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방에서 오히려 도드라지는 김지원의 페르소나

눈물의 여왕

“좋아한다, 싫어한다, 좋아한다, 싫어한다, 좋아한다, 싫어한다 오? 좋아한다고? 아, 진짜? 아... 나는 아닌데.. 나는... 사랑하는데...” tvN 토일드라마 ‘눈물의 여왕’에서 술에 취해 집으로 돌아오는 백현우(김수현)는 꺾은 가지에서 잎 하나씩을 떼어내며 홍해인(김지원)을 두고 좋아한다, 싫어한다를 점쳐본다. 그러다 문득 마지막 하나에 ‘사랑한다’는 잎 하나를 발견하자 수줍은 듯 속내를 꺼내놓는다. 좋아하는 게 아니라 사랑한다는 속마음을. 

 

결혼해 어느 정도 세월을 겪어낸 부부들이라면 이 짧은 장면에 담긴 이들의 사랑표현에 공감할 게다. 사랑이라는 말은 어딘가 낯설고 그래서 좋아하거나 싫어한다는 말로 그 애증(?)의 속내를 꺼내놓기 마련인 부부들. 사랑한다는 말은 술에 잔뜩 취하거나, 꺾은 가지로 잎 하나씩을 떼내며 점을 치는 식의 장난을 더해서야 비로소 슬쩍 꺼내놓는 그런 부부들의 마음이 그 장면에 담겨있다. 그런데 그건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어딘가 사랑이라는 말로는 부족한 마음 때문이 아닐까. 

 

“난 한 번은 채워지고 싶어. 그러니까 날 추앙해요. 사랑으론 안 돼. 추앙해요.” 문득 ‘나의 해방일지’에서 미정(김지원)이 구씨(손석구)에게 갑자기 다가와 뜬금없이 그렇게 말했던 대목이 떠오른다. 구씨가 혼자 사전으로 찾아본 ‘추앙’의 뜻은 ‘높이 받들어 우러러 봄’이다. “고객님 사랑합니다” 같은 표현이 있을 정도로 여기저기 쏟아져 나오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너무 흔하고 익숙해져 그 본래의 의미를 잃어버린 시대에, 미정은 ‘추앙’이라는 새로운 단어를 가져온다. 낯설지만 어딘가 사랑이라는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진심이 느껴지는 단어다. 

 

‘눈물의 여왕’에서 백현우가 결코 쉽지 않은 마음으로 진짜 사랑을 표현하는 홍해인이라는 인물이나, ‘나의 해방일지’에서 사랑으로는 부족하다며 자신을 추앙하라고 말하는 미정이라는 인물이나 모두 김지원이라는 배우가 가진 독특한 이미지가 더해져 더욱 빛이 난다. 그건 같은 시공간에 있지만 어딘가 다른 곳에서 온 듯한 도도한 이방인의 이미지다. 그는 자신이 선 자리에서 그 곳과 어울리지 않는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더더욱 도드라진 아우라를 드러내는 배우다. 

 

‘나의 해방일지’에서 경기도 어디쯤의 가상소도시인 산포시에 거주하는 미정은 출퇴근 시간으로 하루가 다 가서 퇴근 후 여가도 없는 ‘변방’의 삶을 살아가지만 그처럼 벼랑 끝에 서 있어서인지 오히려 진짜 행복을 직시하고 그것을 향해 나아가는 용감한 인물이다. 도시의 삶이 점심에 무엇을 먹고, 여름휴가를 어디로 가고, 다달이 받는 월급으로 ‘행복하다’ 여기는 그저 그런 시시한 삶에 무감각해져 있다면, 미정은 ‘고객님 사랑합니다’ 같은 사랑 대신 추앙을 이야기할 정도로 진짜 행복을 추구하는 인물이다. 그래서 도시에서 한 가락 했지만 사람들에 염증을 느끼고 이 변방으로 칩거해 술에 빠져 살아가는 구씨조차 미정의 요구를 거부하지 못한다.

