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쩔 수가 없다’, 곰곰 생각하면 빵빵 터지는 박찬욱표 블랙코미디

어쩔 수가 없다

“다 죽여버려.” 재취업 면접에 나가는 남편 만수(이병헌)에게 미리(손예진)는 그렇게 말한다. 면접 경쟁 상대들을 이기라는 말이지만, 박찬욱 감독은 이 말을 실제 사건으로 만들어냄으로써 블랙코미디로 그려낸다. “다 이루었다” 생각했던 중년의 가장이 졸지에 정리해고되어 재취업 전쟁에 뛰어들게 되고, 도저히 그 문턱을 넘을 수 없다 생각 하자 엉뚱하게도 경쟁 상대를 제거하는 일에 뛰어들게 되는 것. 

 

이것은 <어쩔 수가 없다>라는 블랙코미디가 가진 웃음의 코드를 드러낸다. 그건 세상에 대한 풍자다. ‘다 죽여버려’ 같은 말이 이제 별 섬뜩함도 없이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경쟁 사회에서 그걸 실제로 감행하는 인물을 통해 그 사회의 단면을 드러내고 이를 통해 쿡쿡 웃게 만드는 것이다. 제목이 ‘어쩔 수가 없다’인 이유도 그것이다. 흔히들 ‘어쩔 수가 없다’는 핑계로 저지르는 일들이(사실 누군가에게는 끔찍할 수 있는) 얼마나 많은가. 

 

역시 블랙코미디는 멀쩡하게 보였던(실제로는 아닌) 누군가가 망가져 가는 과정에서 빛이 난다. 만수는 ‘다 이루었다’고 말할 정도로 성공했고 행복하다 자부하는 가장이다. 교외의 아름다운 전원주택에서 아내와 두 아이 그리고 반려견이 바비큐 파티를 하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그런 정경의 주인공이다. 하지만 25년 간 제지 전문가로 일해왔던 회사가 외국계 회사의 투자로 경영권이 바뀌면서 돌연 해고 통보를 받았다. 만수 가족의 행복은 조금씩 균열을 일으킨다.

 

‘모가지를 자른다’고 표현하는 해고가 실제 누군가의 목을 날려버리는(죽이는) 사건으로 벌어지고, “당신이 사라져야 내가 살아” 같은 대사가 실제로 경쟁자에게 총구를 들이대는 광경으로 펼쳐진다. 그래서 취업 전쟁 속에서 생존하기 위한 살벌한 싸움이 펼쳐지고, 여기서 누락된 자들의 처절한 죽음이 그려지는데, 이것이 모두 세태를 꼬집는 풍자적 은유를 담고 있어 잔혹한 장면에도 웃음이 난다.

 

하지만 박찬욱 감독의 야심은 단지 재취업 전쟁에서 싸우는 가장들의 경쟁에만 머물지 않는다. 종이를 생산하는 제지업이라는 산업이 기계화, 자동화 되면서 사람들의 일자리를 빼앗아 심지어 한 가정을 송두리째 파괴하는 일들이 벌어지지만, 동시에 그것은 인간이 자연에게 하는 짓과 똑같이 병치된다. 나무를 송두리째 잘라 내어 인간의 문명을 담고 쌓아온 것이 바로 종이를 만든 인간의 자연 파괴적 폭력이 아니던가. 

 

분재를 취미로 가진 만수가 억지로 나뭇가지의 방향을 뒤틀려다 부러뜨리는 것처럼, 그가 취업 전쟁 속에서 경쟁자들을 제거하기 위해 벌이는 짓은 나무에게 행하는 폭력을 그대로 닮아있다. 차마 사체를 잘라내지 못하는(모가지를 못 자르는) 그는 사체를 분재하듯 뒤틀어 틀을 만들어 놓고 나무를 심듯 땅에 묻는다. 그리고 그 위에 마치 내일 세상이 망해도 자신은 희망을 버리지 않겠다는 위선으로 사과나무를 심는다. 

