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쩐의 전쟁’, ‘내 남자의 여자’가 뜨는 이유

역시 돈(쩐)과 여자는 되는 소재인가. 불륜이란 자극적인 상황에서 여자들의 심리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내 남자의 여자’에 이어 돈에 죽고 돈에 사는 사채업자들의 지독한 이야기 ‘쩐의 전쟁’도 30%대의 시청률을 향해 돌진하고 있다. ‘주몽’의 장기집권(?)과 ‘하얀거탑’같은 새로운 시도에 힘입어 드라마왕국이라 불리던 MBC가 야심차게 준비했던 ‘히트’와 ‘에어시티’의 부진으로 주춤하는 사이, SBS는 오랜만에 득의의 미소를 짓고 있다. 도대체 어떤 점들이 시청자들의 채널을 고정시키게 만든 걸까.

독성이 강한 드라마들
시작부터 논란이 야기됐을 정도로 ‘내 남자의 여자’와 ‘쩐의 전쟁’은 독한 드라마다. 불륜이 그렇고 사채업이란 소재가 그렇다. 잘못 건드리면 불륜이나 사채업자를 미화한다는 비판에 직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소재만이 아니다. 이 두 드라마가 그리고 있는 세상은 아름답거나 매력적이거나 귀여운 그런 모습이 아니다. 그것은 전쟁이다. ‘쩐의 전쟁’은 제목에서부터 드러나듯 돈을 중심에 두고 벌어지는 전쟁이며, ‘내 남자의 여자’는 칼날보다 더 날카로운 언어로 벌이는 전쟁이다.

이 두 드라마는 자극적인 상황으로 시청자들의 욕망에 직격탄을 날린다. 첫 회부터 내놓고 불륜사실을 드러내는 ‘내 남자의 여자’는 이 금기된 욕망이 가지는 양가감정을 건드린다. 가정을 지키며 살아가는 시청자들로서는 이 ‘찢어 죽일’ 불륜에 이를 갈다가도, 또 한 편으로는 가부장제 속에서 억압되고 길들여졌던 마음의 대리충족을 경험한다. 물론 전자에 더 무게중심이 실린다. 한편 ‘쩐의 전쟁’ 도 더럽다고 하면서도 숭배하는 돈으로 시청자들의 욕망을 건드린다. 이 역시 양가감정이다.

두 드라마의 욕망에 대한 법칙은 라깡이 말했듯이 얻어질 수 없는 환상이다. 욕망을 갈구하면 할수록 더 깊은 허기에 시달리는 격이다. 이 두 독성 강한 드라마가 승승장구하는 이면에는 위에서 밝힌 독한 소재, 독한 이야기 전개가, 시청자들 속에 숨겨져 ‘지저분한 일’ 혹은 ‘더러운 것’으로 치부되던 욕망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단지 그것뿐일까. 이 독한 두 드라마가 논란드라마 혹은 욕하면서 보는 드라마가 되지 않은 이유가 있다. 그것은 ‘진지함’이다.

욕망에 대한 진지한 접근
단지 욕망과 자극만을 추구한 드라마였다면 지금 같은 드라마 환경 속에서는 살아남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것은 적당한 자극적 설정으로 시청률을 꾀해보려다 실패한 여타의 불륜드라마들이 단적인 예이다. 새로운 시도들이 계속되고 있는 현재의 드라마 상황은 과거와는 달라졌다. 이 두 드라마는 자극적인 소재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진지한 칼날을 갖다댄다. ‘내 남자의 여자’가 불륜드라마라는 오명에도 공감을 끌어내는 것은 그 진지한 접근이 우리네 현실에도 와 닿았기 때문이다. ‘쩐의 전쟁’이 사채업을 다루면서도 그 안에 돈에 대한 나름의 진지한 성찰을 포괄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성’은 자극적인 소재까지도 공감으로 끌어내는 힘을 발휘한다.

이 진정성을 뒷받침해주는 것은 작품의 완성도다. 이 두 드라마의 공통점은 동시간 대 여타의 드라마들과 상대적으로 스토리가 탄탄하다는 점이다. 김수현이란 작가가 끌어가는 언어의 전쟁은 때론 살 떨릴 정도의 실감으로 다가온다. ‘쩐의 전쟁’ 역시 만화원작이 갖는 스토리성을 장태유 PD 특유의 속도감 있는 연출감각으로 풍자가 깃든 독특한 현실성을 끌어낸다. 여기에 힘을 듬뿍 실은 ‘쩐의 전쟁’의 박신양, ‘내 남자의 여자’의 김희애, 배종옥 같은 선수(?)들의 연기는 완성도에 굵직한 방점을 찍는다.

