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수의 무표정은 우리의 얼굴이다

'그저 바라보다가(그바보)'에서 톱스타인 한지수(김아중)의 표정은 늘 굳어있다. 미소를 지어도 연기하는 듯 하고, 대중들이나 기자들 앞에서 설 때면 그녀는 실제로 연기를 한다. 아무리 슬픈 일이나 힘겨운 일이 있어도 그 얼굴에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감정이 드러나는 그 순간, 그것은 자신에게 덧씌워진 이미지를 깨뜨리기 때문이다. 늘 외부의 시선을 의식해야 하는 그녀의 삶은 따라서 어느 정도는 늘 연기하는 삶이다.

그리고 이것은 한지수가 처한 불행의 실체이기도 하다. 스타라는 존재는 수많은 대중들에 의해 올려다 보여지지만, 바로 그 수많은 눈들에게 보여진다는 점이 자신의 삶을 살 수 없게 만든다. 그녀는 그래서 자신이 스타가 되기 전의 모습으로 자신을 바라봐주었던 김강모(주상욱)를 사랑한다. 그런데 연기하는 삶은 연기자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정치인이나 기업가 역시 연기하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아버지에 의해 정치에 입문하는 김강모의 삶은 한지수의 삶과 다르지 않다.

연기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두 사람의 사랑이 연기가 되어버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외부의 시선을 의식해야 하는 그들의 사랑이 뒤틀어지는 건 그 때문이다. 그들은 여전히 서로를 사랑한다고 믿고 있지만 그것은 어쩌면 연기하는 자아가 스스로에게 만들어낸 가짜일지도 모른다. 그런 그들 앞에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는 순수한 바보 같은 남자, 구동백(황정민)이 등장한다. 그리고 구동백 앞에서 한지수는 그 굳어진 얼굴이 차츰 얼음 녹듯 풀어져가는 것을 느낀다.

바로 이 한지수의 '잃어버렸던 자기 표정 찾기'는 '그바보'가 말하려는 전부이기도 하다. 초반부 김아중의 연기력 논란까지 불러일으킨 한지수의 마네킹처럼 굳어있는 얼굴이, 이제 와서 조금씩 진정한 웃음과 눈물을 통해 표정을 찾아가는 과정은 따라서 다분히 의도적으로 설정된 것들이다. 톱스타로서의 한지수가 가진 상품화된 얼굴이 구동백이라는 순수의 인물을 만나 차츰 인간으로서의 얼굴로 변화해가는 과정은 배우 김아중이 이 드라마를 통해 희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CF퀸으로서의 늘 똑같은 얼굴이 아니라, 연기자로서의 여러 솔직한 얼굴들을 갖게 되는 것. 그것이 김아중의 바람이다.

그리고 이 바람은 이 드라마를 보는 우리들의 바람이기도 하다. 사실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치고 어느 정도 연기하는 삶을 살아가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조직생활을 통해서 우리는 울고 싶을 때도 웃어야 하고, 웃고 싶어도 심각해야 하며, 때론 화가 나도 침묵해야 하는 그런 얼굴을 차츰 갖게 되었다. 언젠가 문득 거울을 들여다보면 거기 낯선 자신이 서 있는 그 느낌만큼 슬픈 일이 있을까. 순수했던 그 때의 얼굴을 찾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일 것이다.

'그바보'는 웃음 없는 세상에 미소를 가르쳐주는 드라마다. 한지수의 잃어버린 얼굴이 표상하는 것은 언젠가부터 그렇게 되어버린 우리들의 무표정한 얼굴이다. 거래의 세계 속에서, 그 연기해야 살아갈 수 있는 세계 속에서 우리들의 바보, 구동백은 그러지 않아도 충분히 우리는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말한다. 실로 이 땅을 미소 짓게 하는 이들은 바보인 경우가 많다.

절망적인 미래, '그바보'가 전하는 현재의 긍정

"전 지금 벼랑 끝에 서 있어요." 톱스타 한지수(김아중)의 말대로 그녀는 벼랑 끝에 서 있다. 톱스타와 정치인의 스캔들을 피하기 위해 진짜 연인인 김강모(주상욱) 대신 구동백(황정민)과 가짜 결혼을 해야 하는 그녀. 그녀가 현재를 버틸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것은 김강모가 해준 미래에 대한 약속뿐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녀의 착각이다. 미래는 늘 오지 않는 거리에서 보여질 뿐이고, 사실 우리는 늘 현재에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를 벼랑 끝에 세운 것은 김강모가 아니라, 그렇게 늘 미래를 위해 현재를 포기하는 그녀 자신이다.

