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의 민심, <해적>의 고래, <해무>의 참상

 

<명량>, <해적>에 이어 <해무>까지. 공교롭게도 여름 블록버스터 시장에 나온 한국 영화 3편이 모두 바다를 공간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이 영화들이 모두 단 몇 달 전 있었던 세월호 참사를 떠올리게 하는 건 그 공간이 바다라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다. 거기에는 세월호 참사가 벌어지기 이전부터 이미 영화 제작자들의 마음 속에 틈입되었을 현실들이 깔려 있다. 놀라운 일이 아닌가. 세월호 참사가 벌어지기 전부터 제작된 영화들이 마치 예언이라도 한 것처럼 이 안타까운 일을 환기시킨다는 것은.

 

'사진출처:영화<명량>'

3백여 척이 넘는 왜적들과 어느 방향으로 휘돌아갈지 알 수 없는 죽음의 회오리 바다 위에서 그것도 국가로부터 버림받은 장수와 병사들 그리고 민초들이 두려움을 넘어 세상과 싸우는 이야기 <명량>은 세월호 참사에서 숭고하게 희생된 이들을 떠올리게 한다. 제 살길이나 찾자며 도망치는 왕이나 신하들은, 가라앉는 배에 무력했던 정부의 리더십과 승객들을 책임지기는커녕 제 목숨 하나 챙기려 도망치는 선장을 연상케 한다.

 

죽을 줄 알면서도 그 명량의 바다로 나가는 이순신 장군과 병사들의 모습에서는 그 가라앉는 배의 두려움 속에서도 학생들을 향해 달려갔던 숭고한 선생님과 승무원들의 희생이 떠오른다. <명량>1400만 관객을 넘어 전무후무한 1500만 관객을 향해 달려가는 신드롬은 새삼 일어난 이순신 장군 열풍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어쩌면 세월호 참사로 인해 무겁게 생겨난 우리의 마음 깊숙이 존재하는 부채감 때문인지도 모른다.

 

<해적>은 코미디를 전면에 내세운 영화지만 거기에서도 세월호의 잔상이 어른거린다. <명량>이 그러한 것처럼 이 영화에서도 국가는 좀체 그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민초들은 떠돌다 산적이나 해적이 되고 국가는 왕권을 인정받기 위해 명나라의 재가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 이 영화의 기막힌 풍자는 명나라로부터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해 가져오는 옥쇄를 고래가 꿀꺽 삼켜버린다는 설정이다.

 

그런데 왜 하필 고래인가. 조정은 고래가 옥쇄를 삼켰다는 그 사실이 백성들에게는 왕권을 인정하지 않는 하늘의 뜻으로 읽힐 것이라며 해적까지 동원해 옥쇄를 되찾으려 한다. 즉 고래는 여기서 선량하지만 핍박받는 대다수의 백성들(천심)을 상징화한다. 어미 고래는 그저 자식을 보호하려할 뿐이지만 조정은 그 자식을 볼모삼아 고래를 죽이려 한다. 세월호의 침몰을 마치 우리나라의 침몰로 느낀 분들이라면 그저 자식 하나 보호하려 안간힘을 쓰다 쓰러져가는 고래에서 그 비슷한 잔상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해무>IMF 시절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감척사업으로 인해 폐선이 될 위기에 몰린 전진호가 밀항에 손을 대면서 벌어지는 참사에 대한 이야기다. 만선의 꿈은 일찌감치 사라져버렸고 그저 생존하기 위해 벌인 일은 사람다운 땀과 노동의 공간이었던 전진호를 지옥 같은 살육의 공간으로 바꿔버린다. 그리고 침몰하는 배. 여기서도 우리는 세월호의 한 자락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무엇이 선량했던 그들을 그렇게 악귀 같은 모습으로 변모하게 만들었던가. 가라앉는 전진호는 그래서 자본의 논리 속에 인간실종으로 내몰린 세월호라는 결과를 상징화한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바다 안개, 해무의 정국. 그 혼돈의 시간 속에서 그 혼돈에 가려진 채로 폭력들이 자행된다. 하지만 제 아무리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안개 속에서 벌어진 일이라 해도 그것을 마음속에서 마저 지울 수는 없다. 세월호 참사가 벌어진 지 몇 달 마치 그 일이 없었던 것처럼 조용해도 그걸 지울 수는 없는 것처럼. 그 원죄의식과 부채감은 그래서 고스란히 남은 자들에게 파국으로 다가온다.

