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고기

어째서 좋은 영화는 극장에서 잘 걸어주지 않을까. 

'사람과 고기'를 보고 나오면서 들었던 생각이다. 

집 앞에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있는데 눈을 씻고 찾아봐도 '사람과 고기'라는 영화는 없다.

결국 불광역 근처 NC 백화점에 있는 영화관까지 발품을 팔아서 영화를 보고 왔다. 

분명히 있는데 상영관에 들어오지 않아 마치 없는 것 같은 영화. 

'사람과 고기'는 그런 취급을 받는 영화와 똑닮은 영화다. 

 

폐지 주우며 근근히 살아가는 형준(박근형)과 우식(장용)은 어느 날 폐지 한 점 때문에 길거리에서 드잡이를 한다. 

그러다 채소가 담긴 좌판까지 침범한 그들에게 화진(예수정)이 따끔한 한 마디를 하면서 세 사람의 관계가 이어진다. 

또 다른 날 길거리에서 우연히 폐지 줍던 형준과 우식이 마주치고, 

형준은 우식에게 자기 집으로 가서 커피 한 잔 같이 마시자고 권한다. 그 날 미안했다며.

그런데 찾아간 형준의 집이 멀쩡한 단독주택이라는 걸 보고 우식은 놀란다. 왜 형준이 폐지 줍고 다니는지 의아한 것. 

그런 우식에게 형준은 한 마디로 자신의 처지를 설명한다. 

"집만 있고 수입 없고 자식들은 싸가지가 없어. 됐어?"

커피를 내오려는 형준에게 우식이 묻는다.

"그런데 커피 말고 밥은 없어?"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다 형준이 아내가 생전에 끓여줬던 소고기 뭇국 이야기를 꺼내고

우식은 그런 그걸 해먹자고 제안한다. 자신이 고기를 가져오겠다며.

그런데 우식은 엉뚱하게도 정육점에서 고기를 훔쳐온다.

소고기 뭇국에 들어갈 야채를 사러 화진을 찾은 형준은

어떻게 그걸 끓이는가를 묻다가 와서 직접 끓여주면 안되냐고 묻는다. 

결국 세 사람은 그렇게 만나 맛있게 소고기 뭇국을 나눠먹는다. 

사람과 고기

하지만 물에 빠진 고기는 진정한 고기가 아니라는 이야기를 꺼낸 우식이

고기를 사주겠다면 찾아간 고깃집에서 '무전취식'을 시작하면서

이야기는 연쇄 무전취식을 하며 죄책감과 불안감과 더불어 사는 맛을 느끼게 되는 이 노인들의 이야기를 그려간다. 

 

'보니 앤 클라이드'의 독거노인 버전이랄까.

죽을 날이 눈앞에 보이는 노인들은 그것이 범죄라는 걸 알면서도 그 사는 맛에 빠져든다. 

'돈 있어야 먹을 수 있고 혼자 먹기엔 서러운 음식'인 고기는 돈도 돈이지만 함께 해야 먹을 수 있는 음식이다.

이들은 함께 하는 그 시간들이 너무나 소중하다는 걸 알게된다. 

"살면서 이렇게 가슴 뛰어본 적 있어?"

사람과 고기

영화 속에서 가장 아픈 장면은 형준이 찾아간 친구의 고독사 이야기다.

돈 안들이고 죽는 법으로 영양실조를 선택한 그 친구의 임종을 지키며

"오늘 안 죽으면 기다려야 하나"라고 묻는 형준의 농담에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했네"라며 쓸쓸히 웃는 친구의 모습은

이 나라에 노년들에게 존엄은 과연 있는가를 질문하게 한다. 

 

사람이 존엄을 잃으면 한덩이의 고기와 다를 바 뭐가 있을까. 

우리 사회에서 노년은 마치 없는 시간대의 존재들처럼 치부한다. 

여전히 생산성 중심으로 존재를 인정하는 우리네 사회의 산업화 이후 관성 때문이다. 

하지만 노년들은 존재하고 앞으로는 더더욱 많아질 게다.

복지적 차원이 아니라도 사회를 위해서 이들의 존재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이보다 큰 재앙이 있을까.