그런 그녀 앞에 현재로 서 있는 인물은 구동백이다. 그는 오지 않은 미래 때문에 현재를 절망적으로 살아가는 그녀에게 불쑥 배가 고프다며 밥을 먹으러 가자고 한다. 현재를 버텨내야 미래도 온다는 구동백의 전언이다. 그는 그녀가 들어주겠다는 세 가지 소원(이 동화적인 설정은 구동백이란 캐릭터와 너무나 잘 어울린다) 중 하나를 '그녀와 먹는 한 끼 밥'으로 쓴다. 이것은 구동백의 사랑법이 김강모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시제에 위치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김강모가 늘 '미래 그 언젠가'라면, 구동백은 늘 '지금 현재'에 서 있다.

그리고 그는 그 현재를 긍정한다. 한 때 '있으나 마나'였던 자신의 별명을 얘기하며 한지수 덕분에 '사람들 관심 속에서 살아가는 것' 또한 즐거움이라 긍정한다. '사람들 관심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한지수에게는 고통스런 현재 그 자체이지만 구동백은 "진짜 슬픈 인생은 살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바람에 날아가 바닷물에 빠진 한지수의 모자를 건져내며 정작 자신의 바지가 온통 젖었어도 "모자가 젖었네요"라고 말하는 구동백에게 한지수라는 존재는 그의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는 인생에 가장 큰 선물이 된다.

실로 우리네 삶은 미래의 불안 때문에 아무리 절망 속에 있어도 또 그 정반대의 상황에 있어도, 우연히 해파리에 다리를 쏘이면 아프고, 몇 끼를 굶으면 배가 고픈 현재에 붙박여 있다. 이것이 엉거주춤 걸어가는 구동백의 뒷모습을 보며 웃음이 터지는 한지수가 "이런 상황에도 웃음이 나오네요. 어떻게 이렇게 힘든데. 죽을 것처럼 힘든데 어떻게 웃음이 나올 수 있지?"라고 말하며 또 한편으로는 눈물을 흘리는 이유다.

'그저 바라보다가'가 구동백이라는 바보 같은 캐릭터를 통해 전하는 메시지는, 오지 않은 미래의 불안에 잠식되어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현재적 삶을 긍정하며 살아가는 법이다. 쉽게 미래를 예단하는 자들의 특징이란 그 예측 가능성을 통해 어떤 이득을 취하려는 삶의 태도다. 하지만 그 예단하는 습성은 결국 거꾸로 그 자신을 바보로 만들 뿐이다. 한지수가 "구동백씨는 명쾌해서 좋겠어요. 나 어떻게 해야되죠?"하고 묻는 건 그 때문이다. 이 드라마는 그 부제처럼 불리는 '그바보'라는 제목처럼 시종일관 구동백을 바보로 만들려는 세상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 바보는 거꾸로 그런 세상을 바보로 드러내주는 거울 역할을 해준다.

따라서 막장과 자극과는 정반대의 위치에 서 있는 이 바보스런 드라마는 그대로 구동백을 닮아있다. 그저 거기 바보처럼 서서 오히려 세상이 바보임을 증명하듯 말이다.

바보와 버려진 신발, 그리고 서민들

어느 동네나 유명한 바보 한 명쯤은 있게 마련. 그 바보를 만났을 때, 당신은 어떻게 했나. 그냥 그런 존재는 없는 것처럼 지나쳐버렸던가. 너무 더러운 그 모습에 벌레 쳐다보듯 피했던가. 혹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눈앞에서 꺼지라고 했던가. 대부분은 이것들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당혹스럽게도 당신이 지나치거나 벌레 보듯 도망쳤던 바로 그 바보가 주인공이다.

신발을 닮아버린 바보, 승룡이
영화 ‘바보’의 바보, 승룡이(차태현)는 늘 맨발이다. 그 맨발을 지켜주던 낡은 신발이 있지만 칠칠치 못하게 늘 잃어버리고 만다. 구멍난 낡은 신발은 바로 바보 승룡이 자신을 닮았다. 어린 시절, 연탄가스 사고로 아버지를 잃고 자신마저 바보가 되었으며, 그런 바보에게 어머니는 동생마저 맡기고 떠나지만 정작 승룡이는 웃을 뿐이다. 절대로 울지 않는다며 자신이 감당해야 할 것들을 기꺼이 감당한다. 마치 가장 낮은 곳에서 묵묵히 세상의 더러움을 막아주고 소중한 발을 보호해주면서도 늘 버려지는 신발처럼.

바보는 늘 버려져왔다. 부모에게서 버려졌고(물론 부모는 승룡이를 버리지 않았고 일찍 세상을 떠난 것이지만 결과적으로 승룡이 혼자 남겨졌다는 의미에서), 자신이 돌봐주지만 자신을 싫어하는 동생 지인이(박하선)에게도 버려졌다. 영화가 굳이 그걸 보여주진 않지만 가족이 이럴진대 타인은 오죽할까. 그런데 이 버려진 바보, 버려진 신발에 관심을 갖는 이들이 있다. 그것은 어릴 적 친구였던 지호(하지원)와 상수(박희순)다. 지호(하지원)는 바보와의 재회에서 버려진 승룡이의 신발을 주워온다. 의사인 지호의 아버지는 승룡이가 어디 아프지는 않는지 늘 찾아와 문진을 해준다. 자신이 태워먹은 학교 피아노 때문에 대신 누명을 쓰고 학교를 떠난 승룡이에게 깊은 죄의식을 가지고 있는 상수(박희순)는 늘 바보 곁을 맴돌고 기꺼이 자신의 신장을 승룡이의 동생에게 떼어준다. 그들은 바보의 맨발 같은 삶에 신발이 되어주는 사람들이다.