 

<명량><해적> 그리고 <해무>라는 영화 세 편이 모두 세월호 참사를 떠올리게 한다는 건, 영화가 그걸 기획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이 참사가 벌어지기 전부터 우리네 참혹한 현실이 그 참사를 예고하고 있었다는 반증이다. 이미 그 전부터 <명량>의 바다는 버림받은 민심으로 들끓었고, <해적>의 바다는 무고한 백성들의 고래를 살육해왔으며, <해무>의 안개 가득한 바다 속으로 벼랑 끝에 몰린 가장들을 내몰아왔다. 그렇다면 세월호 참사는 그 무수한 과정들의 결과인 셈이다. 올 여름 극장가에는 웃음 속에서마저 그 지켜주지 못했다는 부채감과 잘못된 세상에 대한 분노, 그리고 같은 현실 속에서 느껴지는 그 아픔에 대한 공감대가 뒤섞여 있다.

 

리더십 부재의 현실, <명량>회오리를 만들다

 

개봉 11일 만에 900만 관객이 <명량>을 봤다. 거의 매일 백만 명 가까운 관객이 영화를 본다는 것이다. 이 정도면 신드롬이다. 영화만의 힘으로 이런 폭발력이 만들어지기는 어렵다. 도대체 무엇이 이런 <명량>의 흥행 회오리를 만들어낸 걸까.

 

사진출처:영화<명량>

사극은 역시 과거보다는 현재가 더 중요한 콘텐츠다. 이미 다 알고 있는 이순신 장군의 명량해전이야 이역만리 서구인들에게도 익숙한 이야기다. 그러니 왜 지금 현재 이순신 장군이고 그가 치른 명량해전인지가 중요하다. 왜 하필 지금 이 이야기가 우리들의 마음에 닿은 걸까.

 

가장 큰 것은 민초들을 어루만지는 리더십의 부재다. <명량>의 첫 장면은 기묘하게도 이순신 장군이 고문을 당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역사를 통해 이미 알고 있듯이 선조는 잘 싸운 이순신 장군을 열심히 싸우지 않았다며 역적죄로 몰아 백의종군하게 만드는 왕이다. 이 첫 장면은 이 영화가 결코 왕을 위해 헌신한 장수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

 

국가를 위해 헌신했으니 애국이라 말할 수는 있어도, 여기서 말하는 국가란 이순신 장군에게는 왕이 아니라 백성이다. 이것은 영화의 대사를 통해서도 명백하게 밝혀진다. “장수된 자의 의리는 충을 좇아야 하고 충은 백성을 향해야 한다. 백성이 있어야 나라가 있고 나라가 있어야 임금이 있는 법이지.” 즉 백성이 우선이고 그 다음이 나라이며 마지막이 임금이라는 것.

 

왕의 리더십 부재와 그럼에도 자신을 희생해 백성을 구하는 <명량>의 이야기는 지금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에도 낯선 이야기가 아니다. 세월호 참사만을 두고 봐도 딱 이 이야기랑 다른 게 없다. 우리가 거기서 발견한 것은 정부의 리더십 부재와 그럼에도 온 몸을 던져 한 명이라도 더 학생을 구하려다 안타깝게 목숨을 버린 숭고한 국민들이 아닌가.

 

영화의 제목이 영웅 이순신이 아니고 <명량>인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이순신 장군이 4백여 년 전 발 아래 내려다보던 그 회오리 바다 명량이 지금 우리네 현실을 고스란히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시무시한 바다 저 앞에는 왜적들이 수백 척의 배로 침공해 들어오고 있는데 왕은 나가서 싸우려는 이순신 장군을 독려하기는커녕 왕명을 어긴다며 질책한다.

 

모두가 두려워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죽음이 뻔히 앞에 보이는데 누가 나설 것인가. 그러니 홀로 명량의 바다 한 가운데 스스로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한 장수의 숭고함에 벼랑 끝에 서서 피난 가던 백성들마저 저마다 함께 싸우는 방법을 찾아나간다. 누군가는 저고리를 풀어 위험을 알리고, 누군가는 적진에서 첩보활동을 하다 기꺼이 죽음을 맞이한다. ‘명량은 리더십 부재의 현실에서 저마다 안간힘을 쓰며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가는 우리네 서민들을 위한 헌사의 공간이다.

 

<명량>은 왜 하필 지금 이순신 장군의 명량해전이어야 하는가를 지금의 대중들에게 제대로 설득시켰다. 최민식이 되살려낸 이순신 장군은 죽음의 명량 바다를 향해 나가는 그 비장한 얼굴 하나만으로도 지금의 대중들을 울린다. 또 명량에서 이순신 장군과 함께 싸운 이름 모를 백성들이 보여주는 그 피눈물 나는 응원만으로도 가슴을 뛰게 만든다. <명량>은 그 시대의 백성들이 가졌을 그 절망과 희망을 4백 년 넘어 살아가는 대중들의 가슴에 회오리치게 만들었다. 영화관을 빠져나오는 이들의 가슴 한 켠이 저마다 명량의 회오리 하나씩을 갖게 만든 것. 그것이 <명량> 신드롬의 실체가 아닐는지.

