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스페셜>, 우리가 몰랐던 천일염의 실체

 

예전에 저는 천일염을 저나트륨 소금이고 미네랄이 많고 자연의 조건에 맞춰진 소금이라고 썼습니다. 그 때 제 글을 읽었던 분들한테 저는 죄송하다고 말씀을 드릴게요.” <SBS스페셜>에 출연한 맛 칼럼니스트 황교익은 공개적으로 사과의 말을 전했다. 과거 자신이 썼던 천일염에 대한 글이 사실과 달랐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확인한 셈이다. 그런데 황교익은 왜 모두가 좋다고 믿고 있던 천일염의 문제들을 조목조목 들고 나온 것일까.

 


'SBS스페셜(사진출처:SBS)'

천일염. 우리가 너무나 많이 신문지상을 통해 봐왔던 이 소금에 대한 이미지는 너무나 신화적이다. 하늘과 땅 그리고 바다. 이 자연의 합작품이 천일염이라는 식의 보도들은 천일염에 막연한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마치 자연이 스스로 만들어낸 선물처럼 여겨지게 한다는 것. 여기에 갖가지 연구기관들의 연구발표는 천일염이 세계 최고의 미네랄 함량을 가진 세계 제일의 소금이라는 근거를 세워준다.

 

게다가 옛날부터 우리 조상들이 만들어 먹던이라는 수식어는 마치 천일염이 우리네 고유의 전통방식으로 만들어진 소금이란 인식을 만들어낸다. 여기에 정제염이 전기분해같은 인위적인 조작으로 만들어진 소금이라는 흑색선전까지 더해지니 천일염이 아니면 마치 진짜 소금이 아닌 것처럼 소비자들은 느낄 수밖에 없다. 하지만 <SBS스페셜>이 그 포장을 떼어내고 본 천일염의 실체는 소비자들이 공분을 일으킬만한 것이었다.

 

천일염이 청정갯벌이 아니라 청정갯벌을 죽인 땅에서 생산된다는 황교익의 지적은 염전에 깔리는 두꺼운 비닐장판으로 확인되었다. 가소제를 넣지 않은 폴리프로필렌 재질로 바뀌어 친환경 장판이라고 말하곤 있지만 그것 역시 직사광선에 분해되고 결국은 소금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 방송을 통해 확인되었다. 국내 최고의 천일염전으로 불리는 신안의 염전에서는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장판을 교체하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장판 바닥에서 떨어진 이물질이 소금에서도 그대로 발견되었다.

 

천일염이 우리네 고유의 전통방식으로 만들어진 소금이라는 건 날조된 것이었다. 천일염은 1907년 일본이 대만의 기술을 들여서 조선 땅에 이식한 소금 제조방식이었던 것. 하지만 대만에서조차 천일염보다는 정제염을 더 많이 사용하고 있었다. 대만의 치구염전에서 나오는 건 공업용 소금이고 그것은 세척 공정을 거쳐서야 비로소 식용으로 가능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우리네 천일염이 과거 공업용의 기준을 그대로 따라고 있어 제대로 된 위생기준을 마련하지 않고 있는 것과는 사뭇 대조적인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우리네 전통방식의 소금이란 천일염이 아니라 갯벌을 모아 농축된 소금물을 끓여 만든 자염이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사료에도 남아있는 이 자염은 그러나 현재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 소금이다. 그 빈자리를 천일염이 마치 우리의 전통소금인 양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황교익은 일본이 이식한 천일염은 주로 화학 산업용으로 쓰이는 값싼 천일염을 제조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렇게 먹을 수 있을지 없을 지도 모르는 천일염을 최고의 소금으로 받아들이게 됐을까.

 

그것은 지자체와 연구기관이 만들어낸 날조된 신화가 아니었을까. 재래식 화장실이 옆에 놓여져 있고 그 옆에는 인부들이 신는 장화들이 걸려있고 염전에는 못에서 나오는 녹물이 흘러들어가는 그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그것도 장판을 깔고 그 위를 긁어 모아내는 소금을 어떻게 자연이 만들어낸 선물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까.