사람과 고기

박근형, 장용, 예수정이라는 대배우들이 이 작은 영화에 기꺼이 출연한 데는 이런 이유가 한 몫을 할 게다. 

배우들 역시 나이 들면 설 역할이 줄어들거나 혹은 전형적인 역할로 고정되기 마련이 아닌가.

그런 점에서 이들 대배우들에게 이 작품 속 '보니 앤 클라이드' 같은 독거노인들의 면면은 큰 의미로 다가왔으리라. 

 

작은 영화들 역시 그 존재를 무시당해 왔다는 점에서 그 처지는 이들 독거노인들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작아도, 아니 어쩌면 작아서 더 반짝반짝 빛나는 영화들이

여전히 살아있다는 걸 볼 수 있는 극장의 풍경이 되길 바란다. 

 

영화 속 엔딩에 들어간

본래 시인이었던 우식의 목소리로 들려준 '청춘'이라는 시가 귀에 쟁쟁하다.  

 

목청껏 웃고 싶어서

목놓아 울어본다

살기도 구찮고 죽기도 구찮다

창공을 잊은 채 주저앉아 그저 펄럭이는 날개짓

가슴속에 할 말이 너무 많아 배고픔도 잊어버린다

호떡 하나 주세요

그 한마디 건네기 겸연쩍어 여적 춥다

시린 가슴 덥혀지게 불이나 질러볼까

눈떠 보니 아침 햇살은 공평하다

 

 

국립극단에서 주최한 '명동인문학'에서 스토리텔링 관련 강연을 했다. 

강연장소는 내가 자주 찾는 명동예술극장. 

그 곳에서 이봉련 배우가 출연했던 '햄릿'을 봤고

올해에는 지춘성 배우의 호연에 가슴이 뜨거워졌던 '삼매경'을 봤다. 

그 무대에 내가 오를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래서 명동예술극장에서 하는 강연이라는 국립극단측의 이야기에 단박에 하겠다고 나섰다.

 

1시간 일찍 도착해 사전 리허설 때문에 무대에 오르자 

내가 연극을 보곤 했던 객석이 새삼스러워 보였다. 

간단한 마이크 테스트와 자료화면 점검을 한 후 대기실에서 시간을 보냈는데

그 곳은 연기자들의 분장실이었다. 

딱히 할 일도 없고 혼자만 앉아 있다가 문득 거울 속의 나를 바라봤다.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그렇게 계속 쳐다보고 있는데

새삼 내가 이렇게 내 얼굴을 오래도록 보고 있던 적이 있었나 싶었다. 

나이 먹었네. 희끗희끗하고. 그런 생각을 하다가

마침 그 날 강연 주제가 스토리텔링이어서였는지 

내가 살아왔던 시간들을 하나하나 떠올려 봤다. 

어쩌다 너는 거기 있는 거니. 조금 있으면 저 무대 위에 올라서 사람들 앞에서 강연을 해야 하는데...

너는 어쩌다가 먼 길을 돌아서 그 자리에 서게 된 거니?

어려서 자물쇠가 챙겨진 바보상자 안에 무엇이 있을까 궁금해하던 소년이 떠올랐고

그 후로 서울에 올라와 주말만 되면 극장을 돌아다니던 그 아이의 모습도 떠올랐다.

대학을 나와 직장에 들어갔지만 IMF로 해고된 후

글쟁이로 전전하다 어느 날 대학동기가 비평 글 하나를 써보라고 한 게 계기가 되어

지금까지 그 일을 하고 있는 그 과정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당시에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고 스쳐지나간 일들에 불과했다.

되돌아보니 그런 파편적인 일들이 하나의 연결고리를 만들면서 작은 스토리를 구성했다. 

아 삶이라는 게 이렇게 스토리로 구성되는 순간 드디어 의미를 갖는구나 싶었다. 

 

스토리텔링 관련 강연을 하러 갔지만

오래도록 거울 앞에 앉아서 나의 스토리를 되짚어본 시간이었다.

스산한 가을 날 조금은 차분하게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계절이 돌아왔다.

바쁜 나날들일 테지만 저마다 오랜만에 거울 앞에 앉아 자신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볼 기회를 갖기를...

