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로무비

전라북도 무주는 반딧불이 축제로 유명한 곳이다. 그런데 이 곳은 언젠가부터 영화제도 유명해졌다. 이름하여 무주산골영화제. 올해로 벌써 13회를 맞는 영화제다. 이 곳이 반딧불이와 더불어 영화제로 유명해진 건, 상대적으로 다른 지역에 비해 밤에 불빛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곳 ‘산골’에서는 영화제에 야외에서 영화를 본다. 영화 ‘시네마 천국’의 한 장면같은 로맨틱한 광경이 펼쳐진다. 밤이 낮처럼 밝은 도시라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어둡기 때문에 오히려 빛이 더 잘 보이고, 그래서 삼삼오오 모여 영화를 보는 이들의 마음은 더더욱 따뜻해진다. 어둡기 때문에 더 빛나는 별과 달을 볼 수 있다는 역설. 어찌 보면 우리네 삶이 그렇지 않은가. 

 

넷플릭스 드라마 ‘멜로무비’는 바로 이 무주산골영화제를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다. 단역배우인 고겸(최우식)은 세상 걱정 하나 없어 보이는 청춘이다. 영화 촬영현장에서 ‘똥강아지’처럼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지친 사람들마저 웃게 만든다. 그런 그의 눈에 현장에서 일하는 스텝 김무비(박보영)가 들어온다. 이름 때문에 관심을 갖게 됐지만, 어딘가 사람들과 거리를 두는 듯한 그녀의 그늘이 자꾸만 고겸의 눈에 들어온다. 김무비의 그늘은 아빠에 대한 상처 때문이다.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늘 가족을 떠나 영화판을 전전했던 아빠의 꿈은 영화감독이었다. 하지만 이렇다할 영화 한 편 내놓지 못하고 먼저 세상을 떠난 아빠에 대한 애증은 그 누구에게도 쉽게 정을 주지 못하는 그녀를 만들었다. 그런데 고겸은 그런 깊은 어둠 속에 있는 김무비에게 다가와 한없는 해맑음으로 그녀의 마음을 여는데 그건 마치 한 편의 영화 같다. 김무비 같은 깜깜한 어둠 속에 비춰진 고겸 같은 빛이라 더 따뜻하고 선명한 한 편의 멜로영화 같달까.

 

그런데 한꺼풀 더 인물 속으로 들어가 보면 고겸의 그 해맑음의 이면에는 어두운 과거의 그늘이 숨겨져 있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셨고 형과 단둘이 세상을 살아내야 했던 어린 고겸이었다. 자신을 부양하기 위해 일하러 나가는 형은 그를 비디오가게에 맡겼고, 어린 동생은 혼자 있는 시간들을 영화를 보며 보냈다. 영화는 고겸에겐 그래서 단순히 재미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그 혼자 있는 외로움을 애써 잊게 해주는 것이었다. 고겸은 어두운 삶의 터널 속에서 그 어둠을 바라보기보다는 빛을 애써 찾으려 하는 사람이 됐다. 김무비가 유독 그에게 신경쓰였던 건 그 그늘에서 자신의 어둠을 봤기 때문이었다. 

 

‘멜로무비’는 단역배우였지만 평론가가 된 고겸과 스텝으로 일하다 영화감독이 된 김무비가 사랑하고 예기치 않은 일로 이별하게 되지만 다시 만나 사랑을 엮어가는 과정을 통해 과거의 아픔들을 조금씩 치유해가며 성장하는 이야기를 그린다. 여기에 고겸의 절친인 홍시준(이준영)과 손주아(전소니)의 또 다른 사랑과 성장 스토리가 더해진다. 음악을 꿈꾸던 홍시준과 그의 뮤즈였던 손주아가 각자의 꿈을 위해 헤어질 수밖에 없었지만, 한 편의 영화를 통해 음악감독과 시나리오 작가로 다시 만나 과거의 상처를 회복해가는 이야기다. 그래서 ‘멜로무비’는 고겸과 김무비 그리고 홍시준과 손주아의 사랑이야기를 그리지만 동시에 한 편의 영화를 중심으로 평론가, 영화감독, 음악감독, 시나리오 작가가 어우러지는 작업 과정 또한 담고 있다. 

