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로무비

전라북도 무주는 반딧불이 축제로 유명한 곳이다. 그런데 이 곳은 언젠가부터 영화제도 유명해졌다. 이름하여 무주산골영화제. 올해로 벌써 13회를 맞는 영화제다. 이 곳이 반딧불이와 더불어 영화제로 유명해진 건, 상대적으로 다른 지역에 비해 밤에 불빛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곳 ‘산골’에서는 영화제에 야외에서 영화를 본다. 영화 ‘시네마 천국’의 한 장면같은 로맨틱한 광경이 펼쳐진다. 밤이 낮처럼 밝은 도시라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어둡기 때문에 오히려 빛이 더 잘 보이고, 그래서 삼삼오오 모여 영화를 보는 이들의 마음은 더더욱 따뜻해진다. 어둡기 때문에 더 빛나는 별과 달을 볼 수 있다는 역설. 어찌 보면 우리네 삶이 그렇지 않은가. 

 

넷플릭스 드라마 ‘멜로무비’는 바로 이 무주산골영화제를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다. 단역배우인 고겸(최우식)은 세상 걱정 하나 없어 보이는 청춘이다. 영화 촬영현장에서 ‘똥강아지’처럼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지친 사람들마저 웃게 만든다. 그런 그의 눈에 현장에서 일하는 스텝 김무비(박보영)가 들어온다. 이름 때문에 관심을 갖게 됐지만, 어딘가 사람들과 거리를 두는 듯한 그녀의 그늘이 자꾸만 고겸의 눈에 들어온다. 김무비의 그늘은 아빠에 대한 상처 때문이다.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늘 가족을 떠나 영화판을 전전했던 아빠의 꿈은 영화감독이었다. 하지만 이렇다할 영화 한 편 내놓지 못하고 먼저 세상을 떠난 아빠에 대한 애증은 그 누구에게도 쉽게 정을 주지 못하는 그녀를 만들었다. 그런데 고겸은 그런 깊은 어둠 속에 있는 김무비에게 다가와 한없는 해맑음으로 그녀의 마음을 여는데 그건 마치 한 편의 영화 같다. 김무비 같은 깜깜한 어둠 속에 비춰진 고겸 같은 빛이라 더 따뜻하고 선명한 한 편의 멜로영화 같달까.

 

그런데 한꺼풀 더 인물 속으로 들어가 보면 고겸의 그 해맑음의 이면에는 어두운 과거의 그늘이 숨겨져 있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셨고 형과 단둘이 세상을 살아내야 했던 어린 고겸이었다. 자신을 부양하기 위해 일하러 나가는 형은 그를 비디오가게에 맡겼고, 어린 동생은 혼자 있는 시간들을 영화를 보며 보냈다. 영화는 고겸에겐 그래서 단순히 재미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그 혼자 있는 외로움을 애써 잊게 해주는 것이었다. 고겸은 어두운 삶의 터널 속에서 그 어둠을 바라보기보다는 빛을 애써 찾으려 하는 사람이 됐다. 김무비가 유독 그에게 신경쓰였던 건 그 그늘에서 자신의 어둠을 봤기 때문이었다. 

 

‘멜로무비’는 단역배우였지만 평론가가 된 고겸과 스텝으로 일하다 영화감독이 된 김무비가 사랑하고 예기치 않은 일로 이별하게 되지만 다시 만나 사랑을 엮어가는 과정을 통해 과거의 아픔들을 조금씩 치유해가며 성장하는 이야기를 그린다. 여기에 고겸의 절친인 홍시준(이준영)과 손주아(전소니)의 또 다른 사랑과 성장 스토리가 더해진다. 음악을 꿈꾸던 홍시준과 그의 뮤즈였던 손주아가 각자의 꿈을 위해 헤어질 수밖에 없었지만, 한 편의 영화를 통해 음악감독과 시나리오 작가로 다시 만나 과거의 상처를 회복해가는 이야기다. 그래서 ‘멜로무비’는 고겸과 김무비 그리고 홍시준과 손주아의 사랑이야기를 그리지만 동시에 한 편의 영화를 중심으로 평론가, 영화감독, 음악감독, 시나리오 작가가 어우러지는 작업 과정 또한 담고 있다. 

