 김희애는 특유의 새침한 포즈로 유재석을 손가락으로 가리켜 좌중을 폭소케 만들었다. 또 시상자로 나선 자리에서 손현주가 칭찬받고 싶다고 하자, 김희애가 볼을 꼬집으며 이건 특급칭찬이야라고 말해 큰 웃음을 주기도 했다. 지금 특급칭찬<밀회>가 종영한 후에도 유행어처럼 회자되고 있다.

 

'무한도전(사진출처:MBC)'

사실 SBS <내 남자의 여자>에서 화영 역할로 파격적인 연기를 선보였던 김희애가 <마이더스>에서 살짝 부진함을 보이다가 JTBC <아내의 자격>으로 다시 주목받고 올해 <밀회>로 다시 최고의 배우임을 증명하는 그 과정은 실로 드라마틱하다. 무려 스무 살 차이의 연하남과 사랑에 빠지는 연기는 결코 쉬울 수 없는 일이다. 자칫 잘못하면 비난 받을 소지도 크다. 하지만 김희애는 그 논란의 소지조차 연기력으로 불식시켰다.

 

최근 들어 그녀의 행보는 독특하다. 물론 안판석 감독과의 인연으로 <아내의 자격>에 이어 <밀회>까지 JTBC 드라마를 하게 된 것이지만 지상파 바깥에서 오히려 이런 화제를 끌고 온다는 건 이례적인 일이다. 게다가 처음으로 선택한 예능 역시 tvN이라는 케이블이었다. <꽃보다 누나>는 김희애라는 배우의 또 다른 인간적인 결을 보여주면서 대중들의 반응을 이끌어냈다.

 

<꽃보다 누나>에서 김희애는 여배우로서, 선배로서, 후배로서 또 한 가정의 아내이자 엄마로서의 따뜻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위기에 처한(?) 이승기를 뒤에서 살짝 도와주는 모습은 센스 있는 누나의 모습과 마치 아이를 대하는 엄마의 모습이 비춰졌다. 어떤 상황에서도 우아함을 유지하고 때로는 털털하고 살갑다가도 감수성 많은 소녀의 모습을 보여주는 그녀는 역시 다양한 결을 내면에 갖고 있는 여배우였다.

 

케이블의 예능 프로그램과 종편의 드라마를 통해 그녀는 드라마와 예능 양 분야에서 모두 특급대우를 받는 존재가 되었다. 패러디 물회가 화제가 되면서 <무한도전>과 맺게 된 인연은 백상예술대상을 거쳐 <무한도전> 출연으로까지 이어졌다. “특급칭찬이야라는 유행어가 <밀회>에서는 하나의 진지한 대사였다가 예능으로 와서는 웃음을 주는 패러디가 된 것은 김희애의 드라마와 예능을 넘나드는 여유를 엿보게 한다.

 

이 특별한 여배우는 이미지를 무너뜨리기 마련인 예능에서조차 우아함을 잃지 않는다. 바로 이 점은 그녀가 예능을 하면서도 예능 이미지로 소비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녀의 정체성은 배우다. 웃음을 줘도 곧바로 제 자리로 돌아올 줄 아는 배우. 그녀의 예능이라는 분야에서조차 보이는 편안함은 많은 걸 겪어낸 여배우의 여유처럼 읽혀진다.

 

작년 말과 올해 초에 걸쳐 방영되었던 <꽃보다 누나>와 올해 화제를 만든 <밀회>는 그래서 김희애의 연기 인생에서 기억에 날만한 작품으로 기록될 것이다. 작년 말부터 올해까지 특히 케이블과 종편 프로그램의 약진에 한 자리씩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은 그녀의 작품 위주의 특급행보가 틀리지 않은 선택이었다는 걸 말해준다. 이것이 다시 완벽히 제 자리로 돌아와 예능과 드라마 양편에서 주목받는 그녀가 특급 칭찬받는 이유다.