 

전남보건환경연구원에서 비교 연구한 자료는 시료 채취 방법이 명쾌하지 않아 신뢰할 수 없는 것이 밝혀졌다. 즉 천일염은 염전에서 직접 채취한 걸 썼지만 정제염은 시중에 나온 상품을 시료로 썼다는 것. 오래 놔두면 미네랄 성분이 급격히 줄어드는 건 천일염이나 정제염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이런 잘못된 시료 채취 방법을 통해 천일염의 미네랄 함량이 정제염의 몇 배라는 식의 발표는 잘못된 것이라는 것.

 

결국 천일염의 신화는 과학이 아니라 정치적인 논리에 의해 탄생하고 미디어와 연구기관에 의해 부풀려졌다는 게 <SBS스페셜>이 말하려는 내용이다. 소금의 문제는 우리가 거의 매일 섭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국민 건강과 직결된 사안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국민건강을 책임져야할 국가기관들이 오히려 정치적 논리에 의해 비위생적이고 그 효능도 믿을 수 없는 천일염의 신화를 만들어냈다는 건 심각한 문제가 아닌가.

 

황교익은 뒤늦게나마 천일염의 실체를 알게 됐고 그래서 자신이 과거에 썼던 글에 대해 사과했다. 이것은 지금 미디어들이 해야 할 일이고, 정부기관들이 해야 할 일이다. 그 성격상 단번에 문제가 드러나지 않는다고 해서 마치 문제가 없는 것처럼 덮고 간다는 것은 또 하나의 안전 불감증이 아닐까



히틀러와 라디오로 한 판 붙은 말더듬이 왕, '킹스 스피치'

사용자 삽입 이미지

'킹스 스피치'

말더듬이가 연설을 했다. 만일 이런 스토리라면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말더듬이가 한 국가의 왕이라면? 흥미를 느낄만하지만 그다지 확 끌만한 매력적인 스토리라고 말하기는 그렇다. 하지만 그 말더듬이 왕이 전쟁을 맞아 라디오로 대국민 연설을 해야 한다면? 이만큼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없을 듯하다. 말이 가진 힘이 라디오라는 매체를 통해 증폭되기 때문이다.

이미 많은 히틀러를 다룬 저술들이 말해주듯이 라디오는 나치즘을 말해주는 가장 대표적인 매체다. 만일 라디오가 없었다면 히틀러의 나치즘도 없었을 것이라 말해질 정도로. 라디오는 전형적인 일방향적인 매체다. 한쪽에서만 말을 한다. 그것은 당연히 듣는 다수를 상정한다. 한쪽이 입이면 다른 한쪽은 무수히 많은 귀가 있다. 선전도구로서 히틀러가 이만한 도구가 없다고 여긴 건 당연한 일이었을 게다.

게다가 라디오가 사용하는 청각이라는 감각은 시각보다 훨씬 강력하다. 본다는 행위는 능동적인 주의집중을 더 필요로 하지만, 듣는다는 건 굳이 집중하지 않아도 그 메시지가 전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이 말이 가진 청각적인 특징은 종교적인 힘으로까지 발휘되기도 한다. '성서'에 그토록 많은 메시지들을 우리는 '말씀'의 형태로 받아들이고 있지 않은가.

