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어둠의 대비를 아는 배우, 주지훈의 여러 가지 얼굴

조명가게

“그 아저씨가 세상 무뚝뚝한데 은근 따뜻하지.” 디즈니+ 드라마 ‘조명가게’에서 간호사 영지(박보영)는 원영(주지훈)에 대해 그렇게 말한다. 원영은 암흑뿐인 사후세계에 유일하게 빛을 밝히고 있는 조명가게 주인이다. 빛이 너무 눈부시다는 핑계로 늘 선그라스를 끼고 있지만 사실 그건 의식을 잃고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배회하는 사람들과는 다른 자신(고양이 같은 눈빛을 가졌다)을 숨기기 위해서다. 하지만 선글라스의 용도는 정체를 숨기는 것만이 아니다. 눈빛으로 드러날 수 있는 속내를 숨기는 것도 그 중요한 용도다. 원영은 그 곳이 사후세계인지도 모른 채 조명가게를 찾는 이들에게 자신의 정체도 또 속내도 숨기려 한다. 그런데 그건 그들을 겁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이 곳에 대한 기억을 갖지 않게 하려는 노력이다. 의식을 잃고 사후세계에 발을 디뎠지만 다시 의식을 되찾고 돌아갔을 때 기억의 혼동을 일으키지 않게 하려는 배려다. 영지가 원영에 대해 무뚝뚝한데 은근 따뜻하다고 말한 건 그런 이유다. 

 

무뚝뚝한데 은근 따뜻한 이 배역에 주지훈만한 연기자는 없어 보인다. 주지훈은 지금껏 해왔던 연기들 속에서 무표정을 통해 표정을 극대화하는 연기를 줄곧 선보여온 배우다. 예를 들어 ‘마왕’ 같은 작품에서는 복수를 꿈꾸는 오승하라는 인물이 시종일관 무표정으로 등장하는데, 그래서 그가 가끔 살짝 입꼬리를 들어올리며 미소를 지을 때면 마치 악마 같은 섬뜩한 느낌을 자아낸다. ‘킹덤’에서도 왕세자지만 후궁에서 난 서자로서 계비의 위협을 받으며 각성하는 그 변화 과정을 주지훈은 무표정에서 시작해 생존하기 위해 점점 일그러져가는 얼굴을 통해 실감나게 보여준 바 있다. ‘지배종’ 같은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폭발사고로 병사들을 잃고 사건을 추적하는 우채운이라는 인물을 속내를 알 수 없는 특유의 무표정으로 연기해냄으로써 그 속내가 드러날 때의 반전효과를 극대화시켰다. 

 

이런 면모는 멜로 연기에도 똑같이 드러난다. 최근 방영되고 있는 ‘사랑은 외나무다리에서’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한국형 로맨틱 코미디 같은 설정을 가진 드라마다. 석지원(주지훈)과 윤지원(정유미)은 그 집안이 원수지간이다. 두 사람 역시 학창시절부터 티격태격하며 자라왔고 그러다 서로 좋아하게 됐지만 사소한 오해로 관계가 틀어지면서 애증이 싹텄다. 그리고 18년이란 세월이 흘러 다시 이사장과 체육교사의 관계로 다시 만나면서 그 관계가 이어진다. 어찌 보면 뻔한 구도지만, 이를 흥미롭게 만드는 건 석지원과 윤지원의 속내를 알 수 없는 말과 행동들이다. “나랑 연애합시다. 라일락 꽃 피면.” 이런 내기를 석지원이 툭 던지는 내면에는 진짜 다시 윤지원과 연애 하고픈 마음이 숨겨져 있지만, 그는 겉으로는 마치 내기에서 윤지원을 이기고픈 마음이 앞서고 있는 것처럼 위장한다. 그렇게 속내를 숨기다가 결국 석지원은 숨길 수 없는 감정을 윤지원에게 고백한다. “우리 그만합시다. 난 안되겠어. 그러니까 이딴 내기 집어치우고 나랑 진짜 연애하자. 윤지원.” 반듯한 모습으로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무표정을 하고 있던 이가 어느 순간 감정을 툭 드러내며 표정을 보여줄 때 전해지는 효과를 주지훈만큼 잘 알고 있는 배우는 없다. 

 

‘하이에나’ 같은 법정물에서도 주지훈은 윤희재라는 변호사 역할로 경쟁 관계에 있는 변호사 정금자(김혜수)와 대립 구도를 만들며 매번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 대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그는 스펙 없이 맨몸으로 부딪쳐 살아남으려 안간힘을 쓰는 정금자에게 서서히 마음이 움직이고 그래서 그녀의 편에 서게 되는 새로운 선택을 하게 된다. 여기서도 무표정에서 시작해 으르렁거리다가 멜로의 눈으로 바뀌어가는 주지훈의 얼굴이 효과를 발휘한다. 

