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경’, 운명을 알면서도 피하지 않는 자의 쓸쓸함

원경

차주영이 이토록 매력적인 배우였던가. tvN, 티빙 월화드라마 ‘원경’의 힘은 이 배우의 아우라에서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다. 특히 우아함 속에 슬쩍 드러나는 쓸쓸한 눈빛은 작품 속 원경(차주영)이라는 인물의 깊은 내면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그 눈빛은 마치 앞으로 자신이 마주할 비극적인 운명을 알면서도 피하지 않는 자의 쓸쓸함을 담고 있다. 

 

‘원경’이 흥미로운 건 조선 초기의 혼돈기를 다루면서 이성계(이성민)와 이방원(이현욱)이 아닌 원경왕후라는 인물에 초점을 맞춘 점이다. 그 역사적 사실은 이미 여러 차례 사극으로 재현된 바 있어 누구나 다 알고 있지만 이처럼 관점을 바꿔 놓으니 또 다른 서사가 가능해졌다. 지금껏 주목하지 않았던 원경이라는 인물이 재조명되었고, 조선의 역사에 이 인물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가가 새삼 주목되게 했기 때문이다.

 

이 사극에서 이방원은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인물이다. 자신만의 조선에 대한 야망이 있었고, 그걸 펼쳐내기 위해 형제들마저 죽이는 난을 일으켰다. 여기에 격분한 이성계는 계속 해서 자신의 세력들을 동원해 이방원을 위협했다. 그건 왕의 입장에서 보면 역모에 해당하는 일이지만, 그 주축이 아버지라는 점은 이방원을 복잡한 심경 속에 빠뜨린다. 야망과 불안감 그리고 분노와 회한이 뒤섞여 흔들리는 그런 인물. 

 

이 인물을 붙잡아 주는 이가 바로 원경이다. 이방원이 감정이 폭발하고 마구 흔들리고 있을 때 원경은 흔들림 없이 차분한 모습으로 그를 붙잡아준다. 결단이 필요할 때는 이방원을 결심하게 만들고, 지쳤을 때는 기대게 해준다. 이성계가 군사를 일으켜 이방원을 위협할 때도 원경은 부자 관계인 그들의 연을 끊어지지 않게 하면서도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묘안을 내놓는다. 이성계 앞에 이방원 홀로 다가가게 한 것이다. 

 

하지만 이방원과 이성계가 그 깊은 갈등을 풀어내고 같은 목표를 갖게 되면서, 원경이 오히려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될 거라는 건 어느 정도 예측된 일이다. 이방원은 이성계와 마찬가지로 권문세족들의 힘을 약화시켜 왕권을 강화하려 했고, 그래서 특히 원경의 외척세력인 민씨 일가들과 대립하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원경은 이 사실을 알고 동생들인 민무구(한승원), 민무질(김우담)은 물론이고 아버지인 민제(박지일)에게도 자중하라는 조언을 해왔다. 

 

또 권문세력들의 힘을 누르기 위해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후 이방원과 새 조선을 만들어가겠다는 의지를 드러내지만, 원경의 이 마음이 자신의 집안 사람들과 같을 리가 만무다. 민무구와 민무질이 야망을 드러내고 그래서 결국 이방원에 의해 숙청되는 일이 예고된 이유다. 대범하기 그지 없는 원경이 동생들의 숙청까지는 받아들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이상의 위협이 다가올 때 과연 그것까지 받아들일 수 있을까. 

 

원경이 매력적인 건, 바로 그렇게 흘러갈 운명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이를 피하지 않고 걸어나가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 복잡한 내면을 차주영은 흔들리지 않는 차분한 어조와 어딘가 쓸쓸한 눈빛으로 표현해낸다. 이방원이 원경을 견제하기 위해 여러 후궁들을 들이고, 그들이 용종을 잉태해도 이 인물은 대담하고 대범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이다. “왕자를 낳으면 내 아들로 알고 키우면 그만이네”라고 말하는 대범함이라니.

 

이토록 왕후로서의 대범함을 가진 인물이지만 남편 이방원에 대한 애증 또한 원경은 드러내는 인물이다. “그대는 결국 나의 사랑을 잃게 될 것이오”라고 말하는 이방원에게 원경은 “전하의 사랑을 잃는 것이 저를 잃을 이유가 되지는 않습니다”라고 말하고는 사가로 떠난다. 그리고 그 곳에서 결국 원경이 보고싶어 찾아온 이방원을 맞이한다. 또 이성계와 일전을 벌이기 위해 떠나는 이방원에게 합방을 스스로 요청해 자신의 뜨거운 사랑을 드러낸다.

