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 이방인>, <개과천선> 그리고 <그것이 알고 싶다>의 김상중

 

그런데 말입니다.”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김상중이 버릇처럼 이렇게 말하면 다음에는 어떤 말이 나올까를 자못 기대하게 된다. 상대방의 입장을 그대로 전해주면서 거기에 어떤 의구심을 덧붙이는 이 전환용 멘트는 그래서 김상중의, 아니 나아가 <그것이 알고 싶다>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섹션TV 연예통신(사진출처:MBC)'

조금은 차가운 듯한 이미지에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 얘기하듯 또박또박 내뱉는 대사는 김상중이란 배우를 딱딱한 이미지로 각인시킨 이유였다. 그래서 <내 남자의 여자>에서의 홍준표는 우유부단하고 뻔뻔하기까지 하면서 전혀 변화하지 않을 것 같은 이미지를 만들어냈고, <추적자>에서의 강동윤은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었다.

 

그런데 말이다. 이랬던 김상중의 이미지가 조금씩 다르게 느껴지기 시작한 것은 <그것이 알고싶다>가 점점 세간의 주목을 받으면서부터였다. 상류층의 부조리를 폭로하면서 공분을 일으켰던 사모님의 수상한 외출이나, 영훈 국제중학교 비리를 다뤘던 수상한 배려 귀족학교 반칙스캔들같은 소재들은 대중들의 열렬한 공감을 얻었다.

 

그러면서 김상중의 차가운 이미지는 이지적이고 냉철한 이미지로 바뀌었다. 사회에 존재하는 부조리와 비리들에 대해서 좀 더 철두철미하게 다뤄줬으면 하는 대중들의 바람은 그래서 김상중의 그런데 말입니다를 기다리게 만들었다. <그것이 알고 싶다>는 점점 김상중의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우며 신뢰를 쌓아갔다.

 

세월호 참사를 다루면서 엔딩에서 김상중은 MC로서가 아닌 한 개인으로서의 진심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 차디찬 바다 밑에서 어른들의 말을 믿고, 어른들이 구해주길 기다렸을 아이들과, 아직도 그 날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생존자에게 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부끄럽고 무기력한 어른이라 죄송합니다. 지켜주지 못해 미안합니다.”

 

김상중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는 드라마에서의 시너지로 이어졌다. MBC <개과천선>에서 로펌 차영우펌의 대표 차영우를 연기하는 김상중은 돈이 되는 일이라면 뭐든 하는 대표 변호사지만 그 이미지는 귀여운 면까지 보이는 인물이다. 인턴으로 들어온 이지윤(박민영)에게 호감을 보이기도 하는 그는 그래서 냉혈한과 로맨티스트의 양면을 보여준다.

 

그런가 하면 새롭게 시작한 SBS <닥터 이방인>에서 박훈(이종석)의 아버지 역할로 특별출연한 김상중은 아들의 앞날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버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여기서 김상중의 잔뜩 찡그린 듯한 얼굴은 아들을 걱정하는 한없는 자애로움을 표현해내기도 한다.

 

냉철하고 차가운 이미지로 각인되었던 김상중이 심지어 로맨티스트의 면모와 아버지의 자애로움까지 껴안을 수 있었던 힘은 어디서 나온 걸까. 그것은 그 이지적인 이미지가 <그것이 알고싶다>를 통해 긍정화 되었기 때문이다. 때론 엄정하게 그런데 말입니다를 던지면서 때론 진심어린 눈물을 흘려주는 인간적인 면모까지. 김상중은 연기자로서 이미지를 가로막고 있던 어떤 벽 하나를 깼다는 점에서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배우가 되었다.

장르, 사회극, 사극 속에서 계속되는 멜로의 실험들

미드(미국드라마), 일드(일본드라마)로 대변되는 외국드라마 전성시대에 우리는 너무 쉽게 우리 드라마의 문법을 열등한 것으로 치부하고 있는 건 아닐까. 엄청난 물량이 투입된 제작비에 완벽한 사전제작으로 꽉 짜여진 완성도 높은 외국드라마들을 보다가 무언가 어수룩한 우리 드라마를 보면 단박에 그 열등감에 휩싸이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지금까지 우리 드라마들이 쌓아온 공력은 적지 않다. 그것을 모두 무시한 채 그저 미드, 일드는 정답이고 우리 드라마는 오답이라는 편견은 어딘지 부적절해 보인다.