 

 

<야경꾼일지>, 정통사극 시대에 판타지 괜찮을까

 

MBC <야경꾼일지>의 첫 방송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우선 시청률이 첫 회에 10%를 넘기며 월화 드라마 전체 1위를 차지했다는 점은 고무적이라고 할 수 있다. 워낙 타방송사의 월화 드라마들에 대한 기대감이 떨어져서 그런지는 몰라도, 어쨌든 첫 회에 시선을 잡아끌었다는 건 괜찮은 행보라고 보여진다.

 

'야경꾼 일지(사진출처:MBC)'

판타지 사극이라는 사전 정보가 있었지만 첫 회에 몰아치듯 보여준 CG의 향연은 시청자들의 시선을 볼거리쪽으로 집중시켰다. 시청자들의 의견에 CG 얘기가 대부분인 것은 그래서다. 드라마에서 보기 드문 시도라는 평가가 있는 반면, <디워>에도 못 미치는 CG 수준에 실망했다는 평가도 있다. 확실히 CG로 등장한 이무기와 조선 왕이 활로 싸우는 장면은 의도는 창대했지만 실제 결과물은 B급 괴수물 같은 인상을 주었다.

 

판타지 사극이라는 기치를 내걸어서인지 <야경꾼일지>는 기존 동서양을 초월한 무수한 이야기들의 조합 같은 인상을 주었다. 궁궐로 쏟아지는 유성은 KBS에서 했던 사극 <전우치>가 떠오르고, 왕자를 죽이기 위해 좇는 구름 같은 귀물들은 <해를 품은 달>의 초반 CG를 연상시키며, 왕인 해종(최원영)이 원정대를 이끌고 백두산에 가는 시퀀스는 <반지의 제왕>을 떠올리게 한다. 흥미로운 건 거기 갑자기 <반지의 제왕>의 한 장면처럼 등장한 스켈레톤 골렘을 없애는 방식이 부적을 붙이고 활로 쏘는 <강시>의 한 장면이라는 점이다.

 

이밖에도 판타지와 모험담에서 가져온 이야기 시퀀스가 이 사극에는 너무나 많다. 이를테면 백두산 마고족에게 왕만이 사용할 수 있는 활을 받는 장면은 <주몽>의 한 대목 같기도 하고 나아가 아더왕의 칼을 떠올리게도 한다. 또 용신족에게 재물로 잡혀간 마고족의 무녀를 이무기와 싸워 구해내는 장면은 <손오공>에 단골로 등장하는 이야기 시퀀스다.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포터>가 다양한 북구의 민담과 전설들을 조합해 만들어낸 이야기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처럼 동서양 구분하지 않고 다양한 이야기를 끌어와 사용하는 것은 전혀 잘못된 일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스토리의 확장면에서 권장되어야 될 일들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렇게 조합한 이야기와 시퀀스들이 결과적으로 현대인들에게 어떤 정서적인 공감이나 만족감을 줄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제 첫 회를 마친 <야경꾼일지>는 아직 이 부분에 대한 아무런 이야기도 해주지 않았다.

 

문제는 최근 들어 대중들의 사극에 대한 기호가 상당 부분 정통사극쪽으로 방향을 틀고 있다는 점이다. <정도전>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고 지금 영화판에 회오리를 일으키고 있는 <명량>이 그렇다. 이렇게 된 것은 퓨전사극이 점점 역사를 벗어내 이제는 아예 장르물처럼 변모한 것에 대한 반작용 때문이다. 사극의 핵심적인 힘은 결국 역사라는 팩트에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이미 역사를 통해 뻔히 알고 있는 내용이라고 해도 현재에 울림을 주는 사실이나 인물을 조명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걸 <정도전> 같은 정통사극은 보여주었다.

 

이런 시점에 판타지 사극을 아예 내걸은 <야경꾼일지>는 어떨까. 유성이 쏟아져 궁궐이 초토화되고, 이무기와 말을 타고 싸우는 왕의 장면이 새롭긴 하지만 결국 중요한 건 이러한 CG가 아니라 사극이 담고 있는 현재적인 울림이다. <야경꾼일지> 첫 회는 일단 그 이색적인 CG로 시선을 잡아끄는 데는 성공했다. 이제 남은 문제는 시청자들의 마음을 잡아끄는 것이다. 사실 판타지든 정통이든 중요한 건 단 하나다. 지금 현재의 시청자들이 왜 그걸 봐야하는가를 설득시키는 일. 그것만 있다면 충분하다. 과연 <야경꾼일지>는 그 설득을 해낼 수 있을까.