 

‘그 해 우리는’으로 잘 알려진 이나은 작가는 이번 작품에서도 최우식을 자신의 페르소나로 세웠다. 워낙 최우식을 잘 알아 이를 고겸이라는 인물에 녹여낸 덕분에, 최우식의 매력은 도드라진다. 지금껏 밝은 모습으로만 대중들에게 각인되어 왔던 박보영의 그늘을 느낄 수 있는 연기변신도 주목할만하고, 까칠하지만 그 뒤에 어린아이가 숨겨진 듯한 홍시준을 연기한 이준영과, 사랑하지만 과거에 머물러 있는 홍시준이 현재로 나올 수 있게 아픈 이별을 선택하는 손주아 역할의 전소니의 연기도 인상적이다. 

 

사랑을 담은 청춘멜로지만 사람과 삶이 보이는 드라마다. 어찌 보면 삶이란 어둠 속을 홀로 걸어가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누군가의 온기를 찾고 어둠 저 편의 달을 찾는다. 무겁디 무거운 삶의 무게 앞에서 시시콜콜한 멜로영화 한 편이 주는 위로는 그래서 더더욱 크고 따뜻하다. (글:일간스포츠, 사진:넷플릭스)

박보영과 최우식의 ‘멜로무비’, 영화 같은 사랑에 담은 사람이야기

멜로무비

아홉 살에 세상의 모든 영화를 다 보겠다고 마음 먹는 아이는 영화가 그리도 좋았던 걸까. 아니면 홀로 어두운 밤을 보내야 하는 시간들이 그만큼 힘겨웠던 걸까. 넷플릭스 드라마 <멜로무비>는 부모를 일찍 잃고 형과 함께 비디오가게에서 살며 밤새 비디오를 보는 고겸(최우식)으로부터 시작한다. 어두운 방안을 빛으로 채워주는 영화에 빠져드는 아이 고겸으로부터. 

 

영화를 좋아해서일까. 스물 여섯 살이 된 고겸은 배우로서의 꿈을 키우며 영화판에 들어왔다가 김무비(박보영)라는 독특한 이름을 가진 연출 스태프에게 빠져든다. 무비라는 이름이 고겸을 잡아끌었지만, 정작 무비는 자신의 이름이 싫다. 영화 판에서 일하다 과로로 일찍 사망한 아버지에 대한 애증 때문이다. 가족까지 등지고 열심히 영화를 향한 꿈을 펼쳤지만 이렇다할 영화 한 편 제대로 내지 못했던 아버지. 그렇게 일찍 떠난 아버지에게 무비는 그가 얼마나 한심한 사람이었는가를 보여주겠다며 영화판에 뛰어든다. 

 

그렇게 두 사람은 영화 촬영현장에서 만난다. 한 사람은 영 연기에는 재능이 없어보이지만 사람이 좋아 누구나 좋아하는 너스레 가득한 청년이고, 다른 한 사람은 스텝으로 일하고 있지만 한 발 물러나 섬처럼 그들과는 섞이지 않는 조용한 청춘이다. 고겸은 마치 주인 따라 다니는 댕댕이처럼 김무비를 졸졸 따라다니고 그런 고겸에게 어느 눈오는 날 김무비는 첫 키스를 한다. 마치 영화 속 한 장면 같은 키스를.

 

하지만 삶이 어찌 영화 같은 순간들로 채워지랴. 그 키스를 한 날 이후 갑자기 고겸은 사라져버리고 김무비는 기다리다 지쳐 마음을 접는다. 아버지가 갑자기 떠났을 때 누군가에게 마음을 준다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가를 알았던 무비였다. 그래서 누구와도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던 그녀였다. 하지만 겨우 고겸에게 마음을 열었을 때 다시금 찾아온 건 그 고통이었다. 

 

고겸 또한 힘겨운 시간들이었다. 갑작스런 자동차 사고로 형은 회복하기 어려워보였지만, 고겸의 정성스런 간병으로 다시 살 수 있게 됐다. 그렇게 5년의 시간이 흘렀고, 고겸은 간병하며 할 수 있는 글을 쓰다 영화 평론가가 된다. 무비는 고겸을 마음 속에 지워내며 영화 감독의 길을 걸어간다. 