 

나무나 식물을 자르고, 뽑고, 심는 이미지는 그래서 고스란히 인간의 행위들과 유사한 이미지로 겹쳐진다. 그가 어떻게든 들어가려는 회사의 이름이 ‘문 제지(창업자의 성이 문이다)’인 것은 그래서 이러한 제지 공정을 거쳐 아름다운 예술의 경지로 나오는 종이가 사실은 살벌한 폭력에 기반하고 있다는 ‘문제’라는 걸 드러낸다. 

 

돈이 필요해 사고를 치는 아들이 종이로 말아놓은 담배를 피우고, 첼로에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딸이 나무로 만든 악기와 종이로 만든 악보로 아름다운 음악을 들려주는 건, 이러한 인간이 이룩한 문명의 기반이 어디에서 나오는가를 풍자적으로 담아낸다.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처해진 폭력은 저 <포카혼타스>라는 작품에서 아메라카 원주민 포카혼타스와 백인 개척자 존 스미스의 미화된 판타지로 그려진 바 있는데 박찬욱 감독은 이 위선을 가장무도회에 참여하는 만수의 미리의 이야기로 꼬집기도 한다. 

 

심지어 누군가를 죽여가면서도 “어쩔 수가 없다”고 변명하듯 말하는 만수의 모습은 그래서 재취업 경쟁에 뛰어든 가장의 서사를 넘어,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폭력을 자행해온 인간의 보편적인 서사로 확장된다. 영화의 엔딩은 이를 영상 이미지로 담아낸다. 갖가지 우악스런 기계에 의해 마구 잘려지는 나무들, 그 나무들로 공장에서 말끔하게 만들어지는 종이들, 그리고 그 종이 위에 그려진 음표들로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음악들. 문명과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그렇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다’며 해온 인간의 폭력이라는 걸 이만큼 영상적으로 압축해 담아낼 수가 있을까.  

 

문명을 비판하고 풍자하는 작품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영화는 음악이 압도적인 작품이다.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3번으로 장중하게 시작한 작품은 조용필의 ‘고추잠자리’와 김창완의 ‘그래 걷자’에서 폭발적인 에너지를 만들어내고, 아름다운 첼로 연주로 소동극의 코미디 끝에 깊은 여운을 담는 처연한 엔딩을 만든다. 영상만큼 뛰어난 음악의 결을 제대로 느끼기 위해 극장에 가야할 이유가 있는 작품이다. 

 

최근 들어 박찬욱 감독의 이야기는 훨씬 더 일상 세계 속으로 들어온 느낌이다. 그래서 <헤어질 결심>에서부터 이번 작품 <어쩔 수가 없다>를 통해 박찬욱 감독 특유의 영상미학이 우리의 일상을 보다 특별하게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짜릿함을 주고 있다. 한 번 봤지만 또 보고 싶은 영상미학과 그 안에 담겨진 풍자적 코미디들이 가득한 작품이다. 결코 그 야심찬 기획을 안 보고는 넘어갈 수가 없는. (사진:영화'어쩔 수가 없다')

‘동조자’, 동서와 이념의 대결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비극인가!

동조자

역시 박찬욱이라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쿠팡플레이가 국내 독점 공개하는 HBO 오리지널 시리즈 ‘동조자(The Sympathizer)’ 이야기다. 군더더기 없는 연출과 유머가 느껴지는 영상 미학은 물론이고 ‘동조자’라는 제목에 걸맞게 양측에 걸쳐 있어 희극과 비극을 넘나드는 장면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툭툭 던져놓아 보는 이들을 쿡쿡 웃게 만드는 박찬욱표 농담의 맛까지 가득하다. 시리즈지만 단 한 편을 봐도 웃음에서부터 깊이까지 다양한 맛이 느껴지는 작품이랄까. 