 

“너 내가 어떤 인간인지 알면 깜짝 놀란다. 나 진짜 무서운 놈이거든? 옆구리에 칼이 들어와도 꿈쩍 안 해. 근데 넌 날 쫄게 해. 네가 눈앞에 보이면 긴장해. 그래서 병신 같아서 짜증 나. 짜증 나는데 자꾸 기다려.” 구씨가 한 이 고백은 보통 사람과는 다른 미정의 아우라면서 그걸 연기한 김지원이라는 배우가 가진 아우라이기도 하다. 변방에 서 있지만 어딘가 그 곳에서 그럭저럭 살아갈 사람 같지 않은 도도한 이방인의 면면이 그것이다. 

 

‘눈물의 여왕’에서도 홍해인이라는 인물을 연기하는 김지원의 이런 아우라는 빛을 발한다. 퀸즈 백화점의 대표로서 그 화려하고 빛나는 세계 속에 너무나 잘 어울리는 이 인물은, 자꾸만 그 세계 바깥으로 밀려나면서 오히려 도드라지는 모습을 드러낸다. 뭐 하나 부러울 것 없어 보이지만 뇌종양 시한부 판정을 받고 평범한 사람들보다 못한 처지로 미끌어지고, 백현우에게 프로포즈를 하기 위해 헬기를 타고 용두리로 내려왔던 ‘여왕’의 위치에서 하루아침에 쫄닥 망해 이혼한 전 남편 시댁에 얹혀 사는 처지로 떨어진다. 하지만 그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시골의 소박한 삶 속에서도, 또 시한부 판정을 받은 처지임에도 이 인물은 여전히 꽂꽂하고 도도하다. 그래서 변방으로 밀려났지만 여전히 그 곳과 유리된 이방인으로서 자꾸만 시선이 머물게 만드는 아우라를 드러낸다. 

 

일찍이 ‘상속자들’에서 유라헬이라는 악역으로 김은숙 작가의 눈도장을 찍고는, ‘태양의 후예’에서 육사 출신 군의장교 윤명주 중위로 서대영(진구)과의 커플 연기를 보여줬을 때도, 김지원이 가진 이러한 아우라는 그 세계 바깥에 나와 있어 오히려 추앙하게 만드는 그런 존재들을 빚어내곤 했다. 임상춘 작가의 ‘쌈,마이웨이’에서 연기한, 아나운서의 꿈을 꾸지만 현실은 백화점 인포데스크에서 일하는 최애라라는 인물도 마찬가지다. 스펙 때문에 ‘쌈마이’ 취급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지만, 그 변방의 세계에서도 밝고 건강하게 살아가는 이 이방인 같은 존재는 결국 ‘마이웨이’를 선택하는 당당함으로 시청자들의 시선을 빼앗았다. 그리고 김영현, 박상연 작가가 쓴 선사시대의 인류사를 다룬 판타지 드라마 ‘아스달 연대기’에서는 탄야라는 신적인 아우라를 가진 존재를 연기하기도 했다.

 

김지원은 어딘가 추앙하게 만드는 아우라를 가진 배우다. 그것은 평범하게만 보이는 세계 속에서 그 안에 스며들기보다는 자신의 진짜를 꼿꼿하게 유지하며 그 정체성을 지켜내는데서 나오는 아우라다. 그리고 이건 우리가 스스로의 삶을 특별하게 만들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삶을 그저 흘려 보내는 것이 아니라, 가끔은 이방인의 시선으로 낯설게 바라보고 그 의미를 되새기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그 흐름에서 벗어나 조금은 관조적인 자세를 가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반복되는 삶이 답답하거나 시시하게 느껴질 때, 이방인의 시선으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라. 그건 스스로를 추앙함으로써 특별하게 만드는 일이 될 수도 있을테니.(글:국방일보, 사진:tvN)