 

한편 고겸의 어린시절부터 절친이었던 시준(이준영)과 주아(전소니)는 서로 사랑하는 연인 사이였지만 어느 날 주아는 영화 시나리오를 쓰겠다며 떠나버린다. 음악의 꿈을 갖고 있고 재능도 있었지만 빛을 보지 못한 시준은 자신의 뮤즈인 주아를 잃은 그 시간 속에서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다시 나타난 주아가 시준에게 자신이 만들 영화의 음악감독이 되어달라 요구하면서 이들의 손에 닿지 않는 아픈 사랑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멜로무비>는 미래의 꿈 앞에서 불안해하고 때론 예기치 않은 일들 때문에 흔들리면서도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서로 사랑하게 되는 청춘남녀들의 멜로를 그리는 작품이다. 평론가와 영화감독 그리고 시나리오 작가와 음악감독이라는 네 인물의 직업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이들이 연인과 친구로 얽혀 그려내는 사랑과 우정의 이야기면서 동시에 이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영화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해 우리는>을 쓴 이나은 작가의 색깔 그대로 <멜로무비>는 풋풋하고 경쾌한 청춘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그 밑바탕에는 생각보다 쓰디 쓴 삶의 서사가 담겨져 있다. 그 고통스런 삶의 모습이 밝게 그려지는 건 다름 아닌 어떤 힘겨운 상황 속에서도 그 밝음을 잃지 않는 고겸이라는 인물 덕분이다. 그는 아홉 살 어린 나이에 홀로 비디오가게에서 살아가며 일하러 간 형을 기다리며 살아야 했지만, 그 시간을 영화를 보는 즐거움으로 채웠던 아이였다. 

 

이 지점은 <멜로무비>가 가진 웃음과 행복감 가득한 사랑이야기에 삶의 무게감이 얹어지는 대목이다. 알고 보면 모두가 저마다 무거운 삶을 짊어지고 있었다는 걸 <멜로무비>는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들을 담담히 보여주면서 조금씩 꺼내 놓는다. 갑자기 사망한 부모 대신 이제 겨우 이십대에 덜컥 동생을 부양해야 했던 형, 그 형이 사고를 당하자 모든 일을 접고 형을 간병해 살려낸 동생, 영화의 꿈을 꿨지만 현실의 무게에 무참히 꺾여버린 아버지, 그 아버지와의 시간이 간절했지만 먼저 떠나버린 아버지에 대한 상처 때문에 마음을 닫아버린 딸, 남자친구의 뮤즈가 되어 응원했지만 점점 자신이 사라지는 걸 알고는 떠날 수밖에 없었던 여자와 그 여자가 떠난 후 그 시간대에 머물러 살게 된 남자...

 

발랄하게 그려져 있지만 그 안을 들여다 보면 <멜로무비>에는 고통스런 삶들이 군데군데 숨겨져 있다. 하지만 그 고통스런 삶들을 버텨낼 수 있게 해주는 건 반짝반짝 빛나는 일상의 순간들이고 어쩌면 한 발 물러나 그 삶을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시선이라고 이 작품은 말하는 듯 하다. 그건 마치 영화를 닮았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오히려 빛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그 속으로 우리를 인도해 잠시 아픈 현실을 잊게 해줌으로서 또 그 어둠 바깥으로 나오게 해주는, 영화를. 

 

고겸과 무비가 어느 어두운 밤 한적한 곳에서 오픈카에 앉아 달달한 사랑이야기를 나눌 때 저 편에 보이는 달은 그래서 <멜로무비>가 하려는 이야기를 그림 한 폭에 담아 놓는다. 이토록 고통스러운 어둠 가득한 삶 속에서 저 달처럼 빛나는 달달한 멜로영화 한 편이 주는 위로는 우리가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힘이라는 것. 그렇게 사랑이야기가 사람이야기가 되고 달달함이 묵직한 감동으로 이어지는 작품, 바로 <멜로무비>다. (사진:넷플릭스)