'킹스 스피치'는 바로 이 라디오라는 매체가 말을 만나던 그 시대에 벌어지는 정치적인 변화의 상황들을 절묘하게 포착해낸다. 앨버트 왕자를 차기 왕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말더듬이 때문에 고민에 빠진 영국의 왕 조지 5세는 그에게 시대가 바뀌었다고 말한다. 이제 왕들은 국민들을 이끌기 위해 전장에 나가는 것보다 라디오 앞에서 연기를 해야 한다고. 앨버트 왕자의 말더듬이를 고치는 인물이 학위나 자격을 가지지 못한 연기자인 로그(제프리 러쉬)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왕이 연기를 해야 하는 시대. 미디어 정치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조지 6세가 된 앨버트 왕자가 히틀러의 대중을 휘어잡는 연설을 보면서 "무슨 소린지 모르겠지만 말은 청산유수네"라고 하는 말은 그 라디오라는 매체가 가진 힘을 이제 앨버트가 인정하면서 거기에 맞서 말로서 승부해야 될 시점이 다가온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영화는 이 라디오라는 매체에 대한 흥미로운 관점들을 보여주고 있지만, 또한 앨버트가 말더듬이가 된 내적인 문제들, 즉 왕실의 억압을 벗어나는 그 성장의 과정을 담아냄으로서 스토리에 힘을 부여한다. 누구에게도 밝히지 못하는 그 내면을 평민인 로그에게 차츰 열어가는 그 치유의 과정은 두 사람이 친구가 되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런데 조지 6세가 말더듬이를 극복하고 연설을 하는 그 장면이 감동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단지 그 개인적인 성장이나 극복 때문이었을까. 아니다. 여기에는 히틀러로 대변되는 라디오 독재에 맞서는 자가 다름 아닌 말더듬이 왕이라는 사실이 숨겨져 있다. 연설문 내용은 통상적인 것일 수 있겠지만, 영화는 그 연설문의 한 줄 한 줄을 읽어가는 과정을 마치 말더듬이 왕이 벌이는 힘겨운 전투의 한 장면처럼 그려놓는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조지 6세 앞에 서 있는 로그라는 평민의 존재다. 라디오라는 매체가 가진 힘은 그 후에도 루즈벨트에 의해 활용된 적이 있었고, 그로부터 7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선전에 악용될 소지가 다분하다. 굳이 맥루언의 '미디어는 메시지'라는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이것은 라디오라는 매체의 속성 자체(일방향적, 청각적)가 가진 운명이다. '킹스 스피치'에서 히틀러와 다르게 조지 6세의 라디오 활용이 그려진 것은 거기 로그가 앞에 서 있기 때문이었다. 로그는 조지 6세가 연설에 들어가기에 앞서 이렇게 말한다. "저를 보고 얘기하는 것처럼" 얘기하라고. 즉 친구로 상정되는 듣는 대상이 서 있었기 때문에 같은 국민들의 눈높이에서 조지 6세는 진심을 담아 연설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물론 영화는 낭만적이다. 로그와 조지 6세는 그 후로도 친구처럼 나머지 생을 지냈다고 한다. 하지만 모든 라디오 권력자들이 조지 6세처럼 로그 같은 친구가 있는 건 아닐 것이다. 물론 매체는 또 변화를 겪었다. 그리고 이른바 미디어 정치 시대는 활짝 열렸다. 이미 라디오의 그 일방향적 속성은 인터넷의 쌍방향과 만나고 SNS와 연결되어 어느 쪽으로든 정보가 흘러가는 시대다. 따라서 이 시대에 라디오 같은 미디어를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겠다면, 이제 말더듬이 같은 외형적 장애를 극복하는 것보다 더 중요해진 건 그 말이 갖는 진심일 것이다. 과연 지금 그 진심은 우리 대중들에게 닿고 있을까.

'심야의 FM'은 어떻게 수애의 껍질을 깼나

연기자의 자질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뭘까. 연기력? 외모? 글쎄. 그럴 수도 있겠지만 많은 이들이 목소리를 꼽는다. 신뢰성 있는 목소리는 연기와 외모에 어떤 아우라를 갖게 해준다. 수애는 그런 배우다. 그녀의 착 가라앉은 안정된 목소리는 믿음을 주며 심지어 대단히 분위기 있는 여성의 아우라를 덧씌워준다. 그런 목소리로 커다란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히면 웬만한 사내들은 그걸로 넉다운이다. 수애는 목소리를 타고난 여배우다.

