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현 임신 고백과 워킹우먼들이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

 

기자들과의 인터뷰 후에 터진 구설수. 그리고 이어진 임신 발표. 최근 영화 <암살>로 주목받는 여배우 전지현은 영화의 성공과 달리 개인적으로는 비난에 직면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맞이하게 됐다. 그 시작은 인터뷰에 경호원을 대동하고 나타나 까탈스런 배우의 모습을 보여줬다는 기자들의 불만 섞인 기사들이 올라오면서부터였다. 기사들은 <별에서 온 그대>의 성공 이후 그녀가 변했다며 인터뷰에 경호원 대동은 도에 지나친 과시라고 꼬집었다.

 


영화 <암살> 제작발표회(사진출처:쇼박스)

그러자 갑자기 전지현의 임신 사실이 공표되었다. 3년 만에 임신해 지금 10주차라는 것. 이 이야기는 인터뷰에서의 그 논란이 임신 때문이었다는 걸 강변하고 있다. 전지현 측은 임신을 한 그녀에게 영화 홍보를 위한 강행군을 피할 것을 얘기했지만 그녀 스스로가 이를 기꺼이 감수했다고 밝혔다. 하이힐을 신지 말라는 것과 의자에 오래도록 앉지 말라는 권고도 있었지만 이를 표내지 않았다고 한다. 경호원 대동에 대해 유난스럽다는 지적에도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고만 얘기했던 것도 영화가 아닌 자신의 임신 사실이 부각되는 걸 저어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한편으로는 그럴 듯한 이야기로 들린다. 임신을 했었고, 그래서 조심했어야 하는데 한편으로는 영화 홍보에 나서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니 조심하기 위해 경호원도 대동하고 사진을 찍는데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러한 해명성 임신 사실 발표에 대중들은 그다지 공감하는 분위기가 아니다. 오히려 그녀의 임신 사실 고백에 대해 씁쓸해하는 모양새다. 도대체 왜 이런 반응들이 나오는 것일까.

 

댓글을 들여다보면 그 답이 나온다. “세상에 혼자 임신 했나라는 반응은 그 불편한 정서가 어디서 비롯되고 있는가를 잘 말해준다. 보통의 워킹우먼들을 생각해보라. 임신을 한 것이 마치 죄라도 지은 것처럼 직장 내에서 눈치 보는 게 그 현실이다. 어떤 회사들은 아예 대놓고 또 임신이냐?”고 불편한 기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도 한다고 한다.

 

그래서 임신을 했다고 해도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고, 배가 한참 불러와 이제 산달에 가깝게 와도 출산휴가를 편안하게 내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산달이 다 되어서야 겨우 휴가 내서 아이를 낳고 산후 조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회사에 부랴부랴 복귀하는 게 워킹 우먼들의 현실이다. 물론 그것이 정당한 일이라고는 볼 수 없다. 하지만 이런 현실을 겪는 워킹 우먼들에게 전지현의 임신 10주차 경호원 대동의 이야기는 상대적인 박탈감을 줄 수밖에 없다.

 

만일 그렇게 불안한 상황이라면 기자 인터뷰는 차라리 피하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아니면 아예 임신 사실을 공표하고 좀 더 편안한 자리에서 인터뷰를 하는 방법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굳이 그걸 숨겨가면서 무리하게 인터뷰를 해서 갖가지 오해를 만든 건 지혜롭지 못한 처사였다.

 

임신 사실의 공표가 영화가 아닌 자신에 대한 주목으로 이어질까봐 이를 피하려 했다는 것도 한편으로는 이해가 가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너무 지금의 대중들을 잘 모르는 생각이다. 지금의 대중들은 임신 사실 때문에 영화에 대한 몰입이 떨어진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이 영화는 멜로를 다루는 작품도 아니고 전지현 혼자만의 작품도 아니다. 임신 사실 발표는 영화에 도움이 되면 되었지 나쁜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을 거라는 점이다.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불거진 논란에 대해 전지현 측이 임신 사실을 들고 나온 건 물론 단순한 논란 무마책이 아닐 것이다. 어쨌든 임신은 사실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 해명 과정에서 워킹우먼들이 느낄 상대적인 박탈감은 생각지 못한 듯싶다.

 

전지현은 영화 <암살>에서 그녀가 말한 대로 배우로서의 인생에 어떤 전기가 될 만큼 괜찮은 연기력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연기는 기술이 아니다. 연기는 삶에 대한 이해이고 당대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깊은 공감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결코 깊어질 수 없는 세계다. 물론 생각하지 못한 실수들이 더 많았겠지만 이번 사태를 통해 전지현 스스로 타인의 삶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그것이 결국 진정한 연기자가 되는 길일 테니 말이다.



신처럼 군림하며 맘대로 써서 거액을 번다면...

 

흔히들 대중들은 잘 나가는 드라마 작가에 대한 부러움이 있다. 물론 창작의 고통이라는 것은 해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필자가 아는 드라마 작가는 작품 하나를 할 때마다 10년씩은 늙는다고 한다. 그래서 고료가 많아 보이지만 사실은 제 피와 살을 깎는 비용이라고 토로하기도.