 

‘그 해 우리는’으로 잘 알려진 이나은 작가는 이번 작품에서도 최우식을 자신의 페르소나로 세웠다. 워낙 최우식을 잘 알아 이를 고겸이라는 인물에 녹여낸 덕분에, 최우식의 매력은 도드라진다. 지금껏 밝은 모습으로만 대중들에게 각인되어 왔던 박보영의 그늘을 느낄 수 있는 연기변신도 주목할만하고, 까칠하지만 그 뒤에 어린아이가 숨겨진 듯한 홍시준을 연기한 이준영과, 사랑하지만 과거에 머물러 있는 홍시준이 현재로 나올 수 있게 아픈 이별을 선택하는 손주아 역할의 전소니의 연기도 인상적이다. 

 

사랑을 담은 청춘멜로지만 사람과 삶이 보이는 드라마다. 어찌 보면 삶이란 어둠 속을 홀로 걸어가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누군가의 온기를 찾고 어둠 저 편의 달을 찾는다. 무겁디 무거운 삶의 무게 앞에서 시시콜콜한 멜로영화 한 편이 주는 위로는 그래서 더더욱 크고 따뜻하다. (글:일간스포츠, 사진:넷플릭스)

박보영과 최우식의 ‘멜로무비’, 영화 같은 사랑에 담은 사람이야기

멜로무비

아홉 살에 세상의 모든 영화를 다 보겠다고 마음 먹는 아이는 영화가 그리도 좋았던 걸까. 아니면 홀로 어두운 밤을 보내야 하는 시간들이 그만큼 힘겨웠던 걸까. 넷플릭스 드라마 <멜로무비>는 부모를 일찍 잃고 형과 함께 비디오가게에서 살며 밤새 비디오를 보는 고겸(최우식)으로부터 시작한다. 어두운 방안을 빛으로 채워주는 영화에 빠져드는 아이 고겸으로부터. 

 

영화를 좋아해서일까. 스물 여섯 살이 된 고겸은 배우로서의 꿈을 키우며 영화판에 들어왔다가 김무비(박보영)라는 독특한 이름을 가진 연출 스태프에게 빠져든다. 무비라는 이름이 고겸을 잡아끌었지만, 정작 무비는 자신의 이름이 싫다. 영화 판에서 일하다 과로로 일찍 사망한 아버지에 대한 애증 때문이다. 가족까지 등지고 열심히 영화를 향한 꿈을 펼쳤지만 이렇다할 영화 한 편 제대로 내지 못했던 아버지. 그렇게 일찍 떠난 아버지에게 무비는 그가 얼마나 한심한 사람이었는가를 보여주겠다며 영화판에 뛰어든다. 

 

그렇게 두 사람은 영화 촬영현장에서 만난다. 한 사람은 영 연기에는 재능이 없어보이지만 사람이 좋아 누구나 좋아하는 너스레 가득한 청년이고, 다른 한 사람은 스텝으로 일하고 있지만 한 발 물러나 섬처럼 그들과는 섞이지 않는 조용한 청춘이다. 고겸은 마치 주인 따라 다니는 댕댕이처럼 김무비를 졸졸 따라다니고 그런 고겸에게 어느 눈오는 날 김무비는 첫 키스를 한다. 마치 영화 속 한 장면 같은 키스를.

 

하지만 삶이 어찌 영화 같은 순간들로 채워지랴. 그 키스를 한 날 이후 갑자기 고겸은 사라져버리고 김무비는 기다리다 지쳐 마음을 접는다. 아버지가 갑자기 떠났을 때 누군가에게 마음을 준다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가를 알았던 무비였다. 그래서 누구와도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던 그녀였다. 하지만 겨우 고겸에게 마음을 열었을 때 다시금 찾아온 건 그 고통이었다. 

 

고겸 또한 힘겨운 시간들이었다. 갑작스런 자동차 사고로 형은 회복하기 어려워보였지만, 고겸의 정성스런 간병으로 다시 살 수 있게 됐다. 그렇게 5년의 시간이 흘렀고, 고겸은 간병하며 할 수 있는 글을 쓰다 영화 평론가가 된다. 무비는 고겸을 마음 속에 지워내며 영화 감독의 길을 걸어간다. 