‘쩐의 전쟁’과 ‘내 남자의 여자’의 시청률 독식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그것은 자극적인 소재를 다루면서도 진지한 접근방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도 스토리의 탄탄함일 것이지만 이 역시 드라마에 취하고 있는 진지한 태도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물론 시청률이란 상대적인 것이며, 완성도와 비례가 되는 개념도 아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두 드라마가 시청률을 올릴 수 있었던 데는 지독함과 진지함 사이에서 벌인 아슬아슬한 줄타기의 결과라는 점이다.

여자들을 혹은 여자들만을 위한 드라마

김수현이 그려내는 불륜드라마, ‘내 남자의 여자’는 그 제목부터가 심상찮다. 불륜이라면 당연히 여자와 함께 남자가 있어야 하는 법. ‘내 남자의 여자’란 제목은 남자를 사이에 둔 두 여자라는 관계를 설정한다. 중요한 것은 이 제목에 방점이 찍히는 부분이 ‘남자’와 ‘여자’, 양쪽이 아니라는 점이다. 강조되는 부분은 궁극적인 지칭대상인 ‘여자’에 있다. ‘남자’라는 단어 역시 ‘내’라는 여자에 의해 한정되어 있는 존재. 그러니 이 제목에서 ‘남자’는 그냥 가운데 가만히 멈춰선, 혹은 양쪽에 포획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왜 홍준표는 침묵하고 있을까
제목처럼 이 드라마에서 남자를 찾아내는 것은 어렵다. 홍준표(김상중)가 남자일까. 교수에 나이 들어서도 여전히 부모의 돈으로 풍족한 생활을 하며, 게다가 천사표 부인까지 있는 홍준표는 과연 이 드라마에서 남자로 그려지고 있을까. 이화영(김희애)과 김은수(하유미)가 마치 입에 기관총이라도 단 듯 거침없이 속내에 잔뜩 품은 총알을 쏘아대고 있을 때, 홍준표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그는 침묵하고 방관하고 있었다. 한 손에는 가정을 쥐고 또 한 손에는 욕망을 쥔 채 어느 한 쪽도 잡지 못하고, 또 버리지도 못하면서 “어쩔 수 없다”는 태도를 고수하고 있었다.

그가 이화영과의 불륜을 저지른 것에 무언가 그만의 이유가 있음직도 한데, 그와 이화영이 밝히고 있는 것은 두 가지뿐이다. “의도하지 않았다”와 “그래도 멈출 수 없었다”. 의도하지 않았다는 것은 불꽃처럼 순간적으로 벌어진 일을 뜻하니, 그것은 운명적인 것이었을까. 그런데 잘 보면 누구나 알겠지만 이 드라마는 운명이나 금지된 욕망에 대해 논하려는 의도가 없다. 머리채를 잡고 프라이팬으로 머리통을 내려치며 주먹과 발길질이 오가는 상황이 그걸 말해준다. 이 드라마는 이화영이 대사 속에서 말한 것처럼 불륜이라는 상황 속에서 “끝까지 가보는”, 그래서 어떻게 될 것인가의 화학반응을 보는 쪽을 택했다.

남자라는 족속은 다 그렇다(?)
그런데 김수현의 직설화법 속에서 왜 유독 홍준표는 그다지도 입이 무거운 걸까. 혹 이유가 없는 건 아닐까. 그저 남자라면 다 그런 족속이라고 드라마가 말하는 건 아닐까. 적어도 등장하는 남자들의 면면을 볼 때 그런 혐의를 벗을 수는 없을 것 같다. 트렌디하기 이를 데 없는 불륜전과자(?), 허달삼(김병세)은 남자란 존재가 ‘다 그렇고 그런 수컷’이라고 말한다. 그의 대사를 보면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그 놈의 수컷 기질은 어쩔 수 없는 철없는 남자라는 존재가 그려진다. 불륜 사실을 알고 괴로워하는 지수(배종옥) 앞에서 오히려 더 열불을 내고 있는 은수에게 “당신도 처음이 제일 힘들었지?”라고 묻는 남자다.