 

<명량>, 애국영화보다는 <변호인>에 가까운 까닭

 

요즘은 영화관에서 박수를 치는 것이 이상하게 여겨지지만 70년대 말 80년대 초반만 해도 영화를 보며 박수치는 일이 흔했다. 이렇게 된 것은 과거에는 영화가 연극이나 비슷한 실제 무대 체험으로 받아들여졌던 반면, 이제는 영화가 그저 하나의 가상체험일 뿐이라고 인식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명량>을 보다보면 저도 모르게 이 시간을 거슬러 박수라도 쳐주고 싶은 충동을 순간순간 느끼게 된다.

 

사진출처:영화 <명량>

장수된 자의 의리는 충을 좇아야 하고 충은 백성을 향해야 한다. 백성이 있어야 나라가 있고 나라가 있어야 임금이 있는 법이지.” 이순신이 아들에게 던져주는 이 한 마디는 이 영화의 굵직한 메시지를 고스란히 담는다. 자신은 압송되어 고문까지 당하고 백의종군하게 되었지만 여전히 나라를 지키는 최 일선에 서 있는 이순신. 그 이유는 왕이 아니라 백성이라는 것. <변호인>국가는 국민입니다!”라는 한 마디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명량>은 후반부의 해전 장면이 압도적인 스펙타클을 보여주는 블록버스터지만 그렇다고 단지 전투의 재미만을 보여주는 영화는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다. 영화의 전반부가 다소 지루할 정도로 이순신 장군의 내면을 향해 있는 건 그 장수로서의 고민을 감성적으로 이해한 연후에야 바다에서의 전투가 더 깊은 감동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죽음을 향해 스스럼없이 나아가는 자에게서 느껴지는 숭고미는 <명량>이 이순신 장군을 재조명하면서 바라보려는 것이다. 점점 다가오는 330척에 달하는 왜군의 배와 대적해야 하는 고작 12척 남은 배. 한 대 남은 거북선까지 불타버리고 병사들도 두려움에 탈영하는 상황에서 이순신은 단 하나 남은 희망의 불씨를 떠올린다. 그것은 두려움을 용기로 바꾸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스스로 죽음을 향해 나가야 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다.

 

명량이라는 회오리 바다는 그래서 바로 이 죽음에 대한 완벽한 상징으로 다가온다. 죽은 자들의 외침처럼 들려오는 그 바다의 울음소리가 주는 두려움을 내려다보는 이순신의 모습은 두려움을 용기로 바꾼다는 표현이 중의적이라는 걸 말해준다. 그것은 이순신을 포함한 조선 병사들의 마음 속을 회오리치며 헤집고 다니는 두려움을 이겨내는 일이면서, 저 울돌목 바다가 만들어내는 무서운 조류변화를 오히려 전투의 기폭제로 활용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명량>은 저 77년 반공시절의 <난중일기> 같은 다소 애국심에 호소하는 영화와는 여러모로 궤를 달리한다. 영화는 국가 같은 애국에 호소하기보다는 차라리 백성들을 위하는 애민에 더 호소한다. 국가로부터 버림받은 장수가 백성들과의 의리를 위해 기꺼이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영화다. 게다가 영화가 포착해내는 이순신의 내면은 그것만으로도 국적과 상관없는 위대한 인간승리의 휴먼드라마를 보여준다.

 

김한민 감독은 <최종병기 활>이 그랬던 것처럼 <명량>에서도 역사적 상황을 바탕으로 단순하지만 묵직한 대결이 주는 액션의 묘미를 선사하면서도, 동시에 그 속에서 활이나 바다가 주는 의미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액션 속에 인물들의 감정이나 정서를 잘 얹는 감독인 만큼 죽음의 바다를 향해 나가는 이순신의 내면이 압도적인 전투신과 절묘하게 어우러지게 만들었다.

 

최민식의 연기는 한 마디로 압권이다. 그 스스로는 이순신 장군의 내면을 100% 이해하지 못해 흉내만 냈다고 했지만 영화는 최민식이라는 배우가 있어 비로소 수백 년 전의 영웅을 부활시킬 수 있었다. 표정 하나 동작 하나도 빼놓을 수 없는 그의 연기는 죽음 앞에서 오히려 담대하게 맞섬으로써 죽고자 하면 살 것이라는 걸 몸소 보여준 이순신의 면면을 되살려놓았다.

 

만일 영화를 보면서 박수를 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된다면 그것은 명량 해전 당시 유일한 희망이었던 이순신 장군에 대한 백성들의 마음과 공감하는 바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절체절명의 국가적 위기 상황 속에서 정작 나라를 지켜야할 정치인들은 저 살길만을 찾을 때, 오롯이 백성들만을 생각하며 선선히 죽음을 불사하고 나가는 리더십에 대한 강렬한 대중의 욕망이 수백 년을 넘어 전해지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앞에는 아직도 저 명량의 회오리 바다가 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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