 

배우의 연기와 우리의 삶

 

우리에게 스타란 무엇일까. 젊은 시절 멀리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을 설레게 만들었던 연인이자, 언제나 피곤한 몸을 기댈 수 있는 넉넉한 어깨를 가진 친구 같은 존재일까. 우리와는 다른 별세계에 있으면서 가끔 우리에게 그 빛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화려한 삶을 살아가는 꿈의 존재일까. 아니면 도무지 우리가 범접할 수 없는 우리와는 다른 신적인 아우라를 가진 존재일까. 그저 냉정하게 바라봐 자본주의의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만들어낸 신을 대체하는 인간상품의 하나일까.

 

스타를 바라보는 시각은 이처럼 극에서 극으로 달린다. 한없이 찬사의 대상이 되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끝없는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한없이 동경의 대상이 되다가도, 어느 순간 동정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가 비치는 그곳에는, 또한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충격적인 자살 소식과 거의 폭력에 가까운 근거 없는 끔찍한 루머들이 떠다닌다. 스타와 소속사 사이에 분쟁이 벌어지면 종종 발견되는 노예계약의 징후들은 대중들을 혼란에 빠뜨린다. 그 신적인 존재가 노예였다니. 신과 노예의 사이. 지금 스타가 서 있는 자리다.

 

그들은 실제의 삶과 비치는 삶이 다르다. 그들은 우리에게 있어서 콘텐츠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다. 따라서 그 콘텐츠가 캐릭터로 구현해 내는 판타지나 가상성은 사실상 우리가 받아들이는 그들의 실체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실제 삶과는 유리되어 있다. 드라마 속에서 누구나 꿈꾸는 신데렐라의 역할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소속사에 계약되어하기 싫은 일이라도 웃으면서 해야 하는 입장에 서 있을 수도 있다. 이 실제의 삶과 비치는 삶 사이에 혼란이 오게 되면 그 존재는 파탄으로 몰릴 위험이 있다. 자살은 꿈꿔왔던 삶과 현실의 삶의 괴리에서 비롯되는 바가 크다. 따라서 스타란 기본적으로 이 극한의 정체성의 혼란과 존재의 괴리감을 감당해야 하는 존재다.

유어 아너

이렇게 된 것은 스타가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통해 물질화된 상품인간으로 포장되기 때문이다. 인간적인 삶과 상품으로써의 삶. 이것은 자본주의 세상 속에서 단지 스타만이 겪는 일은 아닐 것이다. 우리들은 저마다 집에서는 한 아이의 부모이고, 한 부모의 자식이며, 한 아내의 남편이자, 한 남편의 아내이지만, 집을 나서서 자본의 세상으로 출근하게 되면 연봉 얼마로, 회사 이름으로, 또 직함으로 구획되는 상품의 삶을 살게 된다. 그러니 스타란 바로 이러한 자본주의의 삶을 가장 극단적으로 표상하는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스타에게서 갖는 동경과 동정은 사실상 우리 스스로 자신에게 갖는 감정과 다르지 않다. 스타는 우리에게 그것을 대리하는 존재로 서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스타를 꿈꾼다. 그것이 딱히 저 TV와 스크린 속의 인물들이 아닐지라도, 자신의 삶 속에서 스타가 되기를 누구나 바란다. 주목받고 싶고, 가치를 인정받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 문제는 그 가치를 평가 내리는 기준이 돈으로 수치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질적인 가치가 양적인 가치로 등급 매겨지는 그 지점에 현대인들의 비극이 있다. 질적인 가치가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양적 가치가 부여되지 않으면 아무도 그것을 주목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지금은 양이 질을 담보하는 시대다. 일단 양을 채워라! 그러면 질은 따라올 것이니!