불륜 사실이 밝혀지고 집 앞에서 어쩔 줄 몰라하는 홍준표를 데리고 가 코치랍시고 하는 대사들 속에도 남자는 없고 수컷만 존재한다. “무조건 빌어라. 빈다고 해결되지 않지만 그렇게 지나간다”는 게 허달삼이 코치한 내용이다. 중요한 건 이런 허달삼의 이야기를 홍준표 역시 듣고만 있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역시, “그게 통할까요?”라고 묻고, “차라리 한 일주일 숨었다가 오라”는 허달삼의 말에, “저도 그러고 싶어요.”라고 맞장구를 치는 캐릭터다. 여기서 그려지는 남자의 모습은 가정이 파탄 날 상황에서도 남자들은 저 혼자 도망칠 궁리만 한다는 것이다.

이 드라마가 그리고 있는 저질이고 철없으며 책임회피만 하면서 여자라면 사족을 못쓰는 남자들의 모습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준표의 아버지인 홍회장(최정훈)이 가정부의 가슴을 만지는 장면, “남자란 족속들은 나이가 드나 젊으나 마찬가지”라고 말하는 듯한 그 장면 속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건 남자가 아닌 수컷이다. 왜 이다지도 남자를 극단적인 모습으로 그려 가는 것일까. 이것은 그 남자가 침묵하고 있다는 것과 만나면서 드라마 속에 묘한 기류를 형성한다. 그것은 이 불륜 게임에서 남자를 소외시키고 여자들만의 대결구도를 만들어낸다. “남자들은 어쩔 수 없어. 그러니 우리가 해결해야되는 거야”라고 말하는 것이다.

여자들을 혹은 여자들만을 위한 드라마
김희애라는 팜므파탈이 탄생하는 것은 바로 이 여자들의 대결구도를 흥미진진하게 이끌기 위함이다. 적이 도무지 이가 들어가지 않는 인물이어야 대결은 더 극적으로 전개된다. 이 대결구도는 윤리적으로 말하면 선악구도가 너무나 명징해서 오히려 식상해진 설정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주로 여자와 남자의 대결이었던 과거의 선악구도와 달리 여자와 여자가 맞붙게 되자 이야기는 참신해진다. ‘내 남자의 여자’라는 관계 속에서 화영과 지수는 서로 자리싸움을 시작한다. ‘내 남자의 여자’는 화영의 관점에서 보면 지수가 되고, 지수의 관점에서 보면 화영이 된다. 여기서 변하지 않는 인물, 남자는 홍준표이고 그는 침묵을 통해 드라마 전체가 말해주는 ‘남자라는 속물’을 묵인하고 있는 셈이다.

‘내 남자의 여자’는 여자들을 위한 드라마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이 드라마가 불륜이란 소재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갖게되는 최대의 강점이 된다. 그러기 때문에 은수가 지수를 위해 화영을 찾아가 ‘박살을 내버리는’ 장면에서 “저런 언니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또한 이러한 여자들만의 구도 속에서 남자 캐릭터가 일방적으로 그려져 상황 자체에서 배제되는 것 역시 사실이다. 단 한 명 그렇게 그려지지 않는 유일한 남자인 지수와 은수의 친정아버지인 김용덕(송재호)이란 캐릭터가 있다는 건 그나마 다행이다. 적어도 아버지는 남자로 그려지고 있는 셈이니까 말이다.

김수현이 ‘내 남자의 여자’를 가지고 또 한번 시청자들의 가슴에 불을 확 질렀다. 들고 온 기름은 화력 좋기로 소문난 ‘불륜’이다. 기름 위에 얹어진 장작들도 여느 장작들과는 달랐다. 그저 불륜이란 소재에 기대 평이한 설정과 연기를 해 이제 식상해져버린 기존 불륜에 넣어진 장작들보다 몇 배는 더 잘 타들어가는 김희애, 배종옥, 하유미라는‘명품 장작들’이다. 그들의 혼을 불사르는 듯한 연기는 김수현이 내지르는 직설화법이란 기름을 만나 활활 타올랐다.

불륜 드라마가 나올 때마다 “이제 불륜 좀 그만해라”는 의견이 대부분이었던 것에 비하면 첫 방송을 끝낸 이 드라마의 반응은 남다르다고 봐야 한다. 그것은 자칫 불륜에 집중될 수 있는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리는 요소들이 있다는 것. 그 장본인은 김수현이란 작가와 작품 속에서 신들린 듯한 연기를 보여준 김희애라는 연기자다. 이 조합이 만들어내는 불륜드라마를 통해 역시 드라마는 소재보다 중요한 것이 완성도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불륜 드라마도 완성도 있게 만들어지면 인간 본질의 사랑 이야기로 발전하는 것인가.