 

베트남계 미국인 작가 비엣타인 응우옌이 써 2016년 퓰리처상을 받은 소설을 원작으로 가져와, 우리에게도 영화 ‘미나리’,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패스트 라이브즈‘나 시리즈 ’성난 사람들‘로 이민자 정서를 담은 일련의 작품들을 만든 제작사로 잘 알려진 미국의 A24가 제작했고, 한국의 박찬욱 감독이 극본을 쓰고 감독을 했다. 그 제작 자체에 ’동조자‘가 갖고 있는 ’반반‘ 정서가 풀풀 풍겨난다. 

 

주인공인 대위는 70년대 베트남이 치열한 남과 북의 전쟁을 치른 후, 남베트남이 패망하게 되자 미국으로 망명한 베트남 혼혈 청년. 그는 프랑스인 아버지와 베트남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고, 남베트남에서 비밀경찰이자 장군의 부하로 활동하지만 CIA와 남베트남의 정보를 북베트남으로 빼돌리는 스파이다. 이처럼 국가나 언어, 심지어 이념의 중간에 걸쳐 스스로 ‘반반’이라고 말하는 그 지점에 선 인물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당대의 풍경은 웃음이 터질 정도로 기괴하고 그러면서도 스스로 ‘모든 일의 양면을 보는 저주를 받았다’고 할 정도로 비극적 정조를 담고 있다. 

 

그 희비극은 시리즈 시작과 함께 등장하는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부터 박찬욱 감독의 유머 가득한 연출로 빛을 발한다. 찰슨 브론슨 주연의 ‘데스 위시(죽음의 갈망)’ 간판이 걸린 극장에서 펼쳐지는 고문 장면이 그것이다. 영화 대신 무대에서는 한 여성이 의자에 앉혀져 고문당하고 심문을 받는다. 스포트라이트가 켜지고 그걸 CIA요원 클로드와 대위 그리고 장군이 마치 실존주의 연극 혹은 영화라도 보듯이 관람(?)한다. 

 

“그래 관객이 오셨다고. 네 공연을 보러. 똑바로 앉아! 네 대사를 궁금해하신다.” 심문을 주도하는 만두라 불리는 인물은 그렇게 이야기하며 마치 자신도 관객이나 된 듯이 콜라를 따서 마신다. 이 장면은 끔찍하면서도 비극적이다. 그 여성은 대위가 장군의 책상에서 확보한 비밀경찰 명부를 가져가려다 체포되었다. 그러니 대위가 스파이라는 걸 안다. 하지만 입을 다물고 말 그대로 죽음을 갈망하듯이 자신을 고문하는 자들 앞에 침과 독설을 뱉는다. 그 광경을 속내를 숨긴 채 바라보는 대위는 끝내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이 광경은 우스꽝스러운 농담과 풍자로 가득하다. 이념 대결로 동족끼리 죽고 죽이고 속고 속는 그 광경이 마치 한편의 실존주의 연극 같다는 은유다. 이들은 이념으로 편을 나누어 연기를 하는 중이고, 다만 누군가는 당하고 누군가는 그걸 영화를 보듯 콜라를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며 관람하는 중이다. 어느 ‘뒷구녕’에서 빼낸 정보냐고 묻는 대사는 실제로 이 여성이 정보를 숨기기 위해 그 필름을 꿀꺽 삼키자 용변을 보게 해 꺼낸 정보라는 점에서 웃음을 주고, 심문 중 만두가 두리안을 먹는 걸 두고 똥내가 극장 가득 찼다고 소리치는 장군의 모습에서는 이 광경이 풍기는 지독한 냄새에 대한 풍자로 다가온다. 

 

이건 ‘동조자’가 앞으로 그려나갈 빵빵 터지면서도 눈물나고 씁쓸한 희비극의 전조를 보여준다. 이념과 국가, 동서 같은 걸로 구분지어진 세계에서 그 중간에 걸쳐진 삶을 살아가는 대위의 시선은 모든 걸 낯설게 만든다. 북베트남의 승리로 돌아갔지만, 장군 옆에 붙어 끝까지 스파이 일을 하게 된 대위가 미국으로 와 겪게되는 일들 또한 마찬가지다. 2회에 등장하는 교수는 동양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가진 인물로서 동서양의 조화를 추구하는 것처럼 말하지만 알고 보면 자기 식의 오리엔탈리즘에 빠진 모습을 보여준다. 