 

지금과는 다른 삶에 대한 희구는 우리의 본능이다. 이미 주목받고 있는 스타들은 차라리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살고 싶다고 말한다. 하지만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드러나지 않는 삶 속에 묻혀있는 이들은 거꾸로 모두의 주목을 받는 스타를 꿈꾼다. 변신 욕구는 우리의 본능이지만 팍팍한 현실에서 변신은 그다지 용이하지 않고 때론 용납되지도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그것을 대체하는 존재로서 스타를 희구하게 된다. 스타에 대한 열광과 현실에 대한 낙담은 같은 동전의 양면이다. 그렇다면 스타를 희구하는 우리네 삶은 늘 그 자리에 머물러 현실을 낙담하면서 변신욕구를 스타를 통해 자위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여기서 우리는 스타와는 다른 배우라는 존재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먼저 시대가 낳은 명배우라는 호칭이 어색하지 않은 메서드 연기의 대가 김명민의 목소리부터 들어보자. “제 이름이 아니라 캐릭터만 쭉 올라오는 배우가 됐으면 좋겠어요. 저 작품을 했던 사람이 이 작품을 했다는 게 의심 갈 정도로 캐릭터의 차별화가 확실했으면... 사람들이 제 이름을 제대로 모르고 못 알아봐도 제가 배우의 길을 제대로 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뿌듯하죠.” 그는 또 이런 말도 했다. "저는 배우가 되고 싶었어요. 아무리 스타라는 딱지를 갖다 줘도 저는 그거 거절하려고 그랬어요. 저는 그냥 배우로 불리고 싶었고 같은 배우들 사이에서도 ‘저 놈은 정말 연기 잘하는 놈’ 이렇게 인정받고 싶은 게 제 꿈이었어요.”

 

김명민은 이미 스타다. 하지만 그는 왜 그다지도 스타를 거부하고 배우를 고집하는 것일까. 스타와는 달리 배우란 실체이기 때문이다. 2009년 방영된 김명민이라는 연기자를 조명한 다큐멘터리 'MBC스페셜'의 타이틀은 아이러니하게도 '거기에 김명민은 없었다'였다. 아마도 이 표현은 연기자라면 최고의 찬사라고 여겨질 것이다. 작품 속에서 연기자가 배역의 이름이 아닌 자신의 이름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수치가 아닐 수 없다. 자신의 이름을 지움으로써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사람들, 바로 배우라는 직업을 가진 이들이다. 그러니 김명민이 자신의 이름을 지워버리는 작업은 그 직업이 가질 수 있는 스타로서의 욕망을 덜어내고, 대신 그 자리에 온전히 실체로 세워둘 수 있는 배우라는 길을 걸어가는 과정이다. 이것은 한 인간의 존재로 봤을 때, 양적 가치의 세상에서 질적 가치를 고집함으로써 그 존재를 실체로 만드는 과정이기도 하다.

연인

물론 연극의 시대에서 영상의 시대로 바뀌면서 연기의 방식도 다양해졌다. 메서드 연기가 국룰로 여겨지던 시대는 연극의 시대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쉬지 않고 극을 이끌어 나가야 하는 배우들에게 메서드 연기는 당연했다. 하지만 매번 찍은 걸 모니터로 확인해 가며 보다 효과적인 연기를 찾아나가는 요즘 같은 영상의 시대에 연기는 본인이 빠져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효과도 중요하게 됐다. 김명민 스스로도 최근 들어 너무 지나치게 메서드를 고집하는 것이 대중들에게 부담을 주는 것 같다며 이를 덜어내는 연기를 하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메소드 연기든 그렇지 않든 배우들의 연기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우리는 이미 스타로서의 삶을 욕망하도록 강요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끝없이 수치로서 환산되는 자신의 양적 가치를 높여나감으로써 사회에서 생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른바 인플루언서, 유튜버의 시대가 아닌가. 그리고 그것은 어느새 물질적 욕망으로서 우리 속에 들어와 있다. 이것이 생존이기에 우리는 경쟁을 해야 하고, 누군가 스타가 될 때, 누군가는 낙오되어 그 위를 부러움의 시선으로 올려다봐야 한다. 낙오되면서도 그 시스템을 탓하지 않고 자신을 탓하며 오히려 자신을 밟고 성공한 그들을 부러워하는 것.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가 스타라는 존재를 통해 우리들에게 끊임없이 교육시켜 온 결과이기도 하다.