<밀회>, 사랑과 욕망의 완벽한 변주곡

 

너는 어쩌다 나한테 와서 할 일을 다 해줬어. 사랑해줬고, 다 뺏기게 해줬고, 내 의지로는 못 했을 거야. 그래서 고마워. 그냥 떠나도 돼.” 스스로 죗값을 치르러 교도소를 선택한 오혜원(김희애)이 이선재(유아인)에게 건네는 이 말은 <밀회>라는 드라마가 무엇을 그리려 했는지가 드러난다. 그것은 사랑과 욕망의 완벽한 변주곡이었다.

 

'밀회(사진출처:JTBC)'

자기 자신까지도 욕망의 도구로 사용했다는 오혜원의 법정 최후진술 속에는 젊은 날의 순수와 열정과 사랑을 잃어버리고 욕망의 끝단을 달렸던 자의 참회가 들어 있다. 그녀는 피아노에 대한 열정마저 접어버렸고 대신 상류층의 삶에 동화되기 위해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채 살아왔다. 그런 그녀 앞에 이선재가 나타났고 그가 들려준 피아노와 사랑의 속삭임은 그녀를 욕망으로부터 깨어나게 했던 것.

 

자신의 죄를 낱낱이 고백하고 죗값을 치르는 것으로 모든 욕망을 털어낸 후 그녀는 비로소 진짜 사랑과 자기 자신의 삶을 얻었다. 허름한 죄수복을 입고 교도소 한 귀퉁이에 기대 있는 그녀가 누릴 수 있는 것이라곤 떨어지는 햇살 한 조각뿐이었지만 그녀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도 평온했다. 작은 행복이지만 그것은 욕망의 것이 아닌 온전한 자신의 것이기 때문이다.

 

<밀회>격정멜로라는 수식어로 시작했지만 치정극과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사랑으로 시작해 욕망으로 변질되는 치정극들은 넘쳐나지만, 거꾸로 욕망 속에 있던 인물이 사랑으로 변화하는 이야기는 흔치 않다. 이 과정에서 상류층의 부조리나 추악한 욕망의 이야기와 사랑 이야기가 동시에 다뤄질 수 있었다. 비리로 점철된 학교 재단의 이야기는 마치 치열한 사회극을 보는 듯 했지만, 그 비리를 부수는 것은 다름 아닌 사랑과 순수의 힘이었다.

 

피아노와 음악은 사랑과 순수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비리로 얼룩진 음대에서는 음악도 일종의 거래처럼 이용되었고 전시되었다. 학교로부터 버려진 친구들과 함께 이선재가 5중주를 준비하고 굿바이콘서트를 하는 에피소드는 그래서 리히테르가 말했듯 음악은 허영이 아닌 진정으로 즐기는 것이라는 걸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선재의 표현대로 끝까지 즐겨주는 것그것이 장땡인 것이다.

 

사회의 부조리를 섬뜩할 정도로 날카롭게 해부해내면서, 동시에 스무 살 차이 연인의 미세한 심리적 변화와 떨림을 포착해내고, 또 그 위에 피아노라는 아름다운 예술의 진정한 맛을 드라마 한 편 속에 모두 담아낸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냉정과 열정을 오가는 정성주 작가의 놀라운 필력과, 조명의 농담과 피아노 선율만으로도 인물들의 감정을 담아내는 안판석 감독의 연출력, 그리고 그 위에서 물오른 연기를 보여준 연기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감성적으로 울리거나 이성적으로 깨우는 드라마들은 많지만 이처럼 감성적이면서 이성적인 드라마는 흔치 않다. 섣부른 해피엔딩을 말하는 드라마나 충격적인 새드엔딩을 말하는 드라마는 많지만 그 둘 다를 아우른 희비극은 많지 않다. <밀회>는 욕망의 끝장이라는 새드엔딩을 그리면서 동시에 사랑의 시작이라는 해피엔딩을 담아냈다. 욕망을 벗어버리고 사랑으로 가게 하는 힘. 그것은 어쩌면 예술의 힘인지도 모른다. <밀회>가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밀회>, 사랑 타령 따위의 드라마가 아니다