 

교수는 동서양이 반반씩 겹쳐진 대위에게 자신이 가진 동양적인 면과 서양적인 면을 나누어 알려달라는 과제를 내주는데, 대위가 모순에 대해 이야기하며 자신의 서양적인 면은 모순을 극복대상으로 삼지만 동양적인 면은 함께 갈 대상으로 보고 그렇기 때문에 동양적인 면은 모순을 받아들이는 걸 겁내지 않는다는 식으로 말하자 교수는 말을 끊어 버린다. 자신이 보는 대로의 오리엔탈리즘적 식견에서 벗어나는 답변이라 그렇다. 교수의 그런 모습을 대위는 겉은 하얗고 속은 노란 삶은 계란 같다며 농담한다.  

 

이처럼 ‘동조자’는 베트남 혼혈 대위가 베트남에서 미국으로 넘어가 겪게 되는 일들을 통해 중간에 걸쳐져 있는 경계인들이 그들의 시선으로 마주하게 되는 비극적이지만 우스꽝스런 현실들을 꺼내놓는다. 제목인 ‘동조자’란 ‘어떤 의견에 대하여 뜻을 같이하는 사람’을 뜻한다. 그건 지극히 평범한 인물일 수 있지만, 이 시리즈에서 중간에 걸쳐진 동조자인 대위는 양측이 벌이는 치열한 이념이나 동서 갈등 속에서 스파이로 취급되어 고통받는 인물이 된다. 

 

70년대 베트남과 미국을 배경으로 벌어진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이것이 남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는 건 우리도 비슷한 경험들을 했고 지금도 그 형태의 정쟁들이 우리네 현실 깊숙이 상흔처럼 남아 있어서가 아닐까 싶다. 지역으로 나뉘고 이념으로 진영을 갈라 내편과 적이 되어 어떤 각각의 사안에 따라 다를 수 있는 의견들조차 스파이처럼 매도되는 현실이 아닌가. ‘동조자’를 보며 때론 낄낄 웃다가 때론 씁쓸해지는 감정들을 의외로 깊게 ‘동조’하게 되는 건 그래서일게다. (사진:쿠팡플레이)

'헤어질 결심' 박찬욱 감독이 하면 멜로도 이렇게 다르다

헤어질 결심

죽어가는 자들의 눈에는 그 마지막 순간이 담긴다. 살인사건을 추적하는 형사가 하는 일은 어쩌면 그 죽어가는 자들의 눈에 담긴 그 마지막 순간을 찾아내는 일이 아닐까. 그 마지막 순간에 그는 왜 그런 선택을 했으며 그건 어떤 감정이었을까. 그런 것들을 건조하게 의심하고 추적하는 일이 아닐까. 

 

박찬욱 감독은 영화 <헤어질 결심>의 형사 해준(박해일)의 그런 시선을 따라간다. 산 정상에서 추락해 사망한 남자. 남편이 죽었는데도 별다른 감정을 보이지 않는 아내 서래(탕웨이). 해준은 의심의 시선으로 서래의 일상을 들여다본다. 그리고 잠복근무를 통해 서래의 주변을 맴돌며 사진을 찍는 그 의심의 시선은 점점 관심으로 바뀌어간다. 

 

죽음의 냄새가 풍기는 여자. 아픈 엄마를 스스로 죽였다는 서래에게 그가 관심을 갖는 건 그 ‘결심’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마음 같은 것 때문이었을 게다. 죽음 앞에서야 사는 의미가 찾아지는 해준. 형사라는 직업 때문에 갖게 된 이런 상태는 주말부부로 만나 건강을 위해서 의무적으로 섹스를 하는 아내에게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게 만든다. 그에게 삶은 죽음 같은 ‘헤어질 결심’까지 하게 만드는 그런 순간에야 비로소 느껴지는 어떤 것이다. 

