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맨>, 총알보다 빠른 퀵 실버에 매료되는 까닭

 

<엑스맨 :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이하 엑스맨)>에는 대단히 인상적인 액션신이 등장한다. 총알보다 빠른 퀵 실버 피터(에반 피터슨)가 경관들이 쏜 총알을 빠른 속도로 제거하고 그들을 쓰러뜨리는 장면이다. 너무나 빠르기 때문에 마치 <별에서 온 그대>의 도민준이 나타난 것처럼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그 순간에, 피터는 헤드폰을 끼고 노래를 들어가며 총을 든 경관들이 저 스스로를 때리게 만들고 또 날아오는 총알의 방향을 바꾸어 놓는다.

 

사진출처:영화 <엑스맨: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

영화를 본 관객이라면 이 장면에서 빵 터지지 않을 수 없다. 퀵 실버 특유의 장난기가 유머 넘치는 장면으로 연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때 흘러나오는 음악이 짐 크로스(Jim Croce)‘Time In a Bottle’이다. ‘시간을 병에 담아둘 수 있다면...’으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아마도 국내의 올드 팝 팬들에게는 깊은 향수를 주는 음악일 것이다.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는 퀵 실버의 현란함에 깔리는 이 지극히 복고적이고 아날로그적인 음악이라니...

 

짧은 장면이지만 이 압도적인 짧은 액션 속에는 다시 돌아온 <엑스맨>의 정서와 이야기 구조가 모두 담겨 있다.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라는 부제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이번 <엑스맨>이 다루는 건 시간에 대한 이야기다. 미래는 어떻게 결정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는 것이 이 영화의 주된 메시지다.

 

영화는 엑스맨들을 제거하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인간까지 위협하는 로봇 센티넬에 의해 파멸의 위기에 처한 미래의 엑스맨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키티 프라이드(엘렌 페이지)의 능력을 이용해 울버린의 정신을 과거의 울버린으로 옮겨 놓음으로써 센티넬이 만들어지게 된 과거의 원인을 제거해 미래를 바꾼다는 설정은 각본가인 사이먼 킨버그 스스로 영향을 받았다 언급했던 <터미네이터>와 유사하다.

 

하지만 울버린이 과거로 돌아가 벌이는 사건들이 마치 미래의 울버린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백일몽처럼 다뤄진다는 점에서는 <매트릭스>의 구조와도 유사하다. 과거로 돌아간 울버린이 프로페서 X와 매그니토의 젊은 시절인 찰스와 에릭을 찾아가 두 사람을 화해시켜 미래의 파멸을 막으려는 과정에서 이 모든 키를 쥐고 있는 인물이 미스틱(제니퍼 로렌스)이라는 걸 알게된다. 무엇이든 변신할 수 있는 이 캐릭터는 자신의 선택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미래를 그 자체로 표상하는 인물이다.

 

<엑스맨>이 흥미로운 건 마치 퀵 실버의 액션 영상이 그러한 것처럼 과거에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들을 영화라는 작은 병에 담아 현재의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있다는 지점이다. 그것은 울버린이 미래에서 꾸는 짧은 꿈이기도 하다. 그것은 끔찍한 악몽이 될 수도 있고 달콤한 꿈일 수도 있다. 과거에 했던 작은 선택들이 모여 미래의 거대한 결과가 만들어진다는 것. <엑스맨>은 어찌 보면 이 사변적인 이야기를 압도적인 SF 액션을 통해 보여주는 영화다.

 

퀵 실버의 짧은 액션은 그래서 <엑스맨> 전체의 이야기와 정서를 함축하고 있다. 시간이란 우리의 생각 속에서는 무궁무진한 양도 찰나에 불과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찰나에 벌어지는 일들은 우리의 미래를 만든다. 영화가 가진 트렌디한 액션과, 과거로 돌아가면서 공존하게 되는 복고적이고 아날로그적인 정서는 그래서 마치 우리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을 만들어낸다. 우리는 과거의 추억과 함께 현재를 살아가고 또 미래를 꿈꾸는 존재들이 아닌가.

 

기가 막힌 캐릭터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즐거움을 주는 영화가 바로 <엑스맨>이다. 시간이 가진 속도에 대한 생각을 뒤집는 퀵 실버, 통제가 아닌 자유선택이 왜 중요한가를 말해주는 변신능력의 미스틱, 죽음과 부활을 떠올리게 하는 회복능력을 가진 울버린 등등. 캐릭터는 그 자체로 흥미롭지만, 그 캐릭터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들은 더더욱 흥미롭다. 이것은 아마도 그토록 반복되어 만들어지고 있지만 <엑스맨>이 매번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근원적인 이유일 것이다.

<런닝맨>이 본 예능의 미래

 

미래의 예능은 어떤 형태일까. 어찌 미래를 점칠 수 있겠냐마는 때론 현재의 징후가 미래를 살짝 먼저 보여주기도 한다. <런닝맨>의 ‘미래 딱지’가 등장한 ‘미래를 보는 자’ 특집 편이 그렇다. 사실 예능의 리얼 게임에서 ‘미래를 봄으로써 현재를 바꾼다’는 것은 지금껏 시도할 수 없었던 불가능의 영역처럼 여겨졌다. <런닝맨>이 제 아무리 기존 영상 콘텐츠의 장르들, 예를 들어 멜로에서 액션, 미스테리, 추리 등등을 잘 흡수했다고 해도 SF는 무리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리얼 게임에서 미래란 늘 물음표의 영역에 남아있기 마련이다.