모든 멜로가 죄인은 아니다
특히 멜로에 강점을 가진 우리 드라마들이 어느 순간부터 멜로드라마를 ‘표방하지 않게 된’ 것은 미드, 일드가 준 영향임에 틀림없다. 한 마디로 쿨해 보이는 그네들의 드라마를 보면서 왜 우리는 매번 똑같은 삼각 사각 구도에 신데렐라 이야기, 그리고 눈물이나 짜는 그런 드라마밖에 없는가 하는 비판은 당연하다. 하지만 이것으로 모든 우리의 멜로드라마를 다 싸잡아 비판하는 건 문제가 있다. ‘멜로드라마 = 식상한 것’이라는 등식으로 괜찮은 멜로드라마들 역시 시청률의 무덤에 던져져 온 것이 사실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90일 사랑할 시간’같은 실험적인 멜로드라마의 시청률 실패이다. 소재만으로 보면 불륜에 불치 코드가 뒤섞여 있었지만 이 드라마는 이 두 가지를 엮어서 전혀 다른 형태의 멜로드라마를 직조해냈다. 하지만 당시 멜로드라마라고 표방하기만 하면 하나같이 철퇴를 맞는 분위기에서 방영된 이 드라마는 역시나 참담한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물러나야 했다. 멜로라는 말은 쑥 들어가 버렸다. 하지만 위에서 표현한대로 드라마들은 멜로드라마를 표방하지 않았을 뿐, 멜로를 완전 버린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비판으로 식상한 틀을 벗어버린 멜로는 다양한 외투를 입고 새로운 진화의 길을 걸어온 것으로 보인다.

장르 속으로 들어온 멜로
미드, 일드의 영향으로 등장한 우리네 전문직 장르 드라마들은 장르를 구사하면서도 여전히 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본격 수사물을 표방했던 ‘히트’는 범인을 좇는 이야기만큼 시청자들을 설레게 한 것이 차수경(고현정)과 김재윤(하정우)의 닭살 멜로였다. 차수경에게 ‘바보팅이’라고 말하는 김재윤의 모습에서 저 미드의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캐릭터나, 일드의 쿨한 캐릭터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우리 식 로맨틱 코미디류의 멜로드라마에서 익숙한 귀여운 남자가 있었을 뿐이다.

‘외과의사 봉달희’는 의사라는 전문직의 장르 드라마를 구사하면서 그 중심에 봉달희(이요원)와 버럭범수 안중근(이범수)의 멜로드라마를 접목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그네들의 톡톡 튀는 사랑법이 병원이란 공간에서 인간으로서의 의사들 이야기와 맞물리면서 독특한 아우라를 형성했다. 한편 ‘에어시티’의 실패는 공항이라는 공간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 장르의 실패로도 볼 수 있지만, 오히려 멜로드라마를 적극 활용하지 못한 데서도 패인을 찾아야 할 것이다. 장르드라마라는 무게에 짓눌려 어정쩡하게 구사한 한도경(최지우)과 김지성(이정재)의 멜로라인은 드라마를 이도 저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최근 종영한 본격 느와르 ‘개와 늑대의 시간’ 역시 멜로를 상당부분 뺐다고 해도 여전히 그 중심에 멜로드라마가 섞여 있다. 이 느와르만의 특징은 복잡하게 얽혀있는 인간관계들 사이에서 어느 한쪽을 선택할 수 없는 주인공들의 심리를 다룬다는데 있다. 따라서 이수현(이준기)과 강민기(정경호) 그리고 서지우(남상미)의 삼각구도는 심리적으로 멜로드라마의 구조를 그대로 가져온다. 다만 그 양상이 사랑타령으로 드러나는 게 아니라 총을 든 느와르의 양태로 나타난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사회극을 표방한 멜로
한편 SBS가 계속해서 사회극을 표방한 드라마를 내놓는데는 역시 이 멜로에 대한 대중들의 무조건적인 혐오를 염두에 둔 포석으로 보인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알겠지만 그 사회극 속에는 여전히 멜로드라마가 존재한다. ‘쩐의 전쟁’은 사채업자들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그 안에 기본적으로 금나라(박신양) - 서주희(박진희)의 멜로드라마를 엮었고, 여기에 공식적으로 이차연(김정화)이란 인물을 끼워 넣어 삼각라인을 만들었다. 드라마는 한창 사회적인 이슈들을 잡아나가다가 마지막회에 이르러 주인공들의 결혼식으로 흘러가는 멜로드라마의 양상을 보였다.