 

하지만 스타는 허상이다. 그래서 그 존재는 좀체 변신하려 하지 않는다. 스타로 만들어준 그 신적 이미지를 왜 스스로 부수려 하겠는가. 그들은 스타로 군림하며 가짜의 삶을 살아가지만 그것이 그들에게 지우는 짐 또한 혹독하다. 실체를 잃어버린 삶이나, 실제와 가상을 혼돈하는 삶은 늘 파탄으로 우리를 내몰기 마련이다. 하지만 배우들은 다르다. 스타가 가진 고정된 가짜의 신적 이미지는 배우라는 무한히 변신을 해야 하는, 그럼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 이들에게는 거꾸로 부담으로만 작용한다. 그들은 끊임없이 변신함으로써 그 속에서 자신의 실존을 찾아나간다.

 

우리는 각자의 삶이라는 무대 위에 서 있는 배우들이다. 우리는 그 위에서 새로운 삶, 새로운 인생을 꿈꾼다. 스타라는 자본주의가 마련한 시스템 위의 허상을 좇을 것인지, 아니면 배우라는 본연의 실존을 좇을 것인지는 모두 우리의 선택에 달린 문제다. 흔히 가십 정도로 치부하며 입에 오르내리는 스타 혹은 배우. 이 두 존재가 우리네 삶에 던져주는 질문은 이처럼 의미심장하다.

2024.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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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와 배우를 자유자재로 오가는 김형서 혹은 비비 

열혈사제2

“달다달고 달디달고 달디단 밤양갱-” 비비가 부른 ‘밤양갱’은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소박한 가사와 멜로디가 특징인 곡이다. 헤어지는 남자가 너는 바라는 게 너무 많다고 말하지만 비비는 바라는 게 하나 뿐이라며 그건 바로 ‘달디단 밤양갱’이라고 노래한다. ‘밤양갱’에 대한 여러 해석이 가능하지만, 비비의 소녀 같은 모습이 블링블링하게 이어지는 뮤직비디오를 보면 그것은 아마도 달콤한 사랑 정도의 의미가 아닐까 싶다. 장기하가 쓴 곡이라 그런지 ‘말 놀이’ 같은 느낌을 주는 이 소박한 곡은 그러나 공개된 이후 신드롬을 일으켰다. 갖가지 버전의 ‘밤양갱’ 패러디 영상들이 등장했고, 한번 들으면 잊혀지지 않는 가사는 저도 모르게 흥얼거리게 만드는 마법을 부렸다. 그 ‘밤양갱’ 뮤직비디오에서 이 곡을 부른 비비는 장기하(떠나가는 남자 역할이다)와 출연해 풋풋하지만 이별에 가슴 아파 하는 소녀를 연기한다. 말맛이 살아있는 노래도 그 맛을 딱 살려 부르는 실력이 엿보이지만, 동시에 천연덕스러운 연기 또한 자연스럽다. 

 

그러고 보면 비비가 노래를 발표할 때마다 냈던 뮤직비디오는 노래만이 아닌 연기가 그의 또 다른 영역이라는 걸 보여준 바 있다. ‘가면무도회’ 같은 뮤직비디오를 떠올려보라. 마치 영화 ‘킬빌’의 여주인공처럼 칼을 휘두르고 총을 쏠 때마다 가면 쓴 이들이 죽어나가는 액션이 압권인 뮤직비디오가 아니었나. 또 ‘나쁜X’의 뮤직비디오도 그렇다. 그건 한 편의 누아르라고 해도 될 법한 영상이고 액션 연기였다. 그래서 이 곡들에 대한 반응은 하나 같이 노래가 아닌 영화 한 편을 본 것 같다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니 비비가 김형서라는 자신의 본명으로 작년에 영화 ‘화란’과 드라마 ‘최악의 악’으로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인 후 올해도 ‘강남 비-사이드’에 이어 ‘열혈사제2’로도 연기의 길을 이어가고 있는 그 흐름이 자연스럽다. 그건 가수가 연기 영역에도 도전해 ‘연기돌’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흐름과는 사뭇 다르다. 애초부터 가수와 연기 두 영역을 동시에 해왔고, 그 양자에서 자기만의 존재감을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다고나 할까. 특히 그가 해온 작품들이 대부분 누아르나 범죄스릴러 같은 장르라는 점이 이색적이다. 보통의 신인 연기자들이 시도하기 쉽지 않은 영역이 바로 ‘몸을 쓰는’ 액션 연기인데 오히려 김형서는 이 분야에 더 독보적이다. 