 

이러한 무표정이 오히려 효과를 만들어내는 표정 연기의 반전은 여러모로 모델로 시작한 그의 필모와 무관하지 않을 듯 싶다. 옷을 강조해야 하는 모델들의 경우, 얼굴 표정은 최대한 절제하는 게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간간히 드러내는 표정은 오히려 그 전달하는 감정을 더 극대화시킨다는 걸 모델에서 연기자로 넘어오며 그는 경험적으로 알게 된 것 같다. 

 

주지훈의 이런 연기적 면모는 한 작품 안에서만 보이는 게 아니다. 일련의 작품 선택 과정을 보면 익숙한 얼굴이 전혀 다른 배역을 차기작으로 선택함으로써 그 반전효과를 내곤 했다는 걸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궁’으로 주목받으며 주로 멜로 연기를 해왔던 주지훈은 ‘마왕’ 같은 스릴러로 진지하고 무거운 얼굴을 보여줬다. 또 ‘신과 함께’ 같은 영화를 통해서 너무나 가볍게 여겨지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을 보여주더니 ‘암수살인’에서는 살벌한 희대의 살인마를 연기했다. 선과 악, 가벼움과 무거움을 오가는 배역 선택은 그래서 매번 ‘같은 배우 맞아’라는 반응들을 만들어내곤 했다.  

 

‘조명가게’는 그래서 주지훈이라는 배우의 특징을 가장 잘 담아낸 작품으로 보인다. 그건 어둠과 빛의 대비를 세계관으로 갖고 있는 ‘조명가게’에서 원영 역시 어둠 같은 무뚝뚝함을 가장하고 있지만 사실은 빛의 따뜻함을 숨기고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오래 전 아파트 붕괴 사고로 딸을 두고 먼저 세상을 떠났던 이 인물은 딸을 살리는 대가로 사후세계의 조명가게를 맡는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흐른 후 그 조명가게를 찾아온 딸을 우연히 만나는 순간, 드디어 선글라스로 가렸던 그의 감정이 폭발한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배회하는 이들을 위해 조명가게를 맡아온 그의 마음 깊숙한 곳에는 마치 그 곳을 찾는 이들을 딸처럼 바라보는 안타까움과 그리움이 숨겨져 있었다는 게 그 순간 드러난다.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살아가는 데 익숙하다. 하지만 그렇게 무표정이라고 해도 그 안에는 다양한 감정들이 존재한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마치 기계처럼 단조롭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느 순간 감정이 밖으로 드러날 때 생겨나는 인간의 증명. 그건 어쩌면 건조한 현대사회를 촉촉하게 해주는 희망 같은 것이 아닐까. 주지훈의 연기는 바로 그걸 증명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어둠 속에 오히려 더 빛나는 백열전구가 주는 희망을.(글:국방일보, 사진:디즈니+)

‘스토브리그’ 남궁민이어서 더 특별했던 이유

 

남궁민의 연기 스펙트럼은 도대체 어디까지일까. SBS 드라마 <스토브리그>의 성공은 물론 완성도 높은 대본과 여러 매력적인 캐릭터들을 제대로 연기해낸 연기자들의 합이 만들어낸 것이지만, 그 중에서도 백승수 단장 역할의 남궁민이 중심이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게다. 심지어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백승수 리더십이라는 이야기까지 나오게 했으니 말이다.

 

남궁민이 연기한 백승수의 면면을 보면, 그가 이 캐릭터를 얼마나 정확하게 이해하고 표현했는가를 실감할 수 있다. 백승수는 ‘시스템 개혁자’로서 감정을 극도로 절제하고 대부분의 상황들에 이성적으로 대처하려는 피도 눈물도 없을 것 같은 차가운 인물이다. 하지만 그건 겉으로 드러난 모습이고 실제로는 동생에 대한 죄책감은 물론이고 늘 맡았던 팀이 우승을 했지만 바로 해체되는 경험을 통해 갖게 된 허탈함 같은 것들이 내면 깊숙이 응축되어 있다.

 

백승수를 표현하면서 남궁민이 취한 건 거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무표정이었다. 그는 어떤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나 갑자기 터진 상황들 속에서도 거의 표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런데 그건 이 작품이 가진 ‘단짠’ 혹은 ‘고구마-사이다’의 이야기 구조와 맞물려 엄청난 폭발력을 발휘한다.