‘내 남자의 여자’는 과거 전형적인 틀을 가진 식상한 멜로드라마를 철저히 부수는 멜로드라마이다. 이 드라마는 멜로드라마들이 가진 전형성을 마치 탐구라도 하듯이 현미경을 들고 조명해나간다. 식상한 멜로드라마들이 어찌어찌 우여곡절을 겪다가 결혼에 골인하는 해피엔딩으로 끝났다면, 이 드라마는 결혼에서 시작해서 결국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모습으로 끝을 맺는다. 그 중심에 결혼이라는 틀 속에서 사랑과 질투, 분노, 기쁨 같은 것들이 환타지가 아닌 현실적인 결론으로 끌고 가기에 ‘내 남자의 여자’는 사회극과 멜로드라마가 그 정점에서 만난 드라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현재 방영되고 있는 ‘완벽한 이웃을 만나는 법’은 멜로드라마라는 틀을 통해 사회를 들여다보는 실험적인 작품이다. 결론을 정해놓지 않고 멜로드라마가 가질 수 있는 인물들을 배치해놓은 다음, 그 화학반응을 통해 인간관계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식이다. 당신이 알고 있는 이웃이라고 하는 사람은 사실 당신이 아는 그 한도 내에서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드라마는 말한다. 그 기본 틀은 정윤희(배두나)를 사이에 둔 백수찬(김승우)과 유준석(박시후), 그리고 유준석을 따라다니는 고혜미(민지혜)가 이루는 사각관계이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이들 사각관계 내부에서 벌어지는 멜로드라마가 아닌, 그 틀 바깥에 존재하는 많은 이웃들(조연들)의 화학관계를 통해 그 멜로를 이어가는 차이를 보인다. 즉 멜로는 나타난 현상이지 목적은 인간관계 자체에 놓여 있다는 말이다.

우리 식의 멜로드라마, 외면 말아야
이러한 멜로드라마의 실험과 진화는 최근 불고 있는 사극 열풍으로도 이어지고 있다. 사극의 메인 테마가 되고 있는 것이다. ‘왕과 나’는 내시인 나, 김처선(오만석)이 왕(고주원)이 사모해온 여인 윤소화(구혜선)를 운명적으로 사랑하는 이야기다. 새롭게 시작한 ‘이산’에서도 정조 이산(이서진)과 성송연(한지민)의 애틋한 멜로드라마가 그려진다. 현대물에서는 외면한 운명적인 멜로드라마를 사극이라는 형식으로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멜로드라마는 늘 식상하다는 편견 속에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멜로드라마는 늘 우리가 보는 드라마 속에 존재해왔다. 다만 새로운 외투를 입고 나타났을 뿐이다. 멜로드라마는 그렇게 비하되거나 구닥다리로 손가락질 받을 존재가 아니다. 어쩌면 그것은 우리네 드라마들의 성패를 가름하는 진짜 숨은 주역인지도 모른다. 상대적으로 타 분야보다 더 많은 노하우를 축적하고 있는 멜로드라마를 외국 드라마와 단순히 비교하면서 그 가치를 평가절하 하는 것은 우리 드라마의 정체성을 뒤흔드는 일이다. 멜로는 죽지 않았다. 다만 끊임없이 다양한 틀 속에서 실험을 해왔을 뿐이다.

자매애로 보여지는 동지의식

참 이상한 일이다. 인터넷사전에 ‘형제애’라고 치면 ‘형이나 아우 또는 동기(同氣)에 대한 사랑’이라고 명시되어 있는 반면, 왜 ‘자매애’라는 단어는 없는 것일까. 신데렐라와 못된 언니들 혹은 콩쥐와 팥쥐 같은 고전들 속 캐릭터들의 잔재가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틀에 박힌 텍스트 공식들이 만들어낸 결과일까.

하지만 드라마들은 꽤 여러 번 자매애의 가능성을 포착한 바 있다. ‘여우야 뭐하니’의 병희(고현정)와 준희(김은주), ‘연애시대’의 은호(손예진)와 지호(이하나), ‘내 남자의 여자’의 지수(배종옥)와 은수(하유미)가 대표적이다. 이들의 자매애는 모두 늘 만나면 서로를 못 잡아먹어 한이라는 듯 으르렁대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 사실은 서로를 깊이 배려하고 있는 속내를 내보인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이렇게 자매들이 드라마 속에서 서로 의견충돌을 일으키는 것은, 여성들의 서로 다른 입장(애정관, 결혼관 등등)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각자 캐릭터들의 개성은 더 살리고, 공감의 폭은 더 넓어진다. 재미있는 것은 애정관, 결혼관이 달라 싸우던 이들이 결국에는 자매라는 끈으로 묶여지면서 묘한 동지의식을 끌어내기도 한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여성들의 연대의식 같은 것이다. 그 대표주자로 꼽을 수 있는 건 역시 ‘내 남자의 여자’의 지수와 은수다.