‘살인자o난감’의 장난감 형사로 돌아온 구씨

살인자o난감

끔찍한 살인자와 그를 추적하는 형사는 역할이 다르지만 때론 비슷해 보일 때가 있다. 영화 <범죄도시>의 마석도(마동석)를 떠올려 보라. 산만한 덩치에 건들건들 사건 현장에 나타날 때면 사람들은 조폭인 줄 알고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곤 하지 않던가. 하지만 그 살벌해 보이는 이가 사실 민중의 지팡이(마석도는 민중의 몽둥이라고 말하지만)이고 그래서 더 살벌한 범죄자들을 때려잡을 때 우리는 더 큰 반전의 안도감을 갖게 마련이다. 이처럼 살인자와 형사는 겉으로 보고는 구분할 수 없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살인자o난감>이 그리는 세계가 흥미로운 건 바로 이 경계 구분을 할 수 없는 인물들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평범한 대학생 이탕(최우식)은 어느 날 우발적인 살인을 저지른다. 그러니 이유가 어떻든 그는 살인자다. 그런데 알고 보니 살해된 자가 희대의 살인마였다? 여기서 조금 헷갈리는 상황이 벌어진다. 이탕은 살인자인가 아니면 희대의 살인마를 죽인 영웅인가. 

 

전직 형사 송촌(이희준)은 정의를 꿈꿨다. 하지만 믿었던 선배 형사마저 부정한 일에 손을 대는 걸 목격한 후 절망하고, 절망은 세상에 대한 엇나간 분노로 이어진다. 끝내 광기에 사로잡힌 그는 잘못을 저지른 이들을 사적으로 처단하는 살인마가 된다. 그는 정의의 수호자인가 아니면 그저 살인마인가. 그 살인마를 추적하는 형사 장난감(손석구)은 법의 테두리 안에서 그들을 단죄하려 한다. 하지만 극심한 분노 속에서 저들에 대한 살인충동을 느낀다. 그는 여전히 형사인가 아니면 저 살인마와 다를 바 없는 존재인가. 이처럼 평범한 대학생과 형사 그리고 살인마 사이의 경계는 얇고도 얇다. 언제든 우연과 필연이 겹쳐져 누구나 그 경계를 넘을 수 있다는 게 <살인자o난감>이 그리고 있는 아이러니 가득한 세계다. 

 

‘살인자 이응 난감’으로 읽는 독특한 제목에 들어 있는 것처럼, 이 작품에서 장난감이라는 특이한 이름의 인물은 그 중심에 서 있다. ‘난감’이라는 이름만 보면 이 인물이 처한 세상이 얼마나 ‘난감한가’를 표현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동시에 ‘장’이라는 성이 들어감으로써 ‘장난감’으로 불리는 그의 이름은, 마치 장난감처럼 그를 휘둘리게 해 끝낸 난감하게 만드는 욕망들로 가득 채워진 세상에 대한 은유를 담고 있다. 피해자와 가해자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게 아니다. 대신 세상사람들의 욕망이 겹쳐지면서 생겨나는 우연과 필연을 통해 만들어진다. 장난감처럼 휘둘리다가는 어느새 살인자 같은 범범자가 될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세상의 폭력성을 드라마는 ‘장난감’이라는 등장인물의 이름으로 표현했다. 그래서 이 작품은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예측 불가 전개에 복잡하게 느껴지지만, 사실상 형사 장난감이 살인자들을 추적하며 마주하게 되는 ‘난감한 세상’에 대한 통찰을 그리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염두에 두고 보면 형사 장난감 역할을 맡은 손석구의 남다른 존재감이 느껴진다. 우연의 일치겠지만 손석구는 유독 범죄자와 형사를 오가는 역할을 많이 연기했다. 넷플릭스 시리즈 <센스8>에서는 문형사 역할을 연기했고 <D.P.>에서는 임지섭 대위로 군인이지만 탈영병을 잡는 헌병대 장교였다. 또 <지리산>에서는 마약반 형사 역할이었으며 <카지노>에서는 필리핀에 파견된 한국인 경찰이었다. 반면 첫 드라마 연기였던 단편 <나청렴의원 납치사건>에서는 사채업자를 연기했고, 시청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마더>에서는 이설악이라는 냉혹하고 잔인한 아동학대 범죄자를 연기했다. 또 <나의 해방일지>로 신드롬을 일으켰던 구씨는 알코올 중독자가 된 전직 조폭이었으며 영화 <범죄도시2>에서는 필리핀 관광객을 연쇄적으로 표적납치해 살해하는 잔혹한 범죄자였다. 그의 연기 필모그래피를 보다 보면 범죄자와 형사 사이를 오가는 것이 이리도 쉬운 일인가 싶은 생각이 든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건 손석구가 연기하는 역할들이 선명한 선과 악으로 나뉘는 인물들이라기보다는(물론 그런 역할도 있지만), 그 사이 어딘가에 걸쳐져 있는 인물에 가깝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카지노>에서 그가 맡은 오승훈이라는 형사는 처음에는 카지노 대부인 차무식(최민식)과 서로 현실적인 도움을 주고 받는 사이처럼 시작하지만, 마지막에 가면 형사 본업으로 돌아가 죽기 살기로 차무식과 그 일당을 소탕하는 모습으로 변모한다. 이것은 <D.P.>에서도 마찬가지다. 시즌1에서 그가 맡은 임지섭 대위는 오로지 승진에만 목을 매는 얌체 상사의 모습이었지만, 시즌2에서는 마지막에 법정 증인으로 나서 소신발언을 하는 모습으로 변신한다. 즉 그가 해석하는 인물은 타고난 선이나 악이 아니라, 그 경계 언저리에 있어 때론 유혹에 흔들리기도 하고 현실과 타협하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본연의 임무를 찾아가는 그런 인물이다. 그래서 더 설득력 있게 느껴진다. 

