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션? 스타? 대학문화 실종도 문제다

 

MBC 대학가요제는 결국 폐지를 결정했다. 작년 폐지 이야기가 나왔다가 대학가요제 출신 가수들의 반발이 있었고 그래서 올해 다시 재개할 것이라는 발표가 나왔었다. 하지만 최종 폐지 결정이 내려진 데는 더 이상 대학가요제를 운영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별 의미가 없다는 판단 때문이다.

 

'대학가요제(사진출처:MBC)'

알다시피 오디션 트렌드는 기존 가요제를 구식의 시스템으로 만들었다. 대학가요제나 강변가요제 같은 가요제가 가수의 등용문이 되었던 시절은 이미 지나버렸다. 최근 몇 년 동안 가요제 출신 스타가 배출되지 못했던 현실은 이러한 변화를 잘 말해준다.

 

기존 가요제가 구식이 되어버린 이유는 오디션 트렌드로 가수의 탄생과정이 결과 자체보다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가요제는 마지막 무대에서 기량을 선보이고 심사위원이 상을 결정하는 식으로 진행된다. 오디션이 일반 대중들의 참여에 의해 당락이 결정되는 과정을 거치는 것과는 사뭇 폐쇄적인 방식이다. 결과에만 집중하는 가요제의 구태의연한 형식이 달라진 대중들의 욕구를 전혀 반영하지 못하는 것.

 

물론 이런 형식의 문제는 언제든 가요제가 바꿀 수도 있다. 하지만 이미 오디션 트렌드가 일반화된 상황에서 대학생들만의 가요제라는 틀은 어딘지 시대착오적인 느낌을 준다. 대학을 들어가건 못 들어가건 노래 잘하고 음악 잘 만드는 지망생들은 넘쳐난다. 그러니 대학생들만의 가요제는 저들만의 성을 쌓고 있는 인상을 주기 마련이다.

 

과거 대학가요제가 대중들에게 주목될 수 있었던 것은 대학이라는 선망이 한 몫을 차지하고 있었고, 그런 지성인들이 벌이는 음악의 향연이라는 점이 어떤 특별한 정서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대학을 보라. 대학이 과연 선망의 대상인가. 대학은 취업을 위한 치열한 전장터가 되어 있다. 대학이 사회의 변화에 선봉적인 역할을 하던 시대도 이미 지나버렸다. 청춘의 도전과 낭만? 그런 게 지금 대학이라는 이름에서 떠오르는가.

 

대학생이라는 특권적 위치에 대해 대중들이 납득할 수 있는 분위기라면 어쩌면 대학가요제가 존속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반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학문화가 점점 실종되어가고 대학을 특권으로 바라보기를 원치 않는(정서적으로 그렇다는 얘기다) 대중들에게 대학가요제는 저들만의 리그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결국 대중들이 참여할 수 없는 가요제란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다.

 

대학가요제 폐지는 물론 아련한 향수를 갖고 있는 이들에게는 아쉬운 일이지만 어찌 보면 당연한 결정이다. 이제는 대학가요제 폐지를 두고 방송사의 공영성을 운운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대학가요제가 없어서 가수 지망생들의 등용문이 사라지는가. 그게 아니라면 대학가요제가 없어서 대학문화가 실종되는가. 가수 지망생들의 등용문은 오디션쪽이 훨씬 넓어졌고 더 효과적인 방식이 되었다. 대학문화? 대학가요제 살린다고 생겨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대학가요제의 폐지는 그래서 시대의 트렌드가 바뀌고 있는 것을 말해주지만 동시에 대학이 사회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던 시대가 이제는 저물어가고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대학이 지성인의 공간이 아닌 미래의 스펙으로 받아들여지는 현실에서 대학생들만의 축제란 대중들에게는 위화감만을 줄 뿐이다.

왜 노는 것은 나쁜 것이 되었나

왜 ‘고고70’일까. 이 영화의 제목은 70년대로 가자는 뜻일까. 제목으로만 보면 이 영화는 또 하나의 복고풍을 겨냥한 영화 정도로 보인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고고’란 조금 다른 의미로 사용된다. 이병욱(이성민)이라는 팝 칼럼니스트는 닐바나라는 고고클럽을 열면서 이런 말을 한다. “이...밤이 너무 조용해, 좀 시끄러웠으면 좋겠어.”

‘고고 70’의 ‘고고’는 개발의 시대, 피곤한 청춘들의 해방구라는 의미로서도 쓰인다. 영화 속에서 마치 노홍철이 과거로 돌아간 듯이 연거푸 소리치는 “그래 가보는 거야!”하는 대사는 군사정권으로 인해 모든 게 통제 속으로 빨려 들어가던 70년대에서 그래도 ‘한번 저질러보자’는 막가파식 청춘(?)들의 외침이다.