“이런 언니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이들의 자매애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여성이라는 연대의식 속에서 피어났다. 이 드라마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드라마 자체가 추구하는 것이 멜로가 아닌, 결혼제도나 남녀문제 같은 사회성 짙은 메시지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으로 보면, ‘여우야 뭐하니’나 ‘연애시대’ 역시 기존 관습에 던지는 사회성 짙은 질문들이 있었다는 걸 발견할 수 있다.

‘여우야 뭐하니’가 사회 통념으로 생각되는 나이와 결혼의 문제에 있어서 병희와 준희란 캐릭터를 통해 연령차를 극복하려 했다면, ‘연애시대’는 은호와 지호를 통해 결혼이란 사회적 관습에 연애라는 잣대를 들고 질문을 던졌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멜로가 가진 틀이 강했기에 ‘내 남자의 여자’처럼 그것이 전면에 부각되진 않았지만 그 속에서 이들 자매들이 보여주는 은근한 서로에 대한 애정은 바로 이런 동일한 적(?)을 앞에 두고 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자매애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아도 자매들 간의 동지의식이 드라마 자체로 드러나는 캐릭터들이 있다. 그것은 ‘막돼먹은 영애씨’의 영애와 영채다. 둘은 서로 다른 외모로 똑같은 외모지상주의의 사회를 살아가고 있지만, 결국 비슷한 결론에 다다른다. 막돼먹은 영애씨가 살기 어려운 만큼, 잘 빠진 영채씨의 삶도 어렵다는 것. 결국 이 드라마는 이 둘의 대비와 거기서 얻어지는 한 가지 결론, 즉 ‘이 사회에서 여자로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한다. 영애와 영채가 굳이 자매애를 강조하지 않아도 한 가닥의 끈으로 연결되는 것은 그들이 이 시대를 사는 여성이라는 동지의식이다.

멜로 드라마들이 보여주었던 연애에 시청자들이 식상해했던 것은 어쩌면 그 연애 밑바닥에 공유되어 있는 남성중심의 사고방식이나 사회체계에 더 이상 공감하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현대의 여성들에게 참신하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아예 남성중심의 사고방식을 제거해버린 여성들만의 환타지(커피 프린스 1호점)를 그리거나, 그런 사고방식과 싸우는 여성들의 이야기(막돼먹은 영애씨)가 유리하다. 만일 드라마 속 자매들의 끈끈한 정에 마음을 빼앗겼거나, 자매들이 좀더 자매애를 보여줬으면 하는 생각이 든 적이 있다면, 그것은 당신도 그들과 한때 암묵적인 동지였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 시대, 연애보다 애틋한 것은 어쩌면 자매애다.

드라마 속 이 시대의 며느리, 시어머니, 친정어머니

1972년도 시청자들을 눈물바다에 빠뜨렸던 드라마, ‘여로’의 시어머니(박주아)는 며느리(태현실)를 박해하는 대표적인 인물로 각인됐다. 바보 아들인 영구(장욱제)를 극진히 돌보는 천사표 며느리를 구박하면서, 심지어는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웠다고 모함하는 시어머니는 전국의 며느리들을 분노케 만들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드라마 속 고부관계는 달라지고 있다. 심지어 시집살이에 대응한 ‘며느리살이’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는데, 이 말은 직장 생활하는 젊은 며느리의 뒷바라지를 시어머니가 해야하는 상황에서 생긴 신조어이다. 이것은 저 ‘거침없이 하이킥’에서 잘 나가는 며느리 박해미에게 구박받는 시어머니 나문희를 통해 충분히 봐왔던 상황이다. 이런 변화를 본격적으로 포착한 드라마가 KBS 주말드라마 ‘며느리 전성시대’다.