 

JTBC 월화드라마 <밀회>에 처음 등장했던 오혜원(김희애)의 모습과 지금 현재를 비교해보면 너무나 큰 차이가 존재한다는 걸 알 수 있다. 어떻게든 상류층에 들어가려 안간힘을 썼다는 그녀. 그래서 그 언저리까지 올라가 으리으리한 집과 차와 커리어를 누리며 우아하게 살고 있다고 여겼던 것들이 후반부로 와서는 모두가 허상이었다는 게 드러난다.

 

'밀회(사진출처:JTBC)'

그녀는 결국 그녀가 말했듯 우아한 노비에 불과했던 것. 재단이 위험에 처하자 도마뱀 꼬리처럼 잘려져 버리는 그런 존재가 그녀의 실상이었다. 번듯한 교수 남편에 마사지 샵을 들락거리며 상류층들의 삶을 코스프레하고 있지만 그것은 전부 연기에 불과했다. 사실 부부관계라고 할 수도 없는 그녀와 남편 강준형(박혁권)의 관계는 누군가에게 보여지기 위해 연기되는 말 그대로의 쇼윈도 부부였고, 그녀를 가족처럼 챙기는 것처럼 보였던 서한그룹 사람들은 그녀를 이용할 뿐이었다.

 

<밀회>가 다루려 했던 것은 결국 스무 살 차이 이선재(유아인)와 오혜원의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그녀의 삶의 실상을 끄집어내기 위한 하나의 촉매제였을 뿐. 드라마는 우아하게 연기된 삶을 살아가던 오혜원이 그 삶이 거짓이며 심지어 추악한 욕망에 불과했다는 것을 궁극적으로 드러낸다. 이선재라는 순수한 존재가 오혜원의 숨겨져 있던 진짜를 꺼내주었던 것.

 

상류층의 삶이 가짜로 점철된 욕망 덩어리일 뿐이라는 건 이 드라마 초반에 이미 보여진 바 있다. 서필원 회장(김용건)의 후처인 한성숙(심혜진)과 그의 딸 서영우(김혜은)가 화장실에서 사로 머리채를 잡고 드잡이를 하는 장면이 그것이다. 그들은 겉으로는 재벌가의 남부럽지 않게 살아가는 가족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가족이라고 할 수 없는 관계. 그들의 관계는 어찌 보면 돈으로 겨우 이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서필원 회장은 틈만 나면 다른 여자를 넘보고, 한성숙은 애정보다는 그의 재력에 달라붙어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 하며, 서영우는 결혼했지만 젊은 남자들만을 욕망하는 인물이다. 그런 상류층의 삶을 왜 오혜원은 그토록 갈망했던 것일까. 결국 우아해지고 싶은 돈과 권력에 대한 욕망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끝단은 그들 상류층의 불행한 삶을 그대로 닮아가는 것일 뿐이다.

 

클래식 연주는 그래서 이 드라마가 다루는 가짜와 진짜의 이야기를 에둘러 말해준다. 흔히들 우아하게 차려 입고 공연장에 앉아 듣는 클래식 연주에는 물론 진짜 감상을 목적으로 하는 이들도 있지만 또한 속물근성도 들어있다. 마치 그 음악을 들으면 자신도 상류층이 된 듯한 착각에 빠져들기도 하는 것. 또한 강준형 같은 이들에게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제자는 음악 자체가 아니라 자신의 영달을 위한 이용가치 정도로 받아들여진다.