‘내 남자의 여자’는 제목에서부터 느껴지듯 남자에 초점이 맞춰진 드라마가 아니다. ‘내 남자의’는 수식어고 결국 그 뒤에 붙는 ‘여자’가 중심이 된다. 그래서일까. 드라마는 아예 내놓고 여성 시청자들을 타깃으로 삼고 있다. 시작부터 중반까지 김지수(배종옥)의 일상을 따라가며 계속되는 대사들은 여성들의 수다에 가까우면서도 대단히 연극적이다. 일상적인 사설은 지겨울 정도로 쏟아져 나오고 그를 통해 관계는 ‘보여지기보다는 설명’된다. 드라마라는 영상언어가 있는데 왜 이렇게 대사중심의 극을 이끌어가는 것일까, 하고 의아해하게 된다. 혹 김수현이란 작가가 PD의 몫을 빼앗아간 건 아닐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게 된다.

하지만 결국 그 목적은 더 치밀한 데 있다는 걸 알게된다. 평온한 가족의 파티에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인물, 이화영(김희애)이 그 장소에 오기 전까지 거의 노출된 몸을 보여주었던 것은 그녀가 앞으로 불붙게 될 극적 순간을 예고했던 것이고, 유난히 천사표이자 세상물정 모르는 김지수가 그녀의 보호자격(적어도 불륜에 관해서는)인 김은수(하유미)와 너스레를 떨며 명랑한 하루를 보내는 장면 역시 그 순간의 폭발을 위한 장치였다. 물론 연극적인 대사 중심의 극 전개 역시 후에 벌어질 시각적 자극의 극대화를 보여주기 위한 장치로 보아야한다.

김수현이란 작가는 소위 작가들이 말하는 ‘눌러주기’의 대가이다. 한참 겉으로 도는 관계를 평이하게 눌러주다가, 어느 한 순간에 폭발시켜주는 것. 그것이 ‘내 남자의 여자’가 시청자들의 가슴에 불을 지르게 만든 요인이다. 이 정도 되면 김수현은 ‘언어의 마술사’라는 호칭이 무색하지 않을 장인임을 증명한 셈이다. 게다가 김수현은 ‘감춰지는 불륜’이 아닌 ‘드러내는 불륜’을 선택했다. 이 차이는 분명하다. 전자는 감춰진 게 드러나는 순간 맥이 빠져버리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불륜드라마 공식 속의 불륜이고, 후자는 드러낼수록 점점 더 강도가 높아지는 불륜이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김희애라는 연기자가 거의 완벽에 가깝게 소화해내는 이화영이란 캐릭터에 있다. 이 캐릭터는 불륜이 드러나는 순간, 자신의 잘못된 관계를 되돌리려 하기보다는 자포자기하면서 파멸을 향한 선택을 하는 인물이다. 즉 드러나서 해결되지 않고 드러나면 상황을 더 복잡하게 만드는 캐릭터란 얘기다. 여기에 맞상대역으로 먼저 등장하는 김은수 역의 하유미도 만만찮은 연기력을 과시한다. 이 팽팽한 대결구도 앞에서 더 몸서리처지는 것은 ‘지금 이건 맛보기에 불과해’라고 말하는 김수현 작가의 모습이 언뜻 보이는 것 같기 때문이다.

불륜드라마라고 무엇이 나쁠까. 불륜은 사실 저 드라마(drama)의 구조가 나왔던 그리스 로마 시대의 연극 속에서부터 지금까지 유구히 내려오는 전통적인 소재다. 그만큼 인간의 원초적인 모습을 담기에 용이하다는 말이다. 사회가 가진 가치개념과 인간의 욕망이 부딪치는 이 소재는 욕망을 가지고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이 존재하는 한 늘 유효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또 불륜이냐”는 목소리에는 우리 드라마가 다루었던 소재의 폭이 그만큼 좁다는 것에 대한 비판과 또한 같은 불륜이라도 너무 표피적인 자극으로만 다루었던 드라마들에 대한 비판이 들어있다.

김수현이 만든 불륜드라마는 일단 무언가 다를 것 같은 예감을 준다. 작가와 연기자들에게 신뢰가 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앞으로도 불륜을 통한 인간의 문제를 천착하지 않고 자극으로만 치닫게 된다면 또다시 비판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또 불륜이냐”는 말보다는 “불륜도 제대로 다루면 다르다”는 의견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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