 

예를 들어 스카우트 비리 문제가 터지면서 백승수에게 반발하는 스타우트 팀장의 갖가지 만행들이 벌어지지만, 백승수는 거기에 대해 아무런 표정이나 동요를 보여주지 않는다. 그래서 시청자들로서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감정인지 전혀 예측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이런 꾹꾹 눌러내는 고구마 전개는 한 에피소드의 절정에 이르러 드디어 백승수의 복안이 드러나면서 터져 나오는 사이다 폭발력을 갖게 만든다.

 

또한 숨긴 감정들은 어느 순간 진짜 드러날 때 백승수라는 인물이 겪는 감정의 파고를 더 격동적으로 만들어내는 효과도 준다. 즉 노골적으로 도발해오는 권경민(오정세)에게 지속적으로 존칭으로 대하다 어느 순간 반말로 슥 넘어갈 때가 그렇고, 팀의 에이스로 어렵게 데려온 강두기(하도권) 선수를 트레이드한다는 결정에는 대놓고 감정을 폭발시키는 장면이 그렇다. 늘 감정을 드러내던 사람이 보이는 것보다 백승수처럼 무감해 보였던 이가 드러내는 감정이 훨씬 더 강렬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는 것.

 

아마도 남궁민은 <스토브리그>의 이야기 전개 구조에 백승수라는 인물이 어떤 톤을 유지하고 어떤 상황에서 그걸 깨고 하는 것이 만들어낼 효과들을 정확히 인지하고 연기를 했다고 보인다. 그는 과거 필자와 만난 자리에서 연기가 무엇이냐고 묻는 질문에 “빠져서 연기하는 메소드 연기”만이 연기가 아니고 “자신이 하는 연기를 인지하고 그것이 보는 시청자들에게 어떤 반응을 불러일으키는지를 컨트롤하는 연기”도 연기라고 말할 바 있다. <스토브리그>에서 남궁민은 그 어느 때보다 그 연기 컨트롤의 맛을 제대로 보여줬다.

 

<스토브리그>를 통해서도 확인한 것처럼 남궁민의 다양한 연기 스펙트럼은 캐릭터 분석과 거기에 맞는 효과적인 방식을 찾아내는 데서 나온다. 지난해 KBS에서 방영됐던 <닥터 프리즈너>의 나이제라는 캐릭터를 떠올려보라. 남궁민은 그 인물을 그 드라마가 가진 팽팽한 대결구도와 반전의 반전이라는 이야기 구조에 걸맞게 연기해낸 바 있다. 감정을 끊임없이 끄집어내 보여주던 그 연기를 떠올려보면 <스토브리그>의 그 무표정 연기가 놀라울 정도다.

 

멜로, 스릴러, 악역, 코믹 캐릭터, 리더 등등 남궁민이라는 배우가 지금껏 표현해온 연기의 스펙트럼은 그래서 되돌아보면 그저 우연이 아니라는 걸 확인하게 된다. 그 하나하나를 표현하기 위해 이 놀라운 배우는 그 상황에 걸맞는 옷을 찾아내 입어 왔으니 말이다. 앞으로 그가 어떤 캐릭터의 옷을 입을지 더더욱 기대되는 이유다.(사진:SBS)

‘남자친구’, 송혜교, 박보검이 웃을 때마다 가슴이 아린 건

“부모잖아. 엄마고 딸이잖아.” tvN 수목드라마 <남자친구>에서 차수현(송혜교)은 그녀를 찾아와 영부인이 되고 싶다는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며 다짜고짜 “쥐죽은 듯 살라”고 말하는 진미옥(남기애)에게 그렇게 말한다. 하지만 그런 차수현에게 진미옥은 차갑게 대꾸한다. “관계가 중요해? 난 가치가 중요해. 쓸모 있는 자식으로 살아.”

이 말은 차수현의 숨을 턱턱 막히게 만든다. 관계보다 가치. 그건 부모자식 간의 관계로 모든 것이 허용되고 용서되기도 하는 보통의 관계와는 너무나 다른 차수현과 엄마의 관계를 잘 말해준다. 부모 자식이라도 가치가 없으면 필요 없다는 말이고, ‘쓸모’가 있어야 자식도 자식이라는 말이다. 차수현은 차 안에서 그 말을 떠올리며 깊은 한숨을 내쉰다. 