 

지도 교수가 없어 연습 자체를 하지 못하는 친구들의 5중주를 위해 피아노를 쳐주는 이선재의 모습은, 그래서 오로지 성공을 위한 준비와 연습을 시키는 강준형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진짜 연주란 결국 마음과 마음이 오가는 이선재와 오혜원이 함께 피아노를 치며 교감했던 그것이었다.

 

쇼윈도 부부로 힘겹게 아내 역을 연기하던 오혜원은 잠시 자기 방에 들어왔다가 침대에 페이지가 열려진 채 엎어져 있는 리흐테르의 자서전을 본다. 이선재가 그리 해놓았던 것처럼 보이는 그 자서전을 읽으며 오혜원은 힘겹게 버티던 하루가 무너져 내린다.

 

우리는 차를 타고 떠난다. 피아노를 실은 차가 뒤따른다. 전염병을 피하듯 고속도로를 피해서 달린다. 어느 작은 도시 귀퉁이에서 연주를 한다. 극장이 될 수도 있고 학교가 될 수도 있다. 정말 좋은 점은 사람들이 속물근성 때문이 아니라 오직 연주를 들으러 온다는 것이다.’

 

리흐테르의 자서전에 밑줄이 그어진 이 글은 예술이 비웃는 속물근성과 이 드라마가 말하는 우아해 보이는 상류층의 가짜 삶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들어있다. 결국 <밀회>는 한갓 스무 살 차이의 남녀가 벌이는 사랑과 불륜 따위의 이야기를 하려던 것이 아니다. 이 드라마는 상류층으로 대변되는 끝없는 욕망의 더러운 실체를 낱낱이 해부하고 있다. 심지어 클래식 연주 속에서조차 존재하는 속물근성의 이야기를 통해.

<밀회>의 불륜, 사회극보다 더 신랄한 까닭

 

그 사람들 기분 좋게 돈 쓰게 하고 또 돈 벌고 그런 걸 두루 돕는 게 내 일이야. 먹이사슬. 계급 그런 말 들어봤어?” 상류사회에서 혜원(김희애)이 당하는 갑질을 보고는 분노하는 선재(유아인)에게 그녀는 자신이 우아한 노비라고 말한다. 혜원을 하인처럼 막 대하는 서영우(김혜은)가 제일 꼭대기냐는 선재의 질문에 혜원은 이렇게 말한다. “꼭대기는 그 여자가 아니라 돈이다. 아니구나. 진짜 꼭대기는 돈이면 다 살 수 있다고 끝도 없이 속삭이는 마귀.” 도대체 이 마귀란 뭘까.

 

'밀회(사진출처:JTBC)'

중년 여인과 청춘 사이에 벌어지는 불륜을 소재로 다루지만 <밀회>를 단순한 불륜 치정극으로 바라보면 이 작품이 가진 다양한 결들을 놓치게 된다. 혜원이 조금씩 선재에게 허물어지고 결국 그의 품에 안기게 되지만, 사실 그 결과보다 중요한 건 과정이다. 혜원은 왜 선재를 만나면서부터 자신의 안온해 보였던 삶에 균열을 느끼게 되었을까.

 

<밀회>의 영우는 혜원의 친구지만 그녀의 뺨을 때리고 마작패를 집어던져 얼굴에 상처를 내는 인물이다. 친구사이지만 이런 짓을 버젓이 할 수 있게 만드는 건 뭘까. 그건 바로 혜원이 말한 그 마귀. 마귀는 돈이면 뭐든 다 될 수 있다고 속삭임으로써 그 어떤 친구사이의 패악질조차 서슴없게 만든다. 흔히 말하는 상류층의 갑질을 하는 영우도 그렇지만, 우아한 노비로 그 갑질을 감당해내는 혜원도 그 마귀의 희생자들이다.