 

한편 고겸의 어린시절부터 절친이었던 시준(이준영)과 주아(전소니)는 서로 사랑하는 연인 사이였지만 어느 날 주아는 영화 시나리오를 쓰겠다며 떠나버린다. 음악의 꿈을 갖고 있고 재능도 있었지만 빛을 보지 못한 시준은 자신의 뮤즈인 주아를 잃은 그 시간 속에서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다시 나타난 주아가 시준에게 자신이 만들 영화의 음악감독이 되어달라 요구하면서 이들의 손에 닿지 않는 아픈 사랑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멜로무비>는 미래의 꿈 앞에서 불안해하고 때론 예기치 않은 일들 때문에 흔들리면서도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서로 사랑하게 되는 청춘남녀들의 멜로를 그리는 작품이다. 평론가와 영화감독 그리고 시나리오 작가와 음악감독이라는 네 인물의 직업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이들이 연인과 친구로 얽혀 그려내는 사랑과 우정의 이야기면서 동시에 이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영화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해 우리는>을 쓴 이나은 작가의 색깔 그대로 <멜로무비>는 풋풋하고 경쾌한 청춘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그 밑바탕에는 생각보다 쓰디 쓴 삶의 서사가 담겨져 있다. 그 고통스런 삶의 모습이 밝게 그려지는 건 다름 아닌 어떤 힘겨운 상황 속에서도 그 밝음을 잃지 않는 고겸이라는 인물 덕분이다. 그는 아홉 살 어린 나이에 홀로 비디오가게에서 살아가며 일하러 간 형을 기다리며 살아야 했지만, 그 시간을 영화를 보는 즐거움으로 채웠던 아이였다. 

 

이 지점은 <멜로무비>가 가진 웃음과 행복감 가득한 사랑이야기에 삶의 무게감이 얹어지는 대목이다. 알고 보면 모두가 저마다 무거운 삶을 짊어지고 있었다는 걸 <멜로무비>는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들을 담담히 보여주면서 조금씩 꺼내 놓는다. 갑자기 사망한 부모 대신 이제 겨우 이십대에 덜컥 동생을 부양해야 했던 형, 그 형이 사고를 당하자 모든 일을 접고 형을 간병해 살려낸 동생, 영화의 꿈을 꿨지만 현실의 무게에 무참히 꺾여버린 아버지, 그 아버지와의 시간이 간절했지만 먼저 떠나버린 아버지에 대한 상처 때문에 마음을 닫아버린 딸, 남자친구의 뮤즈가 되어 응원했지만 점점 자신이 사라지는 걸 알고는 떠날 수밖에 없었던 여자와 그 여자가 떠난 후 그 시간대에 머물러 살게 된 남자...

 

발랄하게 그려져 있지만 그 안을 들여다 보면 <멜로무비>에는 고통스런 삶들이 군데군데 숨겨져 있다. 하지만 그 고통스런 삶들을 버텨낼 수 있게 해주는 건 반짝반짝 빛나는 일상의 순간들이고 어쩌면 한 발 물러나 그 삶을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시선이라고 이 작품은 말하는 듯 하다. 그건 마치 영화를 닮았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오히려 빛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그 속으로 우리를 인도해 잠시 아픈 현실을 잊게 해줌으로서 또 그 어둠 바깥으로 나오게 해주는, 영화를. 

 

고겸과 무비가 어느 어두운 밤 한적한 곳에서 오픈카에 앉아 달달한 사랑이야기를 나눌 때 저 편에 보이는 달은 그래서 <멜로무비>가 하려는 이야기를 그림 한 폭에 담아 놓는다. 이토록 고통스러운 어둠 가득한 삶 속에서 저 달처럼 빛나는 달달한 멜로영화 한 편이 주는 위로는 우리가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힘이라는 것. 그렇게 사랑이야기가 사람이야기가 되고 달달함이 묵직한 감동으로 이어지는 작품, 바로 <멜로무비>다. (사진:넷플릭스)

‘지금 거신 전화는’, 유연석이 보여준 로맨스릴러의 정석

지금 거신 전화는

냉탕과 온탕을 오간다. 차가운 눈빛을 날릴 때면 모든 걸 얼려버릴 것 같은 서릿발이 느껴지지만, 그 눈빛이 한없이 풀어지면서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물기를 머금을 때 따뜻하고 뜨거운 이 인물의 숨겨졌던 속내가 드러난다. 차가움이 강렬할수록 뜨거움도 강렬해지는 냉온을 오가는 연기. MBC 금토드라마 ‘지금 거신 전화는’에서 유연석이 보여주는 이 냉온 연기는 살벌한 스릴러와 달달한 로맨스의 양극단을 오가는 ‘로맨스릴러’를 탄생시켰다. 