 

왕후로서의 면모와 더불어 한 여인으로서의 모습을 모두 가진 이 인물이 이토록 매력적으로 그려질 수 있었던 건 다름 아닌 차주영의 깊이 있은 내면연기 덕분이다. 특히 강인함 속에 언뜻 드러나는 쓸쓸한 눈빛은 이 인물에 대한 연민의 감정마저 느끼게 만든다. 흔들리지 않는 자에게서 언뜻 비쳐지는 감정만큼 보는 이들의 마음을 뒤흔드는 게 있을까. 차주영은 원경이라는 인물을 통해 그걸 꺼내 보여주고 있다. (사진:tvN)

그래도 <달의 연인>에는 이준기와 강하늘이 있다

 

SBS 수목드라마 <달의 연인>에서 이준기의 존재감은 갈수록 무게감을 더해간다. 그가 연기하는 왕소라는 캐릭터는 이 황궁에서 살아가는 다른 황자들과는 이질적이다. 얼굴에 난 상처와 그 상처를 가린 가면은 그의 이질적인 캐릭터를 특징적으로 보여준다. 어린 나이 어머니 황후 유씨(박지영)에 의해 상처를 입고 버려진 이 비극적인 인물은 스스로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공포의 존재, ‘늑대개로 자신을 세운다.

 

'달의 연인(사진출처:SBS)'

그가 정윤 왕무(김산호)를 대신해 살수들을 뒤쫓아 그 본거지를 찾아낸 후, 그들이 황후 유씨의 명령에 의해 움직이는 인물들이라는 걸 알고는 모조리 도륙하고 불을 질러버리는 대목은 그의 캐릭터를 잘 보여준다. 그는 황후 유씨에 대한 애증으로 가득하다. 자신을 버리고 사지로 내모는 것에 대한 분노를 갖고 있지만, 그들을 모두 도륙한 후 유씨를 찾아온 그는 그녀가 연루된 걸 모두 숨기기 위해 불을 질렀다고 말한다. 그는 여전히 어머니 황후 유씨의 관심을 갈구한다.

 

상처 입은 짐승 같은 그를 똑바로 쳐다보고,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지지 않고 토를 다는 해수(이지은)는 그래서 바로 그것 때문에 그의 마음을 움직인다. 그는 해수에게 묻는다. “내가 무섭지 않냐. 왕소는 상처 입은 자신의 얼굴을 두려움을 느끼지 않고 똑바로 쳐다봐 주는 해수를 통해 조금씩 닫혔던 마음을 허문다. 왕소의 존재감은 이렇듯 강렬한 상처 입은 짐승이 해수라는 한 여인을 만나 조금씩 마음이 풀어지는 그 지점에서 생겨난다.

 

이준기는 눈빛 하나로 이 왕소의 심경변화를 연기한다. 얼굴 가득 피칠갑을 한 채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을 통해 그의 내면 가득한 분노를 표현해낸다면, 그런 그가 해수 앞에서 살짝 풀어진 웃음기 머금은 눈빛으로 변할 때는 마음에 피어나는 변화를 그 안에서 느낄 수 있다. 얼굴 한 쪽을 거의 가린 채, 눈빛 하나로 이런 감정의 교차를 표현해내는 건 역시 이준기의 진가를 느낄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한편 해수를 사이에 두고 대척점에 서 있는 왕욱을 연기하는 강하늘 역시 감정을 억누르는 인물이다. 그는 본처인 해씨부인(박시은)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지만 마음을 주지는 못한다. 하지만 왕욱은 타인에 상처를 주지 못하고 차라리 자신이 상처를 입으려는 책임감 강한 선한 인물이다. 그는 끝까지 해씨부인의 옆을 지키려 하지만 그녀는 그의 마음이 해수를 향해 있다는 걸 알고는 죽음 직전 그에게 해수를 부탁한다.

 

강하늘 역시 그 반쯤 풀린 듯한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하는 모습이 그 억눌린 캐릭터를 잘 설명한다. 하지만 강하늘의 왕욱 연기에서 주목할 만한 건 그 목소리다. 그는 이 사극에서 가장목소리를 낮춰 작게 말하는 연기를 보여준다. 하지만 그 낮고 작은 목소리가 어찌된 일인지 더 진중하고 깊게 시청자들의 귀에 박힌다. 목소리 자체는 낮고 작지만 그것이 억누르고 있는 깊은 감정 같은 것들이 거기에 묻어나기 때문이다.