빛과 어둠의 대비를 아는 배우, 주지훈의 여러 가지 얼굴

조명가게

“그 아저씨가 세상 무뚝뚝한데 은근 따뜻하지.” 디즈니+ 드라마 ‘조명가게’에서 간호사 영지(박보영)는 원영(주지훈)에 대해 그렇게 말한다. 원영은 암흑뿐인 사후세계에 유일하게 빛을 밝히고 있는 조명가게 주인이다. 빛이 너무 눈부시다는 핑계로 늘 선그라스를 끼고 있지만 사실 그건 의식을 잃고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배회하는 사람들과는 다른 자신(고양이 같은 눈빛을 가졌다)을 숨기기 위해서다. 하지만 선글라스의 용도는 정체를 숨기는 것만이 아니다. 눈빛으로 드러날 수 있는 속내를 숨기는 것도 그 중요한 용도다. 원영은 그 곳이 사후세계인지도 모른 채 조명가게를 찾는 이들에게 자신의 정체도 또 속내도 숨기려 한다. 그런데 그건 그들을 겁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이 곳에 대한 기억을 갖지 않게 하려는 노력이다. 의식을 잃고 사후세계에 발을 디뎠지만 다시 의식을 되찾고 돌아갔을 때 기억의 혼동을 일으키지 않게 하려는 배려다. 영지가 원영에 대해 무뚝뚝한데 은근 따뜻하다고 말한 건 그런 이유다. 

 

무뚝뚝한데 은근 따뜻한 이 배역에 주지훈만한 연기자는 없어 보인다. 주지훈은 지금껏 해왔던 연기들 속에서 무표정을 통해 표정을 극대화하는 연기를 줄곧 선보여온 배우다. 예를 들어 ‘마왕’ 같은 작품에서는 복수를 꿈꾸는 오승하라는 인물이 시종일관 무표정으로 등장하는데, 그래서 그가 가끔 살짝 입꼬리를 들어올리며 미소를 지을 때면 마치 악마 같은 섬뜩한 느낌을 자아낸다. ‘킹덤’에서도 왕세자지만 후궁에서 난 서자로서 계비의 위협을 받으며 각성하는 그 변화 과정을 주지훈은 무표정에서 시작해 생존하기 위해 점점 일그러져가는 얼굴을 통해 실감나게 보여준 바 있다. ‘지배종’ 같은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폭발사고로 병사들을 잃고 사건을 추적하는 우채운이라는 인물을 속내를 알 수 없는 특유의 무표정으로 연기해냄으로써 그 속내가 드러날 때의 반전효과를 극대화시켰다. 

 

이런 면모는 멜로 연기에도 똑같이 드러난다. 최근 방영되고 있는 ‘사랑은 외나무다리에서’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한국형 로맨틱 코미디 같은 설정을 가진 드라마다. 석지원(주지훈)과 윤지원(정유미)은 그 집안이 원수지간이다. 두 사람 역시 학창시절부터 티격태격하며 자라왔고 그러다 서로 좋아하게 됐지만 사소한 오해로 관계가 틀어지면서 애증이 싹텄다. 그리고 18년이란 세월이 흘러 다시 이사장과 체육교사의 관계로 다시 만나면서 그 관계가 이어진다. 어찌 보면 뻔한 구도지만, 이를 흥미롭게 만드는 건 석지원과 윤지원의 속내를 알 수 없는 말과 행동들이다. “나랑 연애합시다. 라일락 꽃 피면.” 이런 내기를 석지원이 툭 던지는 내면에는 진짜 다시 윤지원과 연애 하고픈 마음이 숨겨져 있지만, 그는 겉으로는 마치 내기에서 윤지원을 이기고픈 마음이 앞서고 있는 것처럼 위장한다. 그렇게 속내를 숨기다가 결국 석지원은 숨길 수 없는 감정을 윤지원에게 고백한다. “우리 그만합시다. 난 안되겠어. 그러니까 이딴 내기 집어치우고 나랑 진짜 연애하자. 윤지원.” 반듯한 모습으로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무표정을 하고 있던 이가 어느 순간 감정을 툭 드러내며 표정을 보여줄 때 전해지는 효과를 주지훈만큼 잘 알고 있는 배우는 없다. 

 

‘하이에나’ 같은 법정물에서도 주지훈은 윤희재라는 변호사 역할로 경쟁 관계에 있는 변호사 정금자(김혜수)와 대립 구도를 만들며 매번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 대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그는 스펙 없이 맨몸으로 부딪쳐 살아남으려 안간힘을 쓰는 정금자에게 서서히 마음이 움직이고 그래서 그녀의 편에 서게 되는 새로운 선택을 하게 된다. 여기서도 무표정에서 시작해 으르렁거리다가 멜로의 눈으로 바뀌어가는 주지훈의 얼굴이 효과를 발휘한다. 