 

시작은 스릴러였다. 앵커 출신으로 대통령실 대변인의 자리에 오른 백사언(유연석)과 어린시절 자동차 사고의 충격으로 함묵증에 걸린 채 수어 통역사로 일하는 백사언의 아내 홍희주(채수빈). 이들이 쇼윈도 부부라는 사실은 어느 날 홍희주가 괴한에게 납치되면서 드러난다. 납치범의 협박에도 장난전화인 줄 알고 죽일 테면 죽이라는 백사언의 말에 홍희주는 분노한다. 결국 사고를 내고 납치범의 핸드폰을 습득한 홍희주는 드디어 숨겨진 자신의 비밀과 속내를 드러낸다. 

 

함묵증에 걸려 말을 못하는 척 해왔지만 사실은 말을 할 수 있는 홍희주는 그 핸드폰을 계기로 백사언에게 수시로 전화해 납치범인 척 협박을 하고, 그간 숨겨왔던 분노를 터트린다. 그런데 어딘가 백사언은 이 전화의 주인공이 홍희주라는 걸 조금씩 알아채고, 그래서 이 전화 통화를 통해 그녀의 진심 또한 조금씩 알게 된다. 납치범의 전화가 침묵을 강요받아 왔던 홍희주의 입을 열게 만들고, 또 그 진심을 백사언이 듣게 만들어준 것이다. 이 지점에서 스릴러는 서서히 로맨스로 방향을 튼다. 냉랭하기만 했던 두 사람의 관계는 변화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백사언과 홍희주가 점점 가까워지고 마음을 열게 되는 로맨스의 과정과 동시에 납치범의 테러가 계속 이어진다. 그런데 이 테러가 야기하는 불안과 위기는 백사언과 홍희주의 서로에 대한 마음을 점점 깊어지게 만든다. 즉 납치범에 의해 때론 백사언이 또 때론 홍희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이들은 서로를 걱정하고 구해내려 온 몸을 던진다. 위협적인 상황 속에서 서로를 지켜주려는 마음이 커지는 것. 바로 이것이 스릴러와 로맨스가 연결되는 지점이다. 그러면서 이 작품은 과거 백사언과 납치범 사이에서 벌어졌던 사건의 진실을 향해 나아간다. 

 

‘지금 거신 전화는’은 사실 잘 들여다보면 과연 저게 가능할까 싶은 상황들이 적지 않다. 예를 들면 홍희주가 언니 대신 백사언과 결혼하는 설정이나, 그렇게 결혼 후 2년 간이나 말 못하는 것처럼 속여가며 부부생활을 해오는 설정 같은 것들이 그렇다. 또 납치범에게 납치되었다가 그가 쓰던 음성변조 핸드폰을 홍희주가 습득하는 과정도 어딘가 허술한 면이 있다. 마치 홍희주가 그 핸드폰을 갖게 만들기 위해 납치범을 허술하게 만든 작가의 의도가 너무 드러난다고나 할까. 

 

이처럼 개연성은 부족하지만 시청자들은 마치 드라마게임을 보듯 어쨌든 전개된 상황 속에서 두 인물의 감정 변화에 빠져든다. 백사언이 홍희주에게 냉랭하게 대했던 그 감정들이 사실은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또 대타로 결혼해 자신에게는 관심이 없을 거라 여겼던 홍희주가 진짜 속내를 드러내자 백사언의 감정은 더욱 폭발한다. 즉 개연성이 부족해도 계속 벌어지는 사건들 속에서 두 사람의 감정이 커져가는 그 모습에 시청자들은 빠져든다. 

 

그런데 여기서 이들의 감정에 빨려 들게 만드는 건 다름 아닌 유연석의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감정연기다. 찬바람이 쌩쌩 부는 냉담한 얼굴에서 시작해, 그 이면에 숨겨져 있는 아내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츤데레적으로 드러나고, 그 속내가 완전히 밝혀진 후에는 더할 나위 없는 사랑꾼의 모습으로 변모한다. 위기에 처한 홍희주를 향해 달려나가는 유연선의 절절한 모습은 보는 이들을 뭉클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지금 거신 전화는’은 스릴러가 풀어가는 진실에 대한 궁금증이 드라마의 한 축이고, 그 과정에서 서로에 대한 오해를 풀고 백사언과 홍희주의 사랑이 커져가는 과정이 드라마의 또 한 축이다. 그래서 이 두 바퀴를 동력 삼아 드라마는 쉬지 않고 달린다. 유연석의 냉온을 오가는 연기는 그 바퀴에 추진력을 더해줬다. 그의 이 몰입감 넘치는 감정 연기가 있어 스릴러의 냉탕과 로맨스의 온탕을 오가는 이 독특한 작품이 설득력을 얻을 수 있었다. (사진:MBC)