 

선재는 모차르트 역시 마귀의 희생자가 아니냐고 묻는다. “모차르트가요. 어느 날 갑자기 난 이제부터 귀족들한테 주문 안 받는다. 내가 쓰고 싶은 것만 쓸 거다. 그러다가 일찍 죽은 거라면서요. 그러다 미치고 병들고.” 혜원은 애써 부정한다. “부자들 돈으로 먹고 살면서도 얼마든지 제 하고 싶은 거 할 수 있어!” 그녀는 선재라는 인물을 통해 자신을 본다. 그녀가 선재에게 하는 말은 실은 자신에게 하는 말이다. “다 까불지 말라 그래! 음악이 갑이야!”

혜원이 한 사이트에서 막귀형이란 이름으로 선재에게 던지는 말은 그래서 고스란히 다시 혜원에게 되돌려진다. “제가 가끔 가는 사이트가 있는데요. 거기 어떤 형이 그러더라구요. 스펙따위 필요 없고 그냥 막 즐기면서 살라고. 저는 그게 사랑이라고 생각해요. 끝까지 즐겨주는 거요. 저는 이 곡도 그렇게 하고 싶어요. 비트 16, 32 막 쪼개갖고 그래서 어깨 빠지게 연습하고 변주 8번 스타카토 더럽게 맘에 안 들다가 어느 날 갑자기 뻥 뚫려서 기분 째지고 그게 최고로 사랑해주는 거죠. 라흐마니노프랑 파가니니가 얼마나 좋아하겠어요. 그게 장땡이잖아요. 먹이사슬이고 먹이고 뭐.”

 

어쩌다 여신이라 믿었던 그녀는 실상 노비의 삶을 살게 되었을까. <밀회>가 그리는 상류사회의 이면은 실로 더럽다. 혜원은 그 더러운 것들을 우아하게 처리해주는 일을 한다. 아트센터라는 우아함 이면에는 아트는 없고 온갖 비리들만 넘쳐난다. 갑질은 일상이고 오입질 또한 스스럼없다. 그것은 심지어 당연시된다. 마귀 덕분이다. 돈이면 뭐든 할 수 있다고 속삭이는. 혜원은 그 더러운 것들을 치워주는 대가로 살아가는 마귀의 포로다.

 

선재는 그래서 혜원에게는 자신을 마귀로부터 구원해줄 존재로 여겨진다. 그가 짱땡이니 짱난다는 식의 우아한 세계와는 어울리지 않는 말을 던져줄 때 혜원은 그것을 순수로 읽어낸다. <밀회>가 가진 진짜 힘은 이 불륜의 과정이 마치 마귀에 의해 잘 굴러가던 선으로부터의 탈출처럼 그려지는데서 나온다. 혜원의 밀회는 그래서 아찔하면서도 슬프다.

 

<밀회>가 이런 불륜의 과정들을 통해 상류사회의 추악한 얼굴을 이끌어냄으로써 공감의 차원으로 승화시키고 있는 데는 피아노 같은 예술적인 장치가 한 몫을 차지한다. 그들의 아름다운 음악을 듣고 있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무수히 많은 예술가들의 삶이 결코 늘 행복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그리고 거기에도 역시 마귀가 존재했다는 것을.

 

좁은 계단을 지나 그녀는 남루한 선재의 방을 찾는다. 그 방은 마치 겉으로는 우아해도 속으로는 한없이 남루해진 자신의 처지 같다. 선재와의 첫 번째 정사가 온전히 이 남루한 집안을 찬찬히 둘러보는 장면과 두 사람의 소리로만 채워진 것은 이 장면이 가진 아픔과 슬픔을 제대로 전해준다. 그 속에서 그녀는 흐느낀다. 그리고 그 짧은 시간 자신으로 돌아갔던 그녀가 제복 같은 하얀 셔츠를 입고 잠든 선재를 둔 채 나가면서 누군가의 전화를 받는다. “예 이사장님 지금 출발합니다.” 다시 마귀의 아가리 속으로 들어가는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삶의 신산함. <밀회>의 불륜은 그 어떤 사회극보다 더 신랄한 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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