 

이런 모습이 극대화되어 나타난 게 <나의 해방일지>로 인해 생겨났던 ‘구씨 신드롬’이다. 경기도 외곽쯤되는 산포라는 곳에 홀연히 나타난 이 인물은 낮에는 싱크대 일을 하고 밤이면 술을 사다 마시는 걸로 하루하루를 소일한다. 일을 할 때는 평범해 보이지만 매일 마신 술이 방 한 가득 채워져 있는데다 나이도 이름도 숨겨 그저 ‘구씨’라 불리는 이 미스테리한 인물에게서는 묘하게도 범죄의 냄새가 난다. 어딘가 선을 넘어버린 느낌이 그것이다. 늘 선 안에서만 챗바퀴 돌 듯 살아가는 염미정(김지원)이 그에게 이끌리는 건 바로 그 ‘탈선’이 ‘구원’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자신 또한 다른 세상으로 데려다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라고나 할까. 구씨의 이미지는 그래서 마치 한때는 세상을 두렵게 만들기도 했지만 어쩌다 동물원 철창 같은 일상의 늪에 갇혀 버린 야생동물 같은 면면이 겹쳐져 있다. 

 

<나의 해방일지>의 손석구 신드롬은 그래서 답답한 일상을 한 달음에 뛰어넘는 그 탈선의 시원함에서 비롯되었다. 그의 길들여지지 않는 거친 이미지는 ‘해방’이라는 단어와 너무나 잘 어울렸으니 말이다. 하지만 <살인자o난감>에서 손석구는 해방의 또 다른 면이라 할 수 있는 ‘탈선’ 앞에서의 치열한 갈등을 보여준다. 갇힌 틀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픈 욕망과 이를 억누르고 통제하려는 이성 사이의 갈등이 그것이다. 

해방과 탈선. 어쩌면 우리는 욕망이 부리는 이 아슬아슬한 양면 사이를 위태롭게 균형을 잡아가며 걸어가는 장난감 같은 존재인지도 모른다. 나아가기 두려운 길이지만 그렇다고 회피하거나 포기할 필요는 없다. 그 두려움을 인지하고 탈선이 아닌 해방으로 나아가는 길을 찾아가면 되는 것이니. <살인자o난감>에서 손석구가 그 처절한 연기를 통해 보여준 것처럼. (글:국방일보, 사진:넷플릭스)

 

편안함과 해방을 꿈꾸는 박해영 작가의 세계

JTBC 토일드라마 <나의 해방일지>가 화제다. “날 추앙해요”라는 비일상적인 대사가 일종의 밈이 되어 유행처럼 번져나가고 있을 정도다. 예사롭지 않은 <나의 해방일지>는 무슨 이야기고, 이 작품을 쓴 박해영 작가가 일관되게 그리고 있는 세계는 무엇일까.