 

디즈니+ 드라마 ‘강남 비-사이드’에서 김형서는 강남 클럽에서 폭력에 노출된 피해자들 중 한 명으로 친구가 위험해지자 자신이 대신 희생하는 인물 재희를 연기했다. 결코 만만치 않게 가해자들과 맞서다가 끝내 그들에게 당할 처지가 되자 스스로 끝을 내는 결기를 보여주는 인물이다. 아직 20대 중반의 나이지만 쓰디 쓴 인생 밑바닥 연기를 보여줬다. 이 작품에서 재희라는 인물이 중요한 건, 그를 사랑했던 윤길호(지창욱)와 그의 절친이었던 예서(오예주)를 행동하게 만들어 작품에 동력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중요한 역할에 김형서가 캐스팅된 건 그의 전작이었던 ‘최악의 악’의 영향이 컸다. 김형서는 ‘최악의 악’에서 중국의 거대 마약조직 두목의 딸 이해련 역할을 맡아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래서 이를 제작한 사나이픽처스가 또다시 디즈니+의 투자를 받아 내놓은 ‘강남 비-사이드’에 김형서는 또다시 지창욱과 함께 출연하게 됐다. 연기 영역에서의 가능성을 인정받았다는 뜻이다. 

 

물론 워낙 도발적인 눈빛으로 누아르적인 분위기를 보여주는 범죄스릴러에 자주 등장했던 탓에 김형서의 연기가 그런 영역에만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였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아직 새로운 역할을 선보일 기회가 없어 생겨난 착시현상에 불과하다는 걸 김형서는 SBS 드라마 ‘열혈사제2’로 보여준다. ‘열혈사제’는 사제의 신분이지만 나쁜 놈들을 때려잡는 열혈 신부 김해일(김남길)의 활극이다. 지난 시즌에 이어 이번 시즌2에서는 부산으로 내려와 그 곳에서 마약 카르텔과의 한판 승부를 벌인다. 그런데 김형서가 맡은 역할은 바로 그 부산에서 새롭게 조력자로 등장한 마약수사대 구자영 형사다. ‘강남 비-사이드’나 ‘최악의 악’과 달리 한층 발랄한 액션 활극인지라 이 작품은 다소 과장된 액션과 서사가 특징이다. 그래서 김형서는 시원시원한 액션 연기와 더불어 만화 같은 코믹한 연기 또한 선보이는데, 할리퀸으로 분장하고 나쁜 놈들 때려잡는 액션은 SNS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또 본래 부산 출신이어서 이 역할에 딱 어울리는 구수한 사투리 구사로 캐릭터를 잘 살려내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비비 혹은 김형서를 보면 그 연기의 이미지에서 여러 가지 맛이 느껴진다. ‘밤양갱’ 뮤직비디오의 순하고 달달한 맛도 있지만, ‘최악의 악’이나 ‘강남 비-사이드’, ‘열혈사제2’에서의 신맛과 짠맛, 쓴맛까지도 그 연기에는 담겨있다. 그런데 그 연기에서 일관적으로 느껴지는 건 직설적이고 거침이 없는 면모다. 흔히들 그래서 ‘MZ대세’라는 표현을 많이 쓰는데, 그건 아마도 타고난 아티스트의 끼가 자연스럽게 밖으로 드러남으로써 생겨난 결과가 아닐까 싶다. 

 

연기와 노래의 영역이 성역처럼 구분되던 시대는 지나갔다. 그래서 연기돌이라는 표현도 이제는 낯선 과거의 유물처럼 여겨진다. 노래를 하는 것과 연기를 하는 것은 물론 기술적으로는 다소 다를 수 있지만 어떤 감성을 전한다는 본질에 있어서는 통하는 면이 있다. 조금 낯설어도 과감하고 솔직하게 도전함으로써 그것이 통한다는 것을 비비는 김형서를 오가며 보여주고 있다. 영역의 한계란 어쩌면 우리 스스로 그어놓은 선 때문에 생겨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해보지 않아서 처음엔 낯설고 어려울 수 있지만, 일단 뛰어들고 보면 어디선가 경험했던 것들이 새로운 영역에서도 여전히 도움이 된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주저할 이유가 뭔가. 비비처럼.(글:국방일보, 사진: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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