“누구라도 상관없어...” 신혜선의 상처를 치유시킨 강훈의 고백(나의 해리에게)

나의 해리에게

“전 상관없어요. 혜리씨. 왜냐하면 난 그냥 혜리씨가 있어주기만 하면 되거든. 내 옆이 아니어도 살아서 건강하기만 하면 난 그걸로 충분해요. 날 사랑하지 않아도 되고 다시 숲으로 들어간대도 난 괜찮아. 원하면 내가 거기 같이 가줄 수도 있어요. 나 진짜 다 버리고 같이 가줄 수 있어요. 그딴 건 조금도 무섭지 않아요. 혜리씨. 왜냐하면 전요 혜리씨. 처음부터 혜리씨가 그 누구라서 좋아했던 게 아니거든. 그저 이런 내게 와준 사람이라… 내가 혜리씨를 그래서 좋아했던 거고 그래서…”

 

지니TV 오리지널 드라마 ‘나의 해리에게’에서 강주연(강훈)은 갑자기 사라져 너무나 보고 싶었던 주은호(신혜선)를 보고는 그렇게 외친다. 물론 강주연이 기다렸던 건 주은호가 아니라 그의 안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인격 주혜리(신혜선)였을 게다. 어느 날 우연히 만나 마음을 나눴고 그리워하게 됐던 주차관리소에서 일하던 주혜리를. 그래서 돌아온 그가 주은호인지 주혜리인지 너무나 궁금해하지만 그는 결국 그게 아무 상관이 없었다는 걸 알게 된다. 그가 주혜리를 좋아했던 건 ‘누구라서’가 아니라 ‘그저 이런 내게 와준 사람’이어서였으니까. 

 

그 말을 들은 주은호는 강주연에게 다가가 그를 꼭 안아준다. 바로 옆에 서서 주은호를 걱정하고 보살피려 한 정현오(이진욱)는 그 광경을 눈앞에서 보고는 깜짝 놀란다. 주은호이기를 간절히 바랐던 정현오다. 너무나 사랑했지만 결혼을 꿈꾸는 주은호에게 이를 거절하고 이별 통보까지 했던 그였다. 자신이 홀로 감당해야할 할머니들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지만, 주은호가 해리성 정체성 장애를 갖게 된 사실이 그는 마치 자신 때문인 것 같아 괴롭다. 주은호가 아닌 주혜리가 되고 싶을 정도로 그 이별 통보가 아팠던 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주은호가 주혜리가 되어 돌아온 것 같은 그 광경이 그에게는 몹시 아프다.

 

실제로 주은호는 자신과의 결혼을 거부하던 정현오가 결혼을 한다는 사내에서의 소문을 듣고 충격에 빠진다. 부모를 잃었고, 숲으로 들어간 동생을 잃었으며 그 빈 자리를 유일하게 채워줬던 사랑하는 사람 정현오와도 헤어졌다. 헤어진 이유가 비혼주의자라서인 줄 알았는데 결혼을 한다는 이야기가 들려오다니. 물론 그건 소문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주은호는 무너지고, 방송사고를 내고 결국 모든 프로그램에서 하차하게 되는 지경에 이른다. 주은호는 자신을 버리고 싶어진다. 대신 주혜리가 궁금하고 되고 싶어진다. 그 애가 왜 행복했는지 알고 싶어진다.

 

그래서 주은호는 숲으로 들어간다. 자신을 버리고 주혜리가 되고 싶어서 심지어 자기 팔에 주혜리가 가졌던 상처까지 내며서 자기를 버리려 한다. 그는 그렇게라도 행복해지고 싶었다. “난 언제나 혜리에게 묻고 싶은 게 있었어요. 주혜리. 넌 행복해? 만약 니가 행복하다면 나는 이제 너로 살아보려해. 내가 노력한다면 그렇게 될 수 있지 않을까. 지금까지 내가 그래 왔던 것처럼.” 하지만 그는 끝내 혜리가 되지 못한 채 돌아왔다고 강주연에게 고백한다. 그건 그가 모든 걸 버리고 그 숲 속 오두막집을 찾아가면서도 버리지 못한 한 가지가 있어서였다. 정현오가 작은 메모지에 그린 목걸이 그림이었다. 그 그림은 주혜리가 되려는 주은호의 손을 끝까지 잡아주었다. 