 

해준의 이런 관심은 고스란히 서래에게도 전해진다. 해준의 집 벽에 붙여져 있는 사건 관련 사진들 속에 자신의 일상이 담겨진 사진들을 보면서 서래는 느낀다. 이 남자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단지 형사가 용의자를 바라보는 시선 그 이상이라는 걸. 서래는 해준의 ‘반듯함’과 ‘젠틀함’을 좋아하지만, 그것이 형사라는 직업에 대한 자긍심에서 비롯된 것이고 그래서 그 자긍심마저 깸으로써 “완전히 붕괴됐다”고 말하는 해준에게 강렬한 사랑을 느낀다. 

 

의심에서 관심으로 넘어가고 그래서 자신이 붕괴되는 것마저 감수하는 해준의 마음과, 자신을 남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고 거기에서 어떤 보호받고 이해받는 느낌까지 받다 그의 마음이 그의 모든 걸 붕괴시킬 정도로 강렬하다는 걸 알게 된 서래의 마음. 그들은 조금씩 서로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형사와 용의자라는 경계를 무너뜨리고, 중국인이라 부족한 말 표현을 넘어선다. 

 

이처럼 우리가 명확하게 선이 그어져 있다고 생각되는 경계들은 마치 안개가 낀 듯 흐릿해지고 이 편과 저 편이 구분가지 않을 정도로 뒤섞인다. 법적인 부부와의 관계는 무미건조하기 이를 데 없고, 사실상 불륜이자 그것도 형사와 용의자 사이에 벌어지는 관계는 서로 나누는 눈빛이나 숨소리, 핸드크림을 발라주는 손길만으로도 에로틱하고 감정을 툭툭 건드린다. 

 

불면으로 잠 못드는 해준의 눈은 마치 죽은 후에도 부릅뜨고 마지막 순간을 애써 보려하는 시신들의 눈을 닮았고, 안구건조증에 넣는 안약으로 흐르는 눈물에는 물리적 고통과 감정적 고통이 뒤섞여 있다. 그런 눈이 세상의 경계를 어찌 분명히 볼 수 있을까. 안개 가득한 이포의 바닷가에서 애타게 서래를 찾는 해준의 모습이 분명하다 여겼던 경계가 완전히 허물어져 헤매는 인간의 실존처럼 비춰진다. 배경음악으로 깔린 정훈희와 송창식의 ‘안개’가 이들의 사랑을 더욱 애틋하게 만드는 이유다. 

 

히치콕의 ‘관찰자의 시선’을 가져온 박찬욱 감독은 그 용의자를 바라보는 형사의 의심을 ‘관심’이라는 새로운 관점으로 틀어 수사극을 멜로로 풀어낸다. 관찰자가 대상에 빠져들고 관찰되던 자 역시 자신을 바라보는 남다른 시선에 마음을 빼앗긴다. 그래서 이건 박찬욱 감독이 생각하는 영화에 대한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의 시선은 그렇게 카메라에 담길 대상에 대해 의심하고 관심을 갖게 되다가 어떤 ‘결심’의 순간을 발견하곤 자신이 생각했던 굳건한 경계들이 붕괴될 정도로 매료되었던 건 아닐까. 

 

결국은 사랑이야기지만, 박찬욱 감독이 그려낸 <헤어질 결심>은 죽음을 결심하는(죽이거나 죽거나) 그 순간의 강렬한 삶을 전제하는 사랑이라는 점에서 많은 걸 생각하게 한다. 일상적으로 쉽게 ‘사랑’이라 부르는 것들이 과연 얼마나 진짜일까를 생각하게 되고, 진짜 사랑하는 마음의 표현은 ‘사랑’을 말하지 않고도 다른 표현으로 드러날 수 있다는 걸 생각하게 한다. 그 방식이 색달라 낯설고 결코 쉽지 않은 안개 같은 영화지만, 다 보고 나면 그 안개 깊숙이 전해지는 여운이 오래도록 남는 작품이다. (사진: 영화 '헤어질 결심')