나의 해방일지

<나의 해방일지>와 <나의 아저씨>의 평행이론

박해영 작가의 드라마 속 인물들은 자주 길을 걷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 길은 출퇴근길이다. <나의 아저씨>에서는 주로 퇴근길 풍경이 담겨졌다. 하루 종일 직장에서 시달리고 스트레스에 쩔은 박동훈(이선균)은 그렇게 퇴근길에 정희네 선술집에 들러 그 곳에 모인 사람들과 술 한 잔으로 피로를 푼다. 그 곳에는 한때는 이사님 소리도 들었지만 지금은 퇴직해 아파트 경비나 청소 같은 일을 하게 된 중년의 아저씨들이 모여든다. 아저씨들은 한바탕 술자리 후 얼콰해진 얼굴로 술집을 나와 골목길을 걸어 저마다의 집으로 돌아간다. 

 

<나의 해방일지>에서는 그 길이 훨씬 멀어졌다. 경기도 수원 근처 산포시의 외진 곳에 사는 삼남매는 매일 시골길을 걷고 마을버스를 타고 나가 전철을 타고 서울로 간다. 그리고 하루 종일 일터에서 지긋지긋한 스트레스를 버텨내고 퇴근 후 술을 마시다가도 전철 막차 시간에 맞춰 일어나 그 먼 길을 돌아온다. 하루 종일 출퇴근만으로도 피곤하지만, 주말에도 아버지를 도와 밭일을 해야 하는 이들에게 전원생활의 낭만 따위는 없다. 

 

<나의 아저씨>나 <나의 해방일지> 속 길을 걷는 인물들은 자신의 일상 속에 갇혀 흔들리고 괴로워한다. 그런데 그 일상을 틈입하는 이질적인 인물이 등장한다. 그들은 범죄의 냄새를 풍긴다. <나의 아저씨>의 이지안(이지은)이 그렇고 <나의 해방일지>의 구씨(손석구)가 그렇다. 이지안은 박동훈이 일하는 회사의 사무보조고, 구씨는 어쩌다 이 외진 곳까지 들어와 삼남매네 아버지가 운영하는 싱크대 공장에서 일하는 미스테리한 인물이다. 이지안은 사채 빚 때문에 시달리며 박동훈에게 들어온 뇌물을 훔치는 것으로 그의 삶 속으로 들어오고, 구씨는 매일 알코올중독자처럼 술만 마시는 그에게 삶이 답답해 미치겠던 삼남매 중 둘째 염미정(김지원)이 뜬금없이 “날 추앙해요”라고 요구하면서 그와의 관계가 시작된다. 박동훈과 이지안 그리고 염미정과 구씨는 각각 다른 세계에서 살아가지만 서로 얽히면서 서로의 세계에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 이들의 관계는 ‘사랑’이라는 단어로는 채워질 수 없는 그 이상의 무엇이다. 박동훈과 이지안이 40대와 20대의 세대 차이를 뛰어넘는 ‘인간애’에 가까운 휴머니즘의 관계를 그렸다면, 염미정과 구씨는 시작부터 사랑으론 부족하다며 ‘추앙하는’ 관계로 그려진다. 이처럼 <나의 해방일지>와 <나의 아저씨>는 그 구도가 평행이론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닮아 있다. 하지만 이 두 작품이 진짜 닮은 건 박해영 작가가 보여주는 태도다. 그는 마치 구도자처럼 화두를 던진다. 벗어날 수 없는 욕망의 번뇌가 왜 생겨나고, 그것으로부터 어떻게 하면 탈주할 수 있을까를 질문한다. 

 

편안함과 해방을 꿈꾸는 <나의 아저씨>와 <나의 해방일지>

사실 박해영 작가는 <나의 아저씨>부터 이런 구도자 같은 태도가 생겼다. 물론 직장생활의 만만찮은 현실이나, 풍자적인 코미디 같은 요소들은 <올드미스 다이어리>부터 <청담동 살아요>, <또 오해영>으로도 이어지는 일관된 면모들이었지만, 이들 작품은 시트콤이나 로맨틱 코미디 같은 장르적 색깔과 재미에 충실한 면이 있었다. 하지만 <나의 아저씨>부터 <나의 해방일지>로 이어지면서는 코미디에 페이소스가 깊어졌고, 장르적 틀에 안주하기보다는 그 바깥으로 튀어나가 말하고픈 메시지를 좀 더 과감하게 풀어내는 방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살아가는 삶 속에서 끝없이 관계의 피곤 속에서 번뇌하는 현대인들에게 다분히 종교적인 느낌까지 묻어나는 초월적 관점이나 해법들을 던진다. 