좀체 웃지 않고 무표정을 가장하고 있는 얼굴. 하지만 그 얼굴은 사실 애써 눈물을 참고 있는 얼굴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어두운 얼굴 속에 담긴 속내를 읽어내는 한 사람이 있다. 바로 김진혁(박보검)이다. 그는 그 얼굴을 보고는 어떤 메시지를 보내야 차수현을 위로할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힘내세요’라고 적으려던 김진혁은 대신 ‘거봐요. 모델보다 더 예쁠 거라고 했잖아요. 봄입니다.’라고 보낸다. 그 문자 메시지 하나에 차수현은 살짝 미소를 짓는다.

전에 김진혁이 생일선물로 준 립스틱을 왜 바르지 않냐고 물었을 때 차수현은 봄에 어울릴 것 같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자 김진혁은 이렇게 말한다. “릴케라는 시인이요. 쌀쌀한 도시에서도 서로 손을 잡고 나란히 걷는 사람들만이 봄을 볼 수 있게 된다고 했거든요.” 그 말을 듣고 차수현이 바르고 나온 립스틱 이야기로 김진혁은 그의 겨울 같은 얼굴에 봄을 피어나게 한다. 

차수현은 관계보다 가치가 중요하다는 엄마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쌀쌀한 겨울 같은 세상에 홀로 던져져 있다. 정치인 아버지 때문에 자신의 삶을 살아온 적이 없고, 팔려가듯 결혼을 했으며 결국 이혼했지만 여전히 아버지의 정치 생명을 쥐고 흔드는 재벌가 시댁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관계보다 가치가 중요한 엄마는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재벌가 시댁에 딸을 다시 팔려고 한다. 

호텔 체인의 대표로서 모든 걸 다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가진 게 하나도 없는 인물이 바로 차수현이다. 그것은 자신이 스스로 결정해 살아가는 삶이 허용되지 않아서다. 제 아무리 많이 갖고 있으면 뭐하나.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일조차 할 수 없는 처지라면. 차수현의 얼굴이 항상 무표정하지만, 그 무표정 속에서 마치 울기 직전까지 참고 있는 아이 같은 얼굴을 발견하게 되는 건 그래서다. 

회사 로비에서 차수현이 만나는 김진혁을 스캔들의 주인공처럼 몰아세우며 공개적인 해명을 요구하는 상황에서, 김진혁이 나서서 두 사람의 관계를 공개했을 때 차수현의 얼굴은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는 복잡한 모습을 보여준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듯한 눈이지만, 입은 이렇게 나서준 김진혁에 대한 기쁨으로 미소가 피어난다. 그 장면은 엄마와는 달리 가치보다 관계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차수현과 김진혁의 마음을 드러낸다. 

하지만 어디 세상이 그런가. 사람을 가진 것과 태생과 스펙으로 구분해 가치를 매기고, 겉보기에 그 가치가 등가로 매겨지는 사람과의 만남이 아니라면 그것을 부적절한 관계로 매도하기 마련이다. 이제 썸을 타기로 한 차수현과 김진혁은 그런 차가운 겨울의 시선들 속에 서 있다. 관계가 공개적으로 알려진 후 회사에서도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비뚤어져 있고, 차수현의 전 시어머니인 김화진(차화연)은 이 관계를 저들이 생각하듯 대표의 가치를 등에 업고 이용하려는 젊은 사원의 다른 의도가 있는 행동으로 치부한다. 

차수현은 본래부터 웃을 일이 없는 세상 속에 있었고, 김화진으로부터 모욕적이고 폭력적인 대우를 받은 김진혁은 차수현이 살아왔던 그 세상을 실감하게 된다. 두 사람은 결코 웃을 일이 없는 이 냉혹하고 쌀쌀한 겨울의 세상 깊숙이 들어와 있지만, 그럼에도 두 사람만의 시선이 마주칠 때는 미소를 띠운다. 어찌 보면 숨 막힐 듯한 현실 속에서 한숨으로 버텨왔던 차수현은 겨우 김진혁 앞에서 잠시라도 숨을 쉴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이들이 웃을 때는 가슴이 아려온다. 

내부순환도로 교각에 붙여진 김환기 화백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작품을 보며 그 작품의 모티브가 된 김광섭 시인의 ‘저녁에’라는 시구를 김진혁은 조용히 읊조린다.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그러자 화답하듯 차수현이 시구의 뒷부분을 이어준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그 시는 모든 만남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말하고 있다. 가치 따위가 아니라 모든 관계들이. 그래서 그 시구 절 앞에서 다시 만나 썸 타기로 한 두 사람은 겨울의 현실 속에서도 아프지만 기쁜 봄날의 미소를 피워낸다. 