 

이러한 무표정이 오히려 효과를 만들어내는 표정 연기의 반전은 여러모로 모델로 시작한 그의 필모와 무관하지 않을 듯 싶다. 옷을 강조해야 하는 모델들의 경우, 얼굴 표정은 최대한 절제하는 게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간간히 드러내는 표정은 오히려 그 전달하는 감정을 더 극대화시킨다는 걸 모델에서 연기자로 넘어오며 그는 경험적으로 알게 된 것 같다. 

 

주지훈의 이런 연기적 면모는 한 작품 안에서만 보이는 게 아니다. 일련의 작품 선택 과정을 보면 익숙한 얼굴이 전혀 다른 배역을 차기작으로 선택함으로써 그 반전효과를 내곤 했다는 걸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궁’으로 주목받으며 주로 멜로 연기를 해왔던 주지훈은 ‘마왕’ 같은 스릴러로 진지하고 무거운 얼굴을 보여줬다. 또 ‘신과 함께’ 같은 영화를 통해서 너무나 가볍게 여겨지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을 보여주더니 ‘암수살인’에서는 살벌한 희대의 살인마를 연기했다. 선과 악, 가벼움과 무거움을 오가는 배역 선택은 그래서 매번 ‘같은 배우 맞아’라는 반응들을 만들어내곤 했다.  

 

‘조명가게’는 그래서 주지훈이라는 배우의 특징을 가장 잘 담아낸 작품으로 보인다. 그건 어둠과 빛의 대비를 세계관으로 갖고 있는 ‘조명가게’에서 원영 역시 어둠 같은 무뚝뚝함을 가장하고 있지만 사실은 빛의 따뜻함을 숨기고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오래 전 아파트 붕괴 사고로 딸을 두고 먼저 세상을 떠났던 이 인물은 딸을 살리는 대가로 사후세계의 조명가게를 맡는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흐른 후 그 조명가게를 찾아온 딸을 우연히 만나는 순간, 드디어 선글라스로 가렸던 그의 감정이 폭발한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배회하는 이들을 위해 조명가게를 맡아온 그의 마음 깊숙한 곳에는 마치 그 곳을 찾는 이들을 딸처럼 바라보는 안타까움과 그리움이 숨겨져 있었다는 게 그 순간 드러난다.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살아가는 데 익숙하다. 하지만 그렇게 무표정이라고 해도 그 안에는 다양한 감정들이 존재한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마치 기계처럼 단조롭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느 순간 감정이 밖으로 드러날 때 생겨나는 인간의 증명. 그건 어쩌면 건조한 현대사회를 촉촉하게 해주는 희망 같은 것이 아닐까. 주지훈의 연기는 바로 그걸 증명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어둠 속에 오히려 더 빛나는 백열전구가 주는 희망을.(글:국방일보, 사진:디즈니+)

조명가게

삶과 죽음의 경계에까지 갔다가 살아 돌아온 사람들에게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디즈니+ 드라마 ‘조명가게’의 상상력은 거기서부터 시작했을 게다. 사고로 인해 의식을 잃었지만 중환자실에서 산소호흡기에 의지한 채 버텨내는 환자들. 그들은 무의식 속에서 불빛 하나 없는 어두운 동네를 배회한다. 그 곳에는 유일하게 밤새도록 환하게 빛을 내는 조명가게가 있다. 낯선 동네를 배회하는 낯선 사람들의 발길은 저마다의 이유로 그 조명가게를 향한다. 

 

어두운 동네를 배회하는 낯선 이들의 모습은 오싹한 공포를 불러 일으킨다. 누군가는 손톱이 손가락 안쪽에 붙어 있고, 누군가는 어두운 골목길에 갇혀 있으며, 누군가는 집에 갇혀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 누군가는 밤새도록 짖어대는 개를 찾아 죽이겠다며 쫓아다니고. 누군가는 하염없이 쏟아지는 눈물에 온몸이 젖은 채 배회하는 이들을 찾아다닌다. 도대체 이들은 누구이고 이 곳은 어디인가. 8부작 ‘조명가게’는 4부까지 낯선 동네와 낯선 이들의 수상한 행동들이 만들어내는 전형적인 공포물의 형태를 보여준다. 