 

'런닝맨'(사진출처:SBS)

하지만 ‘미래를 본다’는 설정이 가능한 것은 <런닝맨>이 가진 게임쇼적인 속성, 즉 리얼과 버라이어티의 절묘한 지점 덕분이다. 게임은 가상의 놀이이면서 그 과정과 결과는 리얼이다. 즉 게임의 룰과 구성은 가상일 수 있지만, 그 속에서 벌어지는 과정은 실제 상황이 된다는 것이다. 결국은 룰을 어떻게 구성하고 짜느냐에 따라서 게임은 전혀 다른 스토리텔링을 할 수가 있다. 거기에는 리얼한 상황도 있지만 룰에 의해 지켜지는 상황극적인 요소도 있게 마련이다.

 

<무한도전>이 처음 이 게임쇼를 가능하게 했던 것은 거기에 확고한 캐릭터들이 있고, 그들이 새로운 상황(게임적인)에 언제든 반응할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김태호 PD는 이들에게 때론 유아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상황(예를 들면 돈 가방을 갖고 튀는 설정 같은)을 부여하고, 그들이 보이는 지나칠 정도로 승부에 집착하는 진지함을 포착함으로써 그 게임이 주는 긴박감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사소한 게임에 목숨을 거는 데서 발생하는 웃음을 만들어냈다.

 

<런닝맨>은 <무한도전>에서 이 한 곁가지를 가져와 새로운 하나의 영역을 구축해가고 있는 예능 프로그램이다. 역시 여행이라는 아이템을 가져와 하나의 영역을 구축한 <1박2일>이 하는 게임이 조금은 단순하고 촌스러운(바로 그것이 <1박2일>만의 맛이다) 느낌을 준다면 <런닝맨>은 대단히 세련되고 창의적인 게임을 만들어낸다. 이것은 성격이 다르기 때문이다. <1박2일>이 복불복 게임에 집착하게 되면 그 본분인 여행지 소개가 빠져있다는 비판을 받지만, <런닝맨>은 거꾸로다. 오히려 게임 그 자체가 식상해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진화시켜야 생존할 수 있다. ‘미래를 보는 자’ 같은 과감한 시도가 가능한 것은 그 때문이다.

 

<런닝맨>이 미래 예능의 징후를 보이고 있는 것은 그것이 원형적인 게임의 형태를 그대로 갖고 있지만 그 스토리텔링은 끝없이 변주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미래를 보는 자’의 미래 딱지는 사실 액면으로 보면, 게임에서 죽어도 한 번 더 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아이템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미 죽은 자가 미래 딱지를 바닥에 던지며 “미래를 보는 자!”를 외침으로써 그 상황이 미래로 바뀌어 다시 반복되는 장면으로 연출되자 이 게임쇼는 전혀 다른 스토리텔링을 구현한다. SF적인 장르적 느낌을 갖게 된 것이다.

 

사실 게임이란 아주 오래 전부터 원초적인 형태로 끊임없이 이어져 내려온 것들이다. 마치 달리기나 술래잡기, 보물찾기처럼. 하지만 여기에 카메라의 트릭과 캐릭터들의 룰에 입각한 상황극, 그리고 리얼한 반응이 엮어지면 사실상 무한한 스토리텔링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 결국 대중들이 즐기는 것은 원형적인 게임이 주는 놀이의 긴박감보다는 바로 이 스토리텔링이 주는 묘미라고 할 수 있다. 같은 것이라도 어떻게 다른 형태로 보여주느냐에 미래의 예능이 달려 있다는 것이다.

 

<런닝맨>의 ‘미래를 보는 자’는 이미 초능력자 특집에서 그 전조를 보인 적이 있다. RPG형의 캐릭터쇼가 가능한 이 게임 형태는 그러나 ‘미래를 보는 자’를 통해 좀 더 구체화된 느낌이다. ‘미래를 본 자는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설정으로 일종의 업보(?) 상황으로 아줌마 부대가 달려들고, 안대를 착용한 채 이상한 곳으로 끌려가며, 때로는 서로의 이름표가 바뀌는 상황은, 이 ‘죽어도 다시 사는’ 단순한 설정을 ‘미래를 보는 자’로 스토리텔링함으로써 더 나아간 진화의 산물이자 덤이다.

 

세상에 새로운 게임이 없듯 새로운 예능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새로운 방식으로 스토리텔링 하는 게임이 있고 예능이 있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런닝맨>은 그 끝없는 스토리텔링의 진화를 통해 우리에게 예능의 미래를 보여주고 있다. 당장의 다소 낯설고 어려운 지점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미래의 어느 날 우리가 <런닝맨>의 영상을 보게 된다면 어떨까. 어쩌면 미래의 그들에게 웃음을 주는 예능의 원류를 거기서 발견하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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