봄은 시간이 지난다고 그저 오는 게 아니고 또 기다려서 맞는 게 아니라고 이 드라마는 말하고 있다. 봄이 오면 화사한 색감의 립스틱을 바르겠다던 차수현은 김진혁을 통해 화사한 립스틱을 바르는 일로 봄이 올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우리의 진정한 관계들이 그러하지 않을까. 스스로 선택한 삶과 거기서 만나게 되는 진정한 관계들. 그 속에서만이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겨울 같은 우리네 삶을 봄으로 만들어줄 수 있을 것이니.(사진:tvN)

<아빠를 부탁해>, 이토록 훈훈하고 뭉클한 순간이라니

 

그들은 함께 있을 때는 여전히 소년들 같다. 서로가 하는 말에 툭툭 장난을 걸기도 하고 누군가에 말에 맞장구를 치기도 하며 때로는 부러워하고 때로는 짠해지기도 한다. SBS <아빠를 부탁해>의 아빠들 얘기다. 그들은 각자 찍어온 관찰카메라를 함께 모여 보면서 서로의 삶이 얼마나 다른지, 아니면 얼마나 비슷한지를 확인한다.

 

'아빠를 부탁해(사진출처:SBS)'

그들은 여전히 자기들끼리 있을 때는 소년처럼 굴지만 화면 속에서는 영 서툰 아빠의 모습 그대로다. 딸과 함께 하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막막해하고, 딸의 친구들이 찾아오면 자리를 피해준다는 핑계로 그 서먹한 관계로부터 도망치기 일쑤다. 속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잘못한 일에 호된 꾸지람을 하고는 후회하고, 자신과는 영 다른 입맛을 가진 딸과의 외식을 신기한 듯 바라본다.

 

화면 속의 아빠는 우리가 일상에서 보던 바로 그 보통의 아빠다. 대부분의 아빠들이 그렇지 않은가. 아빠들은 이경규처럼 딸 예림이와 친구들에게 정성들여 라면을 끓여줄 정도로 살가운 마음을 갖고 있지만 겉으로는 겸상 하면 권위 떨어진다며 자리를 피하기 일쑤다. 그러면서도 맛있게 먹는 딸과 친구들을 흘낏흘낏 훔쳐보고 다 먹고 나면 설거지까지 해주려고 나선다.

 

아빠들은 조민기처럼 딸 윤경이가 미국으로 떠나면서 여권을 챙기지 않은 실수에 호통을 치지만, 그것이 못내 마음에 걸려 영상통화로나마 혼자 지내는 네가 스스로 잘 챙겼으면 하는 마음으로 그랬던 것이라며 변명 아닌 변명을 한다. 그리고 수줍지만 퉁명스럽게 속내를 툭 던진다. “보고싶다.” 그 한 마디 속에는 그래서 참 많은 아빠의 속내가 담겨있다. 미안함과 대견함과 그리움 그리고 쓸쓸함까지.

 

아빠들은 강석우처럼 딸 다은이와 함께 무언가를 한다는 것만으로도 절로 입에서 노래가 나온다. 피곤해 하는 다은이가 툴툴 대면서도 함께 옥상을 청소하는 그 시간이 아빠에게는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보쌈을 제대로 싸먹고, 설렁탕에는 깍두기 국물을 넣어 먹는 다은이는 그래서 아빠 강석우에게는 여전히 신기한 존재다. 식성은 달라도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아빠들은 조재현처럼 나이 들어가는 아버지의 젊은 날 고생을 되돌아보며 자신 역시 나이 들어간다는 것에 먹먹해지기도 한다. 가파른 길을 연탄을 가득 채운 리어카를 끌고 오르는 아버지의 모습은 그래서 자신의 또 다른 모습처럼 여겨지기도 할 것이다. 10년 후 또 사진 찍으러 오자는 손녀 혜정이에게 그 때는 할아버지 없다고 말하자 눈물을 흘리는 혜정이에게 “20년 후면 아빠도 위험하다는 조재현의 농담 속에는 그래서 나이 들어가는 것에 대한 쓸쓸함과 그걸 아쉬워하는 딸에 대한 따뜻함이 묻어난다.

 

왜 우리는 일찍이 아빠들의 진짜 속내를 몰랐던 걸까. 나이 들어 그 아빠의 나이가 됐을 때 비로소 알게 되는 것이 그 서먹함과 무표정 속에 숨겨져 있던 아빠들의 쓸쓸함과 따뜻함이다. <아빠를 부탁해>가 뭉클해지는 순간은 바로 한참 세월이 흐른 후에야 알게 되는 그 속내를 지금 바로 눈앞에서 발견하는 순간이다. 그 무표정이 사실은 눈물도 많고 그 서먹함이 실제로는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 주변을 서성이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는 그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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