 

<나의 아저씨>가 던진 화두는 애써 버티며 살아가는 삶으로부터 ‘편안함에 이르는 길’에 대한 질문이었다. 건물의 안전진단을 하는 건축구조기술사 박동훈은 “모든 건물은 외력과 내력의 싸움”이라며 인생도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즉 무슨 일이 있어도 내력이 세면 이긴다는 것. 하지만 이렇게 내력으로 외력을 버텨내는 삶은 고단하고 힘겨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의 아저씨>는 버텨내는 걸 포기함으로써 편안함에 이르는 길이 있다는 걸 보여준다. 어떻게든 회사에 붙어 살아남으려 안간힘을 쓰던 박동훈이 결국 회사를 나와 새로운 길을 찾는 모습이 그렇다. 정희네 술집에 퇴역한 아저씨들이 여전히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 망가져도 더 이상 버티려는 욕망을 버림으로써 오히려 편안해질 수 있다는 다소 불교적인 화두를 던진 것. 

 

<나의 해방일지>의 화두는 모두가 ‘같은 욕망’을 꿈꾸게 함으로써 가짜 행복 속에서 살아가는 거짓 삶으로부터 ‘해방에 이르는 길’에 대한 질문이다. “날 추앙해요. 사랑으론 안돼. 추앙해요.” 미정이 구씨에게 어느 날 갑자기 ‘추앙’이라는 낯선 단어를 꺼낸 건 ‘사랑’이라는 표현이 얼마나 오염되어 본래의 의미를 잃어버렸는가를 말해준다. “고객님 사랑합니다” 같은 말들이 어디서나 쉽게 튀어나오는 세상이 아닌가. 행복도 마찬가지다. 미정이 다니는 회사의 ‘행복지원센터’는 직원들의 복지를 위해 동아리 모임을 지원하는 부서지만, 그런 지원이 과연 진정한 행복을 줄 것인지 미정은 믿지 못한다. 억지로 동아리를 만들라는 강권에 미정의 제안으로 만들어진 ‘해방클럽’에, 그 행복지원센터에서 일하는 상담사 소향기(이지혜)가 들어오며 하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해방되고 싶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닌데 일단은 이 표정. 무표정이 안돼요. 눈앞에 사람이 보이면 자동적으로 이런 표정이 돼요. 하나도 행복하지 않은데, 행복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고, 이렇게 웃을 정도로 좋지도 않은데 사람만 보면 자동적으로 이런 표정이 돼요. 그래서 상갓집 가는 게 너무 힘들어요. 상갓집 갈 때마다 억지로라도 무표정 해보려고 애쓰는데... 힘들어요.” 가짜 웃음, 가짜 행복, 가짜 사랑. 자본화된 사회가 제안하는 평범으로 포장된 같은 욕망들의 위선을 고발하는 이 드라마는 그것으로부터 해방되는 길을 모색한다. 그 해방클럽은 그래서 세 가지 강령을 제안한다. 첫째, 행복한 척 하지 않기. 둘째, 불행한 척 하지 않기. 셋째, 정직하게 보기.

 

뻔한 틀로부터의 해방을 꿈꾸는 드라마 작가

작품에 담긴 삶을 정직하게 바라보려는 박해영 작가의 이런 태도는, 그의 작품이 통상적인 작법과 뻔한 틀로 그려지는 여타의 드라마들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이유가 된다. 그는 염미정의 입을 빌려 상투적으로 드라마에서 쓰이곤 하는 “심장이 뛰게 좋다”는 통상적인 표현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난 그 말을 이해 못해. 심장 뛰게 좋다는 말.... 내가 심장이 막 뛸 때는 다 안 좋을 때던데. 당황했을 때, 화났을 때, 백 미터 달리기 전. 한 번도 좋아서 심장이 뛴 적이 없어. 정말 좋다 싶을 땐 반대로 심장이 느리게 가는 거 같던데? 뭔가 풀려난 것 같고. 처음으로 심장이 긴장을 안 한다는 느낌.” 즉 그에게 너무나 좋은 기분은 ‘두근거림’이 아니고 ‘편안함’이다. 따라서 <나의 해방일지>에서 염미정이 구씨와의 관계에서 기분이 좋아지는 건 어떤 갈망 때문에 심장이 뛰는 그런 순간들이 아니고, 어느 날 무심하게 구씨가 툭 던진 문자메시지로부터 확인되는 관계의 편안함이 느껴지는 순간이다. 특별한 말을 애써 하지 않아도 되거나, 혹은 이 말을 할까 말까 고심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막 튀어나오는 대로 말할 수 있는 그런 편안함의 순간. 당연히 이 드라마 속 염미정과 구씨 사이에 벌어지는 멜로의 전개도 통상적인 드라마들의 틀을 벗어날 수밖에 없다. 