시집살이 끝나는가 했더니 며느리살이?
이 드라마는 장충동 원조 뚱땡이 할머니집 맏며느리로 거의 소처럼 취급받아온 서미순(윤여정)이 신세대 며느리, 미진(이수경)을 맞으면서 생기는 해프닝을 다루고 있다. 고부 갈등이라는 케케묵은 소재가 주는 편견을 가질 필요는 없다. 초점이 톡톡 튀는 발랄한 신세대 며느리 미진에 맞춰지면서 드라마는 경쾌함을 얻는다. 그간 시집살이를 톡톡히 겪어온 세대라면 이 당찬 며느리의 당돌한 행동에 묘한 쾌감마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드라마의 중간에 끼어있는 서미순의 상황은(물론 드라마에서는 충분히 코믹으로 명랑하게 처리되어 있지만) 이 시대의 예비 시어머니들에게는 좀 심각하게 다가올 수도 있다. 서미순은 여전히 며느리로서 시어머니 오향심 여사(김을동)에게 박해받는 순교자지만, 또한 새롭게 들어오는 신세대 며느리 앞에서 어쩌면 ‘며느리살이’를 해야될지도 모르는 위치에 서 있기 때문이다.

한 평생을 시집살이로 살아온 그녀가 나머지 삶을 며느리살이로 산다는 건 어찌 보면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시집살이가 끝나자 며느리살이가 시작되었다는 이 상황은 지금의 시어머니들이 실제 겪고 있는 일. 시집살이와 며느리살이가 이 족발집이란 공간에서 동시대적으로 발생한다는 것, 그것이 제대로 현실을 포착하고 있는 이 드라마의 미덕이다.

시댁에서 벌어지는 이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갈등이 불을 보듯 뻔한 현실에서 그 둘이 한 지붕 아래 사는 건 점점 더 요원해지고 있다. 최근 SBS 심리극장 ‘천인야화-신 고부갈등편’에서 한 설문조사에서는 며느리의 60%가 “시어머니가 원치 않아서” 같이 살지 않는다고 답했다. 그 이유는 며느리 대신 해야할 가사와 육아에 대한 부담감 때문이었다. 이 양측이 바라는 건 이렇다. 친정엄마 같은 시어머니 그리고 친딸 같은 며느리.

시어머니보다 더 어려운 공주엄마 모시기
그런데 드라마가 포착하는 친정엄마와 딸의 관계는 나을까. 이들 엄마들의 모습은 툭하면 시집간 딸의 앞길에 걸림돌이 되거나, 딸의 비뚤어진 행동을 만들어내는 인물들이다. ‘황금신부’에 등장하는 지영 모(김청)는 이미 결혼한 옥지영(최여진)의 눈앞에 나타나 사사건건 문제를 일으킨다. 지영의 입장에서 보면 시어머니보다 더 어려운 존재가 친정엄마인 셈이다.‘칼잡이 오수정’의 수정 모(유지인) 역시 궁할 때면 찾아와 수정을 괴롭히는 존재이며, ‘내 남자의 여자’의 화영 모(김영애) 역시 딸 앞에서 결혼을 두고 ‘한 몫을 챙기려는’ 비정한 친정엄마로 등장한다.

물론 이것은 극화된 것이고 과장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이 캐릭터들이 말해주는 현실은 또한 분명 존재한다. 요즘 심심찮게 나오는 말이 “공주엄마 모시는 것이 시어머니 모시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말이다. 결혼하면 육아문제로 이제는 친정어머니를 찾게될 딸에게 아이를 돌봐주는 것은 고사하고, 심지어 “네가 벌어다 주는 돈으로 살아야겠으니 결혼하지 말라”는 공주엄마들은 더 이상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이렇게 시어머니가 됐든 친정어머니가 됐든 시집살이, 며느리살이, 혹은 딸이 찾아와 겪는 이른바 친정살이(?)를 피하는 것은 그만큼 그간 가사활동으로 억눌려온 이 시대 어머니들이 자기 자신의 삶을 보상받고자 하는 욕구가 강해졌다는 말이기도 하다. 시집살이가 과거의 유물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지금 상황은 그걸 환호할만한 처지가 못된다. 며느리, 시어머니, 친정어머니들이 얽히고 설킨 관계는 풀리기 어려운 실타래 마냥 더 꼬인 상황이니까.

하지만 ‘며느리 전성시대’의 서미순은 어쩌면 이 복잡한 실타래를 풀 수 있을 지도 모를 가능성을 갖고 있다. 한 인간이 아닌 관계가 만들어내는 입장 차에서 비롯되는 갈등은 그 관계를 벗어나거나 그 모든 입장을 바꿔서 생각하면 해결될 수 있는 일이다. 며느리, 시어머니, 친정어머니, 이렇게 제각각의 인물인 것처럼 보여지지만 사실은 그 모든 위치가 한 여성에게 동시에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을 서미순은 보여준다. 그것이 며느리이자 시어머니이자 친정어머니인 그녀가 못내 안됐으면서 거기서 어떤 가능성을 기대하게 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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