 

‘나의 해리에게’는 구도로만 보면 주은호를 두고 정현오와 강주연 그리고 문지온(강상준)까지 사랑하게 되는 4각구도의 멜로처럼 보인다. 하지만 경계성 정체성 장애를 겪으며 주은호와 주혜리를 오가는 이 인물의 사랑 이야기는 그렇게 밀고 당기는 꽁냥꽁냥 멜로와는 차원이 다른 걸 담고 있다. 그건 강주연이 ‘누구든 상관없다’고 말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보다 ‘존재론적인 사랑이야기’다. 

 

누구나 행복해지기를 원한다. 심지어 동생이 실종되면서 결코 행복할 수 없던 삶을 살아온 주은호 같은 인물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그 불행의 늪을 벗어나기 위해 다른 인격을 꿈꾸기도 한다. 흔히들 말하는 ‘이번 생은 망했다’며 다음 생을 꿈꾸거나, 과거로 되돌아가 다른 선택을 하는 삶을 꿈꾸는 회귀물에 빠지는 건 그래서가 아닌가. 그런데 그렇게 현재의 내가 싫고 불행하게만 느껴져 차라리 다른 인격이 되고 싶은 그를 끝내 붙잡아주는 건 뭘까. ‘나의 해리에게’는 그 질문에 강주연이라는 인물의 사랑을 통해 답하고 있다. 그 누구여서가 아니라 그런 내게도 와준 사람이 있다는 것. 그것이 우리가 설혹 불행의 늪에 빠져 있어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힘이라는 것이다. 

 

“마음은 딱 하나”라고 믿는 강주연에게 주은호는 자신이 주혜리가 되지는 못했다며 대신 그에 대한 고마움을 전한다. “누구보다 사랑이 필요했던 나를 아껴주고 사랑해줘서 고맙다고. 아까 주연씨가 했던 말은 내가 주연씨한테 하고 싶었던 말예요. 맞아요. 나도 처음부터 그 누구라서 그쪽을 좋아했던 게 아니고 그저 내게 와줘서 이런 내게 와줘서 고마웠어요. 주연씨.” 그가 강주연을 꼭 안아줬던 건 주혜리여서가 아니라 고마움 때문이었다는 걸 말해준다. 

 

그래서 주은호가 강주연을 안아주는 장면은 이 대목에서는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강주연의 말이 사실 주은호가 하고 싶었던 말이라는 뜻은, 자신이 주혜리가 되면서까지 찾고 싶었던 행복의 비밀이 바로 그것이었고, 그래서 강주연의 그 말은 주은호가 스스로를 되찾을 수 있는 열쇠가 되었다는 의미다. 주은호가 안은 건 강주연만이 아니다. 바로 자기 자신을 드디어 껴안을 수 있었던 것이다. 

 

현실이 너무 아파서 다른 인격을 가진 이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됐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로 시작한 드라마는 이제 그 모험 같은 여정을 돌아서 인간 존재의 사랑과 행복에 대해 이야기한다. 누군가를 잃는다는 상실감과 그 상처를 어떻게 회복하고 돌아올 수 있는가를 이야기한다. 단 한 순간도 행복한 적 없었다고 생각했던 주은호는 드디어 그 먼 길을 돌아와 알게 된다. 자신이 너무나 행복했던 순간이 있었다는 걸. 어느 날 아침 출근하려던 정현오를 붙잡아 잠깐 동안 함께 있었던 그 순간을 떠올린다. 그러면서 다짐한다. “그 사람이 다시 돌아와준다면 말해야지. 말해줘야지. 말해줘야지. 고마워. 내 사랑. 이런 내게 와줘서 정말 고마워.” 

 

‘나의 해리에게’는 그래서 해리성 정체성 장애라는 다소 우리에게는 낯선 장애를 소재로 삼은 멜로드라마지만, 그런 일들이 우리에게도 마음 속에서 계속 벌어지는 일들일 수 있다고 말하는 드라마다. ‘나의 해리에게’는 묻고 있다. 당신의 혜리는 어떤 존재인가. 또 우리 모두의 혜리는? 그리고 우리가 붙박혀 살아가는 현실과 우리가 꿈꾸는 행복 사이에서 저마다 하나씩 혜리를 갖고 있으면서도 우리를 다시 현실로 되돌리는 진짜 행복이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다. 이런 내게 와준 소중한 존재들이 옆에 있어서 힘겨워도 우리는 행복할 수 있다고. (사진:지니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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