'아가씨' 김민희와 김태리, 그녀들을 지지할 수밖에 없다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박찬욱 감독의 신작 영화 <아가씨>의 배경은 일제강점기 어느 곳에 지어진 대저택이다. 하필 박찬욱 감독이 이 영화의 시대적 배경을 일제강점기로 삼은 이유는 명백하다. 그건 이 시대를 다룬 무수한 영화들이 많이 보여주던 민족주의적인 관점과는 무관하다. 다만 그 시기가 가진 혼종적 성격, 즉 문을 지나고 나서도 한참을 차를 타고 들어가 세워져 있는 대저택이 일본식과 영국식 그리고 우리식으로 한 공간에 지어져 있는 모양새와 무관하지 않다. 공간이 그러하듯이 그 공간에 살아가는 이들도 혼종적 성격을 띤다. 일본어를 쓰는 조선인이 있고 조선어를 쓰는 일본인이 있다.

 

사진출처: 영화 <아가씨>

영화가 담는 시공간이 이처럼 혼종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건 <아가씨>에서는 중요한 모티브가 된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무수한 경계와 구분들이 이 혼종적 시공간에서는 어딘지 느슨해지기 때문이다. 그 느슨함은 관계에서도 드러난다. 대저택에 거의 감금되듯이 살아온 아가씨 히데코(김민희)는 부모를 잃고 막대한 유산을 받았지만 그 후견인인 이모부 코우즈키(조진웅)의 손아귀에서 자라난다. 그런데 이 코우즈키와 히데코의 관계가 애매하다. 친인척 관계지만 코우즈키는 히데코에 대한 변태적인 애정을 갖고 있다. 외부에는 그것이 코우즈키가 히데코의 재산을 노리기 위함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그것이 아니라는 건 영화의 말미에 가면 명확하게 드러난다.

 

영화는 아가씨 히데코의 재산을 노리고 접근하려는 가짜 백작(하정우)이 그녀에게 좀 더 쉽게 접근하기 위해 숙희(김태리)를 하녀로 넣는 일종의 작전으로 시작한다. 따라서 이들은 모두 연기를 한다. 혼종적 공간에서의 연기는 이들이 도대체 그 진심이 무엇이고 실체는 무엇인지를 더욱 오리무중으로 만들어버린다. 3부로 나뉘어 구성된 영화는 그래서 그 시점이 매 부마다 달라지면서 완전히 다른 이야기로의 반전을 보여준다. 연기를 하는 줄 알았지만 사실은 연기가 아니었고, 진짜인 줄 알았는데 그것이 연기였다는 것이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다. 한 장면에 대한 서로 다른 이야기의 변주만으로도 <아가씨>는 꽤 흥미롭다.

 

하지만 영화가 지향하는 점은 그간 박찬욱 감독의 영화들이 보여줬던 모호함이 아니라 훨씬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것은 폭력적인 남성성의 세계로부터 두 여성이 유쾌한 탈주극을 벌이는 것이다. <아가씨>에 두 명의 여성이 등장하고 그들이 모두 두 명의 남성에 포획된 존재들이라는 설정은 그래서 이 영화가 가진 상징성을 보다 명쾌하게 보여준다. 가짜 백작에 의해 작전에 투입된 숙희가 그렇고, 코우즈키에 의해 대저택에 감금된 채, 신사차림으로 가장한 남자들 앞에서 더럽고 도착적인 소설 강독을 하며 살아가는 히데코가 그렇다.