영화가 주목하는 것은 그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길거리에 버려진 더럽고 낡은 신발 같은 바보 승룡이의 마음이다. 바보라는 단어가 가진 두 가지 의미, 즉 덜떨어졌다는 부정적 의미와 착하다는 긍정적 의미는 작품에 의해 주목된 승룡이를 통해 전자에서 후자로 바뀌어 나간다. 그리고 거기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약삭빠르지도 못하고 거짓말도 못하며 누군가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내주는 바보의 위대성이다.

모든 이들을 위해 웃으며 선택하는 바보의 죽음은 마치 예수의 희생을 연상케 한다. 그의 죽음을 통해 많은 이들은 다시 태어나게 되는데, 지호는 비로소 다시 피아노를 연주할 수 있게 되고, 상수와 희영(박그리나)은 술집생활을 청산하고 각각 토스트 가게와 은행안내원을 하게 되며, 동생 지인(박하선)은 새 생명을 얻게된다.

진심을 전하는 반복의 힘
영화가 바로 이 바보가 가진 진심의 힘을 전달하는 방식이 흥미롭다. 그것은 어눌하지만 반복되는 진술과 장면들을 통해서다. 바보는 많은 어휘를 알지 못하지만 같은 말을 여러 번 반복함으로써 그 말의 무게를 더한다. 상수에게 “동생을 돌봐달라”는 말을 반복해서 말할 때, 처음에는 지나쳤던 것이 차츰 정색하며 받아들이게 되는 것처럼 영화는 이런 반복의 문법을 통해 관객에게 진심을 말한다. 이것은 강풀의 만화가 가진 장점과도 일맥상통한다. 강풀은 여러 마디의 말보다 단 한 마디의 반복되는 말로 전하는 말의 힘을 아는 작가다.

학교에서 아픈 동생을 업고 가려는 바보를 막아서며 당신 누구냐고 묻는 선생에게 “얘는 제 동생이구요, 저는 지인이 오빠 승룡이에요”라고 반복적으로 말하는 화법은 마지막에 와서 바보의 사망신고를 하러 온 지인이가 동사무소 직원에게 반복해서 “이 사람은 제 오빠구요. 저는 이 사람 동생이에요”라는 화답으로 돌아온다. 이 반복의 힘은 대사를 통해서만 전달되는 것이 아니다. 고물상 아저씨의 승룡이네 집으로 신발을 던지는 장면의 반복은 이 영화의 가장 상징적인 장면이면서 인상적이다.

버려진 신발을 계속해서 주워와 주인에게 돌려주는 그 고물상 아저씨와, 지인이의 반복된 진술은 모두 타인으로 극장에 앉아 있는 우리에게 어떤 행동까지를 요구하는 힘을 발휘한다. 이제 더럽고 비천하며 어딘가 덜떨어진 사람으로서만 치부하던 낮은 사람들에게 대한 선입견은 이 즈음에 와서는 나의 오빠이자 나의 동생, 친구, 가족 같은 일이 되어버린다. 지인의 대사와 고물상 아저씨의 장면은 세상에 버려진 나와는 하등 상관없어 보이는 비천한 사람들의 죽음이 사실은 바로 나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에둘러 말해준다.

바보에게 빚진 당신의 삶
‘바보’가 그려내고 있는 것은 진짜 육체적인 장애를 겪는 바보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거기에는 주목받지 못하고 매일 매일이 힘겹지만 불평 없이 누군가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며 살아가는 이 땅의 모든 바보들을 위한 이야기가 들어있다. 그리고 그것은 힘없고 가난하며 태생이 다르다는 이유로 계층적 차별의식에 차별 당하면서도 늘 이 땅의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기꺼이 그 일에 뛰어들었던 우리네 착한 서민들을 닮았다. 사실상 지금 우리가 숨쉬며 버젓이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이 땅의 수많은 바보들, 승룡이들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영화는 바로 우리가 삶을 빚진 그들에 대한 채무의식을 승룡이라는 인물을 통해 환기시킨다. 그러니까 승룡이가 하는 일거수 일투족은 거꾸로 우리가 승룡이에게 저지른 그 죄의식을 떠올리게 한다. 세상에 버려진 수많은 낡은 신발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아무런 항변도 없이 자신을 아낌없이 희생하고는 버려진 그 신발들을 귀하게 주워서 주인에게 던져주는 영화 속 고물상 아저씨의 마음이 되는 것은 우리 모두 그 버려진 것들에게 빚진 바가 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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