 

하지만 4부 말미에 이르러 이들이 중환자들이었고, 이 낯선 동네가 이들이 무의식 속에서 가게 된 사후세계라는 게 밝혀지면서 이 공포의 존재들은 저마다 아픈 사연을 가진 사람들로 변모한다. 공포물은 휴먼드라마로 바뀐다. 죽은 자들과 살아남은 자들 사이의 사연이 펼쳐지고, 죽은 자들이 어떻게든 살아남은 자들을 삶으로 되돌려 보내기 위한 눈물 겨운 안간힘이 그려진다. 그 어두운 동네를 지키는 조명가게에서 꺼질 듯 꺼지지 않고 가녀린 빛을 내는 전구들은 알고 보니 사후세계에 들어왔지만 여전히 죽지 않은 이들의 꺼지지 않는 삶의 빛이었다. 스스로의 의지로 혹은 누군가의 도움으로 그 삶의 빛을 찾아내는 것. 그것이 이들이 사후세계에서 돌아올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조명가게’는 바로 사후세계를 경험한 이들의 이른바 ‘임사체험’을 소재로 가져온 작품이다. 무수한 임사체험의 이야기들이 공통적으로 담고 있는 것들, 이를 테면 누군가 나타나 돌아가라고 했다거나 혹은 밝은 빛을 봤다는 식의 신비로운 경험들을 강풀은 조명가게가 있는 낯선 동네라는 세게관으로 그려낸다. 공포물로 시작하던 작품이 휴먼드라마로 바뀌는 건 그래서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다.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이야기가 아닌가. 삶과 죽음 사이의 경계에 서 있는 상황이 공포물의 전형을 그려낸다면, 그들이 죽음을 깨치고 나와 삶의 빛에 도달하는 과정은 눈물 겨운 휴먼드라마가 될 수밖에 없다. 

 

강풀이 임사체험이라는 신비한 이야기 속에 화두처럼 던진 질문은 어떻게 의식도 없는 환자가 어떤 의지로 살아 돌아올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이다. 혹자는 스스로 살고자 하는 의지 때문에 돌아오기도 하지만, 강풀은 거기에 환자만의 의지가 아닌 또 다른 누군가의 의지가 있었다고 상상한다. 어떻게든 딸을 되살리려는 엄마의 안간힘이 있었고, 사랑하는 사람을 삶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 눈물겨운 이별을 감수하는 이가 있었으며, 죽을 때까지 주인을 살리려 자신의 체온을 나눠준 반려견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죽은 자들이었지만 그 낯선 사후세계의 어둠 속에서 배회하던 환자들을 조명가게의 빛으로 인도해준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사후세계를 배회하던 환자들이 다시 삶으로 돌아오게 된 데는 영지(박보영) 같은 간호사의 의지도 한 몫을 차지했다. 자신 역시 사고로 사후세계를 경험했던 영지는 중환자실의 환자들이 빛을 향해 나아갈 수 있게 용기를 불어넣어준다. 어두운 곳에서 길을 잃지 않게 하려고 음악을 들려주고 평소 좋아했던 농구공을 환자 옆에 놔준다. 

 

‘조명가게’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배회하는 존재를 다룬다는 점에서 귀신이 등장하는 공포물의 양상을 담지만, 그들을 이해하게 되자 그 공포는 절절한 감동과 공감을 담은 휴먼드라마가 된다. 삶과 죽음을 별개로 보지 않고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보며, 죽은 자들의 사연을 들으려는 태도는 한국형 공포물들이 자주 보이던 특징 중 하나다. 아랑전설이 그러하듯이 한국의 귀신들은 저마다 아픈 사연들이 있어 원귀로 나타나지만 그 이야기를 들어줌으로써 비로소 편안히 떠나지 않던가. ‘무빙’으로 한국형 슈퍼히어로물의 전형을 그려냈던 강풀은 ‘조명가게’로 휴먼드라마의 성격을 갖는 한국형 공포물의 전형을 그려냈다.(글:일간스포츠, 사진:디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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