군사정권이 통행금지로 통제하려던 밤, 청춘들은 지하로 모여들어 그 답답한 숨통을 트이려 한다. 데블스는 그들을 광란의 시간으로 인도하는 밴드. 기지촌에서 술취한 미군들과 양공주들을 상대로 연주하던 그들은 상경해 서울을 순식간에 고고 열풍으로 몰아넣는다. 여기서 ‘고고’는 이른바 고고클럽을 지칭하는 그 춤을 말하는 것으로 극중에서는 이병욱이 만들어내는 단어다.

긴급조치9호가 발표되면서 퇴폐, 향락으로 몰려 일제 단속에 스러졌던 청춘들. 안기부에 끌려가 대마초를 한 동료 이름을 대라며 갖은 고문을 받는 상규(조승우)가 “지미 핸드릭스요”라고 하는 말에는 기막힌 시대의 아픔과 함께 어떤 젊음의 반항 같은 통쾌함도 느껴진다. 온몸의 멍을 드러낸 채 목욕탕에 앉아 신세한탄을 하며 “대학생들은 아무리 때려도 이름은 안 부는데 우리 같은 놈들은 한 대에 한 명씩 분다더라. 그래서 우리가 딴따란가봐.”하는 말에는 당대 음악인들이 가졌을 딴따라라는 자조감을 엿보게 해준다.

그들은 당대의 투쟁가도 아니었고 혁명가도 아니었다. 그들이 하려는 것은 그저 “놀자”는 것. 그 청춘들의 특권이기도 한 “놀자”는 단순한 권리가 인정되지 않는 시대를 돌아보며 그만큼 절실했던 음악을 향수하게 만든다. 하지만 바로 이 음악의 “놀자”는 주장은 지금 시대에 TV를 켜면 어디든 등장하는 풍경들이다. 그것은 ‘순수함의 상징’이라는 대학가요제도 예외는 아니다.

긴급조치9호로 음악에 드리워진 퇴폐, 향락의 이미지를 쇄신하기 위해 만들어진 대학가요제는 음악에 굳이 지성을 연결시키려는 의도가 짙었다. 하지만 ‘대학생만의 순수함, 도전정신’을 강조하던 대학가요제는 어찌 보면 청춘들의 음악에 또 하나의 틀을 만들어 놓았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대학가요제는 과거의 그것과는 달라졌다. 과거 대학생들의 음악발표회 같은 느낌을 주던 대학가요제는 언제부턴가 축제의 장으로 변모했다.

32회 대학가요제에서 심사위원장이었던 이정선씨가 우려 섞인 목소리로 대학생만의 패기보다는 상업음악화 되어가는 대학가요제를 말한 것에는 그런 뉘앙스가 들어가 있다. 대상을 탄 무려 16명의 혼성밴드인‘파티캣츠’의 퍼포먼스는 음악을 갖고 노는 자들의 그 순수한 즐거움을 보여주었다. 데블스가 만일 이 장면들을 보았다면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지 않았을까. 이 놀이의 장이 되어가는 대학가요제는 우려보다는 오히려 즐기는 음악으로의 바람직한 회귀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여전히 ‘대학’이라는 벽을 거기에 세워두는 것이 온당한지는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시대의 억압을 넘어서기 위해 대학가요제가 굳이 음악을 지성과 연결되는 거창한 그 무엇으로 연결시킨 것은 훌륭한 기획임이 분명하지만, 이제 그 억압이 사라진 시대에 음악을 여전히 그런 시선으로 바라보는 건 온당치 않다. 심사위원으로 나온 김하늘이 “난 고1 때 중퇴했다”고 말하고, 김장훈이 “자기는 고2 때”라고 말할 때 아무 거리낌없이 관객과 시청자들이 웃는 시대에 굳이 대학가요제라는 틀을 유지할 필요가 있을까. 이제 고졸이어도 음악을 좋아하면 언제든 가요제라는 기회를 얻을 수 있어야 마땅한 시대다.

시대가 만들어놓은 음악을 하면 딴따라라는 자조감, 따라서 대학생이라는 라이센스가 있어야 음악을 할 수 있다는 암묵적 동의는 지금도 많이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편견들이다. 음악이 있고 춤이 있고 청춘이 있으면 그만이던 ‘고고70’의 그 짧았지만 대중문화가 꽃을 피웠던 그 시기의 자유분방함이 그리운 건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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