 

아가씨와 하녀라는 관계 설정은 아마도 남성성을 드러내는 무수한 성애 영화가 보여주곤 했던 기묘한 상상을 자극할 지도 모른다. 그래서 직접 보기 전에는 <아가씨>라는 영화가 일종의 동성애 영화가 아니냐는 편견을 갖게 되는 건 이 영화가 주는 반전에는 오히려 더 효과적인 면이 있다. 남자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묻는 아가씨의 질문에 하녀가 그 속살을 만지고 성 행위를 하는 장면은 그래서 1부에서는 말 그대로 남성성의 시각을 그대로 재연하는 듯 보이지만, 2, 3부에서 다시 보는 그 장면은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그것은 마치 코르셋처럼 남성성에 의해 짓밟히고 옥죄던 육체들이 아가씨와 하녀라는 서열 구조까지 한껏 벗어던진 채 서로를 온몸으로 위무하는 듯한 장면으로 치환된다. 두 여성이 첫 설렘을 갖게 되는, 골무로 날카로운 이빨을 갈아주는 장면 역시 다시 보게 되면 여성들의 연대 같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게다가 이 대저택 지하실로 상정되는 남성성의 세계는 점점 더 도착적인 느낌을 준다.

 

섹스는 이 관점에서 바라보면 그저 성행위가 아니다. 여기 등장하는 남성들은 이상하게 삐뚤어진 성의식을 갖고 있다. 마치 여성들을 위압적으로 짓눌러야 여성들이 더 좋아할 거라는 사고방식. 그런 폭력적인 생각들은 지하실 가득한 무수한 성애 소설들의 판타지로 남겨져 여성들을 그 폭력의 대상이 되게 만든다. 뒤늦게 이 지하실에 가득 채워진 성애 소설들을 발견하고 그 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깨닫게 된 숙희는 그래서 히데코와 함께 그 집으로부터 탈주하며 소설들을 발기발기 찢어버린다. 그리고 마치 발기된 성기처럼 세워져 위압적으로 그녀들을 억압하던 상징물 뱀 대가리를 잘라버린다.

 

그렇게 여성들이 탈주해버린 대저택에서 남겨진 남성들은 그 폭력적인 성의식 속에서 스스로를 파멸의 길로 이끈다. 대신 탈주한 여성들은 블라디보스톡행 배를 타고 자유의 항해를 한다. 그간 남성성의 억압을 상징하던 옷들을 남김없이 벗어버리고 폭력적인 성행위가 아닌 행복한 성을 보여주는 마지막 장면은 그래서 인상적이다. 어린 시절 코우즈키가 히데코를 훈육시키기 위해 사용했던 구슬은 온전한 쾌락의 도구로 바뀐다.

 

사실 이렇게 선명하게 메시지를 담아내면서도 매번 반전에 반전을 이어가고 그리고 박찬욱 감독 특유의 탐미적인 영상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아가씨>는 놀라운 성취를 가졌다고 말할 수 있다. 한 장면을 바라보던 카메라가 갑자기 느릿느릿 뒷걸음질을 치면서 그 장면의 진짜 이야기를 보여주는 듯한 영상 연출은 그래서 이 영화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든다. 다음에 벌어질 상황들이 못내 궁금하고, 그러면서 스스로 갖고 있던 편견들이 여지없이 박살나는 그 장면에서는 어떤 쾌감마저 느껴진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혼종적 성격을 띠던 영화의 모호함은 보다 선명해진다. 가짜는 가짜임이 판명되고 진짜는 진짜임이 드러난다. 그래서 모두가 연기를 하는 듯 보였던 영화는 후반부에 이르면 그 연기의 끝장을 보여준다. 누군가의 폭압적인 상상력과 기획으로 강요되던 연기들이 벗겨지고 대신 진실 된 알몸이 드러날 때의 카타르시스는 그 어떤 섹스보다 강렬하다. 남성성이 내포하고 있는 폭력적인 양태들이 무너져 내리고 저 편 들판을 향해 달려 나가는 두 여성의 자유를 지지하게 될 때, 영화는 한없이 유쾌해진다. 성 의식에 대한 논제들이 그 어느 때보다 쏟아져 나오는 시기여서 일까. <아가씨>는 특히 더 흥미로운 동지의식을 갖게 만드는 영화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