 

물론 박해영 작가 역시 아직까지 뻔한 드라마의 공식들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처럼 끝없는 구도의 관점으로 세상의 부조리를 정직하게 보려는 노력과, 오염된 일상어로는 표현할 길이 없어 문학적 서사와 은유를 동원하는 방식은 그가 사유에서나 작품을 통해서나 뻔한 틀로부터 해방을 꿈꾸고 있다는 걸 말해준다. 모든 게 기획되고 효과와 결과로서 평가되는 시대에, 이런 자세와 태도를 꿋꿋이 밀어붙이는 작가가 있다는 건 실로 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건 어쩌면 틀에 박힌 우리의 허위로 가득한 삶과 그걸 반복하는 그렇고 그런 드라마들을 해방시켜주는 선구적 역할을 할 테니.(글:시사인, 사진:JTBC)

‘나의 해방일지’가 해방시킨 배우들의 무한 매력들

나의 해방일지

김지원 하면 먼저 떠오르던 작품이 <태양의 후예>였다. 윤명주라는 캐릭터는 서대영(진구)과의 애틋한 사랑이야기로 사랑받았고 김지원은 인생캐릭터를 얻었다는 평가를 받은 바 있다. 하지만 이제 김지원의 인생캐릭터는 JTBC 토일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의 염미정으로 경신되지 않을까. “날 추앙해요”라는 처음엔 낯설었지만 이제는 거의 유행어가 된 대사가 한동안 김지원이라는 배우를 따라다닐 것일 테니 말이다. 

 

좋은 작품은 좋은 캐릭터들이 있기 마련이고, 좋은 캐릭터들은 배우들의 매력을 끄집어내기 마련이다. <나의 해방일지>가 그간 숨겨져 있던 배우들의 무한한 매력을 해방시키고 있다. 김지원이 염미정이라는 인생캐릭터로 툭툭 던지는 엉뚱한 말들은 묘하게도 이 배우가 가진 차분하면서도 내면에 뜨거운 용암을 품고 있는 듯한 매력이 뿜어져 나왔다. 

 

<나의 해방일지>에서 배우의 매력을 해방시키는 건 예사롭지 않은 대사들이다. “날 추앙해요”도 그렇지만 염미정이 구씨(손석구)와 함께 밤중에 산길을 오르며 깔리는 내레이션은 너무나 인상적이다. “어려서 교회다닐 때 기도제목 적어내는 게 있었는데 애들이 쓴 거 보고 이런 걸 왜 기도하지? 성적, 원하는 학교, 교우관계 고작 이런 걸 기도한다고? 신한테? 신인데? 난 궁금한 건 하나밖에 없었어. 나 뭐예요? 나 여기 왜 있어요?”

 

염미정과 함께 이른바 ‘추앙커플’로 불리는 구씨도 만만찮다. 아마도 <나의 해방일지>에서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가 아닐까 싶은 이 인물은 대사도 별로 없고 일을 하거나 소주를 마시는 게 대부분인 행동들을 보여준다. 그러다 갑자기 멀리 뛰기 선수처럼 훌쩍 어떤 무한의 경계를 뛰어넘는 모습으로 시청자들의 시선을 확 끌어당기더니, 옆구리에 칼이 들어와도 꿈쩍도 안하는 자신을 염미정이 “쫄게 한다”는 말로 기막힌 추앙의 감정을 드러낸다. 