 

사실 <달의 연인>은 쉽지 않은 싸움을 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시청률은 난항이고, 연기력 논란은 그칠 줄 모른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이 사극에 어떤 변화와 희망이 있다면 그건 바로 이 이준기와 강하늘이 보여주는 연기와 그 캐릭터들의 힘에 있다고 할 것이다. 이준기의 눈빛 연기와 강하늘의 목소리. 이 사극의 많은 단점들을 충분히 채워줄 만큼 그 매력이 충분하다

<그 겨울> 빛낸 조인성과 송혜교의 연기

 

어디를 바라보는지 모를 송혜교의 텅 빈 눈빛은 단지 시각장애인이라는 캐릭터를 넘어서 그 안에 담겨진 알 수 없는 공허함과 체념, 절망을 담고 있었다. 돈 때문에 자신에게 접근해 오빠 행세를 하려는 오수(조인성)에게 “사랑 따윈 필요 없어!”하고 외치는 오영(송혜교)의 그 대사 속에는 역설적으로 그녀에게 지금 절실히 필요한 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을 말해주었다.

 

'그 겨울 바람이 분다'(사진출처:SBS)

반면 버려진 길바닥 삶에서 그저 죽지 못해 살아가는 오수는 멀쩡한 눈을 갖고 있으면서도 삶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공허한 눈빛을 보여주었다. ‘삶의 의미’ 따위는 필요 없다고 외치는 그지만 그것 역시 거꾸로 그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삶의 의미’라는 걸 말해주었다. 청부폭력배인 조무철(김태우)에게 칼을 맞고 죽음을 느낀 후에야 그저 “살아있으니 살아 봐야겠다”는 그는 그래서 그 삶의 이유를 찾는 중이다.

 

<그 겨울, 바람이 분다(이하 그 겨울)>가 첫회 파격적인 1,2회 연속 편성을 했지만 그 144분이 언제 지나갔는지도 모를 정도의 몰입감을 주었던 것은 이 두 인물이 주는 절망감이 그 눈빛만으로도 절절하게 묻어났기 때문이다. 재벌가의 상속녀와 길거리 건달이라는 전혀 다른 환경 속에 있지만, 그들을 묶어주는 건 이 공통된 절망감이다. 비록 그것이 ‘돈’이라는 매개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그저 겉으로 드러나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이미 1년 전 오누이가 아니라 남남으로 만났던 그들이 1년 후 오누이 행세를 하는 건 마치 양자가 심적으로 합의한 연기처럼 보인다. 오영은 오수가 진짜 오빠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누구라도 곁에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 그를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이고, 오수 역시 돈을 뜯어내기 위해 오영에게 접근하지만 단지 그 이유 때문만으로 그녀를 애잔하게 바라보고 있지 않는 듯하다.

 

지하철역에서 돈이 목적이라면 지금 자신의 등을 밀라며 지하철로 뛰어드는 오영과 그런 그녀를 내버려두기보다는 애써 살려내려는 오수의 절박함에는 이 오누이 연기에 가려진 속내가 드러난다. 그들은 그렇게 서로의 절망과 상처를 위무해주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물론 그것은 오누이라는 가짜로 만들어진 외적 관계 때문에 결국 파국을 예고하지만.

 

이미 일본드라마 <사랑 따윈 필요 없어, 여름>으로, 또 문근영이 주연을 맡았던 영화 리메이크작 <사랑 따윈 필요 없어>로 익숙할 수 있는 작품이지만 <그 겨울>이 전혀 다른 느낌을 주는 것은 노희경이 가진 특유의 진지함과 조인성, 송혜교의 놀랍도록 발전한 내면 연기가 감각적인 연출과 잘 어우러져 있기 때문이다. 사랑과 삶에 대한 의미를 추구하는 노희경 특유의 색채는 보호본능을 일으키는 상처받은 수컷 눈빛의 조인성과 절망과 공허함을 눈빛 하나에 담아내는 송혜교의 연기와 맞물려 극적 긴장감을 만들어내고 있다.

 

무엇보다 깊어진 송혜교의 연기는 <그 겨울>이라는 작품의 쓸쓸한 정서를 충분히 담아내고 있다고 여겨진다. 어디로 튈 지 알 수 없는 절박한 삶 속에서 뛰어다니는 조인성을 따뜻한 사랑과 삶으로 잡아끄는 송혜교는 그래서 그 시각 장애라는 틀이 오히려 하나의 흡인력이 되게 만들고 있다. 144분 간의 몰입감은 그래서 이 작품에 대한 기대감을 높여놓기에 충분했던 시간이다. <그 겨울> 바람이 불 것 같은 예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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