그런 그녀는 왜 자신의 소리를 부정하는 영화를 찍었을까. '심야의 FM'을 말하는 것이다. 이 영화는 스릴러를 장르로 삼고 있지만 소리로 시작해 소리로 끝나는 소리에 관한 영화다. 수애는 '심야의 FM'을 두 시간 동안 진행하는 DJ다. 이렇게 분위기 있는 목소리가 고요한 심야에 울려 퍼진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 수애의 신뢰가 가는 목소리는 앵커였다가 DJ가 된 선영이라는 캐릭터의 이력을 단박에 수긍하게 해준다. 게다가 그녀는 방송 멘트의 영역을 넘어서더라도 할 말은 하는 여자다.

문제는 바로 이 마성의 목소리에 지나치게 빠져버려 현실감각조차 잃어버린 한동수라는 연쇄살인범이 탄생한다는 것이다. 그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지나치게 현실로서 추종하며 그저 말일 뿐인 진술들을 실행으로까지 옮기는 연쇄살인범. 한동수를 라디오라는 미디어에 열광하는 대중의 상징으로 볼 수 있다면, 이것은 미디어, 특히 라디오가 가진 힘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만약 이것이 없었다면 히틀러가 대중들을 움직일 수 없었을 것이라고 그 강력한 힘을 일찍이 보여주었던 라디오. 라디오로 대변되는 미디어의 힘.

하지만 연쇄살인범이 선영의 삶 속으로 뛰어 들어오면서 상황은 역전된다. 그녀의 차분하게 가라앉은 신뢰감 가는 목소리는 차츰 떨리고 흔들리고 결국에는 방송에서는 절대로 할 수 없는 욕설까지 튀어나오게 된다. 그러면서 선영은 자신이 그동안 그토록 떠들어왔던 수많은 말들이 의심스러워진다. 이미 발화되는 순간 기억 속에서조차 지워버린 자신의 그 말들이 듣는 이들에게는 전혀 다른 힘으로 작용해왔다는 것. 그녀의 신뢰감 있는 목소리는 또 얼마나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댔을까.

이렇게 수많은 말을 쏟아내며 그것으로 자신의 존재를 세우며 살아온 그녀가 이제 자신의 딸을 살리기 위해 연쇄살인범의 말을 하나하나 행동으로 옮겨야 된다는 것은 상황의 역전이다. 수 년 간 쏟아낸 말들의 보복을 두 시간 동안 압축해서 받아내며 그녀가 구해야할 존재가 아이러니하게도 말을 하지 못하는 딸이라는 것은 이 영화의 메시지를 분명히 해준다. 우리가 던지는 수많은 말들, 때론 감미로운 목소리로 때론 강압적임 목소리로 다른 사람을 움직인 그 말은 과연 얼마나 진심이었을까. 과연 그것은 진정한 소통에 이르렀을까. 라디오 같은 미디어는 과연 그 말의 진심을 제대로 전달하고 있는 것일까.

이 영화 속 모든 이야기는 다시 수애라는 목소리를 타고 난 여배우의 이야기로 돌아온다. 늘 단아하고 분위기 있는 그 목소리는 듣는 이에게 확실한 신뢰감을 주었지만, 그것이 과연 그녀가 가진 전부일까. 혹시 그녀의 더 많은 모습들은 목소리로 덮여져 보여지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어쩌면 수애는 이 영화 속 선영이 겪은 껍질을 깨는 고통을 연기하면서 자신의 장점이자 한계로 지목된 그 목소리를 깨려 한 것은 아니었을까. 모든 사건이 종결되고 앰블런스를 타고 가면서 그녀가 "저기요 라디오 좀 꺼주세요"라고 말할 때, 혹시 그것은 더 이상 늘 단아함과 분위기 있는 목소리로 규정되던 자신의 이미지를 꺼달라고 말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또 "오늘이 여러분과의 마지막 밤이네요"라고 말할 때도.

"영웅은 고통 속에서 성장한다." '택시 드라이버'의 한 대목이면서 이 영화 속에 반복되어 등장하는 이 대사는 그래서 수애를 두고 하는 말처럼 들린다. '심야의 FM', 그 두 시간은 온전히 수애가 연기자로서 한 껍질을 벗어내는 시간이 되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