 

<마더>에서 강렬한 인상으로 등장했던 손석구는 <최고의 이혼>에서 이엘과 호흡을 맞추며(그러고 보니 <나의 해방일지>로도 인연이 이어지고 있다) 독특한 멜로의 분위기를 보여준 바 있다. <멜로가 체질>과 영화 <연애 빠진 로맨스>로 이어진 손석구의 이런 분위기 있는 연기는 <나의 해방일지>에서 드디어 귀결점을 찾은 듯한 느낌이다. 

 

염미정의 언니로 왜 날 아무도 사랑하지 않냐며 시종일관 투덜대지만 어딘가 그래서 귀여운 염기정 캐릭터를 입은 이엘과, 그 염기정과 조금씩 가까워지며 연인이 되어가는 조태훈(이기우) 역할을 연기한 이기우도 마찬가지다. 차였지만 찬 것 같은 기분에 좋아하는 조태훈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염기정이 드디어 조태훈과 연인 관계가 되는 순간은 역시 예사롭지 않은 박해영 작가의 대사로 두 캐릭터가 빛을 발했다. 

 

엉뚱하게도 머리만 밀면 해방될 것 같아 올 겨울엔 ‘아무나’ 사랑하든 머리를 밀든 둘 중 하나는 하자고 결심했다는 염기정에게 조태훈이 던지는 대사가 심쿵 그 자체다. “머리 밀지 마세요. 제가 할게요. 아무나.” 머리 밀지 말라는 대사도 곱씹어보면 너무 웃기고, 아무나라는 표현도 웃기지만 이토록 심쿵한 사랑고백이 있을까 싶다. 이러니 이 배우들까지 반짝반짝 빛나 보이지 않을 수가 없다. 

 

<나의 해방일지>에서 ‘인생캐릭터’를 이야기하며 염창희 역할의 이민기 역시 빼놓을 수 없다. 한없이 조잘조잘 투덜대며 하루하루의 스트레스를 잘근잘근 씹어대는 인물. 그런데 이 인물이 끝없이 던지는 이야기들은 기상천외하고 엉뚱하면서도 이상하게 공감이 간다. 그토록 노래를 불렀던 차, 그것도 5억이나 가는 차를 구씨를 통해 얻어 타게 된 염창희가 그런 경험이 자신을 ‘여유롭게’ 바꿔놓았다고 말하는 대사가 그렇다. 

 

할머니 산소, 동네 저수지 같은 곳을 혼자 그 차를 타고 다녔다는 염창희는 의외로 자랑하러 다닐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은 자신을 우연히 만난 헤어진 여자친구에게 털어 놓는다. “몰랏는데 나 운전할 때 되게 다정해진다. 희한하게 핸들 잡자마자 다정해져. 어려서 사회과부도 보는 거 좋아했거든? 희한하게 그것만 보면 시간 가는 줄 몰라.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도시를 머릿속으로 막 다녀. 춘천도 가고 광주도 가고 부산도 가고 울릉도까지. 꼭 그 때 같애.” 갈망할 때는 투덜대기만 했는데, 막상 하게 되니 여유로워지는 마음. 그걸 ‘다정’이라고 표현하는 대사로 염창희라는 캐릭터가 그걸 입은 이민기라는 배우가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물론 이들 뿐만이 아니다. 삼남매의 동네 친구로 지긋지긋한 도시의 삶을 질깃질깃하게 살아내는 지현아 역할의 전혜진, 염기정의 동창이며 조태훈의 누나인 조경선 역할의 정수영, 염기정 회사의 로또 선물하는 이사로 갈수록 매력을 드러내는 박진우 역할의 김우형, 진짜 그런 곳에서 싱크대를 만들고 있을 것만 같은 염제호 역할의 천호진, 역시 딱 진짜 같은 삼남매 엄마 곽혜숙 역할의 이경성, 미친 존재감을 드러내는 동네 카페 사장 오두환 역할의 한상조, 가끔 찾아오는 초등학교 교사 석정훈 역할의 조민국까지... 배우들이 저마다 빛난다. 작품 하나에 이렇게 많은 인생캐릭터라니... 배우들이 추앙할만한 작품이 아닐 수 없다.(사진: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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