 

'오로라공주(사진출처:MBC)'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우리네 드라마 제작현실은 특히 작가들에게 더 취약하다. 어느 정도의 위치에 올라가지 않은 작가라면 대중들의 요구에 의해, 방송사의 요구에 의해 때로는 스타 배우의 요구에 의해 굴욕적이게도 대본을 고쳐야 하는 상황을 겪기도 한다. 피 말리는 쪽대본을 생각해보라. 지옥이 따로 없을 게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제대로 작가가 작품에 대해 진지하고도 심각한 고민을 할 때의 이야기다. 만일 마치 작가가 신처럼 군림하고 자신이 원하면 언제든 인물을 뺄 수도 있고 새롭게 끼워 넣을 수도 있으며 심지어 분량도 마음껏 조절할 수 있다면 어떨까. 심지어 방송사의 통제에서도 벗어나 요구사항 따위는 들어줄 필요도 없고, 원한다면 50부 정도는 연장해달라고 요청할 수도 있다면?

 

그렇게 하면서도 회당 몇 천만 원씩을 원고료로 받아간다면 이만큼 편한 일도 없을 게다. 작품을 할 때는 모두가 두려워하기까지 하는 신적인 존재고, 작품이 끝나고 나면 손에 몇 십 억을 벌 수 있으니 이만큼 손쉽고 즐거운 일도 없겠다.

 

<오로라 공주>의 임성한 작가가 실제로 이렇게 즐거울 지는 알 수 없다. 물론 나름대로의 스트레스와 고충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작품을 통해 비춰지는 모습은 이렇게 편안한 작가도 없다는 느낌이다.

 

인물 하나가 죽는 일에는 거기에 합당한 개연성을 만들어줘야 하는 게 작가의 소임이다. 그런데 그녀의 드라마에서는 그런 고민을 할 필요가 별로 없다. 갑자기 웃다가 죽어버리거나 초자연적인 현상을 경험하다가 죽는 데는 이유란 것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주요 캐릭터들이 중도에 하차하거나 새롭게 들어가는 것에도 상당한 고민이 필요한 게 드라마 작업이다. 완성도가 있는 작품이란 필요 없는 인물이 존재하지 않고 유기적으로 끝까지 각자의 기능과 역할을 할 때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별다른 이유 없이 해외로 보내버린다거나 하는 식으로 캐릭터를 하차시킨다면 어떨까.

 

작가로서는 완성도를 포기하는 대신 고민을 덜게 된다. 결국 피해는 그 캐릭터에 몰입해온 시청자들에게 돌아간다. 시청자들의 비난이나 원성이 생기겠지만 거기에 별 개의치도 않는다면 작가는 별다른 스트레스도 없을 게다. 이런 작가 생활만큼 편안한 일이 있을까.

 

이것이 드라마 작가라면 사실 아무나 할 수 있을 것이다. 대충 캐릭터 몇 명을 세워놓고 이리저리 관계를 엮다가 뭔가 반응이 온다 싶으면 발전시켜나가고 그게 아니라면 중도에 캐릭터를 죽이던가 해외로 보내는 식으로 하차시키고 다른 인물을 세워 또 다른 관계를 엮어나가면 그만이다. 애초에 완성도 같은 건 염두에 두지 않았으니 그걸 두고 쏟아지는 논란이나 비난은 그다지 부담될 일도 아니다. 게다가 논란은 때로는 화제로 이어지기도 하니까.

 

일일드라마를 보는 서민들의 입장을 생각해보자. 어느 누구는 하루 종일 뼈 빠지게 일해도 돈 10만원 벌기가 힘든 이들도 있을 게다. 그러니 하루의 값싼 여가로 드라마를 통해서라도 캐릭터들에 감정이입해 다른 삶을 경험하고 싶은 욕구는 당연할 것이다. 그런데 언제든 목이 날아갈 수 있는 현실과 똑같은 일이 드라마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면 어떨까. 또 완성도는커녕 개연성마저 찾기 힘든 드라마에 오히려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면?

 

그리고 누구는 그렇게 해서 시청률이라는 이름으로 엄청난 돈을 벌어가고, 반대로 스트레스를 받으며 욕하며 애써 드라마를 봄으로써 그 허수의 시청률을 만들어준 시청자들은 다시 생활전선으로 나가게 되는 상황. 어찌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임성한 작가에게 쏟아지는 비난은 그래서 단지 작품의 무개념 때문만은 아니다. 거기에는 대중들이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이 들어가 있다. 작품을 쓰는 창작자로서의 작가가 아니라 단지 작가라는 이름을 빌어 펜대의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며 그 대가로 어마어마한 돈을 벌어가는 것에 대한 박탈감. 이러한 박탈감과 거기서 비롯되는 분노는 자칫 이런 권력을 가능하게 해주는 방송국에게로 옮아갈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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